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붉은 댕기가 걸린 밤이면, 과부촌의 문마다 이겸이 찾아든다. 매일 다른 여자를 품고, 제 욕망을 넘보는 사내는 모조리 없애는 밤도깨비. 그러나 유일하게 문을 열지 않은 연화에게 마음을 빼앗긴 순간, 사랑조차 독차지하려는 그의 집착은 망월촌을 피와 욕정으로 삼킨다.
View More비가 사흘째 쏟아지던 저녁, 망월촌 어귀에 사내 하나가 들어섰다.
문제는 그가 잘생겨서가 아니었다.
여자들을 보는 눈이 너무 노골적이었다.젖은 도포가 어깨와 허리에 달라붙은 채 이겸은 마을 한복판에 멈춰 섰다. 장작을 걷던 난실이 손을 놓쳤고, 약초를 나르던 매향은 광주리를 발등에 떨어뜨렸다.
윤옥련이 먼저 웃었다.
“여긴 과부촌이오. 길 잘못 들었으면 지금 돌아가시오.”
이겸이 천천히 그녀를 훑었다.
“길은 안 잃었소.”
“그럼 뭘 찾으러 왔는데?”
“문 열어 줄 여자.”
난실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미친놈이네.”그때 골목 끝에서 홑청을 걷던 한연화가 고개를 들었다.
이겸의 시선이 그대로 멎었다.
연화는 상복 차림이었다. 남편을 묻은 지 반년도 지나지 않은 여자. 망월촌에서도 누구 하나 함부로 농을 걸지 못하는 여자였다.
그런데 이겸은 눈을 떼지 않았다.
연화가 먼저 쏘아붙였다.
“뭘 보시오?”“사람.”
“처음 보오?”
“저런 얼굴은.”
주변에서 숨죽인 웃음이 터졌다.
연화의 얼굴이 굳었다.
“개수작 부리러 왔으면 다른 집 알아보시오.”“다른 집은 이미 보고 있소.”
그 말에 옥련이 피식 웃었다.
“말은 잘하네. 밤에도 그런가?”그녀는 주막 안으로 들어갔다가 붉은 댕기 하나를 들고 나왔다.
망월촌에서 붉은 댕기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오늘 밤, 이 문은 열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옥련이 그것을 문고리에 걸었다.
툭.
마을 여자들의 눈이 이겸에게 몰렸다.
“들어올 테요?”
그런데 이겸은 움직이지 않았다.
옥련의 미간이 좁아졌다.
“겁먹었소?”“문이 안 열렸소.”
“댕기 걸린 거 안 보이오?”
“댕기와 문은 다르지.”
월선이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이겸을 똑바로 보았다.
옥련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문을 반쯤 열었다.
“이제 됐소?”
이겸이 문 앞까지 갔다.
그러고도 문턱에서 멈췄다.“왜 또.”
이겸이 옥련의 저고리 고름을 내려다봤다.
“내가 풀어도 되오?”옥련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런 데까지 와서 허락을 묻는 사내는 또 처음 보네.”“싫다는 여자는 안 건드리오.”
“잘난 척은.”
“잘난 게 아니라, 싫다는 여자 붙잡는 새끼가 병신인 거지.”
골목이 순간 조용해졌다.
연화의 눈이 흔들렸다.
옥련은 그 표정을 보았다.
그래서 일부러 더 가까이 붙었다.
제 손으로 고름을 풀어 이겸의 손바닥 위에 붉은 댕기를 올렸다.“그럼 이제는?”
“들어가도 되오?”
“들어오라고, 이 미친 사내야.”
문이 닫혔다.
탁.
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연화는 등을 돌렸다.
상관없는 일이었다.
처음 본 사내였다. 어느 과부 방에 들어가든 제 알 바 아니었다.그런데 주막 창호 너머로 옥련의 웃음이 새어 나오자 젖은 홑청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찢어지겠네.”
월선이었다.
연화가 홑청을 놓았다.
“뭐가 말이오?”“천.”
월선이 주막을 한번 보고 덧붙였다.
“설마 다른 걸 말한 줄 알았나?”“별 미친 소리를 다 듣겠네.”
연화가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월선이 낮게 말했다.
“질투는 문을 잠가도 냄새가 나.”
연화가 홱 돌아섰다.
“누가 질투를 해?”“내가 이름 말했나?”
연화는 대답하지 못했다.
밤이 깊었다.
그 뒤로 한동안 주막에서는 말소리가 끊겼다.
오히려 조용해서 더 신경 쓰였다. 연화는 제 방에 들어가서도 등잔을 세 번이나 껐다 켰다. 밖을 보지 않으려 창호까지 닫았는데, 빗소리 사이로 낮은 웃음이 한 번 더 들렸다.“젠장.”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욕을 뱉었다.
그리고 첫닭이 울기 전, 주막 문이 열렸다.
이겸이 나왔다.
옥련은 문설주에 기대 그의 옷깃을 고쳐 주었다.
“오늘 밤은 내 방이었소.”“그랬소.”
“그런데 왜 눈은 자꾸 저 집으로 가?”
이겸의 시선 끝에는 연화의 집이 있었다.
옥련의 표정이 처음으로 싸늘해졌다.
이겸은 그대로 연화의 문 앞까지 걸어갔다.
안에서 인기척이 뚝 끊겼다.
“연화.”
“내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시오.”
“그럼 문 열고 와서 때리시오.”
“미친놈.”
“그 말 들으려고 왔소.”
연화의 손이 빗장 위에서 떨렸다.
이겸이 말했다.
“그대 문에는 왜 댕기가 없소?”
“기다리는 사내가 없으니까.”
“그대가 안 기다린다고 내가 안 오는 건 아니지.”
드르륵.
빗장이 손가락 한 마디만큼 밀렸다.
연화는 놀라 다시 잠갔다.
맞은편 주막에서 그 소리를 들은 옥련의 얼굴이 굳었다.
이겸은 웃지 않았다.
대신 붉은 실끈 하나를 문 앞에 내려놓았다.“싫으면 버리시오.”
“필요 없소.”
“그럼 손대지도 마.”
그가 돌아섰다.
빗물이 처마 끝에서 쏟아졌다.
붉은 실끈이 흙탕물로 밀려가는 순간이었다.문이 벌컥 열렸다.
연화의 손이 튀어나와 실끈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맞은편 주막 문도 열렸다.
옥련이 서 있었다.
두 여자의 눈이 마주쳤다.
연화는 황급히 변명했다.
“떠내려갈까 봐 주운 것뿐이오.”옥련이 천천히 웃었다.
“그럼 버려.”
연화의 손이 멎었다.
“왜.”
옥련의 웃음이 사라졌다.
“못 버리겠어?”
연화가 손을 펴려 했다.
그러나 붉은 실은 이미 검지에 두 번 감겨 있었다.
옥련이 그것을 내려다보다 낮게 말했다.
“이제 알겠네.”
“뭘.”
“저 사내가 오늘 밤 내 방에 들어왔는데.”
옥련의 눈이 연화에게 박혔다.
“미친년처럼 밤새 떨고 있던 건 너였구나.”
“내가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야.”연화의 말이 끝나자 한재문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무슨 뜻이야?”연화는 눈물을 닦았다.“당신이 내 남편이었어.”한재문의 눈이 붉어졌다.“그래.”“그런데 나는 당신을 죽였다고 믿었어.”“네가 나를 죽인 게 아니야.”“알아.”연화가 고개를 들었다.“이제 전부 기억났어.”십 년 전.강민석은 연화에게 거짓말을 했다.한재문이 하린을 데리고 도망쳤다고.강도윤을 죽인 사람도 한재문이라고.연화는 그 말을 믿고 한재문을 찾아갔다.하지만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강민석이었다.강민석은 한재문을 죽였다고 거짓말했고, 연화에게 칼을 쥐여줬다.그러나 한재문은 살아 있었다.연화가 칼을 떨어뜨리는 순간 강도윤이 나타났고, 강민석과 몸싸움이 벌어졌다.그 과정에서 강도윤이 쓰러졌다.그리고 강민석은 도망쳤다.연화가 아버지를 붙잡고 울었다.그때 강도윤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 있었다.‘재문이를 믿어.’연화는 고개를 저었다.“그 말을 듣고도 나는 믿지 않았어.”한재문이 조용히 물었다.“왜?”“내가 너무 많은 거짓말을 들었으니까.”연화가 그를 바라봤다.“그래서 내가 직접 내 기억을 지워달라고 했어.”“그래.”“당신에게.”한재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나는 당신을 사랑했으니까.”연화의 목소리가 떨렸다.“그런데 당신을 믿는 순간 다시 모든 걸 잊어야 했어.”한재문이 다가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연화가 먼저 그의 손을 잡았다.“이번에는 기억하고 싶어.”“연화야.”“내가 당신을 사랑했던 것도.”그녀가 하린을 바라봤다.“우리 딸을 낳았던 것도.”그리고 강민석을 바라봤다.“나를 속였던 사람도.”강민석은 고개를 숙였다.“미안하다.”연화가 차갑게 말했다.“그 말로 끝날 일이 아니야.”“알아.”“내 아이를 이용했고, 내 기억을 망가뜨렸어.”“알아.”“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사람까지 죽이려고 했어.”강민석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그래.”연화는 경찰에게 휴대전화와 서류를 건
“하린의 아버지는…”연화의 목소리가 떨렸다.“당신이야.”강민석의 얼굴이 굳었다.한재문도 움직이지 않았다.태윤만 입꼬리를 올렸다.“드디어 기억났네.”강민석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야.”연화가 다가갔다.“내가 기억했어.”“연화야.”“하린이 태어나던 날 당신이 내 옆에 있었어.”“그건…”“내가 당신 손을 잡았고, 당신이 내 배를 만졌어.”강민석의 얼굴이 창백해졌다.연화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그리고 내가 말했어.”그녀가 자신의 기억을 되짚었다.“우리 아이 이름은 하린으로 하자고.”강민석은 눈을 감았다.“그래.”그 한마디에 연화가 숨을 삼켰다.“인정하는 거야?”“하린은 내 딸이야.”한재문이 주먹을 움켜쥐었다.“그런데 왜 지금까지 숨겼어?”강민석은 대답하지 않았다.연화가 소리쳤다.“왜!”“네 아버지가 막았어.”“강도윤이?”“그래.”강민석은 천천히 말했다.“그 사람은 하린이 내 딸이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너까지 위험해진다고 했어.”“그래서 나를 속였어?”“너를 살리고 싶었어.”연화가 헛웃음을 흘렸다.“또 살린다는 말.”“이번에는 진짜야.”“그럼 왜 내 기억까지 없앴어?”강민석의 얼굴이 무너졌다.“내가 부탁했어.”연화가 멈췄다.“누구에게?”강민석이 한재문을 바라봤다.“한재문에게.”연화의 눈이 커졌다.한재문은 고개를 숙였다.“맞아.”“둘이 짜고 내 기억을 지웠어?”“그래.”연화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러다 조용히 물었다.“내가 뭘 기억하면 안 됐는데?”강민석은 대답하지 않았다.태윤이 대신 말했다.“하린의 출생보다 더 큰 비밀.”연화가 그를 노려봤다.“뭔데?”“네가 하린을 낳기 전에 이미 한 번 아이를 잃었다는 것.”연화의 얼굴이 굳었다.“뭐?”“그리고 그 아이를 죽인 사람이…”태윤이 강민석을 바라봤다.“바로 강민석이야.”연화가 강민석을 바라봤다.“거짓말.”“연화야.”“거짓말이라고!”강민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태윤이 웃었다.“십
“네가 나를 죽이기 위해 낳은 아이였어.”연화는 태윤을 바라봤다.“그게 무슨 개소리야?”태윤은 피가 묻은 입술로 웃었다.“말 그대로야.”“아이를 낳아서 사람을 죽인다고?”연화가 이를 악물었다.“헛소리하지 마.”“그럼 기억해 봐.”태윤이 바닥에 떨어진 사진을 가리켰다.“하린이 태어나기 전날, 네가 나한테 했던 말.”연화의 눈앞이 흐려졌다.병원.비 내리는 창문.그리고 자신의 목소리.‘아이만 태어나면 끝낼 거야.’연화가 관자놀이를 움켜쥐었다.“아…”한재문이 다가왔다.“연화야, 듣지 마.”“왜?”“태윤이 일부러 네 기억을 자극하는 거야.”연화가 그를 밀어냈다.“이번엔 아무도 나 대신 판단하지 마.”태윤이 웃었다.“맞아. 네가 직접 들어야지.”그가 휴대전화 하나를 꺼냈다.“하린이 태어난 날 녹음이야.”재생 버튼이 눌렸다.젊은 연화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태윤아. 하린이 태어나면 네가 데려가.’연화의 얼굴이 굳었다.‘그리고 내가 너를 죽이려고 하면 도망치지 마.’한재문의 표정이 변했다.녹음 속 태윤이 물었다.‘왜 나를 죽이려고 하는데?’잠시 침묵.그리고 연화의 목소리가 들렸다.‘네가 우리 아버지를 죽였으니까.’연화의 눈이 커졌다.태윤이 녹음을 멈췄다.“이제 이해돼?”“아니.”연화가 고개를 저었다.“아버지를 죽인 건 네가 맞아.”“그래.”“그런데 왜 내가 하린을 낳고 너를 죽이려고 했어?”태윤은 한참 연화를 바라봤다.“하린이 내 약점이었으니까.”연화의 표정이 굳었다.“뭐?”“네 아버지는 내가 너를 이용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무슨 이용?”“돈.”태윤이 말했다.“강도윤은 내가 네 재산을 빼앗으려고 접근했다고 생각했어.”연화가 숨을 삼켰다.“그래서?”“내가 하린을 데리고 도망가려고 하자 네 아버지가 막았어.”한재문이 끼어들었다.“그건 사실이 아니야.”태윤이 한재문을 노려봤다.“네가 뭘 알아?”“강도윤은 하린을 이용한 적 없어.”“그럼 네가 왜 출생기록을
“이번에는 내가 직접 연화를 데리러 갈게.”전화가 끊겼다.강민석의 손이 떨렸다.연화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이름.”“…….”“방금 전화한 사람 이름 말해.”강민석은 대답하지 못했다.연화가 휴대전화를 빼앗았다.통화기록에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 하나만 남아 있었다.그때 한재문이 말했다.“민석아.”강민석이 고개를 들었다.“네 동생 이름이 뭐였지?”“강태윤.”연화가 그 이름을 되뇌었다.“강태윤.”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었다.그 순간 머릿속을 찌르는 듯한 기억 하나가 스쳤다.어두운 창고.자신을 붙잡은 남자.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강태윤이라고 불러.’연화가 눈을 감았다.“나 이 사람 알아.”강민석의 얼굴이 굳었다.“뭐?”“십 년 전에 봤어.”연화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그 사람이 내 앞에서 아버지를 죽였어.”한재문이 숨을 삼켰다.“연화야.”“그리고 나한테 칼을 줬어.”강민석이 말했다.“그럴 리 없어.”“왜?”“태윤은 칼을 쓸 줄 몰랐어.”연화가 그를 바라봤다.“그럼 내가 본 사람은 누구야?”강민석은 대답하지 못했다.윤재혁이 낡은 서류를 펼쳤다.“이제야 맞춰지네.”연화가 서류를 받아 들었다.사망진단서였다.사망자 이름은 강태윤.사망일은 십 년 전.그런데 사망진단서의 지문 확인란에는 아무 기록도 없었다.연화가 눈을 좁혔다.“지문이 없네.”윤재혁이 말했다.“시체가 없었으니까.”강민석이 고개를 숙였다.연화가 그를 바라봤다.“처음부터 알고 있었어?”“태윤이 살아 있다는 건 몰랐어.”“그런데 왜 시체도 없이 죽었다고 신고했어?”강민석이 대답했다.“아버지가 시켰어.”“강도윤?”“그래.”연화는 한숨을 내쉬었다.“도대체 우리 아버지는 왜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그때 한재문이 말했다.“강도윤은 사람을 숨긴 게 아니야.”연화가 돌아봤다.“그럼?”“신분을 숨긴 거야.”한재문이 서류를 가리켰다.“강태윤이라는 이름 자체가 가짜였어.”연화가 굳었다.“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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