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와의 결혼식날에 그녀의 표정이 어땠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에게 꽤나 충격이었다. 데미안은 자신은 분명 루시아 벨루아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고매한 백작가의 영애, 레이루나 아르테미스가 만든 최고의 상품, 원로회에서 사들인 사교계의 꽃. 하지만 그날, 그가 끌려 나가면서 바라본 에이든을 바라보는 루시아의 발그레한 뺨이, 수줍은 듯한 표정이 그에게 말해주었다. 더는 그녀의 곁에 혹은 마음 자리에 그의 거처는 없다고. 그 사실을 깨닫고는 더이상 그 자리에 더 머물 수가 없었다. 숨이 막혀왔다.***루시아는 그저 데미안 벨루아가 귀국했다는 소식만을 셀레나에게 전해들었다. 사실 에이든과 입을 맞추면서도 내내 그가 무슨 짓이라도 할까봐 마음 졸였었다. 하지만 다행인지 어쩐 일인지 그는 아무 일도 벌이지 않고 제국으로 돌아갔다. 더이상 그를 볼 일이 없었으면 했다. 사실 그보다 더는 에이든 이외의 사람을 생각할 공간이 그녀의 안에 남아있지 않았다. 데미안이 알아챘듯이.그는 입술을 떼어내고는 귓속말로 속삭였다."이따가 기대할게. 루시."뭘 기대하겠다는 건지. 결혼식이 끝나면 각자의 방에서 잠을 취하면 되는 게 아니었느냐고 붙잡고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에이든은 그 뒤로 요리조리 루시아만을 피해다니며 미묘한 웃음만 흘리고 다녔다. 곤란한 듯 또는 상기된 듯한 루시아의 뺨이 붉은 것이 그러니까 그녀의 머리속에 저만 가득한 것이 빤히 보이는 게 즐거워보였다. 셀레나는 어릴 적에는 그나마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던 놈이었는데 참 어른이 되더니 몹쓸 버릇만 늘었다고 생각했다."장난친거야. 루시아."셀레나는 뺨에 열꽃이라도 금세 피어오를 듯한 친구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진실을 말해주기로 했다."응?"항상 똑똑하면서 정작 이런 구석에서는 둔하다."에이든은 오늘 너하고 저녁 식사만 함께 할거야. 초야 일정같은 건 없다고 시녀장이 그랬어."있었다면 루시아는 지금쯤 이렇게 웨딩드레스를 벗고 편한 슬립 차림으로 갈아입고 앉아서 그녀와 차를 마실 시간도
데미안과 결혼했을 때 읽었던 맹세문과 달랐다. 그때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남편에게 순종하고, 후사를 위해 노력하며, 투기하지 않고 가장의 결정을 따르며 가정을 일구어 내는 안사람의 역할을 해내고 남편의 기쁨을 위해 종사할 것을 맹세합니다. 문장 하나 하나가 그녀의 의지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저 레이루나가 환하게 웃고 있어서 맹세문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 저가 또 하자품이라서, 규격외의 인간이라서 그런다고만 생각했다."루시?"어느새 그게 눈물로 고여있을 줄은 몰랐다. 루시아는 자신이 남편에게 그토록 바랐던 게 존중이었다는 걸 결혼식장에 들어와서야 처음으로 들어서 알았다. 그리고 그게 부부 사이에 가능하다는 것도 처음으로 알았다. 처음이 참으로 많은 날이었다.***에이든은 루시아의 결혼 멩세문을 직접 고쳤다. 순종이니 남편을 잘 따르니 하는 수동적인 이야기는 전부 도려내고, 그가 아는 루시아가 원할 것들을 적어나갔다. 그가 아는 그녀라면 '사랑'을 바랄 것이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사랑없는 결혼을 했으니까 말이다. 정작 그가 당연하다고 생각해 적은 존중, 그 기본 조건으로 루시의 마음이 충분했다는 것을 안 건 아주 나중의 일이었다.루시아는 조금 오래 울고, 맹세문을 천천히 읽어나갔다. 마주 잡은 에이든의 손이 따뜻했고, 전해오는 여전히 뜨거운 그의 체온으로 감정의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사랑하고 사랑할 것입니다."어느덧 식순이 거의 다 끝나가고에이든이 루시아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루시아는 장난꾸러기 디디에게 키스를 하는 게 별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오만을 다시 생각해야 했다.다정한 파란 눈이 의아한 빛을 띄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 안에 뜨거운 열정에 함부로 제 속을 들켰다가는 알 수 없지만 아주 큰 일이 날 것같았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벽안이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고개가 서서히 다가왔다.내내 실처럼 쓰다듬었던 연갈색 머리카락이 쏟아져 내려왔다. 시야가 가려졌다고 생각했던 순간, 그가 제 뒤통수를
외국의 유행을 받아들여 가끔 나스의 신부들이 걷는 하얀 카펫 위를 버진로드라고 표현하기도 했지만, 루시아에게는 오히려 괜히 안좋은 기억만을 떠올리게 할까봐 에이든은 카펫 대신 꽃을 바닥에 깔았다. 붉은 장미였다. 수북하게 바닥에 깔린 장미가 눈 앞에 펼쳐져 있었고 그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부모의 역할을 해줄 이가 없어 내심 고민했더니, 나스에서는 신부가 혼자 입장하기도 한다며 주례사를 맡은 나다니엘 총리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총리는 솔직히 소문이 실제와 다르다고 생각했다. 소문은 실제를 과소평가 한 것이다. 그보다 훨씬 과장해야 겨우 제국에서 온 아가씨가 겨울의 왕의 차갑고 오만하던 게다가 냉랭하기까지 했던 마음을 녹였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이었다.에이든은 일단 사랑에 빠진 눈이었다. 눈앞에 서 있는 마르기만한 여인이 만약에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나스 제일의 명의를 데려다가 치료를 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문득, 그녀가 제국에서는 어떤 취급을 받았었는지가 나스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에이든이 어떻게든 새어나가는 걸 막아보려고 했으나 사실 나다니엘도 대공이 그렇게 신경쓰는 여자가 궁금해 구태여 막지 않았다.그러니 이렇게 선뜻 소문의 예비 부부를 위해 주례를 서는 것은 저 마음 편하자고 그런 것도 없지는 않았다. 물론 그걸 겨울의 왕의 앞에서 입 밖에 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가 사실 애초에 제국의 황제와 무슨 거래를 했는지도 대충은 짐작하는 바였다. 황권 복권 세력을 지원하는 걸 눈감아주겠다고 했겠지. 나다니엘은 처음에 이 안에 대해 가장 반대하는 사람이고 유일하게 나스의 공식적인 최초의 총리라는 자리엔 앉아있었기에 그나마 에이든의 계획을 들어볼 수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애초에 막을 힘도 없었지만, 적어도 공화정은 지켜야하지 않겠느냐고 그게 그 여자도 바라는 바가 아니겠느냐고 애원하다시피 해서 의회에 제국황실의 행적과 앞으로의 일들을 하우젠 령이 공유하는 걸로 했다. 그 대단한 일을 하게 만든 여자가 그의 눈 앞에 서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루시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에이든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 곳은 나스, 제국이 아닌 에이든의 모국이니 그는 안전할지라도 겨우 추방기간까지 고작 하루 이틀 남은 외국인인 저의 신세는 달랐다. 이 결혼이 엎어지면, 자신은 아르테미스로 혹은 더 나쁘면 벨루아로 돌아가야 할 수도 있었다. 루시아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난 시간동안 백작가보다 조금 더 넓고 반짝이는 벨루아의 새장에서 만족했던 건, 그를 사랑하려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애먼 사람이라도 사랑하지 않고서야는 견딜 수 없었던 세월이었다. 그러다 목숨을 건 시도로 마침내 그 곁을 떠났는데 결국 그저 화가 났다는 데미안의 변덕으로 이렇게 모든 걸 잃을 순 없었다.정말 급할 땐 급소라도 때려리고 도망가야 한다. 머릿속에 남은 결론이었다. 공작을 해하려 했다는 혐의가 붙겠지만, 적어도 평생 수녀원이나 벨루아에 갇혀 사는 것보다야 잠깐 감옥에 가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불안이 천장을 뚫을 만큼 올라갔을 때 문이 열렸다. 순간순간이 아주 느리게 끊기는 것 같았다.에이든은 그 당시의 루시아의 버석거리는 메마른 시선을 기억했다. 셀레나가 숨도 쉬지 못하고 저에게 달려와 데미안 벨루가 왔다고 일러주지 않았다면 조금 더 늦었다면, 큰일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애초에 그를 초대한 일도 없었고, 그토록 치밀하게 입장객을 골라냈는데도 어디서 구멍이 난걸까. 에이든의 머릿속에 목을 칠 사람들의 명단이 씌어졌다가 지워졌다. 그녀의 일에 관해서라면 그는 자꾸만 더없이 잔인해졌다. 일단은 루시아가 먼저였다. 그녀의 안전이 최우선이었다. 그는 이제 나스의 미신 따위에 지지 않았다. 저의 태양이 계신 곳으로 가고 있었다.기사들의 저항은 하우젠의 기사들이 막았다. 애초에 나스의 영토였으니 당연히 그들이 우세했다. 서둘러 신부 대기실 안에 들어가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루시아의 잿빛 눈동자가 보였다. 그 다음은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의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벽에 데미안 벨루아를 밀친 것까지는
제국에서도 벨루아 전 공작부인의 거취는 비밀로 부쳐졌지만 이미 나스의 언론들이 대공과의 결혼을 일제히 보도하기 시작했을 때는 빠르게 소식이 데미안의 귀에 들어온 이후였을 것이다. 그래서 루시아에게 에이든이 그가 이미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미안하다고 사과했을 때 고개를 저었다.다만 이렇게 자기 아내였던 사람의 결혼식에, 그것도 공작씩이나 되는 자가 직접 타국에까지 방문할 줄은 몰랐다. 아내라고는 해도 고작해야 자기 성욕을 풀어주는 인형 역할이나 하던, 사람도 아닌 어떠한 존재를 위해. 루시아는 그래서 새삼 그 저의를 의심했다.셀레나는 무례라는 것도 잊고 그를 노려보았다. 루시아는 벨루아의 기사들이 검집 위로 손을 얹는 걸 보았다.그녀가 친구를 제지했다.“잠깐 나가 있어줘, 셀리.”루시아의 말에 눈이 커진 셀레나가 만류한다.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였다.“하지만.”“괜찮아.”그건 확신이 담긴 목소리였다. 셀레나는 그런 종류의 목소리와 눈빛을 루시아가 아주 어린 시절밖에 보지 못했다. 그것은 친구가 성장함에 따라 빛을 잃었던 귀한 것들 중에 하나였으므로. 셀레나는 그 전조를 믿기로 했다. 더 이상 벨루아 에서의 무기력한 도자기 인형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어쩐지 데미안 벨루아가 이곳에 온 보람이 무색하리란 생각이 셀레나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셀레나가 나가고서도 데미안은 벨루아의 기사들을 물리지 않았다. 루시아가 직접 언급하기 전까지.“나는 내 시녀도 물러가라 했는데 기사들은 왜 남아있는 거죠. 나를 납치라도 할 셈인가보죠.”데미안의 눈썹이 못마땅한 듯 구부러졌다. 그가 한 손을 들어 기사들에게 나가라는 명을 내렸다. 기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그의 명을 따랐다. 벨루아에 오직 그만을 따르며 공작만을 위해 존재했던 이 인력들은 벨루아 공작부인이더라도 루시아의 명을 한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녀를 위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런 이들은 대개 지금 이 신부대기실의 바깥에 있었다. 이를테면 셀레나라든가, 에이든이라든가.그녀의 소년을 생
결혼식 날이 밝아왔다. 세간에서는 아주 졸속으로 치를 거라며 비웃는 언론도 있었지만 대개가 그토록 여성을 멀리하던 에이든의 일사천리로 진행된 소문의 신부와 납치결혼에 대해 궁금해 하는 기사를 냈다.이른 새벽부처 화장과 목욕, 가꾸기로 여념이 없던 루시아는 그래도 오늘은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에이든이 전에 했던 말 덕분이었다. 전날 찾아온 그는 루시아에게 이것저것 물어볼 게 있다고 찾아왔다. 다음날 신부로서 꾸며야할 때 하고싶지 않은 게 있냐고. 루시아는 이제 그게 나스의 관습이 아니라 에이든 개인의 다정함, 호의, 선량함에서 비롯된 것이라 눈치챌 정도는 되었다.“......코르셋은 차지 않았으면 해.”평생 이런 말을 해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는데.그 말에 에이든도 고개를 끄덕였다.“기절 한적도 있었지.”벨루아에서의 일을 말하는 것 일 테다. 그의 낯빛이 조금 어두웠다.“괜찮아. 자주 입었던 건 아니야.”거짓말.에이든은 때때로 루시아가 저에게 마음을 많이 열어놔도 마치 남의 일을 말하듯 자신의 상처를 담담하게 말할 때면 그가 어찌할 수도 없이 기분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그걸 일일이 말로 표현하자면 아마 루시아가 저에게 질릴지도 몰라 가만히 입을 다물고 안쓰러운 눈빛만 보낼 뿐이었지만.“그리고?”루시아는 첫 번째 결혼식을 생각했다. 레이루나의 기대 가득한 눈빛과 뭇사람들이 그녀를 위 아래로 재단하며 남몰래 비교하던 시선. 그 모든 것을 다시 겪으려니 끔찍했다.“초대된 손님들의 명단을 볼 수 있을까?”일전에도 윌을 통해 확인은 했지만 한 번 더 봐두어도 나쁠 건 없어보였다. 오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아야 이쪽에서도 대응할 것 아닌가.에이든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저 빙긋 웃고 별말 없이 루시아의 곁을 떴다. 대개 그는 결혼을 앞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루시아에게 담백하게 굴었다.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생각했던 아주 작은 의심의 싹을 지울 수 있었다. 결론은 전혀 그의 마음을 예측해내지 못했지만. 어쨌든 당시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