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제국의 홀대받는 공작부인 루시아, 그런 그녀에게 찾아온 과거에 구해줬던 소년 디디라고 칭하며 자신을 구해주겠다는 겨울의 왕, 하우젠 대공 에이든. 전남편 데미안 벨루아. 세 사람의 삼각관계가 시작됩니다.
View More그녀는 자주 지쳤다는 말로 모든 걸 대신했다. 원망스럽거나 상대가 실망스러울 때, 그에게서 받은 상처가 너무나도 커져서 가끔 그녀의 사랑을 역전해버릴 때. 그러니까 그녀가 겪어야 했던 모든 일들, 당했던 것들을 모두 감당할 수가 없을 때. 마치 노인 같은 거울 속의 제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도망가고 싶다느니, 지쳤다느니 하는 말로 제 속을 표현하곤 했다.
지쳤다는 말은 쉬고 나면, 잠시 어딘가로 도망가고 나면, 그러다 그 자리로 돌아오면 모든 게 괜찮아질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어찌되었거나 제 자리는 그의 곁이었으므로. 루시아 아르테미스 벨루아는 데미안 벨루아의 아내요, 제국의 단 둘뿐인 공작가의 공작 부인이었다. 비록 결혼 전에 데미안이 얼마나 지금의 황후인 마리아를 사랑했는지 전제국민이 다 알고 있고 모든 신문에 그 모습이 영원히 박제되었다고 해도, 가문에서 루시아를 팔아치우듯 공작가에 넘겼다는 것도 공작저의 사용인 중 누구도 그녀를 진정한 공작가의 안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나가던 개가 알았다고 해도.
***
뜨거운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의 문턱에 닿을 무렵이었다. 나무는 여전히 녹음으로 푸르렀지만 아침 저녁으로 선선해진 바람으로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루시아는 사계절 중 가을을 가장 좋아했다. 데미안이 태어났고, 그들이 결혼한 시기였다. 그래서 풀벌레가 우는 저녁이면, 고요하게 앉아 테라스에서 밖을 바라보며 행복하다고 중얼거리곤 했다. 그녀의 곁에 그의 마음은 없었으나 그의 곁을 차지하고 있을 수 있어서 그 답답한 집을 떠나 공작부인이라는 조금 더 넓고 반짝이는 새장에 올 수 있어서. 아마 그녀에게 이보다 나은 선택지는 없었으리라.
짧은 머리를 동경했고, 꾸미는 것보단 자연스러운 게 좋았다. 이를테면 나무 그늘 아래 흙바닥에 주저앉아 드레스가 엉망이 되어도, 머리가 바람결에 망가져도 신경쓰지 않는 쪽이 루시아다웠다.
유별난 아이라고들 했다. 어머니인 레이루나와도 다르고, 여느 귀족가의 영애들하고도 달라서. 그건 어떨 땐 저가 가장 편안한 모습으로 있으면 되니 아주 쉬운 일이었다가 더러는 어려운 일이 되었다.
특히 제 모습이 원인이 되어 가족들로 하여금 수치심을 안겨줬을 땐 스스로가 하자품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레이루나는 그녀를 지극히 사랑했지만 둘은 다른 사람이었으므로 때로 그 사랑은 이유를 알 수 없게 루시아의 목을 죄었다.
도망갈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혼사를 치르던 중 혹은 그 전에 사고로 위장해 죽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도 있었다.
구애를 하던 수많은 영식들 중엔
기사들도 있었으므로 그들을 따라 남자의 낯선 고향에 자리잡아 은거하는 것도 방법이었다. 다만 루시아가 그런 선택을 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은 젋은 황제와 황제파 귀족들의 득세로 세가 약해진 귀족파의 대표격인 아르테미스 백작가의 상황과, 밤에 잠못이루고 한숨짓는 레이루나의 눈가에 생긴 잔주름.
제 아버지나 오라비 제레미의 모진 말들 때문이기도 했고, 절반은 데미안 때문이었다. 현재의 황후를 사랑하여 예전 황태자와 삼각관계에서 사랑싸움을 하다가 끝내 패배한 남자. 돌이 굴러가듯 그 자리에 빠르게 박혀서는 손톱만한 관심 아니 적어도 존중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면 결혼한 지도 3년이 넘은 지금은 자연스럽게 감히라는 말이 생각났다. 감히, 제 아이도 잡아먹은 주제에. 거북하게 치른 관계속에 태어난 아이는 유달리 루시아를 고생시키다가 열흘 정도 살다가 세상을 등졌다. 이름도 없이, 제 아비의 품에 안기는 일도 없이. 그마저도 루시아가 사경을 헤맸기에 의식을 찾고 깨어났을 땐 모든 게 끝난 후였다.
아이의 관은 참나무로 되었는데 그녀의 품에 들어올 만큼 작으면서도 유난히 차가웠다. 그녀에게 있어 행복은 마땅히 주어진 할 일을 해낸 자의 보상이었기에 차마 루시아 자신에게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누구에게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국에서는 한바탕 피바람이 불었다. 카이사르가 압송된 데미안 벨루아의 공작위를 압수하고 그 가신들의 작위와 재산을 몰수했다. 황권 복위 세력과 손을 잡고 전쟁에 가까운 무력행위 문제를 일삼았다는 이유에서였다.레이루나는 그런 처분이 날 때까지 가만히 차를 마셨다. 눈 앞에 황후가 있건 말건 말이다. 마리아 지젤은 여전히 지금 자신이 있는 세계가 예언서대로 이루어질 세계라고 생각했다. 이미 그 결말이 끝나 자신은 더 이상 주인공이 아니었음에도 데미안과 카이사르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자신의 모습이 주변에 어떻게 보이는지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그러니까, 대부인이 대공비에게 연락을 넣어서 탄원서라도 받아내 주는 게 어떤가.”얼마 전에는 브리짓을 불러다 결국 하우젠 령으로 향하게 해서 루시를, 제 딸을 들쑤신 것을 모르지 않았다. 레이루나는 조용히 찻잔을 들어 홍차를 홀짝일 뿐이었다.그녀가 물렀던 탓이다. 아들의 결정이라고 하면, 그저 따르고 힘이 없다며 딸에게 어떤 위협이 닥칠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았는가. 레이루나는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제 딴에는 계속해서 루시아를 위한 선택을 한다고 하지만 정작으로는 그것들이 점이 연결되어 선이 되고 결국 루시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될 뿐이었다.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단발머리를 하고 자유롭게 살아갈거라던 딸아이의 모습이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레이루나의 낯이 어두웠다.“대부인?”레이루나는 눈앞의 멍청한 여자를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황제와 독대를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뒤에서 여우처럼 이렇게 화로를 들쑤시는 자는 자신 하나로 족했다. 그리고 제 자식에게 방해가 된다면 얼마든지 그 대상을 치울 생각도 있었다.하지만 여자는 황후였다. 이전처럼 루시아를 위한다는 생각이 다시 그녀의 발목을 잡을까 두려워져 레이루나는 선뜻 어떠한 선
“조사가 진행된 적이 없다니?”루시의 물음에 에이든은 침음을 흘렸다. 그는 무어라 대꾸하고 싶었지만 그동안 여성인권에 대해 오히려 기득권층인 가신들이 역차별 따위의 목소리를 내는 바람에 실질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그 스스로 꺼내기에도 꽤나 부끄러운 이야기였다.“말그대로야. 루시. 신분제가 없어도 그들은 여전히 귀족처럼 살려고 해. 계층이 없어지지 않았어.”“그러면, 자선사업의 개념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구나?”사회사업의 책을 읽으며 신들의 세상이었던 지난 신화기의 역사를 읽고 루시는 여성들의 자선사업 개념으로만 사회사업이 이루어졌으리란 데에 예상이 미쳤다.그곳을 다시 방문한대도 그렇다면 기존에 해왔던 것과 다른 영향을 주기는 힘들다. 그리고 그녀의 태에는 아이가 있었다. 저번처럼 바깥으로 나섰다가 데미안 벨루아같은 자가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에이든이 그때처럼 구해주지 못한다면,루시의 얼굴이 사뭇 어두워졌다.“루시, 당장은 눈 앞의 일만 생각하자. 아이가 있고, 너는 야간대학에도 다니겠다고 했어. 이미 충분히 많은 일을 하고 있어.”에이든은 루시아가 걱정스러웠다. 그녀는 때로는 자신이 무언가를 하면서 보여주지 않으면 아무도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때때로 그녀 혼자 밤에 산책삼아 거니는 후원에서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듣기도 했던 에이든이다.그는 그녀가 아직도 첫 아이를 완전히 잊지 못했고, 그래서 더더욱 자신보다 비참한 신세에 있는 이들을 도우려고 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디디. 하지만, 그 사람들한테는.”“이미 네가 시작한 제도들의 구상으로 여러 가지 사회부조 제도를 시범도입했어. 당분간은 쉬어도 괜찮아.”
루시의 태에 있는 아이는 쑥쑥 자랐다. 에이든이 어떻게든 그녀가 하우젠 가의 안주인 노릇을 안하게끔 하고 싶어했기에 그녀도 일부러 나서는 일 없이 지냈지만 사실 루시는 자신을 바라보는 가신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황좌에 앉기를 거부하고서 공화정이라는 낯선 체제까지 끌어들인 유일한 이유였다는 외국인 여자.이제는 전 대공비 방에 틀어박혀서 아무것도 안하는 여자. 사용인들이야 자신들에게 친절한 루시를 두고 다정하게 대해주지만 종종 집무실에서 지나칠 때면 책사 비요른과 직속 보좌관 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것이 기억났다. 루시는 이제쯤에는 자신이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브리짓도 돌아갔고, 안정기에도 접어들었으니 시민들의 복지에 조금 더 신경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야간 대학에 다니는 것은 개강까지 한달 여가 남았지만 그렇다고 내내 아무것도 안할 수 는 없었다.루시는 오랜만에 도서관에 들렀다. 새벽마다 그곳에 들러 책을 빌리기는 했지만 이렇게 낮에 돌아다닌 일 자체가 드물어서인지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벨루아의 도서관에서 에이든을 만나 이렇게 그의 아내가 되어 아이를 품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불과 최근까지도 데미안 벨루아가 자신을 찾으러 오고, 브리짓 언니가 하우젠 령을 마구잡이로 들렀던 것을 생각하면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다사다난했던 적이 있나 싶었다.루시는 우선 개론과 사회사업과 관련한 책들을 몇 권 집었다. 하우젠 령의 역사나 경제와 관련된 책은 이미 탐독했기에 사회사업으로 전공을 결정하고 나서는 관련 지식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셀리는 그 풍경이 자연스러워 곁에서 책 몇 권을 추천하며 루시하고 지적인 토론을 나누기도 했는데 정작 그 장면이 열린 틈 사이로 복도를 지나가던 가신들에게 어떻게 퍼져나가고 있는지는 아주 나중에야 들을 수 있었다.“그러니까, 내가 아주 대단히 지적인 여성이라고?”
사흗날 아침이 밝았다. 브리짓은 지난 이틀 내내 그랬던 것처럼 아주 편안하고 말간 낯으로 루시아의 앞에 섰다.“루시.”그 사이 두 사람은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되었다.“응, 언니.”“잘 지내. 아프지 말고, 건강하고.”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조카의 출생 과정을 볼 수는 없을 것을 알았기에 브리짓은 다만 그저 건강하라고 했다.루시도 그걸 알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슬퍼서 눈물이 쏟아질 것같았지만 티내지 않기로 했다. 아주 편안하게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헤어지고, 언젠가 된다면 그녀의 장례식에 참여해 그렇게 그녀를 보내줘야지.루시는 문득 생각난 것을 말하듯 브리짓에게 덧붙였다.“언니, 그때 나더러 왜 아버지 앞을 막아섰냐고 했잖아.”브리짓이 첫날의 기억이 생각이 난 듯 표정이 살짝 흐려졌다.우울한 기억이었다. 그녀가 저를 동정했다고 하는 것은. 그런데 루시아가 덧붙인 말은 놀라웠다.“나같아서 그랬어. 고작 이 좁은 새장에 갇혀 내내 남자들 때문에 삶이 휘둘리는 게 나 같아서. 그렇게 예쁘고 똑똑한 사람인데, 브리짓 언니는. ”브리짓이 또 울기 시작했다. 또르륵 흐르던 눈물이 어느새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루시아는 당황하여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정작 건넨 것이 아이를 위해 만들어둔 가제 수건이라 그녀가 수를 놓은 것이었다. 실력은 형편없었지만.“아, 그건 아이 때문에 만든 건데.”루시아가 부연설명을 하려고 하자 브리짓이 아주 환하게 웃으며 루시아에게 말했다.“내가 가져도 되겠니, 이것?”수많은 구혼자에게 어떤 금은 보화를 받았을 때에도 저런 표정은 아니었다. 루시아는 문득 브리짓의 저런 환한 미소를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고작 그걸로 되겠어?”못생긴 꽃 한 송이를 수놓은 손수건이었다. 그런데도 브리짓이 그걸 양손으로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이 꼭 껴안고 있어서 루시아는 어쩐지 부끄러웠다.“그렇게 대단한 물건도 아니고.”브리짓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너무 기뻐.”순수하게 그렇게 기
데미안은 여자의 텅 빈 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저택에는 껍데기만 남은 듯 했다.“외국인을 고를 줄은 몰랐는데.”대공을 두고 한 말이었다. 루시아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그 변화가 데미안의 분노를 부채질 했다.“그 남자가 대공비의 자리라도 준다던가?”나스가 비록 신분제를 폐지했을지 언정 사람들에게 관습적으로는 계급의식이 남아있었다.“당신이 주지 못한 전부를 주기로 했죠.”루시아가 비릿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인형 같기만 하던 여자가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었나. 그건 데미안때문이 아니었다. 오로지 하우젠 대공때문이었다
데미안은 루시아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려 했으나 번번히 셀레나에게 막혔다. 일개 시녀가 제 앞을 막다니, 말도 안됐다. 그러자 더 험악한 표정의 하우젠 대공이 벨루아 공작부인의 방에서 나왔다.데미안의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이혼하자던 이유가 눈앞의 남자 때문이리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 탓이었다.“환자의 방에 들이닥치려거든 나부터 꺾어야 할 겁니다. 공작.”분명, 경어였는데도 욕지거리를 들은 것처럼 불쾌함이 치솟았다. 에이든은 신분으로 상대를 누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루시아를 위해서 그가 못할 일은 없
루시아가 통보하듯이 그에게 말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뒤로 감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에게 훤히 속을 들킬까봐 두려웠다.언제나 꿰뚫어보는 듯한 보라색 눈동자가 오늘따라 저를 끝까지 따라붙는 것같았다. 방으로 뛰어오다시피 한 루시아가 문을 닫자마자 그 자리에 주르륵 주저앉았다.놀란 셀레나가 루시아에게 달려왔다."루시!"품안에 손수건으로 루시아의 땀을 닦아 주었다."괜찮아. 셀리, 나 데미안한테 말했어."식은땀을 흘리던 루시아가 그렇게 말하곤 다시 쓰러졌다. 몸살이었다.더러 악몽을 꿨다. 이미 지나간 시절, 오래된
데미안은 복도를 지나치다 대공을 만났다. 그쪽은 공작부인의 방이었다.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곳에서 오지? 의뭉스러운 자였다."대공 전하."데미안이 예를 갖췄고, 에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접이 융숭했던 탓인지 어제 저녁의 일로도 대공은 벨루아를 탓하지 않았다.여상한 얼굴로 평온을 가장한 채 있었다. 데미안은 짐승같은 감으로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음을 알았다. 굳이 마리아를 제 앞에서 들먹인 것도 분명 속셈이 있는 것같아 보였다. 황궁에 가서 물으니, 황제가 말하기를 하우젠 대공은 황후를 알현하지 않았다고 했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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