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새벽 버스에 몸을 실었다.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서울의 불빛들을, 나는 멍하니 바라봤다.이렇게 도망치듯 떠나는 게, 벌써 몇 번째인지.그런데 이번엔, 정말 마지막이어야 했다.우석이 해외에서 마음 편히 활동할 수 있도록, 나는 여기서— 그와 완전히 분리된 삶을 시작해야 했다.버스가 강원도에 가까워질수록, 이상하게 마음이 아려왔다.6년 전, 이곳에서 시작된 인연이었다.그런데 이제 그 인연을, 이곳에서 끝내려 하고 있었다.채사장이 알려준 사무실은, 예전 시설 근처의 작은 상가 건물이었다.버스에서 내려 걷는데, 휴대폰이 쉴 새 없이 울렸다.우석의 이름이 화면 가득 떴다.받을 수 없었다.받으면, 분명 마음이 흔들릴 거였다.나는 휴대폰을 가방 깊숙이 넣고, 발걸음을 재촉했다.사무실 앞에 도착해, 은퇴를 앞둔 변호사와 인사를 나눴다."이렇게 갑자기 오실 줄 몰랐네요. 채사장님한테 얘기는 들었습니다.""잘 부탁드립니다."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마음이 텅 빈 것 같았다.새로운 시작이라는 게, 이렇게 공허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계약서에 서명을 하려는데, 손이 떨렸다.
며칠 뒤, 우석이 결국 해외 촬영 제안을 수락했다는 소식을 들었다."6개월이라니, 너무 길잖아요.""그래서 안 가려고 했었어. 그런데—"우석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이번에 가면, 최대한 빨리 끝내고 돌아올게. 그리고 돌아오면— 진짜, 더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게 만들어줄게."그 말이 다정했지만, 동시에 마음 한구석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출국까지 남은 시간은 열흘.그 열흘 동안, 나는 계속 같은 생각에 시달렸다.내가 이 사람 곁에 있는 한, 이런 위기는 계속 반복될 거라는 생각.변호사 자격 문제도, 여론의 비난도, 결국 다 나 때문에 시작된 일이었다.우석이 해외로 떠나 있는 6개월 동안, 나는 계속 여기서— 이 모든 짐을 짊어진 채, 그의 발목을 잡는 존재로 남게 될 터였다.그러던 어느 날, 채사장을 찾아갔다."채사장님. 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뭔데.""혹시— 지방에 사무실 자리, 아는 데 있으세요?"채사장이 미간을 좁혔다."…뜬금없이 왜?""그냥. 서울이 너무 시끄러워서요. 조용한 데서, 새로 시작해보고 싶어서요."채사장이 한참 나를 바라보다가, 낮게 물었다.
기자회견은 예상보다 훨씬 크게 터졌다."차우석, 사실은 이성애자였다""남장 탐정과의 은밀한 사랑, 그 실체는""변호사 자격 논란까지... 파장 확산"기사 제목들을 보는 내내, 속이 울렁거렸다.기자회견장에서, 우석은 담담하게 모든 걸 밝혔다.내가 여자라는 것, 남장을 하고 탐정 일을 했던 이유, 그리고—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까지.정훈이 증인으로 나서서, 내가 얼마나 진심으로 사람들을 도왔는지 이야기해줬을 때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었다.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기자회견 이후, 여론은 반으로 갈렸다.응원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훨씬 크고 날카로운 비난이 쏟아졌다."신분 위장으로 변호사 행세? 사기 아니냐""배우 이미지로 다 덮으려는 거 아니냐""저런 여자를 왜 감싸주는지 이해 안 감"사무실에 출근하는 것도 점점 힘들어졌다.미선이 매일 아침,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맞았다."변호사님, 오늘도 댓글 안 보셨죠? 제가 미리 필터링해서, 진짜 심한 건 안 보여드리려고 했는데—""괜찮아요, 미선 씨. 봐야 할 건 봐야죠.""그래도 너무 억울해요. 변호사님이
기자회견 날짜가 사흘 뒤로 잡혔다는 소식에, 나는 며칠째 제대로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그런데 그날 저녁, 초인종이 울렸다.문을 여니 우석이 양손 가득 봉지를 들고 서 있었다."저녁 안 먹었지?""...어떻게 알았어요?""목소리 들으면 알아. 밥 굶고 걱정만 하고 있을 게 뻔하잖아."그가 성큼 들어와 부엌으로 향했다."오늘은 내가 해줄게. 앉아 있어.""저도 도울게요.""됐어. 넌 그냥 앉아서 나 보고 있어."능청스러운 말에, 나는 픽 웃으며 식탁 의자에 앉았다.도마질 소리가 경쾌하게 이어졌다."저, 기자회견 생각하면 자꾸 속이 안 좋아요.""그럴 만하지."우석이 파를 썰다 말고 돌아봤다."근데 내일모레까지 그 생각만 하고 있으면, 나만 손해야.""손해요?""응. 그동안 나랑 있을 시간이 아깝잖아.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거고, 지금은— 그냥 나랑 노는 데 집중해."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잠시 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된장찌개가 식탁에 올라왔다."우와, 진짜 잘하네요.""내가 요리 하나는
약속한 저녁, 우석의 차 안에서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시동을 끈 채로, 어둑해진 주차장 안에 정적이 흘렀다."소속사에서는 뭐라고 해요?"내가 먼저 물었다."두 가지 방법이 있대. 하나는 법적 대응하면서 시간을 버는 거, 다른 하나는— 정면돌파. 내가 직접 밝히는 거.""정면돌파요."그 단어를 되뇌는데, 손끝이 차가워졌다."그렇게 되면, 저도 다 드러나는 거잖아요. 남장했던 것, 정체, 전부.""…맞아."우석이 낮게 대답했다."그래서 나 혼자 결정 못 하겠더라고. 이건 너한테 훨씬 무거운 일이니까."나는 창밖을 바라봤다.법원 앞, 늦은 밤인데도 사람들이 오가는 게 보였다.저 사람들 중 누군가는, 곧 나에 대한 기사를 읽게 될지도 몰랐다."제가 여자라는 게 알려지면— 지금까지 남장하고 탐정 일 했던 것도, 다 문제가 될 거예요. 사기죄로 걸릴 수도 있고, 변호사 자격도— 흔들릴 수 있어요.""그건, 내가 어떻게든 최고의 변호인단을 붙여서라도 지켜줄게.""우석 씨."나는 그를 돌아봤다."이게, 변호사 붙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세상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볼지— 그게 문
평온한 나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 사무실로 낯선 전화가 걸려왔다."안녕하세요, 저는 '위클리스타'의 기자입니다. 송희우 변호사님 맞으시죠?"심장이 덜컥했다."…네, 맞는데요. 무슨 일이시죠?""다름이 아니라, 배우 차우석 씨와의 관계에 대해 취재 중인데요. 몇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숨이 막혔다."어떤— 어떤 걸 확인하고 싶으신 거죠?""차우석 씨가 1년 전, 성 소수자 열애설이 났었잖아요. 그런데 저희가 취재하다 보니, 그 상대가 사실 여성이라는 제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여성이— 변호사님이시라는 이야기도 함께요."나는 숨을 참았다."확인해주실 수 있으실까요?""…드릴 말씀 없습니다."나는 급히 전화를 끊었다.손이 떨렸다.누가 제보한 걸까.나문희일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일까.곧바로 우석에게 전화를 걸었다."우석 씨, 방금— 기자한테 전화가 왔어요.""…무슨 내용으로?""우리 관계, 그리고— 제가 여자라는 것까지, 다 알고 있는 눈치였어요."전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