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낮에는 냉철한 팀장님, 밤에는… 당신이 매일 밤 기다리던 그 야설 작가. 대한민국 상위 1%의 정장을 입고, 회의실에서는 단호한 시선으로 모든 걸 컨트롤하는 여자. 차서윤, 대기업 홍보팀의 악명 높은 카리스마 팀장. 하지만 퇴근 후 노트북을 펼치면? 그녀는 수천 독자를 몸부림치게 만든 19금 로맨스 작가 ‘핑크문’으로 변신한다. 그녀의 키워드는 늘 자극적이다. #계약결혼 #사내연애 #벽치기 #침대진행중 그리고 매번, 묘하게 한 남자와 닮은 주인공. 그러던 어느 날, 그 남자가 현실에 나타났다. 소설 속 남주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비주얼, 목소리, 심지어 눈빛까지 신입 계약직 정하준, 그는 단순한 팬이 아니라, 핑크문의 정체를 알고 있는 남자였다.
view more출근 시간 10분 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서윤은 숨을 죽인 채 탑승했다.
7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아무 말도 없이 함께 탄 직원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익숙한 침묵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차서윤 팀장’이라는 이름이 만들어낸 공기의 밀도는 언제나 차갑고, 정돈되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조금은 무서운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걸 부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건 그녀에게 필요한 갑옷이었다.
무너뜨릴 수 없고, 들켜서는 안 되는 세계를 지키기 위해.
회사에 들어온 지 8년, 팀장이 된 지 2년.
그 시간 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지각을 한 적이 없고,
업무를 미뤄본 적이 없으며, 누구와도 사적인 관계를 만든 적이 없었다.
일만 하는 여자, 감정이 희미한 사람. 그리고, 말 못할 이중생활을 가진 사람.
밤마다 그녀는 노트북 앞에 앉아 핑크문이라는 이름으로 세상 가장 뜨겁고 위험한 판타지를 쓴다.
퇴근 후, 정장을 벗고 침대에 기대 노트북을 열면 현실과 전혀 다른 인물이 그녀 안에서 살아난다.
사내연애, 계약결혼, 대표님과 비서, 의도된 갇힘, 휘청이는 마음과 함께 무너지는 체온.
그녀는 낮에는 정적이지만, 밤에는 불을 쓰는 여자였다.
그날 아침. 서윤은 예정보다 더 진한 컨실러를 눈 밑에 얹고 출근을 준비했다.
지난밤 마감으로 새벽 세 시까지 글을 썼고, 댓글을 확인하느라 30분은 더 뒤척였다.
이번 화는 독자 반응이 유난히 뜨거웠다.
“대표님 미쳤어요”,
“여주가 너무 부럽다”,
“작가님 진도 언제 나가요?”
그녀는 그 댓글들 속에서 고양된 감정을 눌러안고 다시 출근길로 나섰다.
하루에 두 개의 인생을 사는 건 생각보다 체력을 많이 잡아먹는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날부터였다.
“팀장님, 인사드립니다.”
새로 배정된 계약직 신입이 인사를 건넸다.
정하준. 27세. 이력서 사진에서 본 것보다 훨씬 단정한 외모,
날카롭진 않지만 묘하게 선을 넘을 듯한 웃음기.
“홍보팀 정하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의 첫 인사에서 그녀는 뭔지 모를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 심지어 그 느낌은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그의 눈매, 입매, 그리고 목소리.
그녀가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을 상상하며 반복적으로 그려왔던 이미지와 너무나 흡사했다.
‘아니야. 그냥, 우연이야.’
그녀는 생각을 잘라냈다.
그러나 그 우연은 그날 하루 종일, 아주 이상한 방향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회의실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의 노트북 화면이 문득 시야에 들어왔다.
문서의 제목은 ‘PM_Project_Summary’.
잠깐 스쳐 지나가는 글자였고, 실제론 회사 업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서윤은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PM' 핑크문. 그녀가 작품 파일 이름을 저장할 때 즐겨 쓰는 약자였다.
‘설마... 아니겠지.’
그녀는 순간, 자신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돌아보았다.
혹시 회사 프린터에 잘못 출력한 원고는 없었는지,
혹시 노트북 화면을 열어둔 채 자리를 비운 적은 없었는지.
하준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문서를 넘기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가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불안이 아니라… 감지였다.
며칠이 흘렀다. 서윤은 피곤을 견디며 낮을 버텼고,
하준은 이상할 만큼 그녀에게 말을 자주 걸었다.
“팀장님, 요즘 밤에도 바쁘시죠?”
“…네?”
“그러니까요. 좀 피곤해 보이셔서.
제가 아침마다 커피 한 잔 뽑아다 드릴까요?”
그의 말은 공손했고, 의도는 배려였지만,
서윤은 이상하게 ‘밤’이라는 단어가 찔렸다.
자신의 밤이 얼마나 낯 뜨거운 문장들로 가득 차 있는지
그는 전혀 모를 테니까.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신경 안 써도 돼요.”
하지만 다음 날 아침,
그녀의 책상엔 샷 추가 아메리카노 한 잔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포스트잇 한 장.
“작가님,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서윤은 그 쪽지를 손끝으로 접으며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작가님?’
그 단어가 왜 이렇게 가슴을 콕 찌르듯 아플까.
아니야. 우연이야. 그냥 말버릇 같은 거겠지.
그는 몰라. 그가 알 리가 없잖아.
…그런데.
어쩌면, 진짜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녀는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예감 하나에 소름이 돋았다.
그날 밤, 서윤은 글을 쓰지 못했다.
모니터를 바라보며 손을 올리다 멈추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자신의 문장을, 누군가에게 들킨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더 무서운 건 그가 그녀의 세계를 좋아할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그가 핑크문의 독자라면, 그녀가 쓴 말도 안 되는 벽치기.
회의실 키스, 눈 가린 입맞춤 같은 장면들을 좋아한다면…
이진은 오래도록 회의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모든 동료가 퇴근한 후에도 불이 꺼지지 않은 그 공간은그의 미련을 하나씩 부풀리고 있었고, 책상 위에 놓인 종이컵 커피는 식은 지 오래였다.문득, 서윤이 처음 들어오던 날이 떠올랐다.표정도 어딘가 얼어 있고, 말투도 조심스러웠던 그녀.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그 조심스러움이 자신의 하루를 조금씩 채우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그는 그녀에게 말하지 못한 수많은 감정을 자신만의 질서와 원칙 뒤에 숨긴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그리고 그 시간들은 이제, 그녀가 다른 사람의 곁에 안착하는 것을 지켜보는 시간으로 남아 있었다.서윤은 퇴근길, 작은 골목의 조명을 따라 걸었다.그날은 유난히 바람이 부드러웠고,그 바람은 그녀가 두 팔 안에 껴안고 있는 불안의 조각들을 조금은 밀어내주는 것 같았다.하준과의 사이에는 분명 따뜻함이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어딘가 망설이고 있었다.마치, 스스로를 전부 내어준다는 것이 또 다른 상처로 돌아올까 두려워마음의 일부를 접어두는 습관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를 본 하준은 조용히 다가와 외투를 받아주었다.“오늘, 춥진 않았어요?”“응, 바람이… 좀 마음을 쓰다듬는 기분이었어.”하준은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웃었다.그저 주방 쪽으로 걸어가 따뜻한 차를 내리는 손길이 분주했을 뿐이다.“하준 씨.”서윤은 주저하다 그를 불렀다.그는 차를 내려놓으며 시선을 그녀에게 옮겼다.“나… 사실 조금, 무서웠어요.”“…무엇이요?”“내가 쓰는 글이, 누군가에게 읽히는 일도, 그게 나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일도,그리고… 그걸 알아채고도 아무렇지 않게 웃는 하준 씨의 존재도.”하준은 그녀의 앞에 앉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서윤 씨는 계속 조심했어요? 말 한마디, 표정 하나까지도.”“응. 그런데, 하준 씨가 그냥… 아무 말 없이 있어주니까자꾸 말하고 싶어졌어요. 그게 고마웠어요. 무섭기도 했고.”하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서울의 불빛은 하루를 마감한 사람들의 피로를 감싸듯 부드럽게 번져 있었고, 그 창밖을 바라보며 서윤은 손끝으로 머그잔을 감쌌다.잔 안에서 김이 천천히 피어오르고 있었지만,그보다 더 뜨겁게 피어오르던 건 그녀의 목 아래 깊숙이 잠겨 있는 긴장과 두려움이었다.그는 지금, 자신이 가장 오랫동안 감춰왔던 이름 앞에 서 있었다.‘핑크문.’ 그 필명 아래 적어내려간 모든 욕망과 감정,사랑과 환멸, 외로움과 관능의 문장들.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진짜 자신의 또 다른 그림자였다.하준은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었다.평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예전보다 깊어 있었다.이제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그가 기다리는 것은 진심, 그리고 그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정말 말해야 할까 싶었어요.”서윤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지만 그 안에는 묵직한 파동이 일고 있었다.“말하면, 모든 게 달라질까 봐 겁났어요. 회사에서의 나, 하준 씨 앞에서의 나,그리고 노트북 앞에서의 나… 그 모든 이름이 한꺼번에 무너질까 봐.”하준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서윤은 잠시 침묵했다가, 한 손을 뻗어 노트북을 열었다.화면 안에는 수많은 폴더가 정리되어 있었다.그 중 하나 ‘작업 중 원고’라는 이름의 폴더를 클릭하자그 안에 담긴 수십 개의 파일들이 일제히 드러났다.『지독하게, 부드럽게』 『네 이름으로 날 불러줘』『몸의 기억은 마음보다 오래 간다』그리고 가장 마지막, 『내가 너를 쓰기 시작한 날부터』그제야, 하준의 눈이 아주 조용히 흔들렸다.“…그동안 이걸 쓰고 있었어요?”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나예요. 회사에서 보이는 모습보다, 더 진짜 나에 가까운.”하준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파일 하나를 클릭해 첫 페이지를 읽었다.그는 문장을 천천히, 아주 느리게 따라 읽었다.“그 사람은 웃지 않았다. 하지만 눈빛 하나로, 나를 천천히 벗기기 시작했다.”그 문장을 읽고 난 후, 하준은
밤늦게까지 이어진 회의, 기록을 정리하고 마지막 보고 메일을 보내기까지의 긴 시간. 사무실엔 이미 대부분의 불이 꺼지고, 복도에는 조용한 정적만이 가라앉아 있었다.서윤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커피를 데우러 탕비실로 향했다.하이힐을 벗어둔 발끝이 마룻바닥에 살짝살짝 부딪힐 때마다, 그녀는 오히려 그런 소리에 안도했다.그 어떤 설명도 필요 없는, 익숙한 야근의 공기.그 속에서만큼은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은 채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었으니까.컵에 커피를 붓고 뒤돌던 순간, 문득 복도 쪽에서 낮은 인기척이 들렸다.“…팀장님?”그림자처럼 나타난 이진이 탕비실 문턱에 기대선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다크한 수트와 풀린 넥타이, 그리고 그의 손에는 낡은 표지의 소설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이 시간까지… 여기 계셨네요.”그는 그녀의 손에 들린 머그컵을 가리켰다. 서윤은 어색하게 웃었다.“잠깐, 커피 마시러요. 보고서 정리 좀 늦게 끝나서…”그는 아무 말 없이 다가와, 조용히 머그컵을 들어 그녀의 손끝에 닿을 듯 말 듯 가져갔다.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말했다.“이거, 그때랑 똑같네요. 팀장실에서 처음 같이 마셨던 커피 맛.”“…기억하세요?”“이상하게, 그 날 이후로 계속 그 커피 생각이 났어요.쓰고, 묘하게 따뜻하고, 잊히지 않게 만드는 맛.”말의 결이 묘하게 감정의 결을 따라붙는 것 같아, 서윤은 커피잔을 다시 받아 들며 눈길을 피했다.“혹시… 이 책, 읽어본 적 있어요?”이진이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내민 책.붉은색 하드커버에 금박 글씨로 새겨진 제목,'화양연화, 또는 불가해한 감정'그건 서윤이 핑크문으로 활동하던 초창기 시절에 가장 오랜 시간 손질하고, 가장 큰 애정으로 출간했던 첫 19금 단행본 소설이었다.“아… 예전에, 잠깐 본 적 있어요.”그녀는 당황한 기색을 숨긴 채 대답했지만, 이진은 이미 눈빛에서 그 진심의 결을 읽고 있었다.“어쩐지… 문장이 익숙하더라고요. 회의 때 가끔 서윤 씨가 사용하는 어휘들이
창밖의 햇살이 유난히 따사로운 오후였다.회사의 복도에는 점심시간을 알리는 가벼운 발걸음과 웃음소리가 섞여 흐르고 있었지만, 서윤은 그 풍경과 묘하게 어긋나 있었다.작은 회의실 안, 커튼이 반쯤 내려진 조용한 공간 속에서 그녀는 문득, 손끝에 맺힌 미세한 떨림을 느꼈다.노트북을 열어둔 채로 한참이나 화면을 바라보다, 서윤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이진의 말이 계속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숨기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누구든.”그 말은 무심한 듯 다정했고,한편으로는 너무 가까워 두려웠다.“무슨 생각해요?”하준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서윤은 놀란 듯 고개를 들었고, 그가 이미 문을 열고 들어서 있는 것을 보았다.“여기서 일하고 있었어요?”그녀는 서둘러 노트북을 덮었다.“아니요, 그냥… 잠깐 생각 좀 하느라요.”하준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 맞은편에 앉았다.그의 손에는 커피 두 잔이 들려 있었고, 한 잔을 조용히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요즘 얼굴이 자꾸 피곤해 보여요. 무리하지 말아요, 서윤 씨.”그 말에 서윤은 잠시 숨을 멈췄다.지금, 그녀의 일상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짜였을까.낮에는 마케팅팀의 차서윤이고, 밤에는 핑크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또 다른 자신.그 모든 경계가 무너질 듯한 나날 속에서 이렇게 다정하게 건네는 말 한마디는 가끔 견디기 어렵도록 아프게 다가왔다.“하준 씨.”“응?”“저… 혹시, 내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면, 지금처럼 똑같이 대해줬을 것 같아요?”그는 잠시 놀란 표정이었지만, 곧 잔잔한 미소로 대답했다.“그 사람이 차서윤이라면, 그게 어떤 모습이어도 상관없어요. 난… 그냥 서윤 씨가 웃는 걸 보고 싶어요.그게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니까.”서윤은 말없이 커피잔을 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끝으로 전해졌고,그 따뜻함이 마음 어딘가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그날 밤. 서윤은 이진에게도, 하준에게도 아무 연락을 하지 않았다.창밖엔 봄비처럼 가느다란 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녀는 작은 책상 앞
노트북을 켜지 않은 밤이 이틀째였다.서윤은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서도, 늘 펼쳐놓던 문서 파일을 열지 않았다.열지 않아도 머릿속에서는 문장들이 맴돌았다.남주의 대사, 여주의 시선, 침대 머리맡의 호흡, 불 꺼진 방 안에 맺히는 정적의 결.그건 그녀가 늘 써온 것들이었고,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그런데 이제, 그 이야기들이 손끝에서 멀어지고 있었다.누군가가, 그녀의 이야기를 너무 정확히 꿰뚫고 있다는 걸 느끼고부터였다.정하준. 그는 확실히 단정한 사람이었다.처음 봤을 때, 외모보다 그 눈빛에 더 오래 시선이
이상했다. 정말로, 너무 이상했다. 처음엔 단순한 피로였다.글 마감을 넘기고, 커피로 새벽을 버틴 뒤에야 겨우 눈을 붙이는 밤들.아무리 단련된 생활이라 해도, 이중생활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그녀의 피로는 더 이상 수면 부족만이 아니었다.머릿속을 계속해서 맴도는 말들. 누군가의 목소리를 닮은 대사들.그리고, 너무 잘 알고 있는 문장이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들.서윤은 자꾸만 무언가가 흐트러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무대 위에 혼자 서 있던 배우가 무대 밖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을
누군가의 비밀을 알아낸다는 건 원래 이런 느낌일까.하준은 요 며칠 사이 계속 같은 생각을 했다.마치 혼자서만 비밀의 방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처럼,어쩌면 눈앞의 이 사람이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아 하는 어떤 세계를자신만 슬쩍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그 기분은 묘하게 짜릿하면서도, 어딘가 찔리는 느낌이었다.하지만 그는 그 ‘선’을 넘지 않았다.아직은. 아니, 아직까진.그는 이 모든 걸 확신하지도 추궁하지도 않았다.그저 조금씩 더 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그녀가 왜 밤마다 그렇게 늦게까지 노트북을 붙잡고
그는 그녀를 어떤 눈으로 보게 될까.그리고 그 눈은, 그녀가 더 이상 피해갈 수 없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하준은 요즘 이상하리만치 눈에 띄는 사람이 하나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 이상이었다. 그는 자주 그녀를 보고 있었다.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심지어는 때때로 습관적으로.차서윤 팀장. 입사 첫날부터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던 그녀.‘쎄다’, ‘무섭다’, ‘멋있다’, ‘일은 잘한다, 근데 감정이 없다’…그런데 하준에게는 그녀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분명 단정하고 또렷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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