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원수의 목숨은 내 것

내원수의 목숨은 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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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sammenfassung

계약연애

정략결혼

복수물

능력녀

왕세자/왕세자 남주

황제

왕족/귀족

궁중 암투

금단의 관계/금단의 사랑

칠 년 전 역모로 멸문한 설씨 가문의 생존자 설연은 원수로 알려진 대군 무강을 암살하려 한다. 그러나 칼을 겨눈 밤, 또 다른 살수들이 그녀를 노리고 아직 살아 있는 무강을 죽였다는 사형 문서까지 발견된다. 무강은 설연을 구하려다 그녀의 독에 중독되고, 정보 길드장 백현과 의원 아란이 두 사람의 탈출을 돕는다. 탈출로 끝에서는 황제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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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pitel 1

1화. 원수의 잠버릇

칠 년 전, 설연의 집에 군사들이 들이닥쳤다.

가족은 반역자라는 죄명을 쓰고 죽었다.

혼자 살아남은 설연에게는 복수할 사람이 있었다.

대군 무강. 황제의 동생이자, 가족을 죽이라는 명령에 서명한 남자였다.

그날 이후 설연은 이름을 숨기고 살았다. 남의 목숨을 빼앗는 일을 하며 칼을 배웠다. 밤마다 죽은 가족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울다가도 칼을 쥐었다. 언젠가는 무강 앞에 서야 했다.

그리고 오늘 밤, 그 기회가 왔다.

정보를 사고파는 친구 백현이 대군 저택의 경비가 바뀌는 시간을 알아냈다. 낮에는 호위들이 무강 곁을 지켰다. 혼자 잠드는 침실이 그에게 접근할 유일한 틈이었다.

“창문 아래서 기다릴게. 일이 틀어지면 바로 나와.”

담을 넘기 전 백현이 속삭였다. 설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호위들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침실 창문을 넘었다. 침상에는 무강이 누워 있었다. 설연은 소리 없이 다가가 칼을 꺼냈다.

이 남자를 죽이면 끝난다.

그런데 칼끝이 목에 닿기도 전에 무강이 눈을 떴다. 설연은 숨을 멈췄다. 그가 소리를 지르면 호위들이 몰려올 터였다.

무강은 오히려 희미하게 웃었다.

“살아 있었구나.”

“날 알아?”

무강은 그녀의 복면 위로 드러난 흉터를 보았다. 눈썹 끝에 남은 작은 자국이었다.

“알아.”

“그럼 왜 사람을 안 불러?”

“네가 도망갈 테니까.”

설연은 칼끝을 그의 목에 댔다. 그 말투가 더 화났다.

“내 가족을 죽이라고 명령했지?”

“내가 서명했다.”

“아이들까지 죽이라는 명령에?”

무강의 턱이 굳었다. 그는 이번에도 부인하지 않았다.

“그랬다.”

칼끝 아래로 피 한 방울이 맺혔다. 설연은 이를 악물었다. 변명이라도 하면 더 쉽게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무강은 피가 나는데도 그녀만 보았다.

“그럼 살려 달라고도 하지 마.”

그 순간 무강이 그녀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

“숙여!”

그의 팔이 설연의 허리를 감아 끌어당겼다. 몸이 기울면서 그녀의 칼이 그의 쇄골을 길게 그었다. 거의 동시에 화살이 베개에 박혔다.

조금 전까지 설연의 머리가 있던 자리였다.

무강은 그녀와 함께 침상 아래로 굴렀다. 그의 손이 설연의 뒤통수를 받쳐 바닥에 부딪치지 않게 했다.

죽이러 온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놔!”

설연이 밀어내자 무강은 바로 팔을 풀었다. 대신 등잔을 걷어차 방을 어둡게 만들었다. 열린 창으로 검은 옷의 사내 둘이 들어왔다.

첫 사내의 칼이 설연을 향했다. 그녀는 몸을 낮춰 발목을 찌르고 달려드는 몸을 넘어뜨렸다. 짧은 몸싸움 끝에 사내가 움직이지 않았다. 무강에게 붙잡힌 다른 사내도 숨겨 둔 독을 깨물고 쓰러졌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설연은 곧장 무강에게 칼을 돌렸다.

“당신이 부른 놈들이야?”

“그랬다면 내 몸으로 네 앞을 막을 이유가 없겠지.”

무강의 옷깃이 피에 젖고 있었다. 설연의 눈이 자꾸 상처로 갔다. 자기가 낸 상처인데, 기쁘지가 않았다.

복도에서 호위들이 달려왔다. 그녀가 창문 쪽으로 물러서자 무강이 먼저 명령했다.

“아무도 들어오지 마라. 내가 부를 때까지 기다려.”

발소리가 멎었다.

설연이 낮게 물었다.

“왜 나를 숨겨 줘?”

무강은 죽은 사내의 소매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죽일 사람의 특징과 대금이 적혀 있었다.

스물셋인 여자. 왼손 손바닥에 화상. 선금 은 삼백 냥.

설연은 흉터가 있는 손을 움켜쥐었다. 마지막 줄은 더 분명했다. 대군의 침실에 들어온 뒤 죽일 것.

오늘 밤 무강을 노린 것은 자신이었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창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설연. 살아 있으면 손 좀 줘.”

백현이었다. 담에 매달린 그가 한쪽 팔을 뻗었다.

“복수하는 데까진 도왔는데, 담 때문에 죽으면 억울하잖아.”

설연이 그를 끌어 올렸다. 백현은 시신을 보고 웃음을 거두었다.

“우리 쪽에서 네가 올 길이 샌 것 같아. 연락책도 죽었어.”

그가 붉은 봉투를 내밀었다. 죽은 연락책의 몸속에 숨겨져 있던 문서라고 했다. 설연이 펼치자 자신의 이름이 나왔다.

내일 새벽, 북문 형장에서 설연을 처형한다.

죄목은 대군 무강을 죽인 죄였다.

설연은 살아 있는 무강을 보았다. 아직 저지르지도 않은 죄로 처형 날짜가 정해져 있었다.

무강이 그녀의 칼끝을 천천히 밀어 내렸다.

“지금 나를 죽이면 저들의 뜻대로 된다.”

설연의 손이 멈췄다. 그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

“내가 살아 있어야 네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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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원수의 잠버릇
칠 년 전, 설연의 집에 군사들이 들이닥쳤다. 가족은 반역자라는 죄명을 쓰고 죽었다. 혼자 살아남은 설연에게는 복수할 사람이 있었다.대군 무강. 황제의 동생이자, 가족을 죽이라는 명령에 서명한 남자였다.그날 이후 설연은 이름을 숨기고 살았다. 남의 목숨을 빼앗는 일을 하며 칼을 배웠다. 밤마다 죽은 가족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울다가도 칼을 쥐었다. 언젠가는 무강 앞에 서야 했다.그리고 오늘 밤, 그 기회가 왔다.정보를 사고파는 친구 백현이 대군 저택의 경비가 바뀌는 시간을 알아냈다. 낮에는 호위들이 무강 곁을 지켰다. 혼자 잠드는 침실이 그에게 접근할 유일한 틈이었다.“창문 아래서 기다릴게. 일이 틀어지면 바로 나와.”담을 넘기 전 백현이 속삭였다. 설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호위들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침실 창문을 넘었다. 침상에는 무강이 누워 있었다. 설연은 소리 없이 다가가 칼을 꺼냈다.이 남자를 죽이면 끝난다.그런데 칼끝이 목에 닿기도 전에 무강이 눈을 떴다. 설연은 숨을 멈췄다. 그가 소리를 지르면 호위들이 몰려올 터였다.무강은 오히려 희미하게 웃었다.“살아 있었구나.”“날 알아?”무강은 그녀의 복면 위로 드러난 흉터를 보았다. 눈썹 끝에 남은 작은 자국이었다.“알아.”“그럼 왜 사람을 안 불러?”“네가 도망갈 테니까.”설연은 칼끝을 그의 목에 댔다. 그 말투가 더 화났다.“내 가족을 죽이라고 명령했지?”“내가 서명했다.”“아이들까지 죽이라는 명령에?”무강의 턱이 굳었다. 그는 이번에도 부인하지 않았다.“그랬다.”칼끝 아래로 피 한 방울이 맺혔다. 설연은 이를 악물었다. 변명이라도 하면 더 쉽게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무강은 피가 나는데도 그녀만 보았다.“그럼 살려 달라고도 하지 마.”그 순간 무강이 그녀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숙여!”그의 팔이 설연의 허리를 감아 끌어당겼다. 몸이 기울면서 그녀의 칼이 그의 쇄골을 길게 그었다. 거의 동시에 화살이 베개에 박혔다.조금 전까지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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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살아 있는 시신
“그럼 죽지 마.”설연은 무강의 목에서 칼을 뗐다.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죽으면 자신에게 살인죄를 씌우려는 자가 웃게 된다. 그 꼴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다.무강이 처형 문서를 받아 들었다.“황제의 도장이 없다. 아직 정식 명령은 아니군.”“당신이 죽으면 찍으려고 비워 놨겠지.”“처형을 맡을 사람 이름은 있다. 한치수. 이 자에게 물어야겠다.”백현이 두 사람 사이를 보다가 문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물어보는 건 나중에. 궁에서 보낸 조사관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어.”설연은 문서를 접어 품에 넣었다. 칼을 쥐고 그의 곁에 있다 붙잡히면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밖으로 나가야 했다. 무강이 살아 있다는 증거도 필요했다.“당신 호위에게 범인을 찾아 달라고 하면 안 돼?”“네가 여기 있다는 걸 적에게 알릴 수 있다.”무강이 열린 창을 보았다.“나를 지킨다는 사람 중에도, 저 길을 알려 준 자가 있을지 모른다.”설연은 칼을 다시 쥐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백현뿐이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을 향한 화살을 막아 준 사람은 원수였다.백현이 죽은 사내의 허리띠에서 은빛 물건을 꺼냈다. 손바닥보다 작은 패에 꽃무늬가 새겨져 있었다.“귀비의 방에 드나들 때 보여 주는 출입패야.”“그 여자가 나를 죽이려고 했다고?”무강이 패를 받아 꽃무늬를 긁었다. 검은 때가 손톱에 묻었다.“새것에 때를 발라 오래 쓴 척했어. 귀비의 물건처럼 속였을 수도 있다.”누가 보냈는지 당장 알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이 물건을 만든 사람을 찾으면 한 걸음은 다가갈 수 있었다. 백현이 패를 보관하려고 천을 펼쳤다.그때 무강의 손에서 패가 떨어졌다.짤랑.설연이 돌아보는 순간 그의 무릎이 꺾였다. 그녀는 생각보다 먼저 팔을 뻗었다. 뜨거운 몸이 기대 왔다. 쇄골의 상처 가장자리가 검게 변해 있었다.백현이 설연의 칼을 보았다.“독을 발랐지?”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없어.”“준비가 철저했네. 하필 지금.”설연은 무강의 팔을 놓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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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두 번째 설연
설연은 제 얼굴을 한 여자에게 칼을 겨눴다.여자는 피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가까이 보니 턱 아래에서 얇은 가면의 끝이 들떠 있었다. 얼굴에 씌워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만든 물건이었다.“누구야?”“월희입니다. 제가 여기 남겠습니다.”설연은 무강을 돌아보았다. 그가 숨을 고르고 답했다.“네가 붙잡힐 때 대신 나설 사람이다. 너를 빼내려고 준비했다.”“대신 잡혀가면 내 죄도 이 사람이 받겠네.”무강이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호송하는 도중에 구할 생각이었다.”설연은 칼을 내렸다. 여자가 적이라서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자기 대신 죄인이 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그 계획이 실패하면?”설연은 무강의 굳은 얼굴을 보았다.“나 하나 살리려고 아무나 죽어도 된다고 생각해?”문이 크게 흔들렸다. 백현이 빗장을 눌렀다.“따질 말 많은 건 아는데, 문이 우리보다 성격이 급해.”바깥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최명석입니다. 문을 여십시오, 대군마마.”월희가 움찔했다. 설연은 그 반응을 보았다.“저 사람이 너를 데려왔어?”“네. 궁의 내관들을 거느리는 분이에요.”무강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맡긴 일이었다고 인정했다. 설연은 문과 침상 뒤의 통로를 번갈아 보았다.“우리가 숨을 길도 저 사람이 알겠네.”“알고 있다.”여기서 버티면 숨어도 잡힌다. 설연은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월희는 그 손을 보고 뒷걸음질했다.“전 남아야 해요. 대군께서 아버지 빚도 갚아 주셨고, 어머니 묏자리도 구해 주셨어요.”“그래서 네 목숨으로 갚아?”월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제가 달아나면 동생을 잡아간다고 했어요.”무강의 얼굴이 변했다.“누가 그런 말을 했지?”월희가 문을 보았다. 최명석이 다시 문을 두드렸다. 설연은 더 묻지 않고 여자의 턱 아래로 손을 가져갔다.“벗길게.”가짜 얼굴을 조심스럽게 떼어 냈다. 그 아래에는 두려워 입술을 깨물고 있는 어린 여자가 있었다. 설연은 가면을 화로에 던졌다.“이제 네 얼굴로 살아.”월희가 불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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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황제의 유예
“무릎이라면 제가 꿇겠습니다.”설연이 무강 옆으로 나섰다. 철문 너머의 황제가 웃음을 멈췄다. 무강의 손이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그러지 마.”손끝이 차가웠다. 독 때문에 몸을 가누지도 못하면서 자신을 막는 손이었다. 설연은 그 손을 떼어 제 어깨에 다시 걸쳤다.“앉을 자리부터 얻어야 하잖아.”봉인이 뜯기고 철문이 열렸다. 등불을 든 시위들 사이에 황제가 서 있었다. 그의 손에서 작은 은방울이 흔들렸다. 죽은 동생의 물건과 꼭 닮았다.설연이 손을 뻗으려 하자 황제가 방울을 감췄다.“갖고 싶으냐?”그녀는 대답을 삼켰다. 같은 물건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눈앞에서 죽어 가는 사람부터 살려야 했다.아란이 황제 앞에 고개를 숙였다.“환자를 앉히겠습니다.”허락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손은 무강의 맥을 짚었다. 황제가 비켜서자 아란은 물가의 돌턱을 가리켰다. 설연과 백현이 무강을 내려놓았다.황제의 눈이 설연의 피 묻은 손에 멎었다.“네가 내 아우를 찔렀느냐?”무강이 입을 열려고 했다. 설연이 먼저 처형 문서를 꺼냈다.“이것부터 봐 주십시오.”“변명인가?”“누군가는 제가 대군을 죽이기도 전에 저를 처형할 준비를 했습니다.”황제가 종이를 펼쳤다. 설연은 그의 얼굴을 살폈다. 자기 동생이 죽었다는 글을 읽고도 놀라지 않았다.“역적의 딸이 황족을 죽였다. 믿기 쉬운 이야기로구나.”“아직 살아 있습니다.”설연이 무강의 어깨를 붙잡았다. 손바닥 아래에서 느린 숨이 오갔다. 그 숨이 끊기면 저 거짓말을 막기도 더 어려워질 것이다.무강이 황제를 보았다.“제 이름으로 조사하겠습니다.”“네 집에서 일어난 일을 네가 조사하겠다? 네게 유리한 말만 남길 수도 있겠지.”황제가 설연에게 종이를 돌려주었다.“네가 찾아라. 이 문서를 만든 자를.”설연은 받기 전에 물었다.“제가 도망가면요?”“무강에게 죄를 묻겠다. 너를 감춘 것도 저 아이니까.”“대군이 저를 죽이면요?”“자기 비밀을 덮으려 했다고 보겠다.”설연은 무강을 보았다. 황제의 뜻은 분명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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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죽이지 못하는 손
“그 명은 받지 않겠습니다.”설연은 무강을 놓지 않은 채 황제를 보았다. 죽이러 온 남자를 죽이라는 말인데, 다른 사람의 명령으로 듣자 견딜 수 없었다.황제는 고개를 기울였다.“복수할 기회를 주는데 싫으냐?”“제 원한입니다. 남이 날짜를 정할 일은 아닙니다.”황제가 웃었다.“그럼 이레 안에 찾아라. 실패하지 않으면 될 일 아니냐.”조건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설연은 더 따질 말을 삼켰다. 무강이 기대 오는 무게가 점점 늘고 있었다. 지금 시간을 잃으면 그를 살릴 기회도 잃는다.계단을 오르자마자 그의 몸이 기울었다. 백현이 반대편 팔을 붙잡고 가까운 별채를 가리켰다. 아란이 먼저 문을 열어 침상을 확인했다.“눕혀. 그리고 내 약방에서 약 좀 가져와 줘.”아란이 필요한 약봉투를 적어 시녀에게 주었다. 백현은 누가 약을 바꾸지 못하도록 함께 따라갔다. 치료는 황제가 허락한 일이었다. 막아서는 사람은 없었다.설연은 침상에 몸을 굽혔다. 무강의 팔을 내려놓으려는데 그의 손이 소매에 걸렸다. 붙잡는 힘조차 없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하나씩 펴 주었다.“안 가. 지금은.”말하고 나서 스스로 놀랐다. 그가 묻지도 않은 대답이었다.아란이 옷깃을 열었다. 설연의 칼자국 아래로 오래된 화상 흉터가 보였다. 옆구리에서 등까지 이어지는 큰 상처였다. 설연이 더 보려는 순간 아란의 손이 가렸다.“등불을 이쪽으로.”설연이 불을 가까이 가져갔다.“죽어?”“아직 안 죽었어. 그러니 도와.”아란이 무강의 팔을 잡아 달라고 했다. 설연이 맥 뛰는 자리를 눌렀다. 그 작은 움직임을 느끼려고 손끝에 정신을 모았다.무강이 갑자기 몸을 뒤척였다.“문을…… 열어.”그의 눈은 감겨 있었다. 약을 데우는 숯 냄새가 불타던 집의 기억을 끌어냈다. 무강에게는 문 앞에 누군가 서 있는 것 같았다. 밖으로 나가야 했다. 팔 안의 사람을 살려야 했다.그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설연이 어깨를 눌렀다.“열었어.”아란이 창문을 밀었다. 찬바람이 들어왔다. 설연은 무강의 이마에 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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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죽은 아이의 값
월희의 손에서 은전이 떨어졌다.“아니에요. 아침에는 멀쩡했어요.”문지기는 몸을 돌려 문을 닫으려 했다. 설연이 문틈에 손을 넣었다. 나무 모서리가 손바닥의 흉터를 눌렀지만 빼지 않았다.“시신은 어디 있지?”“병으로 죽은 노비는 가족에게 안 돌려주오.”“무슨 병이었는데.”“장부에 적힌 대로 말하는 거요.”백현이 그의 어깨 너머로 장부를 보았다.“누가 죽었다고 확인했는지만 보여 줘. 의원 이름은 있겠지.”문지기가 짜증스럽게 종이를 돌렸다. 도윤의 이름 옆에는 열병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시신을 살핀 의원 이름이 비어 있었다. 대신 ‘일괄 처리’라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백현의 표정이 굳었다.“광산에 사람을 팔아넘길 때 본 도장이야. 죽었다고 적으면 가족이 찾으러 와도 돌려보낼 수 있거든.”월희가 종이를 붙잡았다.“그럼 아직 살아 있을 수도 있어요?”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직접 보기 전에는 안 돌아가.”문지기가 문을 세게 밀었다. 설연은 힘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 그의 팔을 비틀었다. 백현이 고함을 막았다.“사람 실은 수레, 어디 있어?”남자의 눈이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담 너머에서 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났다. 설연은 곧장 뒷마당으로 달렸다.삼베를 덮은 수레가 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시신을 묻는 곳은 서쪽인데 수레는 북쪽으로 향했다. 마부 옆에 앉은 호송병이 그녀를 보고 칼자루를 잡았다.백현이 뒤따라 나오며 월희에게 문을 지키라고 했다. 그리고 길가의 장대를 집어 던졌다. 설연은 그것을 받아 바퀴살 사이로 밀어 넣었다. 수레가 크게 기울며 멈췄다.호송병이 뛰어내렸다. 설연은 칼이 내려오기 전에 팔꿈치를 쳤다. 떨어지는 칼을 멀리 차고, 상대의 무릎 뒤를 걷어찼다. 백현이 마부를 끌어내려 붙잡는 동안 그녀는 삼베를 걷었다.큰 포대가 네 개 있었다.그중 하나가 움직였다.설연은 칼을 넣으려다 멈췄다. 안의 사람이 다칠 수 있었다. 대신 묶은 끈을 자르고 포대 입구를 벌렸다. 입을 천으로 막은 소년이 숨을 쉬려 몸을 비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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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은패를 만드는 아이들
“해 뜨기 전에 누구를 죽인다고?”백현이 은패를 감추고 도윤 앞에 앉았다. 아이는 대답 대신 누나를 찾았다. 월희가 돌아와 손을 잡아 주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저거 만든 사람들요. 저도 거기서 일했어요.”도윤이 쇳가루 묻은 손을 보여 주었다. 손가락 곳곳에 상처가 있었다. 설연은 그의 손을 억지로 펴지 않고 자기 손바닥을 먼저 폈다. 오래된 화상 자국이 보였다.“다친 데는 의원이 봐 줄 거야. 일한 곳만 알려 줄래?”“종루 뒤의 청록방이요.”금속 물건을 만드는 공방이었다. 도윤은 그곳에서 은패의 거친 모서리를 갈았다고 했다. 진짜 하나를 보고 같은 모양으로 열두 개를 만들었다.백현이 다시 패를 보여 주었다.“이것도 그중 하나야?”도윤이 옆면의 작은 흠집 세 개를 가리켰다.“제가 쓴 줄이 깨져 있어서 저렇게 남았어요.”설연은 꽃무늬보다 그 흠집을 오래 보았다. 자신을 죽이러 온 사내가, 이 아이가 만든 물건을 갖고 있었다. 공방으로 가면 사내에게 패를 준 사람도 찾을 수 있을지 몰랐다.“죽이라는 말은 누가 했어?”도윤의 목이 움츠러들었다.“오늘 온 사람이요. 얼굴은 못 봤어요. 작업 끝났으니 손에 모란 묻은 것들을 없애라고…….”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설연은 더 묻지 않았다. 아직 공방에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구해야 했다.백현은 월희에게 갈 곳을 알려 주었다. 동쪽 염색집, 흰 천 두 장이 걸린 문이었다.“대군부로 가면 안 돼요?”월희가 물었다.“거기는 오늘 너무 많은 사람이 보고 있어. 내 유모 댁으로 가.”“숨겨 주실까요?”“내가 어릴 때 숨어도 늘 찾아내셨지. 찾는 일을 잘하면 숨기는 일도 잘할 거야.”월희의 굳은 얼굴이 조금 풀렸다. 백현은 네 사람을 수레에 태워 보냈다. 도윤은 누나 옷자락을 끝까지 쥐고 있었다.설연은 수레가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 보았다. 자신에게는 구하지 못한 동생이 있었다. 오늘 다른 누나의 동생을 구했다고 그 빈자리가 채워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저 수레가 빈 채 떠나지 않아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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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귀비의 물건
설연은 문고리를 붙잡고 멈췄다. 문이 조금만 더 열리면 실에 매달린 등잔이 떨어진다. 바닥의 기름에 불이 붙으면 묶인 노인은 달아날 수 없었다.“내가 잡고 있을게. 등잔부터 꺼.”백현이 옆창을 밀었다. 잠겨 있었다. 그는 약한 창살 하나를 부러뜨리고 몸을 밀어 넣었다. 옷이 못에 걸려 찢어졌지만 돌아보지 않았다.백현이 등잔을 받친 뒤 심지를 껐다.“됐어.”설연이 문을 놓았다. 실이 풀리며 빈 고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소리가 멎을 때까지 문고리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불이 붙지도 않았는데 손바닥의 옛 흉터가 아픈 것 같았다.백현이 그녀를 보았다.“나 여기 있어. 불도 껐어.”설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들어갔다. 조금 전 무강도 문을 열어 달라며 몸을 떨었다. 자신처럼 불을 기억하는 사람일까. 궁금해하던 생각은 노인의 다급한 소리에 끊겼다.“뒷방에 사람이 있소!”설연이 돌아섰다. 문 뒤에 숨었던 사내가 뒷문으로 달아났다. 그녀는 작업대의 집게를 집어 던졌다. 집게가 빗장에 걸려 문을 막자 사내가 몸을 돌려 칼을 휘둘렀다.설연은 팔목을 밀어 칼끝을 기둥 쪽으로 돌렸다. 이어 명치를 차고 바닥에 넘어뜨렸다. 백현이 노인을 묶었던 밧줄을 가져와 사내의 팔을 잡았다.그의 허리띠 안쪽에 모란꽃이 수놓여 있었다. 살수의 은패와 같은 꽃이었다.노인이 손목을 문지르며 말했다.“장석입니다. 귀비마마를 모시는 내관이오.”“입 닫아!”장석이 소리쳤다. 설연은 칼부터 멀리 치웠다.“패를 만들라고 한 사람도 이자야?”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석은 돈을 빼돌린 장인을 벌하려던 것뿐이라고 우겼다.“그 벌이 산 채로 태우는 거야?”설연이 바닥의 기름을 가리켰다. 장석이 입을 다물었다. 백현이 노인의 의자를 불붙을 자리에서 멀리 옮겼다.“설명은 앉아서 하세요. 오늘 서 있을 사람은 충분히 많습니다.”노인이 겨우 숨을 골랐다. 설연은 은패를 보여 주었다.“열두 개 만들었지? 모서리를 갈던 아이가 알려 줬어.”노인의 눈이 커졌다.“그 애들이 살아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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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귀비의 서명
“훔친 쪽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중입니다.”설연은 귀비에게서 눈을 피하지 않았다. 상대가 높은 자리에 있다는 이유로 이 종이를 넘기면, 자신과 무강을 노린 사람에게 가는 길도 끊긴다.귀비가 수레 발판에 발을 디뎠다. 곁에는 절에 올릴 향 상자가 묶여 있었다.“공방에 불이 났다기에 오던 길을 돌렸더니 도둑이 있었구나.”백현이 꺼진 등잔을 보았다. 불은 아직 나지도 않았다. 누군가 불이 날 것을 미리 알고 귀비에게 전갈을 보낸 셈이었다.설연은 황제가 준 검은 패를 꺼냈다.“대군을 습격한 자가 이 출입패를 갖고 있었습니다. 황명으로 출처를 찾고 있습니다.”상궁이 패 뒷면을 읽고 귀비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귀비는 물러서지 않았다.“장부를 보라는 허락으로 내 사람을 묶었느냐?”“저를 칼로 찌르려 해서 막았습니다. 관청 사람이 오면 넘기겠습니다.”설연은 주문서를 펼쳤다. 귀비가 가져가려 손을 내밀자 한 걸음 물러섰다.“읽으십시오.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백현이 헛기침했다. 웃음을 참는 소리였다. 귀비의 시선이 잠깐 그에게 갔다가 종이로 돌아왔다.“낡은 패 두 개를 바꾸라 했을 뿐이다.”“여기에는 열두 개 값을 치렀다고 적혀 있습니다.”백현이 다른 종이를 들었다. 귀비가 장석을 보았다.“열 개는 어디 있지?”장석이 입을 열었다 닫았다. 귀비는 그제야 설연을 다시 보았다. 자기 명령으로 꾸민 일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얼굴이었다.설연이 말했다.“모르셨다면 그렇게 적어 주십시오. 주문한 것은 두 개라고.”“네가 내게 서명을 요구하느냐?”“패를 보냈다는 오해를 풀 기회이기도 합니다.”백현이 말을 받았다.“물론 저희가 잘못 보았다면, 열두 개 모두 마마의 물건이라고 적어도 됩니다.”귀비가 부채를 접었다. 장석이 다급히 무릎으로 기어 나왔다.“마마, 소인은 시키신 대로—”“내가 열두 개를 시켰느냐?”장석의 입이 닫혔다. 귀비는 상궁에게 붓을 가져오게 했다. 자기가 주문한 것은 둘이며, 추가 제작과 반출은 허락한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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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죽은 이름의 행방
설연은 무강의 집사가 가져갔다는 줄을 다시 읽었다. 구겨질 만큼 종이를 쥔 뒤에야 힘을 풀었다.“무강이 시켰대?”심부름꾼이 고개를 저었다.“그건 못 들었어요. 집사가 장부를 받아 가는 것만 봤어요.”확인한 것은 거기까지였다. 설연은 더 짐작하지 않고 돌아섰다. 백현도 함께 대군부로 향했다. 올 때는 그가 살아 있기를 바랐는데, 돌아가는 길에는 살아 있어야 따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어느 쪽이 진짜 마음인지 알 수 없었다.별채 문을 열자 아란이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조금 전에 잠들었어.”무강은 침상에 누워 있었다. 목의 붕대는 새것이었다. 설연은 가까이 가서 가슴이 오르내리는 것을 확인했다. 안도한 것이 들킬까 봐 종이를 침상 곁에 내려놓았다.“물어볼 게 있어.”아란이 종이를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숨이 가빠지면 멈춰. 그건 약속해.”설연이 대답하기 전에 무강이 눈을 떴다. 제 앞에 선 여자를 보자 굳었던 눈가가 풀렸다.“돌아왔군.”설연은 그 말이 반가워서 더 화가 났다.“아이들은 살았어. 넷 모두.”“다행이다.”“이제 내가 물을게. 칠 년 전 장부는 왜 가져왔어?”무강이 종이를 읽었다. 한 번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들었다.“내가 가져오라고 했다.”“없애려고?”그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 설연은 물러서지 않았다.“내가 찾는 기록을 왜 당신이 먼저 봐?”무강이 탁자 위의 꾸러미를 가리켰다. 아란이 가져와 설연 앞에 놓았다. 없애 버린 종이가 아니라, 펼쳐 읽을 수 있는 장부였다.“최명석이 월희를 관노청에서 골랐다. 칠 년 전에도 그곳에서 사람을 빼돌렸는지 확인하고 싶었다.”“언제 시켰는데?”“내가 약 끓이러 간 사이에.”아란이 대신 답했다. 무강은 변명하지 않았다. 설연은 꾸러미의 끈을 풀었다. 날짜마다 들어온 사람과 나간 사람의 수가 적혀 있었다. 가족이 잡혀간 다음 날에도 글이 남아 있었다.무강이 손을 뻗자 설연이 종이를 당겼다.“또 숨기려고?”그의 손이 멎었다.“등불을 옮기려 했다. 글씨가 흐려서.”설연은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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