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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4화

Author: 주 한잔
“이 깊은 궁 안에서 내가 가장 믿는 건 너 뿐이야. 지금 내가 겉보기엔 화려해 보여도, 덕빈께서 이 중대한 시기에 돌아가셨으니 황제께서도 한 번을 들르지 않으셔. 지금 내 처지도 좋지 않아.”

혜주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이다가도 곧 반짝이는 눈으로 아령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령의 능력을 믿고 있었다.

더구나 어젯밤 임신을 위해 동침했을 때, 그녀는 똑똑히 들었다. 황제가 아령에게 애칭까지 지어준 것이다. 그는 아령이를 정이라고 불렀다.

정이, 정이……

그 이름만으로도 얼마나 아리따운 여인이며, 황제를 얼마나 사로잡았는지를 보여주는 충분한 증거였다.

총애를 받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우린 잘될 거야, 다 잘 될 거야.”

아령은 혜주의 속내를 대략 읽고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이 새로 선택한 주인을 더욱 믿었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시선을 서랍으로 돌렸다. 베개와도 멀지 않은 곳. 바로 그 위에 소우희의 작고 희며 마른 손가락 마디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과연 이 밤, 편히 잘 수 있을까?

아령은 슬쩍 그곳을 흘깃 보더니 말했다.

“죽은 년일 뿐이야. 살아있을 때도 나한테 당해내질 못했는데, 죽었으니 더 아무짝에도 쓸모없지.”

혜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소우희 같은 악독한 여자는 아령 같은 사람만이 억눌러 제어할 수 있었다.

사흘 후, 덕빈의 입관식이 치러졌고 장례식 절차를 미리 준비하기 시작했다.

소우연은 곁에서 효를 다하느라 이미 몸이 지쳐 있었다. 이육진이 얼마나 피로할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부군, 내시총관이 왔습니다.”

소우연은 종이돈을 태우고 있던 이육진에게 알렸다.

고개를 돌리며 소우연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으며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수현은 먼지떨이를 휘두르며 무겁고 슬픈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태자 전하, 폐하께서 전하를 어서 어전으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어마마마께서 돌아가신 지도 한참 지났건만, 폐하는 단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 부르는 이유가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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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448화

    경문은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정연을 바라보았다.“왜 그런 걸 묻는 거죠?”정연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공자님,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 없어요.”“태자비 마마께서 말씀하시길, 방법만 있다면 어떤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용 대인의 병을 고치겠다고 하셨습니다.”“태자비 마마께서 시켜서 절 여기로 데리고 온 것입니까?”“네.”정연은 숨기지 않았다.“태자비 마마께서는 정말로 용 대인께 마음을 쓰고 계십니다. 태자 전하와 태자비 마마께 용 대인은 소중한 친구이자 지기 같은 분이니까요.”경문은 살짝 웃었다.태자비 마마는 결국 여전히 주인을 진심으로 아끼고 있었다.하지만, 주인께서는 분명히 당부했었다.이 치료법은 절대, 절대로 누구에게도 밝혀서는 안 된다고.그것이 들키는 순간 태자, 태자비 그리고 자신까지 모두가 피할 수 없는 난처함과 곤란함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었다.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경문은 부드럽게 말했다.“태자비 마마와 태자 전하께 대신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혹시…”정연은 애타는 눈빛으로 물었다.“혹시 방법이 정말로 있다면, 꼭 알려주세요. 약재가 아무리 귀하고, 치료가 아무리 힘들어도 괜찮습니다.”“어떻게든 태자비 마마께서 다 감당하실 거예요.”경문은 입술을 다물었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없습니다.”“태자비 마마께서 이토록 마음을 써주시는 것만으로도, 대인께서는 충분히 감사하고 있습니다.”그리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만약 정말로 대인께 도움이 되고 싶다면, 매일 빠짐없이 침을 놓아주시기만 하면 됩니다.”“침 치료는 분명히 대인께 효과가 있는 듯 합니다.”경문은 마음속으로 깊은 한숨을 삼켰다.용 대인은 오직 태자비처럼 그와 운명을 함께하는 사람만이 이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었다.정연은 경문의 말과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그는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 표정 어딘가에는 망설임과 어쩔 수 없는 무력감이 비쳐 있었다.그때, 웅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희들 거기서 뭐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447화

    차마 입에 올리기 어려운 말이지만, 소우연은 요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용강한은 이제 자신 없이는 살 수 없게 된 것이 아닐까.매일매일 침을 놓아야만 그의 병세가 완화되었다.소우연은 조용히 물었다.“이런 상태가 꽤 오래됐을 텐데요.”“제가 침을 놓아드리기 전에는 어떻게 버티셨습니까?”“그렇게 참으면서 병세가 더 악화되지는 않았나요?”용강한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짧은 시간 안에는 크게 악화되진 않았습니다.”지금 그는 이미 천기를 엿보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그로 인해 반작용으로 생긴 병도 더 이상 심해지지 않았다.그럼에도 이 극한의 한기는 그의 삶을 지옥처럼 만들었다.본인은 이 고통 속에서 평생을 보내야 할 거라 생각했었다.하지만 소우연은 끝내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여전히 예전처럼 따뜻하고 선한 마음으로 자신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덕분에 이제 그는 하루에 두세 시진 정도만 고통을 견디면 되었다.“일단 맥을 짚어봅시다.”“네.”두 사람은 오랜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소우연은 슬쩍 옆을 보았다.정연이 경문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두 사람은 슬며시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그리고 그녀는 다시 용강한을 바라보았다.남자는 눈길을 거두지 않은 채 정연과 경문이 사라질 때까지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그는 시선을 돌렸다.그리고 둘의 눈빛이 정면으로 마주쳤다.소우연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맥은 전과 다름없어요. 꽤 괜찮습니다.”손을 거두며 부드럽게 덧붙였다.용강한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자리를 조금 옮겼다.소우연 쪽으로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고자 했다.그저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따스함을 가까이에서 느끼고 싶었을 뿐.별다른 의도는 없었다.“약상자를 가져오겠습니다.”정연이 없으니, 소우연은 직접 약재방으로 향하려 했다.“수고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마마.”용강한이 정중히 인사했다.“무슨 말씀이세요, 오라버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446화

    “건방지다. 감히 태자비 마마 앞에서 이리 무례를 범하다니!”정연이 단호하게 꾸짖자 상연과 상란은 더는 감히 말도 붙이지 못하고, 소우연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소우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뱉으며 말했다.“일단 일어나거라.”“다음에 다시 얘기하자구나.”상연과 상란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조심스레 물러났다.“태자비 마마, 걱정 마십시오.”정연이 부드럽게 말했다.“태자 전하께서는 마마 외에 다른 여인에게 눈길 한 번 주신 적이 없습니다.”소우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고개를 돌려 시든 듯한 계관화와 작약꽃을 바라보던 순간, 문득 한 구절의 시가 떠올랐다.만원의 봄빛도 가두지 못해, 붉은 살구꽃 한 가지 담장을 넘는다.지금은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는 부군, 하지만 앞으로는 어떨까?……“진짜입니다.”정연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이어갔다.“태자 전하께서 아직 회남왕이셨을 때부터, 노비는 곁에서 모셔왔습니다.”“그동안 전하께서는 노비를 정면으로 바라보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말을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명심을 떠올렸다.명심만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지금도 함께 소우연 곁을 지키고 있었을 텐데.지금쯤 명심은 농장 생활에 잘 적응했을까?정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노비가 직접 봐왔습니다. 태자 전하의 눈에는 오직 태자비 마마 한 분만 계십니다.”소우연은 여전히 잔잔한 미소만 지었다.“태자 전하 이야기는 이만 됐어.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단다.”“네?”정연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명령만 내려주세요.”두 사람은 천천히 걸었다.소우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조금 있다가 내가 기회를 봐서 경문을 자리를 비우게 할 테니, 너는 그 틈을 타 그 자를 만나거라.”“노비가… 경문 공자를 만나서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까?”정연은 어리둥절했다.“물어봐야 해. 오라버니의 병에 대해서 말이야.”“정말 방법이 없는지.”“네에?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445화

    눈을 떴을 때,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어느 집 부인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늦잠을 잘 수 있을까?더구나 어느 시대의 태자비가 이런 사치를 누릴 수 있단 말인가.마침 정연이 세숫물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소우연이 지친 얼굴로 힘겹게 일어나자, 정연이 다정하게 말했다.“태자비 마마, 노비가 주방에 부탁해 기혈을 보충하는 아교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식사 후에 두 조각 드시지요.”소우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몸이 축 처진 느낌이었다.어젯밤 이육진에게 모든 정기를 다 빼앗긴 듯한 기분이었다.아침밥을 먹고 난 뒤, 소우연은 물었다.“오라버니는 왕부에 있지?”용강한은 가끔 외출하기도 했기에 물어본 것이었다.정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계십니다.”다만, 태자비 마마의 목소리는 심각하게 쉬어 있었다.어젯밤 내내 울고 애원하던 소리가 아직 귓가에 선명했다. 정연은 급히 마음을 다잡았다.주인을 흉보면 안 되지 않는가!소우연과 정연은 함께 배나무 별채로 향했다.가는 길에 소우연은 정연에게 일렀다.“오늘 전하께서 돌아오시면, 혹시 바쁘시거든 간석을 데리고 와 주렴. 물어볼 것이 있어.”“예, 알겠습니다.”정연은 속으로 갸웃거렸다.태자비 마마께서 간석에게 무슨 일을 물어보시려는 걸까?“마마! 마마…”갑자기 화단 너머에서 두 명의 여인들이 튀어나왔다.소우연은 놀라며 움찔했고, 정연은 재빨리 그녀 앞을 막아서며 소리쳤다.“대담하다! 감히 누가 태자비 마마께 무례하게 구는 것이냐!”두 명의 여인은 소우연 앞에 무릎을 꿇었다.“태자비 마마, 부디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제발요. 마마…!”두 사람 모두 눈물범벅이었다.마치 세상의 모든 억울함을 짊어진 듯한 모습이었다.취객은 아닌 것 같았다.소우연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너희는 누구냐? 고개를 들어라.”그러자 두 여인이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정연은 그제야 기억해낸 듯 소우연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태자비 마마, 이 둘은 상연과 상란입니다.”소우연은 아차 싶었다.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444화

    본채 안.소우연은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의자에 반쯤 기대어 앉아 있었다.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다른 손에는 의서를 들고 열심히 읽고 있었다.쾅!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가을바람이 세차게 들이쳤다.소우연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이육진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정연아…”“물러가라.”소우연은 정연에게 이육진을 위해 차를 준비하게 하려 했지만, 그는 한마디로 하인들을 물러 나게 했다.“전하,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기셨습니까?”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이육진은 그녀를 껴안고 눌러 눕히더니,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덮었다.너무나도 갑작스러웠고, 너무나도 뜨거웠다.방 안에서는 촛불이 출렁거렸다.이육진은 그녀의 옷을 하나하나 벗겨내며, 의자에서 침상으로… 그러고는 또다시 침상에서 침대 발치로 몰아붙였다.소우연은 숨이 가빠왔다.“전하… 조금만 부드럽게…”그는 입으로는 순순히 응하면서도, 손길은 전혀 말처럼 따라주지 않았다.“부군…”소우연은 그의 몸이 점점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설마, 춘약이라도 먹은 걸까?그렇게 길고 긴 정사가 끝났다.네 번이나 물을 갈았고, 닭이 울기 시작할 즈음이 되어서야 겨우 모든 것이 끝났다.소우연은 온몸에 힘이 풀려 침대에 축 늘어져, 팔 하나 드는 것조차 버거웠다.그녀는 억울하고 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분명 그만하자고 했는데, 부드럽게 해달라고 했는데…”“미안하다, 연아.”이육진은 진심으로 사과했다.소우연은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 다정한 사과 한 마디에 도저히 화를 낼 수 없었다.눈물을 머금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았다.이육진은 머리를 긁적였다.솔직히 지금 그는 전에 없이 속이 후련했지만, 소우연에게는 무척 무리였던 것이 틀림없었다.소우연은 옆으로 누워 이육진을 바라보았다.“정말 무슨 일 없는거죠?”“없다. 정말… 없어.”“이상하잖아요.”소우연은 뾰로통해지며 입술을 내밀었다.“오늘따라 전하는 너무… 너무… 강했어요.”“미치지… 않고서야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443화

    이태의가 마지막에 남긴 말은 이육진의 기억에 깊이 남았다.임곽수 또한 비슷한 말을 했었다.하지만 마음속의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몸도 마음도 모두 건강한데, 왜 하늘은 아직 그들에게 자식을 내려주지 않는 것일까.참으로 조물주가 야속하다고 생각되었다.아무리 힘껏 발버둥 쳐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라는 사실이 그를 더욱 무력하게 만들었다.결국 이태의를 하인에게 맡겨 돌려보냈다.그 후 이육진은 이 장원의 관리자를 불러들였다.“이 근처 십리 안쪽에 사계절 꽃이 피는 정원을 만들거라.”……태자부로 돌아왔을 땐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평소라면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본채에서 상소문을 읽으며 업무를 처리했겠지만, 오늘은 곧장 서재로 향했다.간석은 준비해온 보약 한 그릇을 공손히 건넸다.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육진은 그의 수상한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채, 아무렇지 않게 약을 한 번에 들이켰다.'하아…'간석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아이고 우리 태자 전하'건강한 몸에 뭐 하러 이런 약을 먹는단 말인가.태자비 마마와 방안에서 함께할 때마다 그 소문은 도성 전체에 퍼질 정도였다.소문에 따르면 한 번 시간을 보낼 때 거뜬히 몇 시진을 넘기고, 태자비 마마는 목이 쉬어 울음을 터뜨릴 정도였다고 한다.가장 짧게 잡아도 반 시진이 넘는다니. 세상에 어느 남자가 감히 따라갈 수 있겠는가?그런데 이 훌륭한 태자 전하께서, 보약까지 챙겨 드신다니. 이제 다른 남자들은 무슨 낯으로 살아야 하나.비록 자신은 내시라지만 다른 내시 친구들의 얘기를 들어봐도 한참을 못 미쳤다.현재의 황제조차 젊었을 적 가장 전성기라 해도 반 시진은커녕 한참 못 미쳤다고 했다.……이육진은 약을 다 마신 뒤, 상소 몇 건만 더 처리하고 본채로 돌아가려 했다.그런데 문서를 검토할수록 몸이 점점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맥을 짚어보니 뜨거웠다.하지만 정확히 얼마나 뜨거운지는 가늠이 안 됐다.가장 문제는 머릿속에 저절로 소우연의 웃는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442화

    운이 좋다 해도, 너무 좋았다.단지 어마마마의 죽음으로 잠시 합방 일이 미뤄졌을 뿐, 이제는 뱃속에 황손을 품은 덕에 그녀의 지위는 자연스레 올라가게 될 터였다.이육진은 하얀 손가락으로 찻상을 톡톡 두드리며, 이태의를 향해 말했다.“너는 명문 가문의 자손으로, 세대를 이어 의술을 닦아왔지.”“네 실력은 태의원 원장인 진 태의와도 견줄 만하다. 이번에 기회를 주겠다.”설마, 줄을 서라는 뜻일까?이태의는 어안이 벙벙했다.그는 그저 병을 보고 사람을 고치는 의원일 뿐인데, 왜 이런 권력 다툼에 휘말려야 하는 걸까?속으로 울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조아렸다.“태자 전하께서 명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이육진은 담담히 명령했다.“진 태의를 감시하거라.”“그리고 이비 쪽의 모든 움직임을 놓치지 말고 보고하거라.”“작은 흔적 하나라도 빠뜨려선 안 된다. 앞으로 네 앞날은 작은 태의에 그치지 않을 것이니라.”왜 하필 이태의를 선택했는가?이유는 간단했다.이태의는 의술이 뛰어나고, 성격은 소심했다.누가 봐도 정치적 암투에 뛰어들 인물이 아니었다.“허나, 신은…”이태의는 고개를 들까 말까 망설였다.그러자 이육진이 낮게 그것도 아주 묵직한 음성으로 한 마디 던졌다.“흠?”그 한 마디에 이태의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며 곧바로 머리를 조아렸다.“예, 전하의 분부를 따르겠습니다!”이육진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들으니, 다음 달이면 네 혼롓날이라 하더구나.”“오늘의 너의 선택은 너의 가문 전체를 살리는 일이 될 것이다.”“예, 감사드립니다.”이태의는 억지로 웃었다.아무도 모를 것이다.그가 지금 속으로 얼마나 쓰리고 아픈지.누가 남의 혼례를 언급하며 압박을 준단 말인가!이것이야말로 완곡한 협박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하지만 어쩌겠는가. 상대는 이 나라의 황태자, 미래의 황제였다.설령 정치를 혐오해도, 이 기회 자체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생각을 정리한 이태의는 다시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441화

    “왜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느냐?”이육진이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소우연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저는 아무 일 없습니다. 아주 건강하고, 어디 하나 불편한 곳도 없습니다.”그 말을 듣고서야 이육진은 조용히 숨을 돌렸다.만안당의 의원과 태의원의 이태의 모두, 자신과 소우연이 모두 건강하다고 진단했었다.분명 괜한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하지만 다음 날 아침 조회를 마친 이육진은 여전히 마음 한켠이 편치 않았다.결국 사람을 시켜 이태의를 따로 불러오게 했다.이태의는 진규의 인도 하에 마차 근처까지 와서 조심스럽게 인사했다.“소인, 태자 전하께 문안드립니다.”이육진은 마차 안에서 명령했다.“마차로 올라오거라.”“예.”이태의는 식은땀을 훔치며, 간석이 내려준 마판을 밟고 조심스럽게 마차에 올랐다.“태자 전하.”이태의는 다시 한 번 공손히 절했다.이육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가면서 말하자구나.”마차는 덜컹거리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이태의는 속으로 긴장했다.태자 전하께서 자신을 어디로 데리고 가려는 것일까.과거 태자부에 진맥하러 갔을 때는 태자와 태자비 모두 크게 협조적이지 않았다.그저 형식적으로 맥을 짚고 황제께 보고하는 정도일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육진은 황제보다도 더욱 냉철하고 위압감 넘치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그 압도적인 기운에 이태의는 숨 쉬기도 어려웠다.마차는 꾸준히 흔들리며 달렸고, 이육진은 눈을 감고 조용히 휴식을 취했다.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태의는 서서히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반 시진이 지나, 마차가 멈췄다.“도착했습니다.”간석이 알리자 이육진은 천천히 눈을 떴다.눈가에는 약간의 피곤함이 서려 있었다.이태의는 속으로 생각했다.'아, 태자 전하께서 정말 피곤하셨구나.’‘괜히 겁을 먹었군.'마차에서 내리자, 한적한 장원이 눈앞에 펼쳐졌다.가을 끝자락. 들꽃 씨앗이 바람에 흩날리고, 초목은 붉거나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낙엽은 바람 따라 쓸쓸히 흩어졌다.이태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440화

    “감히 그런 일을 벌일 수 있을까요?”소우연이 물었다.원래 책 속에서 이민수는 수많은 시험과 고난을 겪은 끝에 겨우 황위에 올랐다.그 전제는 황제의 유일한 아들인 이육진이 한때 폐인이 된다는 점이었다. 성정 또한 포악하여 민심을 얻지 못했기에 결국 이민수에게 기회가 돌아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이육진은 건강을 완전히 회복했고, 다시 정식으로 태자에 책봉되었다.예전처럼 포악하다는 소문도 이미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백성들 또한 지금의 이육진을 훌륭한 태자로 인정하고 있었다.이육진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용강한은 잔잔하게 웃으며 말했다.“태자빈 마마께서 남자들의 최고 권좌에 대한 욕망을 얕보지 마십시오.”소우연은 어색하게 웃었다.용강한은 이육진을 바라보며 물었다.“꽤 오랫동안 심소균을 보지 못했습니다.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그 자를 회남으로 보냈다.”잠시 말을 멈춘 이육진은 덧붙였다.“진위 또한 금주로 보냈지.”회남. 바로 이육진이 과거 태자 신분을 박탈당하고 회남왕으로 강등됐던 그 봉지였다.그리고 금주는 경성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만약 뜻밖의 사태가 발생하면 즉각 지원병을 보낼 수 있는 위치였다.그 순간 소우연은 깨달았다.이육진이 왜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지...용강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고 무언가를 곱씹었다.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눈을 뜨고 담담하게 말했다.“태자 전하께서는 이미 준비를 마치셨습니다.”운명이란 참으로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신이 자신들을 두고 장난을 치는 것만 같았다.이 정도 준비를 해도 결국 이기지 못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다한 뒤 하늘의 뜻을 따라야 할 터였다.용강한은 소우연을, 그리고 이육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이육진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아직은 아바마마께서 부자지간의 정을 기억하고 계시길 바랄 뿐이야. 나는 그저 이곳에서 묵묵히 기다릴 것이다.”하지만 그 말의 숨은 의미는 분명했다.만약 황제가 단지 여색에 눈이 멀어, 평서왕부 같은 야심 가득한 무리에게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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