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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作者: 지리지
“다 지나간 일이야. 우린 아직 젊으니 아이는 다시 가지면 돼.”

심주혁의 몸이 굳어지며 얼굴에서 미소가 가셨다.

그는 강정연 앞에 쪼그려 앉아 눈을 맞추며 말했다.

“내가 형수랑 거리를 두라고 한 것도 네가 괜히 옛날 일을 떠올리며 괴로워할까 봐 그랬던 거야. 정연아, 약속할게. 반드시 범인을 법의 심판대에 세워서 할머니랑... 우리 아기 한을 풀어줄게.”

심주혁은 엄숙하게 맹세했다.

하지만 그 모습은 강정연의 눈에 그저 황당하고 가증스러울 뿐이었다.

그녀는 아무런 대꾸 없이 무심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태도가 생경한 듯, 심주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나직이 이름을 불렀다.

“정연아?”

그의 눈에 미안한 기색이 서렸다.

“내가 잘못했어. 형수님께는 전담 간병인을 붙여뒀으니까, 이제부턴 온전히 네 곁에만 있을게. 약속해.”

강정연이 입을 떼기도 전, 테이블 위에 놓인 심주혁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전화를 받자마자 당황한 여자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주혁 씨, 어떡해요. 애가 계속 울어요. 아무리 달래도 안 돼요...”

“형수님, 진정하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

심주혁은 휴대폰을 꽉 쥔 채 곧장 발걸음을 옮기려다, 방금 아내에게 했던 약속이 떠올랐는지 난처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정연아, 형수님이 지금...”

너무나 익숙한 상황이었다.

허수정은 수없이 많은 밤, 이런 식으로 심주혁을 불러내곤 했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일들이 이제야 선명해지며 지난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강정연은 자신이 한심할 정도로 어리석게 느껴졌다.

‘심주혁이 형님과 이토록 부적절한 관계였다는 사실을 왜 이제껏 몰랐을까? 설마 아이를 지운 것도 허수정과 마음 편히 놀아나기 위해서였을까?’

심장이 차갑게 식어 내려앉았다.

할머니의 복수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이혼 서류를 내던지고 그를 쫓아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강정연은 외투를 챙겨 입으며 심주혁의 의구심 어린 시선에 답했다.

“나도 같이 가.”

심주혁은 잠시 미간을 좁혔을 뿐, 거절하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자 그는 세심하게 자신의 코트를 강정연의 등에 걸쳐주었다.

“감기 걸리겠다.”

병실로 향하는 내내 그는 마음이 급해 보이면서도 그녀를 품에 꼭 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강정연은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얌전히 그에게 몸을 맡겼다.

“주혁 씨, 늦은 시간에 정말 미안해요...”

병실 문이 열리자마자 허수정이 가련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품에 안긴 강정연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굳어버렸고 붉게 충혈된 눈에는 금세 맑은 눈물이 차올랐다.

허수정은 요람에 누운 아이를 내려다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현호 씨만 곁에 있었어도 이 밤중에 두 사람을 번거롭게 하진 않았을 텐데.”

“형수님, 그런 말씀 마세요.”

심주혁은 즉시 강정연을 안았던 손을 풀고 허수정에게 달려가 다정하게 달랬다.

지극정성으로 눈물을 닦아주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강정연의 입가에는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이내 그녀의 시선은 다시 울기 시작하는 아이에게로 향했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낮보다 훨씬 가늘고 힘이 없었으며 피부색마저 불길한 자줏빛을 띠고 있었다.

이것이 그녀가 굳이 이곳까지 따라온 이유였다. 강정연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려 다가갔다.

복수를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릴 이유가 없었다.

만약 아이에게 숨겨진 질환이 있다면 직접 치료를 맡아줄 생각이었다. 훗날 심현호와의 협상 테이블에서 요긴하게 쓰일 패를 하나 더 쥐게 되는 셈이니까.

하지만 그녀가 다가가기도 전에 허수정이 한발 앞서 아이를 낚아채듯 품에 안아 들었다.

“태어날 때부터 주혁 씨가 돌봐줘서 그런지 아이가 주혁 씨 품만 찾네요. 주혁 씨, 애 좀 달래줘요.”

그러고는 미안한 기색을 꾸며내며 강정연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동서, 여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이만 돌아가서 쉬는 게 어때요?”

이내 허수정은 환한 얼굴로 심주혁에게 말했다.

“거 봐요. 아기가 주혁 씨를 찾은 게 맞다니까요. 안아주니까 바로 뚝 그치잖아요.”

그 말에 강정연은 시선을 들어 아이를 쳐다보았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멎었지만, 얼굴에는 희미한 청색증이 번지고 있었다.

의사로서의 본능이 깨어난 강정연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이 이리 줘봐. 상태가 이상해.”

심주혁이 무의식적으로 아이를 건네려던 찰나, 허수정의 눈동자에 짙은 경계심이 스쳤다. 이내 그녀는 순식간에 눈시울을 붉히며 가로막았다.

“동서, 내가 주혁 씨를 오라고 해서 기분 상한 건 알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우리 아기한테 그런 몹쓸 소리를 하면 안 되죠.”

그 말에 강정연은 심주혁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곤혹스러움이 서린 그의 묘한 표정을 확인한 순간, 강정연은 단박에 상황을 파악했다.

허수정은 아이에게 병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십중팔구 심주혁이 그녀가 걱정할까 봐 줄곧 숨겨온 모양이었다.

강정연은 차분함을 잃지 않은 채 단호하게 말했다.

“저주하려는 게 아니에요. 심주혁, 빨리 아이 이리 줘봐.”

짧은 갈등 끝에 심주혁은 결국 강정연에게 아이를 보여주기로 마음먹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채 일어서기도 전에 허수정이 그의 손목을 꽉 붙들었다.

“주혁 씨, 제발 동서더러 그냥 가라고 해줘요, 네?”

허수정은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고집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애원하는 형수와 무거운 침묵으로 자신을 지켜보는 아내, 그 팽팽한 대치 속에 갇힌 심주혁은 결국 강정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연아, 너 일단 돌아가 있어.”

그의 어조는 아까보다 한층 단호해져 있었다.

“형수님이 출산 후라 정서적으로 많이 불안한 데다 모성 본능 때문에 예민해져서 그래. 네가 좀 이해하고 일단은 먼저 가 있어.”

강정연은 그의 말을 가차 없이 무시한 채, 심주혁의 품에 안긴 아이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비록 전공은 신경외과였으나, 그녀가 거쳐온 수많은 환자 중에는 영유아도 적지 않았다.

아이는 이미 질식 증상을 보이고 있었고 이는 선천적 질환으로 인한 급성 발작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여기서 더 지체하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닥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강정연은 앞뒤 가릴 것 없이 응급 처치를 위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녀가 침대 곁에 다다랐을 때, 허수정은 느닷없이 손을 뻗어 그녀를 거칠게 밀쳐냈다.

온 신경이 아이에게 쏠려 있던 강정연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나 탁자 모서리에 세게 부딪혔고 동시에 탁자를 짚은 오른손바닥에서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치솟았다.

그녀는 신음을 삼키며 뒤를 돌아보았다.

탁자 위에는 과도가 놓여 있었고 깊게 베인 손바닥에서는 붉은 선혈이 울컥 배어 나오고 있었다.

“괜찮아?”

심주혁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예전 그녀의 사고 소식을 듣고 정신없이 달려왔을 때와 같은 목소리였다.

“괜찮아, 너...”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며 차분히 몸을 돌리던 강정연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심주혁은 그녀를 보기는커녕 등을 돌린 채 허수정의 침대 앞을 철옹성처럼 가로막고 서 있었던 것이다.

지난 1년간 이런 광경은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오늘, 그의 거짓을 우연히 엿보기 전까지 강정연은 미처 알지 못했다. 이 ‘지고지순한’ 남편이 온 마음을 다해 지켜온 사람이, 처음부터 단 한 번도 자신이었던 적이 없음을.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끊임없이 선혈이 솟구치는 오른손을 내려다보다 그대로 문밖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주혁 씨, 난 괜찮으니까 어서 동서부터 봐봐요. 내 실수로 동서가 다쳐서...”

등 뒤에서 허수정의 가증스러운 목소리가 가련하게 들려오더니 곧이어 심주혁의 낮은 음성이 비수처럼 귓가를 파고들었다.

“형수님, 자책하지 마세요. 본인이 굳이 따라오겠다고 고집 피우다 다친 건데 형수님이 뭐가 미안해요? 하여간 형수님은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자꾸 본인 탓으로 돌리지 마세요. 지금은 산후조리 중이니 몸 추스르는 게 최우선이에요.”

뒷이야기는 더 들을 필요조차 없었다. 강정연은 멈추지 않고 곧장 응급실로 향했다.

‘심주혁의 세상에서 허수정은 그토록 가련하고 무결한 존재였던 걸까. 그래서 저토록 맹목적으로 두둔하고 허물을 덮어주는 것일까. 허수정이 고작 힘을 조금 썼을 뿐인데, 그에겐 하늘이라도 무너지는 일인 모양이지.’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제 강정연에게 심주혁 따위로 마음 아파할 여유는 없었다. 그저 이 상처가 후유증을 남길지 여부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녀의 손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메스를 잡아야 할, 무엇보다 소중한 손이었으니까.

최근 그녀는 이미 병원에 복직 서류를 제출하고 승인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자신만을 기다리는 환자들이 산더미 같은데, 고작 쓰레기 같은 인간 하나 때문에 그 수많은 환자의 희망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응급실.

의사는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바른 뒤 붕대를 감아주며 말했다.

“큰 부상은 아니니 물 닿지 않게 관리만 잘하세요.”

강정연은 그제야 비로소 안도하며 약 봉투를 들고 나섰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정연아.”

어느새 따라온 심주혁이었다.

그녀가 나오자 그는 서둘러 다가오며 두 눈 가득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어때, 많이 다쳤어?”

강정연은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치다 그의 눈빛을 마주하고는 잠시 망연해졌다.

한때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던 건 그의 달콤한 맹세뿐만 아니라, 바로 이 다정하기 그지없는 눈매 때문이기도 했다.

눈꼬리가 자연스럽게 처져 보는 것만으로도 온화함이 느껴지는 저 눈매 말이다.

잠깐...

강정연은 그의 눈을 찬찬히 뜯어보다가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굳어버렸다.

허수정과 심현호는 둘 다 눈꼬리가 위로 날카롭게 올라간 눈매였다.

그런데 그녀의 기억 속에 남은, 태어난 지 보름 된 조카의 눈은...

그 아이는 심주혁과 똑 닮은 처진 눈매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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