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황제의 명이 떨어진 이상, 공작이 딴지를 걸 수 있는 가능성이 없었다. 떠나는 날이 언제라고 말은 해야 되어서 일러주었더니, 저택 문이라도 막으려는지 기사들이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셀레나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저번에 사용한 비밀 통로로 루시아와 에이든을 안내했다.
등불에 의지해 건너는 길에서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한 걸 두 사람이 잡아주었다. 루시아는 하녀복 차림이었다. 에이든도 제국에서 평민 차림새로 갈아입었다. 셋 다 로브를 뒤집어 쓴 채였다.
공작저와 영지에 딸린 숲의 경계에 마차가 있었다.
“기다렸습니다. 전하.”
에이든의 사람이었다. 그가 고개를 까딱였다. 절도 있는 동작을 한 남자가 마부 자리에 올라탔다.
셀레나와 에이든, 루시아 세 사람이서 같은 마차를 탔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운송용 마차를 빌려서 사실상 귀족이 타는 마차같은 승차감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냥 짐칸에 올라탄 수준이었다.
“너무 형편없나.”
에이든이 루시아의 눈치를 봤다.
루시아는 그런 그가 귀여운지 그저 싱긋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나스에서는 나 진짜 돈많아. 루시.”
그러냐고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유치한 논쟁이라 셀레나는 하늘에 뜬 달이나 쳐다봤다. 이대로 가는 길이 평화롭기를 바랐다.
바람은 오래 가지 않았다. 길목 마다 벨루아의 기사들이 수배지를 들고 서 있었다. 에이든이 검 위로 손을 들려는 찰나였다. 마차를 세운 기사들이 수색을 시작하려는 사이, 얼굴을 가린 괴한들이 들이닥쳐 기사들을 공격했다. 그 저택에서 평생을 보내다시피한 루시아만이 그들을 알았다. 아르테미스의 기사들이었다.
레이루나의 안배였을 것이다. 루시아는 모질지 못한 어머니를 알았다. 떠나는 딸조차 자신의 핏줄이라 또 다시 구해준 것이다. 그 뜻을 이루라고.
에이든이 마부로 가장한 남자에게 명령했고, 마차가 출발했다. 벨루아의 기사들이 쫓기 전에 수도를 벗어났다.
나스로 가려면 이틀을 더 가야했다. 수도를 벗어나자, 하우젠 대공의 가문 상징이 그려진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디디, 언제 이걸 준비했어?”
“아주 오래 전부터.”
입에 버터라도 바른 듯 나오는 말솜씨에 루시아 피식 웃었다.
“응. 고마워.”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올랐다. 아까의 운송용 마차와는 비교도 안 되게 푹신했고, 승차감이 좋았다. 금세 잠이 왔다. 낮고 다정한 에이든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셀레나의 어깨에 기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녀가 평온한 미소를 지은 채 인줄은 루시아는 꿈에도 몰랐다.
에이든은 마차를 몰 줄 알았다.
마부와 교대하여 그가 마차를 몰기도 했다. 거의 쉬지 않고 밤새 달렸다. 혹시라도 쫓아오는 세력이 있을까봐 잠시도 쉴 수 없었다. 나스에 다다랐을 때, 에이든이 미리 준비해둔 자신의 신분패를 꺼낼 필요도 없이 모자를 벗자마자 병사들이 국경 문을 열어주었다. 나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국민대공이라더니 정말인 모양이었다.
“루시, 일어나봐.”
셀레나가 그녀를 깨웠다. 나스의 국경에서 하루를 더 달려 수도 바사에 도착했다. 눈을 뜨니 보이는 건물들의 양식은 같은 대륙인 제국의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으나 디테일이 조금씩 달랐다. 지붕의 색깔이라든지, 사용한 재료라든지.
사람들의 복식도 달랐다. 머리가 짧고 바지를 입은 여성이 많았다. 남자들이 연인처럼 손을 잡고 다니기도 했다.
루시가 놀란 눈으로 묻자 에이든이 다 안다는 듯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직 나스에서도 동성결혼이 합법화되지는 않았지만, 대륙에서는 가장 개방적인 도시라 소수자들이 수도에 많은 편이야.”
수도에서 망명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들었다. 에이든의 고향인 하우젠으로 가기 전에 마쳐야 하는 일이었다.
“일이 나 때문에 많이 밀리진 않았어?”
루시가 그걸 물어볼 줄은 몰랐다는 듯 에이든의 눈이 동그래졌다.
“루시, 나 생각보다 한가해.”
물론 에이든 휘하의 사람들이 들으면 기함할 일이었으나 에이든은 적어도 루시아 한정으로는 앞으로도 영원히 한가할 예정이었다.
“그런가?”
“공화정에서 구황실의 핏줄이 할 일이 뭐가 있겠어.”
그건 그렇네 하고 중얼 거린 루시아가 뒷목을 긁적였다. 머리카락이 허리 아래에 없다는 게 아직도 조금은 어색했다. 정작 머리를 만져주던 셀레나는 이제야 잘랐느냐며 속 시원해했지만.
“바사는 뭐가 맛있어요, 전하.”
셀레나는 에이든에게 존대를 했다. 굳이 그럴 필요없다고 에이든이 말했지만 그가 연상이라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그럼 하다못해 이름으로 불러줘.”
셀레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는 그걸 보며 역시 디디는 친절하다고만 생각했다. 셀레나가 루시아의 사람이어서 그렇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로.
제국에서는 한바탕 피바람이 불었다. 카이사르가 압송된 데미안 벨루아의 공작위를 압수하고 그 가신들의 작위와 재산을 몰수했다. 황권 복위 세력과 손을 잡고 전쟁에 가까운 무력행위 문제를 일삼았다는 이유에서였다.레이루나는 그런 처분이 날 때까지 가만히 차를 마셨다. 눈 앞에 황후가 있건 말건 말이다. 마리아 지젤은 여전히 지금 자신이 있는 세계가 예언서대로 이루어질 세계라고 생각했다. 이미 그 결말이 끝나 자신은 더 이상 주인공이 아니었음에도 데미안과 카이사르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자신의 모습이 주변에 어떻게 보이는지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그러니까, 대부인이 대공비에게 연락을 넣어서 탄원서라도 받아내 주는 게 어떤가.”얼마 전에는 브리짓을 불러다 결국 하우젠 령으로 향하게 해서 루시를, 제 딸을 들쑤신 것을 모르지 않았다. 레이루나는 조용히 찻잔을 들어 홍차를 홀짝일 뿐이었다.그녀가 물렀던 탓이다. 아들의 결정이라고 하면, 그저 따르고 힘이 없다며 딸에게 어떤 위협이 닥칠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았는가. 레이루나는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제 딴에는 계속해서 루시아를 위한 선택을 한다고 하지만 정작으로는 그것들이 점이 연결되어 선이 되고 결국 루시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될 뿐이었다.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단발머리를 하고 자유롭게 살아갈거라던 딸아이의 모습이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레이루나의 낯이 어두웠다.“대부인?”레이루나는 눈앞의 멍청한 여자를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황제와 독대를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뒤에서 여우처럼 이렇게 화로를 들쑤시는 자는 자신 하나로 족했다. 그리고 제 자식에게 방해가 된다면 얼마든지 그 대상을 치울 생각도 있었다.하지만 여자는 황후였다. 이전처럼 루시아를 위한다는 생각이 다시 그녀의 발목을 잡을까 두려워져 레이루나는 선뜻 어떠한 선
“조사가 진행된 적이 없다니?”루시의 물음에 에이든은 침음을 흘렸다. 그는 무어라 대꾸하고 싶었지만 그동안 여성인권에 대해 오히려 기득권층인 가신들이 역차별 따위의 목소리를 내는 바람에 실질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그 스스로 꺼내기에도 꽤나 부끄러운 이야기였다.“말그대로야. 루시. 신분제가 없어도 그들은 여전히 귀족처럼 살려고 해. 계층이 없어지지 않았어.”“그러면, 자선사업의 개념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구나?”사회사업의 책을 읽으며 신들의 세상이었던 지난 신화기의 역사를 읽고 루시는 여성들의 자선사업 개념으로만 사회사업이 이루어졌으리란 데에 예상이 미쳤다.그곳을 다시 방문한대도 그렇다면 기존에 해왔던 것과 다른 영향을 주기는 힘들다. 그리고 그녀의 태에는 아이가 있었다. 저번처럼 바깥으로 나섰다가 데미안 벨루아같은 자가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에이든이 그때처럼 구해주지 못한다면,루시의 얼굴이 사뭇 어두워졌다.“루시, 당장은 눈 앞의 일만 생각하자. 아이가 있고, 너는 야간대학에도 다니겠다고 했어. 이미 충분히 많은 일을 하고 있어.”에이든은 루시아가 걱정스러웠다. 그녀는 때로는 자신이 무언가를 하면서 보여주지 않으면 아무도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때때로 그녀 혼자 밤에 산책삼아 거니는 후원에서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듣기도 했던 에이든이다.그는 그녀가 아직도 첫 아이를 완전히 잊지 못했고, 그래서 더더욱 자신보다 비참한 신세에 있는 이들을 도우려고 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디디. 하지만, 그 사람들한테는.”“이미 네가 시작한 제도들의 구상으로 여러 가지 사회부조 제도를 시범도입했어. 당분간은 쉬어도 괜찮아.”
루시의 태에 있는 아이는 쑥쑥 자랐다. 에이든이 어떻게든 그녀가 하우젠 가의 안주인 노릇을 안하게끔 하고 싶어했기에 그녀도 일부러 나서는 일 없이 지냈지만 사실 루시는 자신을 바라보는 가신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황좌에 앉기를 거부하고서 공화정이라는 낯선 체제까지 끌어들인 유일한 이유였다는 외국인 여자.이제는 전 대공비 방에 틀어박혀서 아무것도 안하는 여자. 사용인들이야 자신들에게 친절한 루시를 두고 다정하게 대해주지만 종종 집무실에서 지나칠 때면 책사 비요른과 직속 보좌관 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것이 기억났다. 루시는 이제쯤에는 자신이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브리짓도 돌아갔고, 안정기에도 접어들었으니 시민들의 복지에 조금 더 신경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야간 대학에 다니는 것은 개강까지 한달 여가 남았지만 그렇다고 내내 아무것도 안할 수 는 없었다.루시는 오랜만에 도서관에 들렀다. 새벽마다 그곳에 들러 책을 빌리기는 했지만 이렇게 낮에 돌아다닌 일 자체가 드물어서인지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벨루아의 도서관에서 에이든을 만나 이렇게 그의 아내가 되어 아이를 품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불과 최근까지도 데미안 벨루아가 자신을 찾으러 오고, 브리짓 언니가 하우젠 령을 마구잡이로 들렀던 것을 생각하면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다사다난했던 적이 있나 싶었다.루시는 우선 개론과 사회사업과 관련한 책들을 몇 권 집었다. 하우젠 령의 역사나 경제와 관련된 책은 이미 탐독했기에 사회사업으로 전공을 결정하고 나서는 관련 지식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셀리는 그 풍경이 자연스러워 곁에서 책 몇 권을 추천하며 루시하고 지적인 토론을 나누기도 했는데 정작 그 장면이 열린 틈 사이로 복도를 지나가던 가신들에게 어떻게 퍼져나가고 있는지는 아주 나중에야 들을 수 있었다.“그러니까, 내가 아주 대단히 지적인 여성이라고?”
사흗날 아침이 밝았다. 브리짓은 지난 이틀 내내 그랬던 것처럼 아주 편안하고 말간 낯으로 루시아의 앞에 섰다.“루시.”그 사이 두 사람은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되었다.“응, 언니.”“잘 지내. 아프지 말고, 건강하고.”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조카의 출생 과정을 볼 수는 없을 것을 알았기에 브리짓은 다만 그저 건강하라고 했다.루시도 그걸 알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슬퍼서 눈물이 쏟아질 것같았지만 티내지 않기로 했다. 아주 편안하게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헤어지고, 언젠가 된다면 그녀의 장례식에 참여해 그렇게 그녀를 보내줘야지.루시는 문득 생각난 것을 말하듯 브리짓에게 덧붙였다.“언니, 그때 나더러 왜 아버지 앞을 막아섰냐고 했잖아.”브리짓이 첫날의 기억이 생각이 난 듯 표정이 살짝 흐려졌다.우울한 기억이었다. 그녀가 저를 동정했다고 하는 것은. 그런데 루시아가 덧붙인 말은 놀라웠다.“나같아서 그랬어. 고작 이 좁은 새장에 갇혀 내내 남자들 때문에 삶이 휘둘리는 게 나 같아서. 그렇게 예쁘고 똑똑한 사람인데, 브리짓 언니는. ”브리짓이 또 울기 시작했다. 또르륵 흐르던 눈물이 어느새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루시아는 당황하여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정작 건넨 것이 아이를 위해 만들어둔 가제 수건이라 그녀가 수를 놓은 것이었다. 실력은 형편없었지만.“아, 그건 아이 때문에 만든 건데.”루시아가 부연설명을 하려고 하자 브리짓이 아주 환하게 웃으며 루시아에게 말했다.“내가 가져도 되겠니, 이것?”수많은 구혼자에게 어떤 금은 보화를 받았을 때에도 저런 표정은 아니었다. 루시아는 문득 브리짓의 저런 환한 미소를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고작 그걸로 되겠어?”못생긴 꽃 한 송이를 수놓은 손수건이었다. 그런데도 브리짓이 그걸 양손으로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이 꼭 껴안고 있어서 루시아는 어쩐지 부끄러웠다.“그렇게 대단한 물건도 아니고.”브리짓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너무 기뻐.”순수하게 그렇게 기
“생활은 어떠니? 사람들은 잘해주고?”“아, 언니. 음......”브리짓이 어떻게 생각할까, 순간적으로 루시아는 망설였다. 귀족으로 평생을 살아온 브리짓이 야간대학에 대해 어떻게 바라볼지 모르지만, 그녀는 그래도 좋은 소식이니까 브리짓에게도 전하고 싶었다.“나, 야간 대학에 다니기로 했어. 오는 봄에.”야간 대학? 브리짓이 귀를 의심했다. 그렇다면 공부를 이어서 하겠다는 뜻인가? 아니 애초에 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니 이어서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은.“그렇구나. 드디어, 할 수 있게 됐구나.”브리짓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평생 자신으로 인해 스스로를 하자품처럼 여기기만 했을 아이가 우뚝선 나무처럼 듬직하게 자라 자신의 삶을 향해 나아갔다. 그녀의 곁에는 이제 그녀만의 사람들이 있었다. 더는 벨루아에서처럼 그녀가 자신같아질까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다.“무슨 공부가 하고 싶니?”고작 야간 대학에 다니겠다는 말 한다미에 이렇게 오열을 할줄은 몰랐던 루시아가 브리짓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사회사업. 여성들을 위한 사회사업을 공부해보려 해.”훗날 사회복지가 되는 분야의 그 이전 이름이었다. 루시아의 말에 브리짓이 그것 또한 그녀 답다며 방긋 웃었다. 하우젠 령에 온 뒤로 아니 어쩌면 그녀가 올해에 가장 환하게 웃는 걸지도 몰랐다. 진심으로.루시아는 고작 자신이 대학에 간다는 이야기에 그토록 우는 브리짓을 보며 복잡다단한 심정으로 침실에 왔다. 이미 다 씻고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에이든이 어느새 지나간 사흘 동안의 이야기를 물었다.일부러 언니와 시간을 보내라며 한발짝 뒤로 물러나 있던 그였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그가 밤에도 조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부족하다고 하는 만큼 루시아가 채워줘야 했다.“어땠어, 루시?”그가 새하얀 베개를 베고 루시아에게 팔을 내어준 채로 물었다.“음, 어떤 게 궁금한데?”루시아가 물으니 그가 조심스레 덧붙였다.“......싸우거나 괴롭히지는 않아?”브리짓이 아직도 그런 인상으로 남았나. 처형이라고 부를 땐 언제
브리짓은 셀레나가 돌아가고 나면 루시아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부 다 늘어놓을 것을 알았다. 애초에 그렇게 앵무새처럼 떠들어대기만 하는 아이였으니, 그렇게 하겠지. 하지만 그게 제 동생에게는 좋은 시녀를 둔 셈이니 더 낫긴 했다. 정작 바보같은 자신의 동생은 셀레나를 두고 친구라고 말하겠지만. 그 점이 자신과 루시아가 다른 점일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자신이 어둠 속에 있어도 저를 구하러 와줄 하우젠 대공 같은 백마탄 왕자나 셀레나 같은 사람이 없는 거겠지. 하물며 레이루나같은 어머니조차도.문득 그 사실이 서러워 눈물이 흘렀다. 루시아가 자신을 동정했다는 사실보다 그저, 스스로가 비참해 무너지기도 했다.그러던 그녀에게 찾아온 이는 다름 아닌 하우젠 대공이었다. 그는 지독한 수면초 향에 눈살을 찌푸리며 들어왔다.“이정도일 거라고는 몰랐습니다만. 황후도 참 지독한 여자군요.”이미 공공연하게 귀족 사회에 아서 남작부인의 질병에 대한 이야기가 퍼져 있을 텐데도 일부러 그녀를 보낸 마리아 지젤이라는 여자는 그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악질인 것이 분명했다.“그런 걸 말하려고 온 건 아닐텐데요. 대공.”“의사를 불렀습니다.”저택의 주치의를 동반하고 나타난 그가 그녀가 진찰을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의사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이미 손 쓸 단계를 지났다고 했잖아요.”브리짓이 이것 보라는 듯 팔을 들어 짓무른 피부를 보여주었다.면보를 쓴 에이든이 브리짓에게 물었다.“그렇다면 적어도 마지막으로 멀쩡하게 동생과 추억을 쌓고 싶지는 않으십니까?”그가 듣기로는 내내 서로 반목하느라 제대로된 추억 하나 쌓지 못한 자매 사이라고 들었다. 루시아는 그걸 내내 아쉬워했고, 브리짓도 아마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라도 루시아를 보려고 그래야 안심이 되어서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해줄 수 있는 일도 있다면 나름 있었다.“젠슨, 그녀가 하우젠 령에 머물 동안 통증을 줄일 방법이 있나.”주치의에게 물으니 그가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짓다가 조심스레 말했다.“아
총리 나다니엘은 ‘대공’의 편지를 받고 뒷목을 잡았다. 국경에서 갈등이 있은 지 벌써 며칠이었다. 아내를 납치해갔다는 공작의 증언을 대공이 인정하는 꼴이었다. 그가 국민의 신망을 살수록 공화정파는 그를 경계했으나 그렇다고 자신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인물이 이렇게 인망을 잃는 걸 바라지도 않았다. 벨루아 공작 부인을 대공의 곁에서 치워야 할까. 총리는 고민했다. 하지만 에이든 하우젠의 말을 무시했다가는 그의 목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황제 자리를 제 발로 찬 ‘겨울의 왕’의 분노를 사봐야 좋을 게 없으므로.고로 망명 절차는 흠 없
바사의 시내는 트램이 다녀서 마차가 다니기 좋지 않았다.에이든과 셀레나, 루시아가 마차에서 내리고 마부였던 에이든의 사람이었던 남자는 자신을 윌이라고 소개하고는 타운하우스에 가 있겠다고 했다.“그럼 우리도 가볼까?”에이든이 로브를 뒤집어 쓰고 앞장 섰다. 그가 가장 먼저 안내한 곳은 사진관이었다.“여긴?”카메라는 제국에서도 황실에서나 쓸법한 물건이었다. 그게 나스에서는 보급됐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이토록 발전한 곳이라니.“네 증명사진이 있어야 해서. 루시.”그럴 줄 알았다면 미용실이라도 다녀올 걸 그랬다. 태어나서 처
덜덜 떨리는 어깨와 루시아의 것처럼 하얗게 질린 낯빛은 마치 루시아가 비참한 일이라도 겪은 것처럼 안쓰러움으로 가득했다. 그래, 레이루나는 이런 사람이었다. 그 순간에도 그녀의 백금발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제레미가 물려받은 레이루나의 백금발과 달리 까마귀처럼 검기만한 부친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싫었다. 제레미가 자꾸만 루시아가 백작을 닮았다고 할 때마다 아버지의 폭력성을 닮을까봐 스스로를 내리누르고 깎았다. 그럼에도 진한 혐오감은 어쩔 수 없었다. 정작 아르테미스 백작을 갈수록 닮아가는 건 제레미 였는데도.“루시. 황제 폐하
데미안은 여자의 텅 빈 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저택에는 껍데기만 남은 듯 했다.“외국인을 고를 줄은 몰랐는데.”대공을 두고 한 말이었다. 루시아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그 변화가 데미안의 분노를 부채질 했다.“그 남자가 대공비의 자리라도 준다던가?”나스가 비록 신분제를 폐지했을지 언정 사람들에게 관습적으로는 계급의식이 남아있었다.“당신이 주지 못한 전부를 주기로 했죠.”루시아가 비릿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인형 같기만 하던 여자가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었나. 그건 데미안때문이 아니었다. 오로지 하우젠 대공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