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일행은 모닥불을 둥글게 둘러앉아 정세를 논했다. 군영 안은 더없이 평온했고, 아무도 그들을 방해하지 않아 마치 세상과 동떨어진 곳처럼 한적했다.이튿날 오후.이육진이 그제야 아갑과 아을을 데리고 소룡진 군영에 당도했다.이영, 심초운, 심연희 세 사람은 이육진 앞에 무릎을 꿇고 일제히 '선황'이라고 칭했다. 아갑과 아을 두 사람은 진작에 이육진의 신분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솟구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상운국의 최고 통치자들에게 귀순한 셈이었으니, 실로 혀를 내두를 만한 일이었다.이육진이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다들 무고하게 잘 지내더니, 어쩌다 예까지 다 달려온 게냐?”“오라버니께서 조정을 굳건히 장악하시어 천하태평을 이루시고, 남녀노소 모두가 평안히 생업에 종사하는 태평성대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저 같은 꼭두각시 황제는 황궁에 있으나 마나 한 셈이지요.”이영이 대답했다.이육진이 코웃음을 쳤다.“내가 너를 잘못 보았구나.”이영이 흠칫 놀라 되물었다.“아바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터인데.”이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아하, 그러니까 아바마마께서는 자신 역시 아바마마나 어마마마처럼 권력이나 황위에 큰 욕심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다.세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난 후, 이영이 다시 물었다.“아바마마, 어째서 어마마마는 함께 오시지 않은 겁니까?”“여기가 우리 본거지도 아닌데 네 어마마마를 뭣 하러 데려오겠느냐? 네 어마마마는 지금 군의관 노릇을 하며 그곳 의원들에게 의술을 가르치고 있단다. 훗날 영남의 의술은 그 의원들을 통해 전해질 터이니, 이 좋은 기회를 놓칠세라 네 어마마마가 그 일에 여간 열심인 게 아니란다.”이영은 어깨를 으쓱했다.용강한은 찻잔을 들어 물을 마시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부녀와 장인, 사위가 모여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꽤나 흥미로웠던 것이다.이육진이 힐끗 용강한의 표정을 보고는 물었다. “이 대인, 무얼 그리 재미있어 하십니까?
“무슨 일이야? 그동안 뭐가 그리 의문이었는데?”이진이 주익선을 바라보며 물었다.주익선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막상 말하려니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 예전에 학문을 가르쳐 주시던 스승님께서 종종 하시던 말씀이 있어.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사명을 띠고 태어나, 그 사명을 다 이루고 나면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난다고 하셨지. 역대 왕조의 성현들이나, 기울어가는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낸 대장군들이 남긴 업적들… 그게 바로 그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 이루어야 할 사명이었다는 거야.”이진은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말인지 더 모르겠어.”주익선이 이진을 마주 보았다.“예로부터 황족들은 하나같이 황위를 차지하려고 형제끼리 피를 흘리며 처절하게 싸웠잖아.”“야사나 책을 보아도, 높은 자리에 올라 황제가 되기를 마다하는 사람은 없었지.”이진이 담담하게 덧붙였다.주익선이 고개를 끄덕였다.“선황 폐하께서는 황위를 쟁취하셨지만, 여러 후궁을 두지도 않으셨고 나라를 형님에게 물려주시지도 않았어. 그 대신 어릴 적부터 곁에 두고 황태녀로 키우신 폐하를 선택하셨지. 그건 선황 폐하께서 폐하나 형님, 그리고 너까지 모두 똑같이 소중한 자식으로 여기셨다는 뜻이야.”이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남녀평등을 강력하게 내세우던 그 시절에도, 크게는 명문 세가부터 작게는 평범한 백성들까지 누구나 아들을 낳고 싶어 했잖아. 심지어 냄비나 그릇 같은 살림살이 하나라도 아들에게 물려주려 했지. 그런데 아바마마께선 이 거대한 강산을 언니에게 물려주셨어. 아바마마께선 대체 어떻게 그런 사상의 굴레를 깨뜨리신 걸까? 그리고 어째서 수천 년간 이어져 온 남성 우위의 통치 체제를 돌연 깨버리신 걸까?”주익선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소우연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선약방의 문은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굳게 닫혀 있었다.“어쩌면, 방금 태후 마마께서 하신 말씀이 그 해답일지도 몰라.”주익선이 말했다.“선황 폐하와 태후 마마께서는 이 세상이 그저 덧없으며
소우연이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천 년을 더 수련한다 해도 네 외삼촌을 따라가지는 못할 게다.”하물며 사람의 한평생이 고작 백 년을 넘기기 어려운데, 천 년이라는 세월이 어디 있겠는가?“수련으로 따지자면 네 오라버니가 오히려 타고난 재능이 있지. 지난 몇 년간 조정을 다스리느라 매여 있지만 않았어도, 필시 수위가 한층 더 높아졌을 게다.”소우연이 말했다.“그깟 도를 닦는 게 뭐가 좋다고요? 새언니와 금슬 좋게 지내며 서로 아끼고 믿는 게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이진은 그렇게 말하며 주익선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다정하게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그렇지, 익선아?”주익선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이진을 바라보았다. “응. 진이 네가 곁에 있으니, 이번 생에 난 더 바랄 게 없어.”다정하게 구는 두 아이를 보며 소우연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가 그리 행복해하니 나도 기쁘구나. 하지만 네 외삼촌 말로는 이 세계와 창궁 은하에는 무궁무진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하더구나. 오직 도를 깨우치고 수련해야만 시공을 초월해 우주의 비밀을 엿볼 수 있다면서 말이다.”소우연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우주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다.“너희, 혹시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느냐?”“어떤 이야기 말입니까?”“이 세상, 상운국이든 영남이든… 그저 누군가의 붓끝에서 탄생한 하나의 세상에 불과하다는 것 말이다.”그녀는 여전히 밤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이 겪었던 전생과 용강한이 도법을 가르쳐주며 수없이 들려주었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러다 문득 깊은 감회에 젖은 듯 나직이 중얼거렸다.이진은 어마마마가 이토록 감상에 젖은 모습을 처음 보았다. 하늘을 우러러보는 지금 이 순간, 어마마마에게서 어쩐지 범접하기 어려운 신성함마저 느껴졌다.이진이 고개를 돌려 주익선을 바라보자, 주익선 역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굳이 말을 나누지 않아도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한참 뒤, 이진이 입을 열
“거의 다 나은 것 같소.”소항이 담담하게 대답했다.소우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차를 마셨을 뿐, 더 이상 나눌 말은 없었다.차를 한 잔 비운 뒤, 소항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인을 보면 참으로 친근하게 느껴지오. 마치 날 때부터 한 식구였던 것처럼 말이오.”소우연은 하마터면 입을 열 뻔했다. 사실 두 사람 사이에는 피가 섞여 있었다. 수십 년 전 소씨 가문의 역모가 실패로 돌아가지만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토록 많은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지만 않았더라면, 그들은 본래 한 집안 식구였다.소항은 가볍게 턱을 당겨 목례를 했다. “왕 부인, 이 의관.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소.”그는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었다.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바람을 몰고 올 것처럼 잿빛으로 잔뜩 흐려 있었다.“어마마마, 소항이 말한 '그들'이란 상운국에서 암암리에 저 자를 돕고 있는 진청산의 옛 수하들을 말하는 것이겠지요?”이진이 멀어지는 소항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들 말고 또 누가 있겠느냐?”모녀는 조용히 시선을 교환했다.“그렇게 생각하면 저 소항이라는 자도 참 딱하네요. 저자가 반기를 들지 않더라도 상운국의 그자들이 어떻게든 반역을 일으키도록 몰아붙이거나, 아니면 언니가 영남으로 출병할 수밖에 없게 만들 테니까요.”소우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자신의 분수는 아는 것 같은데, 뾰족한 수가 없는 모양이에요.”소우연이 이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우리 진이도 알아보았구나.”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바보는 아닌걸요. 저자의 말에 담긴 무력감을 어찌 눈치채지 못했겠어요? 만약 옛날 소씨 가문 사람들이 어마마마께 그토록 매정하게 굴지만 않았더라면, 저 소항이라는 자도 따지고 보면 어마마마의 먼 사촌동생쯤 되는 것 아닌가요?”소우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과거 그녀가 소씨 가문 저택에 머물던 시절, 그녀를 핍박한 것은 본가 사람들이었지 소씨 가문의 방계 친척들과는 큰 상관이 없
“어마마마, 어찌 웃으십니까?”“저 자가 오고 있구나.”소우연은 덤덤하게 말하며 손에 든 약초를 만지작거렸다.이진은 소항을 힐쩍 쳐다보고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소우연과 함께 일에 집중했다.령이가 선약방에서 찻물을 내어 오다가, 소항이 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대왕께서 어째서 또 온 거지? 마님께선 또 어찌 대처하시려나?'령이가 찻물을 한쪽 탁자에 내려놓자, 소항이 뭐라 입을 떼기도 전에 소우연이 먼저 령이를 물러가게 했다.소우연은 손을 탁탁 털고 탁자 쪽으로 걸어가, 직접 차를 한 잔 따르고 자리에 앉았다.이진이 다가가 말했다. “어머니, 저도 마시겠습니다.”소우연은 이진에게도 찻물을 한 잔 따라 주었다.소항은 두 모녀가 자신을 본체만체하는데도 전혀 무안해하지 않고 다가와 물었다. “왕 대인, 내가 이 자리에 앉아도 되겠소?”“대왕, 편히 앉으십시오.”소항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차도 한 잔 얻어 마시고 싶구려.”이진이 웃으며 말했다. “대왕께서는 매일같이 먼 길을 마다하고 군영까지 오시는데, 그저 제 어머니께서 따라주시는 차 한 잔을 얻어 마시기 위함입니까?”소항은 이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말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내가 군영에 오면, 비록 잠깐 보는 것일지라도 내 마음속의 답답함을 달랠 수 있기 때문이라오.”“그 말씀을 들으니 대왕의 마음이 퍽 고독하신가 봅니다. 남들이 우러러보는 것처럼 그리 위풍당당하고 패기 넘치기만 한 건 아닌가 보군요?”이진은 차를 마시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었다.소항은 이진의 태연자약한 기세에 놀라기보다는, 그 어머니에 그 딸이라 여겼다.이 왕수미라는 여인과 그 딸은 영남의 여인들과는 확실히 달랐다.무엇보다 그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든 것은, 이진이 무심코 내뱉은 말이 그의 마음속 깊은 그늘을 정확히 찔렀다는 점이었다.소항은 드물게 우울한 기색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이 높은 자리에 앉아 있긴
소 대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소항이 태후마마를 탐내지만 않았더라면, 그의 손이 그런 끔찍한 변을 당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그러니 너는 내가 왜 그 여인에게 이토록 각별한 마음을 품는지 알겠느냐?”소항이 소 대장에게 물었다.소 대장이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대답했다.“왕 부인께서 대왕의 손을 고쳐주셨으니, 대왕의 목숨을 구해주신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겠지요.”“그렇다.”“하오나 은혜를 갚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나는 은혜를 갚으려는 게 아니다. 그저 연모하는 것이다. 그윽한 난초 같은 그녀의 자태가 좋고, 가벼운 미소 한 번만으로도 내 마음은 환희로 가득 찬다.”‘큰일이다…’소 대장은 속으로 탄식했다.소항은 진작에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 틀림없었다.“대왕! 제, 제가 오늘은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을 올리겠습니다.”소 대장은 그 자리에서 소항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아랫사람으로서 소항을 위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도리라고 여겼다.“지금 무얼 하는 것이냐? 어서 일어나라.”소항이 소 대장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소 대장은 고개를 저었다. “대왕, 대왕께서는 지금 모든 것을 갖추셨습니다. 어찌하여 고작 왕 부인 한 명에게 이토록 집착하시어 스스로를 망치려 하십니까?”“더는 말하지 마라.”소항이 단호하게 소 대장의 말을 끊었다.소 대장은 멍하니 그 자리에 얼어붙어, 한동안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마침 하인이 차를 내어왔다. 소항은 찻물을 두어 모금 축이고는 찻잔을 내려놓고 군막 밖으로 향했다.“네 일은 잘 인계해 두고, 이만 문산으로 가거라.”“예, 대왕.”소 대장이 고개를 들었을 때, 소항의 뒷모습은 이미 군막 밖으로 사라진 뒤였다.'대왕, 이번에 떠나면 언제 다시 뵐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만 번 죽어 마땅한 제가… 대왕을 배신했습니다.'소 대장은 소항이 떠난 방향을 향해 쿵 소리가 나도록 세 번 연속으로 이마를 조아렸다. 마음 한구석이 복잡하게 엉켰지만, 자신의 자손들이 훗날 노비의
“제가 좋아하는 꽃이네요.”그녀가 가늘고 고운 손으로 꽃을 받아들며 향기를 맡았다.경장명이 물었다. “낭자, 아까는 무슨 생각에 그렇게 빠져 있었던 겁니까? 혹시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그는 알 수 없었다. 혹시 자신이 괜한 걱정을 하는 걸까. 처음에는 그녀가 잘 감추고 있는 듯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어딘가 마음이 산만해 보였다.이 모든 것은 그녀가 이천이 장안거리에서 점을 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였다.“아닙니다.”그녀는 청년의 시선을 피하며 교외를 흐르는 강을 바라보았다. 강 양쪽으로는 잡초가 무성했지
’만약 일찍 이 사실을 깨달았더라면, 궁궐에 들어가 호위무사가 되든지, 아니면 마음잡고 글공부를 하여 과거를 봤을텐데… 그랬다면 이렇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신세는 되지 않았을 텐데.’그는 가슴이 쓰렸다.이진은 주익선의 얼굴에 분을 바르고, 눈썹을 그리며, 고운 입술선을 그려주기 시작했다.“아씨…”하녀 염이가 복숭아꽃 가지 몇 개를 안고 들어왔다. 방 안에서는 공주가 또다시 주익선에게 화장을 시키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광경이 전혀 낯설지도 않은 모양이었다.다만 이번에는 주익선의 화장된 얼굴을 본 순간 눈이 동그래지더니 깜
이튿날, 경문과 이천은 말을 달려 운불사에 당도하였다.달리는 내내, 이천의 가슴 속엔 설명할 길 없는 불길한 예감이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큰일이 아니고서야, 사부님께서 경문을 보내어 자신을 부를 리 없었다.“사부님.”이천은 용강한의 얼굴을 보자 안절부절못한 채 입을 열었다.“이영 누님은 사부님께서 누님 때문에 경성을 떠나셨다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용강한은 조용히 응하였다.“그 일은 이미 심초운에게 부탁하였다. 그 아이가 영이를 잘 달랠 것이다.”“경성을 떠나신 것이 누님 때문이 아니라면…”이천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찌하여 저를 영원히 '시군'의 신분으로만 곁에 두려 하십니까?”이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인상을 찌푸린 심초운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그가 성큼성큼 걸어와 그녀 앞에 멈춰 섰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이영은 반사적으로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의 손아귀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요동쳤다. 그에게서 풍겨오는 강압적인 기운, 아침에 허공을 딛고 뇌운을 몰아칠 때 보여준 그 위압감이 그녀의 온몸을 휘감았다.그 감각은 쉽게 가시지 않았고, 그녀는 당황한 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