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 이육진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나지막이 말했다. “난 약속한 일은 반드시 지키니라.” 약속한 일?그녀가 그의 상처를 낫게 하면 그녀를 향해 웃어주겠다는 그 약속 말인가? 소우연은 이육진쪽으로 몸을 기울였다.“왕야께 감사를 드리옵니다.” 이육진은 거듭 침만 삼킬 뿐이었다.“그러지 않아도 된대도.” 너무 뜨겁게 달아오른 몸 상태에 그는 자꾸만 이불 귀퉁이를 들어 올리며 열을 식혔다.“왕비, 어서 쉬도록 하거라.” 그는 더 이상 그녀의 행동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고 이러다간 정말로 터져버릴 것 같았다.소우연이 물었다. “왕야께서는 제가 싫으시옵니까?” 그러자 이육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맨 소녀라는 것을 안 뒤에는 그녀 말곤 다른 여인을 맞이할 생각조차 없을 정도였다.“왕야?”그가 왜 쓴웃음을 짓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혹 정말로 그 방면으로 문제가 있는 것일까?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그를 남성적 매력이 가득했던 장군으로 그렸던 작가를 꾸짖었다. 한때 전장에서 무적의 장군으로 통하던 존귀한 황태자를 어찌 이토록 망가뜨린단 말인가?그렇게 비뚤어지고 뒤틀린 존재로 만들면서까지 남녀 주인공의 순결함을 돋보이게 하려던 걸까?그때 갑자기 남자의 억센 손이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왕비는 진심으로 내가 좋으냐?” “전…… 그건....” 소우연은 잠시 머뭇거렸다. 진짜 이육진이 좋은 걸까?환생한 이후로 그녀에게는 더 이상 사랑이란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육진이 곁에 있었다.눈을 떠보니 그녀는 이 남자의 사람이 되어있었다.그와 자신만이 반역자였다. 이 세상은 여자에게 너무나도 가혹했다. 그녀는 힘이 없는 존재였고 의지할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오직 이육진,그만이 유일하게 그들과 맞설 힘을 가지게 해주는 사람이었다!이육진은 그녀를 놓아주고 몸을 돌려 그녀를 등지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밤이 깊었다.다음 날 아침,
진우도 귀를 바짝 세우며 마차 밖의 동태를 살폈다. 무공을 익힌 자들은 상대가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지 않는 한 웬만한 대화는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장안 거리의 번잡한 길목을 몇 바퀴나 돌며 생각했다. 왕비마마께서는 도대체 어디를 가시려는 걸까?소우연은 다시 태어난 이후 이토록 마음이 어지러웠던 적은 없었다.만약 이육진이 정말로 자손을 볼 수 없다면, 황제가 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원작의 서사로 회귀하지 않겠는가! 원작에서 이육진은 최후에 ‘척골지형’을 당한다. 그 잔인한 형벌을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했다. “마차를 멈추거라.”소우연은 마차 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나왔다. 장안 거리의 인파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한없이 복잡했다. 아니다. 그들은 운명을 바꿀 수 있다. 반드시 바꿀 것이다.그때, 멀리서 걸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놈이 무엇을 하는 자이기에 감히 이리도 함부로 구는 것이냐?” 소우연이 그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소우희와 혜주가 약재를 든 채 약국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혹시 그녀가 직접 진정향을 제조하려는 것인가? 그녀의 시선은 곧 굵은 목소리의 주인공에게로 옮겨갔다. 그는 얼굴에 수북한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거대한 몸집은 소우희와 혜주를 압도하고도 남았으며 나이는 사십 대쯤 되어 보였다. “너는 대체 누구냐? 본왕이 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그때 정연이 낮은 소리로 소우연에게 속삭였다. “평춘왕이옵니다.” 평춘왕 이종대? 소우연은 원작 속 이 인물을 떠올렸다. 그는 황실의 방계로, 방탕하고 음탕하기로 유명했다. 왕부에는 수많은 후궁과 첩들이 있었고 세 명의 왕비를 연이어 보낸 뒤로는 새 왕비를 맞이하지 않았다.그러던 중, 우연히 소우희를 만났고 순간 그녀의 미모에 사로잡혀, 이후 끈질기게 소우희를 괴롭히기 시작했다.그러나 신중했던 이민수는 이를 당장 해결하려 하지 않았고 먼저 평춘왕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이민수는 냉랭한 눈빛으로 평춘왕을 노려보았다. “참으로 재미없는 농담이군요.”평춘왕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굳어지더니, 그의 시선이 소우희에게로 옮겨졌다. 그녀는 그저 연약한 여인으로 보였다. 방금 그는 그녀의 허리를 슬쩍 만져보았는데, 그 작고 부드러운 허리는 한 손으로 완전히 감쌀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지배욕과 파괴 충동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그는 잠시 어색한 표정을 짓더니, 곧 부하들을 거느리고 자리를 떠났다. “세자 오라버니…….”잔뜩 겁먹은 소우희는 곧장 이민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방금 그녀는 실수로 평춘왕과 부딪쳤고, 그는 그 틈을 타 그녀를 희롱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절대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 특히 이민수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 만약 그가 자신을 신부로 맞이하지 않을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이 경성에서 불구에다 변태 같은 회남왕을 제외하면 평춘왕이라는 자야말로 제멋대로 날뛰며 여인을 짓밟는 악질이었다.그 손에 죽은 왕비들만 해도 여러 명이었고 왕부에서 이유 없이 죽어 나간 첩들까지 합하면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었으니 그런 놈의 손길에 닿았다는 것만으로도 진저리가 쳐질 만큼 역겨웠다.“내가 집까지 바래다줄 것이니 두려워 말거라.”이민수는 그녀를 달래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혜주 손에 들린 약재 꾸러미를 보게 되었다.이민수의 시선을 느낀 소우희가 황급히 말했다. “할머니께서 두통으로 고생하시기에, 약재를 구하려고 나왔사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찾을 수가 없더군요…….” “그대가 누구보다 효성이 지극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느니라.” 그의 수행원들이 칼을 뽑아 번뜩이자, 주변의 인파는 순식간에 흩어졌다. 소우희는 약간 목이 메인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안타깝게도 가장 중요한 약재는 구하지 못하였습니다. 할머니께서 고생하실 걸 생각하면 제 마음이 또 아파오네요.” 그녀는 눈물을 머금으며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언니에게 제가 만들어 놓은 완제
‘혹시 심각한 병은 아니겠지?’ 어의는 이런저런 생각에 사로잡혀 점점 초조해졌고, 급기야 두 다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괜찮으십니까?” 고개를 돌린 소우연은 어의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물었다.어의의 이마는 이미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그녀가 묻자, 어의는 황급히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회, 회 왕비마마, 소인은 괜찮사옵니다.” 소우연: “....” 그녀는 옆에 있던 정연을 바라보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평민이기에 예기치 못한 황족과의 만남에 잔뜩 긴장한 모양이었다.소우연은 낮은 목소리로 의원을 다독였다. “너무 긴장하지 마시게. 그저 평소처럼 진찰해 주시면 되네. 특히 왕야의…… 남성 건강에 관해서 말이야.”어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예 마마, 그렇게 하겠사옵니다.” 하지만 여전히 지나치게 긴장을 하고 있는 그를 정연은 다시 한번 안심시켰다. “왕야께서 서재에 계시느냐?” 무빈은 문 앞에서 졸고 있다가 소우연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그는 급히 예를 갖추며 대답했다. “왕비마마께 문안드리옵니다. 왕야께서는 서재에 계시옵니다.”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재 안에서 이육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비를 안으로 모시거라.” “예, 왕야.” 무빈은 서둘러 문을 열었다. 소우연은 의원을 힐끗 본 뒤, 함께 서재로 들어갔다. 이육진은 책을 한 손에 들고, 혼자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가 사용하고 있던 바둑판은 전에 본 것과는 다른 평범한 옥석 바둑판이었다. 사실, 전에 봤던 바둑판은 이락원에서는 딱히 쓸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바둑판은 많았으니, 하나쯤은 둔다고 해도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왕야께 문안드립니다.”그녀는 몸을 숙여 예를 올렸다.“소인 왕야께 문안 올립니다.”어의는 무릎을 꿇고 정중히 큰 예를 올렸다.그제야 그는 소우연이 민간 어의와 함께 왔음을 깨달았다.그의 짙은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소우연, 도대
회남왕부 이당.소우연은 정연을 문밖에 대기시키고, 임곽수와 함께 이당으로 불러 차를 마셨다. 그녀는 어의에게 차를 대접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왕야께서는 정말 아무 문제가 없느냐?”임곽수는 방금 전 서재에서의 긴장감을 떨쳐내지 못한 듯, 아직도 몸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맥을 짚어본 결과, 다리 외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하여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문제없사옵니다.” “정말 아무 이상이 없단 말이냐?” 소우연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런데 왜 왕야께서는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냐?” 임곽수는 그녀의 질문에 잠시 당황했다. “왕야께서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으신다고요?”그는 문득 한때 경성에서 떠돌던 소문을 떠올랐다.하지만 왕비마마의 간절한 시선을 마주하자,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게다가 이 말들이 왕야의 귀에 들어가는 날이면 그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다.임곽수가 묵묵부답이자, 소우연은 은전 한 자루를 꺼내 그의 앞에 놓으며 말했다. “내가 왕부의 주인이니, 넌 그저 알고 있는 대로 말하면 된다. 절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임곽수는 은전과 소우연을 번갈아 보았다. 만약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그녀가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그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인은 단지 짐작일 뿐이옵니다. 아마도 왕야께서 마음에 두고 계신 여인이 없으시기 때문에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으신 것일 수 있사옵니다. 혹은…….” “혹은?” 소우연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재촉했다. “혹은 왕야의 취향이…… 여인이 아닐 수도 있사옵니다.” 그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소우연도 자연스레 이상한 방향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소인이 죄를 지었습니다! 이는 그저 추측일 뿐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옵소서!” “그렇다면…… 그 방면으로는 가능한 것이냐?” “그…… 어쩌면 가능할지도…….” “어쩌면?” 소우연은 어의의 모호한 대답에 당혹스러워하며 다시 물었다. “자네는 비뇨기과 명의로
정연은 의아한 눈빛으로 소우연을 바라보았다. ‘왕비마마께서 왜 이리 마음이 불편해 보이시는 걸까?’‘갑자기 어의는 왜 부른 것일까?’한편, 이육진은 진규를 서재로 불렀다. “왕비가 오늘 갑자기 어의를 불러 진료를 받게 한 이유를 알아보거라.” 진규는 두 손을 모으며 명을 받들었다.진규는 일 처리가 빨랐다. 임곽수가 아직 의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진규는 그의 마차로 불쑥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위협했다. “오늘 왕비께서 왜 너를 부른 것이냐?” 목에 닿은 차가운 칼날에 임곽수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다급히 말했다. “대, 대감, 부디 흥분하지 마시오. 제가 말하겠습니다!”그리하여 임곽수는 소우연과의 대화를 진규에게 고스란히 털어놓았다. 듣고 있던 진규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러다 이내 다시 물었다. “그래서, 우리 왕야의 몸에 정말 문제가 있다는 것이냐?” “소인은 문제가 없다고 보았사옵니다. 그러나 왕비마마께서는 왕야께서 여색을 기피하신다 말씀하셨사옵니다…….” 진규는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면 정말 문제가 있는 것인가?’ 그는 돌아가 왕야에게 무어라 보고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대감, 그럼 왕비께서 청하신 약은…… 보내드려야 합니까?” 아직 목에 닿아있는 칼날에 임곽수는 경직된 목소리로 물었다.그러자 진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보내거라.”이육진의 지시로 임곽수를 찾아간 것이니, 당연히 왕야께서는 왕비가 이 사실을 알게 두지 않을 터였다. 그는 단단히 입단속을 시킨 뒤, 곧장 돌아가 보고했다.진규의 보고를 받은 이육진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그녀와 혼인한 뒤로 자신이 얼마나 참고 버텨왔는데!그런데도 그녀는 남자로서 문제라도 있는 것처럼 의심하고 그 어의는 아예 취향 문제라는 암시까지 했단 말인가?이게 대체 무슨 황당한 상황이란 말인가?!정말 기가 막히는군!그녀가 어디까지 믿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그는 낮에 그녀가 이민수를 우연히 마주쳤다는 것을 전해
어떤 여인을 좋아하냐고? 그는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소우연의 청아한 미모와 미소, 그녀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약초 향기가 머릿속을 가득 채울 뿐이었다.소우연은 그가 대답을 망설이는 동안 뜻밖의 말을 꺼냈다. “왕야께서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차라리 왕야의 취향에 맞는 여인을 첩으로 들이시는 건 어떠하옵니까?” “첩을 들이라고?” “예, 왕야의 취향에 꼭 맞는 여인이 어떤 모습인지 말씀해 주시옵소서.” 이육진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헌신하며 자신의 곁을 지키지만, 그 모든 것은 동정과 책임에서 비롯된 것일 뿐, 사랑은 아니었다. 불구에다 흉측한 얼굴을 한 그에게 사랑을 느끼리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민수뿐이었다. 진심을 가장한 친절과 헌신이 오히려 자신을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역시, 아리따운 여인은 거짓말을 하더라도 상대가 저절로 그 덫에 빠지도록 만드는 재주가 있구나.’그리고 그 순간, 이육진은 그녀가 자신에게 발라주고 그 연고들이 제발 효과를 발휘하길, 그저 조금이라도 흉터가 옅어지기만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소망이 생겼다.“나는 여인에 관심이 없다.”그는 눈을 감으며 마음 한구석을 찌르는 듯한 고통을 애써 무시하려 했다.여자에 관심조차 없다니……!소우연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너무나 긴장한 탓에 점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첫날밤, 스스로를 다치게 하면서까지 정조의 상징을 만들어낸 이유.그녀에게는 그저 낯 뜨거운 신음만 내도록 요구했던 이유.바로 그래서였다.이래서야 어찌 이민수와 맞서 싸울 수 있겠는가? 소우연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왕야, 태의에게 진찰을 받아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녀의 질문에 이육진은 몸을 돌렸다. 그녀는 여전히 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이냐?” 그는 진규로부터 들은 보고에 이미 충분히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그런데 이제는 아예 대놓고
소우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는 이육진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왕비, 두려워하지 말게.”“두렵지 않사옵니다.”이미 한 차례 죽음을 겪은 몸인데 이제 와서 무엇이 두렵겠는가? 다만, 이 일에 대해서는 너무 생소하여, 어찌해야 할지 모를 뿐이었고 이렇게까지 먼저 다가선 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그런데 이육진은 그저 그녀의 머리만 쓰다듬고 마는 것인가?그 이상의 행동은 왜 하지 않는 것인가?“저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사옵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이육진의 표정을 살피려 했으나, 방 안은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어 그의 얼굴을 또렷이 볼 수 없었다.그 순간, 이육진의 몸은 이미 뜨거운 용광로처럼 달아올라 있었다.예전 같았더라면 스스로 감정을 다스리며 그녀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그는 그리할 수 없었다.그녀가 눈앞에 있는데도 그는 감히 이 망가진 몸을 그녀에게 감당하라 할 수 없었다...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소우연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내 다리를 치료할 수 있겠느냐?”소우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왕야께서는 아직도 저를 믿지 못하시는 것이옵니까?”이육진은 짧게 한숨과 함께 나직이 미소를 지었다. “믿는다. 나는 그대를 믿고 싶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덧붙였다. “그렇다면, 내 다리가 완전히 낫거든 그때 합방하는 것이 어떻겠느냐?”소우연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의 다리가 불편하다는 것을 떠올리니, 합방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남녀 간의 일이란 것을 잘 알지 못했기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그가 적극 협조한다고 해서, 과연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일까? 답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단호하게 약속했다.“제가 기필코 왕야의 다리를 고쳐 드리겠사옵니다!”어두운 방 안에서도 이육진은 그녀의 결연한 눈빛을 볼 수 있었다. “좋다. 난 반드시 왕비를 잘 따르도
용부에 도착하자 하인이 다가와 알리겠다고 했지만, 소우연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괜찮습니다. 미리 알리지 않으셔도 돼요.”정연과 진우를 데리고 주합문 앞에 다다랐을 때, 소우연은 마당 한가운데서 햇살을 받으며 누워 있는 용강한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얇은 담요 하나 덮은 채 대나무 안락의자에 기대어 있었고, 따사로운 햇살은 그의 온몸을 감싸며 은은한 빛을 퍼뜨리고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금방이라도 햇살 속에 스며들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소우연은 잠시 숨을 삼켰다.곁에 있던 호위가 다가오려 하자 그녀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저는 태자빈입니다. 용 감정과 조용히 나눌 이야기가 있습니다.”호위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그는 그녀를 몰라볼 리 없었다. 주군께서 가장 자주 안부를 묻던 이였다. 위급한 상황에는 도우라는 명까지 내려졌으니, 그가 나서서 막을 이유는 없었다.소우연은 조용히 정연과 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문 앞에서 기다리세요. 누구도 들이지 말고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발소리조차 삼키며 마당을 가로질렀다.낙엽과 풀이 깔린 바닥 위로 바스락이는 소리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돌려보내라.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용강한은 눈도 뜨지 않은 채 무심하게 말했다.소우연은 멈추지 않았다.“제가 오늘 올 거라는 예감이 들진 않으셨나요?”그제야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햇살을 뚫고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그는 그대로 누운 채 손을 모아 가볍게 인사했다.“태자빈 마마셨군요. 자리에 앉으시지요.”소우연은 그제야 그의 옆에 놓인 또 하나의 안락의자를 발견했다.방석까지 가지런히 놓인 자리가, 누가 봐도 ‘그녀’를 기다린 자리였다.“이걸 미리 준비하셨군요. 오늘 제가 올 걸 아셨던 거네요.”“예. 그리고 약간의 수를 써서 태자 전하께서 잠시 궁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단둘이 뵙고 싶었거든요.”소우연은 가볍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진맥해드릴게요.”“괜찮습니다…”그의 말이 끝나
이민수는 혜주와 소범준만 남긴 채,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가 떠난 뒤, 아령은 소씨 가문 안에서 훨씬 자유로워졌다. 소지윤에게 아이를 얻기 위한 계획도 한결 수월해졌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혜주는 속으로 생각했다.아씨는 누구에게도 깊은 감정을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그런데 어째서… 소지윤 대인에게만은 그 마음이 다른 것 같았다. 아니, 그렇지 않다면 왜 하필 그의 아이를 가지려 하시는 걸까.한편, 태자부.이육진은 연회를 열고, 용강한과 심소균을 초대했다.술이 몇 순배 돌았을 즈음, 소우연이 용강한더러 ‘오라버니’라 부르자 심소균은 술잔을 들고 멍한 얼굴이 되었다.‘아니…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된 거지?’태자빈이 ‘오라버니’라 부를 정도라면, 절대 가벼운 인연이 아닐 터.그보다 더 놀라운 건, 태자 이육진 역시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심소균은 무언가 중요한 걸 놓친 기분에, 괜히 청주를 몇 잔 더 들이켰다.“그냥 조용히 마시죠.”용강한은 무심히 말하며 자신도 잔을 비웠다. 하지만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소우희는 이미 죽었다.그토록 집요하게 소우연을 괴롭히던 이가 사라졌다면 마음이 홀가분해질 법도 했다.하지만, 연회 자리를 둘러싼 이들의 표정은 어딘가 무거웠다.심소균은 내막을 알지 못했지만, 용강한은 알고 있었다.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결말이 아니라, 어쩌면 또 다른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심소균이 술에 취해 정신을 잃자, 이육진은 하인을 불러 그를 데려가게 했다.연회가 마무리되고, 소우연이 조심스레 물었다.“오라버니, 어디 불편하신 건 아니세요?”“괜찮습니다.”용강한은 담담히 웃었지만, 이어진 기침은 거셌고… 이내 곧 수건에는 선혈이 스며들었다.그는 그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재빨리 망토를 여미고는, 여느 때처럼 미소를 띠었다.그러나 그를 지켜보는 눈은 날카로웠다.소우연은 물론, 이육진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용 감정, 네 몸 상태가 왜 이리 나빠졌느냐. 예전엔 이러지 않았잖아.”그는
서재 안은 숨조차 쉬기 어려울 만큼 숨막히는 분위기로 가득했다.이민수는 의연한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예전에 우희가 소우연에게 얼마나 애원했는지, 부인께서 또 얼마나 고개를 숙였는지… 다들 기억하시겠지요? 그런데도 소우연은 우희를 단 한 번도 용서하지 않았답니다.”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지금 잠시 조용하다고 이게 끝이라 생각하십니까? 제가 내민 손길을 뿌리치셨으니, 훗날 다시 찾아오신다 해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고, 서늘한 눈빛을 떨구었다.“우희와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아령이 눈물로 애걸복걸하지 않았다면… 소씨 가문을 위해 이 더러운 일에 제 발로 들어설 생각 따윈 없었습니다.어차피 저희 평서왕부는, 태자부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으니까요.”그 말에 소홍범의 안색이 굳어졌다.평서왕의 야심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과거 이육진이 불구가 되고 얼굴까지 망가졌을 무렵, 평서왕은 황태자의 자리를 가장 가까이서 노릴 수 있는 유력한 인물이었다. 비록 직접 황태자가 되지 못한다 해도, 그의 장남 이민수가 황제에게 양자로 들어가 후계자가 될 거란 이야기는 조정에 이미 돌고 있었다.수년간 평서왕부는 조용히 인맥을 조율하고 관료를 포섭해왔다. 이육진이 회복했다고는 하나, 평서왕 부자의 야망은 그 무엇으로도 꺾이지 않았다.소씨 가문은 이제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다.“아버지…”소현우가 조용히 일어섰다. 우희를 향한 죄책감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고, 소우연에 대한 원망은 이미 마음속에서 불덩이처럼 타오르고 있었다.이 길로 가나 저 길로 가나 지옥이라면, 차라리 평서왕세자의 손을 잡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소홍범은 고개를 돌려 소현준을 바라보았다.소현준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소우연을 직접 만나야 하나… 아직은 이르다.’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머뭇거리던 그 순간.이민수가 옷자락을 휘날리며 돌아서자, 소현우가 갑작스레 그의 등
“누구지?” 임진숙이 물었다.“평서왕부의 세자저하, 그리고 스스로 둘째 아씨의 지기라 밝힌 여인입니다.”소현우가 곧장 말했다. “어머니, 우희와 친하다고 했던 그 손수건 친구입니다. 어제 시신 수습을 도왔던 그 아가씨예요.”임진숙은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모셔라. 우희의 친구라니... 잘 모셔야 한다. 알겠느냐?”“예.”소현우는 급히 나가 마중을 나갔다.지금의 소씨 가문에겐 더 이상 발버둥칠 힘도, 핑계도 없었다.평서왕 세자 이민수, 한때는 소우희의 혼처 상대였던 사내. 소우연만 아니었다면, 소씨 가문이 이렇게까지 무너질 일도, 우희가 그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그리고 자신이 직접 여동생의 목을 조르는 죄를 짓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이민수가 도착하자, 병중에 있던 소홍범마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맞았다.가족 모두가 알고 있었다.태자부는 이제 발붙일 수 있는 곳도 없었고, 의지할 곳도 아니었다.소씨 가문이 마지막으로 기대어볼 곳은 오직 평서왕부뿐.본래부터도 세상은 소씨 가문이 평서왕부의 그늘 아래 있다고 여겨왔다.“소 장군께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다시 뵙는 자리가 이리도 쓸쓸할 줄은 몰랐습니다.”소홍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얼굴엔 피로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휠체어에 앉아 있던 소한준은 냉랭하게 내뱉었다.“소우연만 없었더라면, 우희는 진작에 세자저하의 곁에 있었을 겁니다. 이런 참변도 없었겠지요.”이민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죠. 다 지켜주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형식적인 위로가 몇 마디 오간 뒤, 아령은 이민수의 배려로 이당에 남아 임진숙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소홍범과 이민수, 소현우, 소현준은 서재로 향했고, 소한준은 하인의 부축을 받아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임진숙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한참을 흐느꼈다.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결같았다.‘우리 우희가 왜 이리 비참하게 갔을까… 우리 집안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그녀는 끝없는 자책과 회한 속에 빠져 있었다
“그때는 정말로 믿었어. 그 은인이 우리 어머니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거라고. 그런데 우리가 피를 말리며 상운국에 도착했을 땐 외가 쪽은 이미 떠난 뒤였지. 나중에야 들었어. 멀리 남강으로 이사했다는 걸 말이야. 그 은인은 어머니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했나 봐. 결국 어머니를 다시 백화루에 팔아넘겼어. 그리고 나도… 결국 기생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지.”아령은 눈가에 눈물이 고인 채로 조용히 혜주를 바라봤다.“넌 어떻게 생각해? 내 이모인 임진숙이라는 사람… 참 무섭지 않아? 그런 사람은 죽어 마땅하지 않아? 왜 그 사람은 고귀한 장군 부인으로 살아가고, 우리 어머니는 천한 기생이어야 해? 왜 그 사람 자식들은 다들 한 자리씩 가질 때, 나는 태어날 때부터 천한 신분이었던 걸까? 우리 어머니가 그걸 참지 못했어. 나도 마찬가지였고.”아령의 눈빛은 억눌린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그래서 맹세했어. 어머니랑.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기회가 생긴다면, 꼭 그 사람과 그 사람 가문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겠다고.”그녀는 눈물을 훔친 뒤, 환하게 웃었다.그 미소는 해맑았지만, 그 속에 담긴 결심은 날카롭고 서늘했다.“그게 바로 내가 살아 있는 이유야.”그 이야기를 들은 혜주는 마음 깊은 곳이 흔들렸다.‘그랬군요… 그래서…’소 부인 임진숙. 겉으론 다정하고 자애로워 보였지만, 어린 동생을 백화루 문 앞에 유기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분명 겉과 속이 전혀 다른 이중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소우희 아씨가 그렇게 악랄했던 것도… 이유가 있었군요.’‘진짜… 그 어머니에 그 딸이었네요…’“그 진홍색 비단함, 꼭 잘 보관해. 그 안엔… 언젠가 그 집안 사람들의 뼛가루를 담게 될 거야. 그래야 어머니의 영혼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질 테니까.”아령은 혜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너도 쉽지 않은 삶을 살았잖아. 그 마음, 나도 잘 알아. 평서왕부로 돌아가면 널 풀어줄거야. 그때 내가 준 돈으로 아무도 널 모르는 곳에 가서… 조용히, 너답게 살아.”그 말을 들은
그녀가 한때 이민수의 침소를 지키던 몸이었다는 사실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그랬군요...”소현우는 장정답지 않게 눈가가 붉어졌다.멀찍이서 하인들이 수레를 끌고 오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저건...”“우희 언니에요.”아령은 숨김없이 고백하며, 눈가를 눌렀다. 슬픔을 삭이는 듯한 손짓이었다.소현우에게는 낯선 장면이었다.소우희에게 이런 절절한 마음을 나누던 벗이 있었던가.그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소현준은 그리 쉽게 믿지 않았다.여인의 말은 빈틈이 없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위화감이 들었다.그럼에도 혜주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 있었다.소현준은 혜주를 일으켜 세우며 눈을 맞췄다.“정말... 둘째를 원망하지 않느냐?”혜주는 힘 있게 고개를 저었다. 그 눈빛엔 감사와 충성이 담긴 듯 보였다.하지만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그녀는 소우희를 증오했다. 결국 바랐던 대로 소우희는 혀를 잃고, 자신보다 먼저 죽었다.그것으로 충분했다. 모든 것이 보상받은 기분이었다.소현우는 그런 혜주의 내면까지는 읽지 못한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어릴 적부터 함께한 사이니... 주인과 종이라도 정이 있었겠지.”사실 혀를 자른 것도 그날 격분한 소홍범의 지시였다.이제 소우희는 죽었고, 더는 이 하녀에게 뭐라 할 이유도 없었다.소현우는 이마를 짚으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아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고맙다. 혜주가 그대 곁에서 지낼 수 있다면... 그 또한 우희가 남긴 인연이라 생각한다.”아령은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했다.“오라버니... 아니, 장군님. 죄송해요. 순간 감정이 북받쳐서...”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마치 실수라도 한 듯 웃어 보였다.소현우는 손을 내저었다.“우희의 벗이라면, 오라버니라 불러도 괜찮다.”잠시 후, 소씨 가문의 하인들이 아령 일행의 수레 대신 소우희의 시신을 직접 실었다.이제 그녀를 보내는 건, 가족의 몫이었다.소현준은 형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형은 어
전날엔 폭우가, 오늘은 뙤약볕이 내리쬐었다.이런 날씨 속에서, 소우희의 시신은 또 얼마나 더 큰 고통을 겪고 있을까.강직한 무장이자 소씨 가문의 주인인 소홍범조차 그 앞에선 중심을 잃을 뻔했다.말을 꺼내려다 삼킨 그는, 결국 큰아들 소현우와 둘째 소현준에게 시신을 찾으러 가라고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난장골.산바람은 살을 찌를 듯이 뜨겁고, 공기마저 눅눅하게 달아올라 있었다.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채 숙취에 시달리던 소현우는 동생과 함께 난장골에 도착했다.주위를 둘러보니, 시신을 찾아 이곳을 헤매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그중 한 무리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희고 단정한 옷차림의 소녀가 한 대의 수레를 따라가고 있었고, 수레 위엔 희미한 천이 덮인 시신 하나가 실려 있었다.소녀의 눈가엔 희미한 붉은 기가 맴돌았다.썩은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소현준은 코끝을 막으며 얼굴을 찌푸렸다.호위병 하나는 이미 참지 못하고 옆에서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소현준은 손을 들어 허공을 가르며 말했다.“둘째 아씨 시신부터 찾아라.”차가운 명령이 떨어지자, 하인들은 이를 악물고 악취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때였다.하얀 옷의 소녀와 그 일행이 소씨 가문의 마차 앞으로 다가왔고, 소녀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실례합니다. 혹시 소씨 가문의 도련님들이신지요?”마차 안에 있던 소현우는 움직이지 않았다.마차 옆에 서 있던 소현준만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그리고 그 소녀 옆에 선 익숙한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혜주였다.혜주는 곧장 무릎을 꿇으며 조용히 예를 올렸다.그 눈동자엔 아련한 빛이 어려 있었고, 그리움과 슬픔이 섞인 감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소현준은 미간을 좁히며 소녀에게 물었다.“너는 누구냐?”시선은 혜주에게 있었지만, 질문은 분명 그 소녀에게 향한 것이었다.소녀는 다시 한 번 차분하게 몸을 낮추며 답했다.“아령이라 합니다. 예전에 소우희 아씨를 몇 차례 뵌 적이 있고, 개인적인 은혜를 입은 바 있습니다. 서로 손수건을 나
반 시진이 지나고, 어느덧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붉게 타오른 노을이 하늘 끝에 걸려 있었고, 맑고 푸른 하늘은 마치 물로 씻어낸 듯 투명했다.그 풍경은 마치 소우연의 마음과도 같았다.모든 짐을 내려놓은 듯, 가볍고 평온했다.소우희는 죽었다.이 세계의 여주인공은 사라졌고, 남주는 더 이상 남자 구실을 할 수 없었다.모든 이야기는 이제 완전히 새로 쓰일 터였다.진원 장군부.소현우는 돌아오자마자 술을 들이켰고, 그날 밤을 고스란히 의식을 잃은 채로 보냈다.그리고 다음 날, 해가 지기 직전에서야 겨우 눈을 떴다.헝클어진 머리에 단추도 제대로 잠그지 못한 채, 그는 하인에게 명했다.“소씨 가문 사람들을 전부 정청으로 불러라.”며칠째 앓고 있던 소홍범은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군의 업무는 거의 대부분 부장들에게 넘긴 상황이었고,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이육진이 그의 군권을 서서히 회수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그러나 어찌할 수 없었다.지금 그의 수하 중 대부분은 본래 이육진의 옛 부하였다.이육진은 별다른 수를 쓰지 않아도, 그저 말 한마디면 모두가 따랐다.그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소홍범, 그리고 그의 아들들마저도 과거엔 모두 이육진의 군 아래 있었다.5년 전, 국경에서 벌어진 전투.이육진이 매복을 당해 위기에 처했을 때, 소현우는 전방에서 적과 싸우며 지원 한 번 받지 못한 채 중상을 입었다.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그 순간, 그를 구해낸 사람은... 소우희가 아니었다.소우연이었다.소홍범은 이를 악물었다.소우희를 미워했다.믿고 싶었지만, 결국 기대를 저버린 딸이었다.소우연이 그의 큰아들을 살려냈다고 해서, 그에게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가족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다.하지만 그게 소우희의 자리를 대신할 이유는 아니었다.결국 일을 망쳤다.감히 소우연을 건드려, 집안 전체가 흔들리는 사태를 자초했다.정청에 모두가 모였다.눈이 퉁퉁 부은 임진숙이 조심스레 물었다.“어머님은 안 오는 거니...? 혹
‘세상에 진심이란 없어. 결국 믿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야.’그 말이 또렷이 귓가에 맴돌았다.마지막까지 아령의 목소리가 소우희의 머릿속을 울렸다.‘날 미워하지 마. 미워할 거면 너 자신을 미워해. 네가 소씨 집안의 자식이라는 걸. 네 어머니가 악독한 여자였다는 걸. 그 여자가 내 어머니 인생을 망쳤고, 그래서 난 태어나자마자 천민이 되었어.’‘난 바라는 거 없어. 단 하나, 너희 소씨 집안이 완전히 무너지는 걸 두 눈으로 보는 것. 그것만이 내 삶의 이유야.그리고 지금 난 그 목표에 가까워지고 있어. 나는 반드시 성공할 거야.’소우희는 그녀가 정말로 복수가 성공하길 바랐다.여자의 숨소리가 멎었다.소현우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비틀거리며 주저앉을 뻔한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우희의 콧날 아래를 짚어보았다.숨이 없었다.정말로 죽은 것이다.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오라버니’라 불렀던 여동생. 그 목소리가, 그 웃음이, 아직도 귓가를 떠나지 않았건만.소우희는 정말로 죽었다.그는 허둥지둥 감방을 뛰쳐나왔다.밖에서 기다리던 임진숙이 그 얼굴을 보고 다급히 물었다.“왜 그래? 무슨 일이니?”소현우는 눈을 피하며 단호히 말했다.“아무 일 아니에요. 어서 돌아가요. 어머니, 어서요.”말을 재촉한 뒤, 급히 달려가는 소씨 가문의 마차를 바라본 옥졸은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다.불안한 기운에 곧장 감방으로 달려가 안을 들여다보았고, 그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소우희가 죽어 있었다.그녀는 움직일 수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는 몸이었다.그렇다면 가능한 건 단 하나.소현우 장군.그는 자신의 손으로 친여동생의 목숨을 거두었다.옥졸은 온몸이 얼어붙었다.어떻게 이런 일을 책임자에게 보고해야 한단 말인가.더욱이 태자에게...그는 급히 의원을 불렀지만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소우희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옥졸은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로 직접 태자부로 달려갔다.하늘은 잿빛으로 물들었고, 금세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