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21세기의 비혼주의자였던 서인경, 눈을 떠 보니 한남자밖에 모르는 연애 바보로 환생했다. 원주인이 하도 여기저기 적을 많이 만들고 다닌 탓에 그녀는 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이딴 삶을 어떻게 살아가라고! 이혼, 반드시 이혼해야 해! 전생에서 서인경의 가족은 누명을 쓰고 비참하게 몰살당했다. 서인경은 이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복수도, 이혼도, 자유로운 비혼주의도 모두 되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존귀하신 왕야에게 조심스레 이혼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하고 말았다. 한발 양보해서 휴처(休妻: 고대에 혼인한 사내가 처를 집안에서 내쫓는 것)라도 해달라 했지만 그것도 거절. 결국 그녀는 스스로 이혼서를 써서 그에게 건넸다. 그러나 그걸 본 사내는 문서를 갈기갈기 찢으며 분노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경고했다. “내 사전에는 이별이라는 단어가 없다. 나와 헤어지고 싶다면 오직 사별뿐이지. 죽고 싶으면 어디 한번 해보거라.”
View More서인경은 문 앞에 의자를 가져오라 지시하고는 걸터앉아 한 대, 또 한 대 뺨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파문 하나 없이 잔잔했다.“여긴 상왕부다. 태황태후의 사람이 감히 윗사람을 능멸해? 본왕비가 태황태후를 대신해 훈계하는 것이다. 내가 왕비인데 하인 한 명도 때리지 못한단 말이냐? 누구든 감히 한 마디 더 변명해 준다면 똑같은 꼴 날 줄 알거라.”경고가 칼처럼 뻗자 입 끝까지 치솟던 말들은 모두 꿀 삼키듯 목구멍으로 사라졌다. 암위들의 손엔 힘 조절 따위는 없었다. 손바닥 소리는 서슬 퍼렇고 주먹보다 더 잔인했다.오십을 채 가기도 전에 환관의 얼굴은 부어올라 돼지처럼 뒤틀렸고 입가에서는 침이 줄줄 흘러나왔다.백 대가 끝났을 때 즈음 그는 거의 죽은 자나 다름없었다.내내 서인경 품에 안겨 있던 꼬막이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비명도, 살 떨리는 소리도 그에게는 그저 호기심일 뿐이었다숨도 고르지 않고 바라보는 꼬막이에 서인경은 속으로 생각했다.‘이 아이는 과연 누구를 닮아 이렇게 태어난 걸까? 상왕과 내 피를 이어 받았으니 쉽지는 않겠지.’백 대가 끝났을 때는 문 앞에 이미 모여든 구경꾼들로 몇 겹의 벽이 쌓여 있었다.서인경은 꼬막이를 안고 일어섰다.궁으로 향하는 마차에 오르기 전, 그녀는 평이를 불렀다.“내가 발을 떼는 즉시 사람을 풀어라. 예정임이 진국의 유아들을 납치해 죽음의 병사로 길렀다는 사실을 온 경성에 퍼뜨려. 그리고 모두가 알게 해야 한다. 상왕은 진국 백성을 위해 야랑국에 간 거라고. 또 나와 세자가 태황태후에게 불려 궁으로 들어간 사실도 퍼트리거라.”평이는 즉시 이해하고 눈을 반짝였다.“명심하겠습니다! 가장 빠르게 온 경성에 퍼지게 하겠습니다.”막북에서 전공을 세운 상왕 부부였는데 돌아오자마자 상왕은 백성을 위해 다시 야랑국으로 향했다.태황태후와 서 가의 오래된 앙금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지금 이 타이밍에 과부와 어린 세자를 들여 궁에 가둔다면 모두가 알 것이다. 그녀
단정하게 갖춰 입은 궁중 예복이 몸에 얹혀지자 상왕비라는 위압이 단숨에 살아났다. 거울 앞에 선 그녀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첫 대결을 벌이기엔 이보다 더 알맞은 전투복은 없었다.“얼마나 이 날만을 기다렸겠느냐? 벌어질 일이라면 피해도 소용없다. 가서 맞서주자꾸나.”평이는 입술을 바짝 말아 쥔 채 잔뜩 겁먹은 얼굴이었다.“후궁은 용이 들끓고 호랑이가 노니는 곳이라 하지 않습니까? 왕야께서 계시지 않는 지금, 왕비님 혼자서도 위험한데 세자까지 데리고 들어갔다가 무사히 나오지 못한다면…”서인경은 옷자락을 내려놓고 다가와 평이와 봉한설의 볼을 양손으로 톡 하고 집었다.“안 가면 그게 오히려 항명이다. 목이 날아갈 일이지! 간다면 그래도 한 줄기 숨통이라도 남아 있지 않겠느냐?”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볼 뿐 결국 말 한마디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고는 묵묵히 서인경과 꼬막이의 옷을 갈아입혀 주었다.준비를 마치고 전원 앞으로 나서자 궁에서 조서를 가지고 온 환관은 이미 진득하게 화가 올라 있었다. 하필이면 어제 왔던 그 환관이었다. 그는 어제 빈손으로 돌아갔다는 이유로 궁에 들어서자마자 머리끝까지 욕을 먹었던 참이었다.하지만 오늘은 사정이 달랐다.상왕이 부재한 지금, 그녀는 그저 친정마저 없는 한낱 상왕비일 뿐. 궁궐의 주인들은 애초에 그녀를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았다.후궁은 높은 자의 눈치만 보는 곳. 주인조차 하찮게 여긴다면 그 밑의 노비들은 더더욱 마음껏 짓밟아 된다고 여기는 법이었다.서인경이 천천히 걸어 나오자 환관은 콧구멍이 하늘을 찌를 기세로 외쳤다.“상왕비의 위세가 참으로 대단하시군요! 태황태후께서 단지 세자를 보고 싶어 하실 뿐인데 상왕비께서는 번번이 핑계만 대며 회피하시니, 이는 태황태후께 대한 참람한 불경입니다!”쏘아붙이는 말투와는 달리 서인경은 오히려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아이가 어려서 준비에 시간이 좀 들었다. 너그러이 용서해 주게나.”그녀가 화내지 않자 환관은 더욱 기고만장해졌다.“애가 어리
연기준이 조심해야 할 사람들을 하나하나 언급했다. 그 말투 속에 모두 걱정이 묻어 있자 서인경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참 한심한 인생입니다. 친구는 몇 명 사귀지도 못했는데 권세 있는 사람들은 왜 전부 적으로 돌렸는지 모르겠네요. 이렇게 말하니까 저도 반성하게 됩니다. 대체 뭘 하면서 살아온 건지.”연기준은 그녀의 손을 더 꼭 잡았다.서인경은 그의 걱정이 손끝으로 전해지자 살짝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다.“걱정 마세요. 폐하께서는 저를 당신을 견제할 명분으로 남겨둔 거니까. 당신이 밖에서 독립할 움직임만 보이지 않는다면 저를 함부로 건들진 못 할 겁니다.”연기준은 낮게 웃었다.“본왕은 황권에 관심이 없다. 본왕에게 필요한 건 너희뿐이다.”서인경은 처음 이곳으로 오게 된 날을 떠올랐다. 전생의 일로 연기준을 원망하고 미워해 당장이라도 헤어지고 다시는 마주치지 않길 바랐던 때, 연기준 역시 냉정했고 그녀를 거칠게 대했었다. 서로 보기만 해도 불쾌해서 서인경은 수시로 그를 걷어차고 싶었다.그땐 상상도 못 했다. 이렇게 함께 누워 있는 평온한 밤이 올 줄은.그날 밤, 서인경은 편안히 잠들었다.환하게 날이 밝아올 무렵, 그녀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꼬막이는 어느새 깨어 침상 한가운데서 팔 다리를 쭉 뻗고 혼자 놀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편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녀는 생각할 틈도 없이 맨발로 바닥을 딛고 허둥지둥 문을 열었다.문 앞에는 봉한설과 평이가 기다리고 있었다.서인경이 나오자 둘은 동시에 그녀를 보았다. 봉한설은 무엇을 묻고 싶은지 알고 있었기에 먼저 입을 열었다.“왕야께서는 아직 날이 밝기도 전에 떠나셨어요. 왕비 마마를 깨우지 말라 하셨고요.”서인경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어제 떠나는 시간을 묻는 걸 깜빡했던 것이다.애초에 연기준은 그녀가 배웅하는 걸 바라지 않았다. 어쩌면 떠나는 순간의 슬픔을 굳이 마주하지 않게 하려는 작은 배려였을지도 모른다.‘그래. 그냥 보내자. 배웅은 없어도 되지 않을까?’하지만 대문 밖을 바라보
서인경은 말할 힘도 없어 눈을 한 번 깜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그러자 연기준은 가볍게 웃었다.“됐다. 더 피곤하게 하지 말고 눈 감고 좀 쉬거라.”서인경은 그의 말대로 눈을 감았다.연기준은 사흘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었다. 서인경 곁에서 잠든 이 잠은 곧바로 낮 한참까지 이어졌다.창밖의 아침 햇살은 어느새 저물어 석양이 창을 물들였다.꼬막이는 배고파서 몇 번이나 울먹였지만 봉한설이 계속 붙잡아두었다.“아가, 착하지. 우선 유모 젖을 조금만 먹자꾸나. 너희 아버지랑 어머니는 지금 감정을 쌓는 중이시거든. 동생을 만들지도 모르는데 방해했다간 나중에 후회할 거다.”곁에서 듣던 평이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입 좀 다물 거라!”하지만 봉한설은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면 그 말을 듣고 꼬막이가 금세 울음을 멈췄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절대 유모 젖은 안 먹으려 했을 텐데 오늘은 억지로라도 삼켰다.서인경은 하루 종일 먹지도 못한 상태에서 연기준에게 많은 체력을 빼앗겼다. 그러다 몸을 일으킬 때는 배고픔에 눈앞이 빙 돌고 다리가 풀릴 정도였다.저녁상이 차려지자 서인경은 허겁지겁 먹었다.품에 안겨 오던 꼬막이는 엄마의 먹는 모습만 봐도 다시 배가 고파져 머리를 들이밀며 품으로 파고들려 했다. 하지만 파고들기도 전에 연기준은 꼬막이를 번쩍 안아들었다.“배고프면 어머니한테만 매달리지 말고 유모를 찾거라. 아버지가 없는 동안 넌 남자다. 귀찮게 굴지 말고 어머니를 지켜야지.”서인경은 밥을 씹으며 눈을 흘겼다.“지금이라도 공중제비 하나 시켜보지 그러십니까?”꼬막이는 아직 친아버지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황제는 사람을 보냈다.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연기준은 내일 첫새벽에 출발하라는 전갈이었다.이별 전 마지막 밤, 서인경은 꼬막이를 연기준 품에 꽉 안겨 두었다.“많이 안아두세요. 돌아오면 그땐 아버지라고 부를지도 모르잖아요.”연기준은 꼬막이를 한 손으로 가볍게 받쳤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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