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재혁과 세린은 의과대학 시절부터 오랫동안 연인이었고, 한때 결혼까지 생각했던 사이라고 했다. 두 사람이 헤어진 뒤 재혁이 이경을 만났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경은 남편의 과거를 탓한 적이 없었다.
그가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다.
“한국에 돌아왔대요?”
“응. 이번에는 아예 들어온 모양이야.”
재혁은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여전하네. 사람 놀라게 하는 것도.”
이경은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많이 반가운가 봐요.”
“당연하지. 얼마나 오래 알고 지낸 사인데.”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이경은 더 묻지 않았다.
오래된 친구가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남편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세린이 귀국한 뒤 재혁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주말마다 함께 가던 카페에 가지 않았고, 저녁 약속을 취소하는 날이 잦아졌다. 휴대전화에는 비밀번호가 생겼으며, 이경이 가까이 다가가면 화면을 뒤집어 놓는 버릇까지 생겼다.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사소한 다정함이었다.
출근할 때마다 이경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 잠든 그녀의 이불을 끌어 올려 주던 습관, 병원에서 늦게 돌아오는 날이면 짧게라도 보내던 메시지.
그런 것들이 하나씩 없어졌다.
이경은 남편이 바빠서 그렇다고 생각하려 했다.
그러나 재혁은 아내에게는 피곤하다고 말하면서도 세린에게 전화가 오면 늦은 밤에도 외출했다.
그날도 그랬다.
이경은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수술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온몸이 쑤셨고, 체온계에는 39.1도가 찍혀 있었다.
그녀는 해열제를 먹고 잠시 누워 있었다.
재혁이 저녁을 먹겠다고 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몸을 추슬러야 했다.
이경은 침대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냄비에 쌀을 씻어 넣고 죽을 끓이는 동안 몇 번이나 조리대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몸이 떨려 칼을 쥐기도 어려웠지만 남편이 좋아하는 반찬 두 가지까지 꺼내 놓았다.
재혁이 퇴근했을 때 그녀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왔어요?”
남편은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이경이 몸을 일으켰다.
“죽 끓여 놨어요. 오늘은 제가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때 재혁의 전화가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세린아, 무슨 일이야?”
이경은 남편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뭐? 사고가 났다고? 어디야?”
재혁은 통화를 끊자마자 차 열쇠를 집어 들었다.
“세린이가 차 사고가 났대.”
이경은 소파 팔걸이를 붙잡고 일어섰다.
“많이 다쳤어요?”
“아직 몰라. 가 봐야겠어.”
“어느 병원인데요? 필요하면 제가 아는 응급의학과 선생님께…….”
“됐어. 내가 알아서 해.”
재혁은 급하게 구두를 신었다.
이경은 어지럼증이 밀려와 다시 소파에 주저앉았다. 손을 뻗어 물컵을 집으려다가 손끝이 미끄러졌고, 컵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물이 쏟아졌다.
“재혁 씨…….”
그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돌아보았다.
“왜 또?”
“저도 열이 너무 높아서…….”
말을 끝내기도 전에 심한 오한이 밀려왔다.
이경은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남편이 잠깐이라도 다가와 괜찮으냐고 물어 주기를 바랐다. 이마에 손을 대어 주거나 물 한 잔이라도 가져다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재혁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너 의사잖아. 아프면 알아서 약 먹어.”
이경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데 지금은…….”
“세린이는 사고가 났어. 너처럼 감기 걸려서 누워 있는 거랑 같아?”
재혁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네가 좀 아프다고 내가 세린이까지 모른 척해야겠어? 꼭 이런 때까지 사람을 나쁜 놈으로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니?”
이경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재혁은 바닥에 쏟아진 물을 힐끗 보았다.
“그리고 저것 좀 치워 놔. 내가 돌아왔을 때 집까지 엉망인 꼴은 보기 싫으니까.”
현관문이 닫혔다.
이경은 소파에 기대어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열 때문에 뜨거워진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손등으로 닦아 내도 자꾸만 새어 나왔다.
그녀는 남편이 나간 현관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울음을 참으려 했지만 목 안쪽에서 작은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 부분도 담당 부서에 전달하겠습니다.”두 사람이 떠난 뒤 이경은 서류를 다시 읽었다.종이 위의 글자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재혁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네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인지 잘 생각해.'그 말이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늦은 오후, 이경에게 연구지원 부서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서 교수님, 제출된 연구 발표 자료와 관련해서 확인할 사항이 있습니다.”이경은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어떤 사항인가요?”“민재혁 교수님 측에서 연구 발표 자료를 먼저 제출하셨습니다.”그녀는 잠시 말을 잃었다.“이미 제출했다고요?”“네. 연구 기여와 자료 사용 범위에 관해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이경은 모니터를 바라보았다.조금 전까지 재혁은 그녀에게 일을 크게 만들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자신은 발표를 중단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제출된 자료를 확인할 수 있을까요?”“관련 절차에 따라 확인하실 수 있도록 안내드리겠습니다.”전화를 끊은 이경은 의자에 기대었다.몸속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그녀는 남편이 이혼을 요구했을 때조차 언젠가는 대화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랑이 끝났다고 해도 함께 보낸 시간까지 모두 거짓은 아니었을 거라고.하지만 재혁은 아내가 어떤 연구를 해 왔는지 알고 있었다. 그 연구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는지도 알고 있었다.그런데도 자신의 이름을 앞세워 자료를 제출했다.이경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보았다.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던 그녀는 천천히 반지를 빼냈다.손바닥 위에 놓인 작은 금속 고리가 차갑게 빛났다.결혼식 날 재혁이 직접 끼워 준 반지였다.그녀는 그날을 기억했다.재혁이 자신의 손을 잡고 평생 함께하겠다고 약속했던 순간을.이경은 서랍을 열었다.반지를 넣으려다가 잠시 멈췄다.아직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했던 말은 실수였다고, 자신이 잘못
대신 그는 아내가 이혼 문제로 감정이 격해져 공동연구 발표를 방해하고 있다고 말했다.“저도 이런 말씀까지 드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병원 연구 일정에 차질이 생길까 봐 걱정됩니다.”그는 통화하는 동안 몇 번이나 한숨을 쉬었다.“아내가 요즘 개인적인 문제로 많이 예민해져 있습니다. 연구실에서도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일이 있어서요.”상대방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재혁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네. 저도 최대한 조용히 해결하고 싶습니다. 다만 연구 자료 관리에 문제가 없는지는 확인해 주셨으면 합니다.”통화를 끝낸 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연락했다.“서이경 교수 연구실의 자료 접근 권한부터 확인해 주세요. 공동연구 자료가 외부로 유출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고 전달하면 됩니다.”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실제로 유출 정황이 확인됐습니까?”재혁의 얼굴이 굳었다.“그래서 확인하라는 겁니다. 문제가 생긴 다음에 움직일 생각입니까?”비서는 더 묻지 않았다.재혁은 전화를 끊고 의자에 기대었다.이경이 자신의 이름을 문제 삼을 줄은 몰랐다.늘 남편의 기분을 먼저 살피던 여자였다. 그가 목소리를 높이면 먼저 사과했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 자신의 주장을 접었다.그런 여자가 오늘은 여러 교수 앞에서 자신을 반박했다.재혁은 그 장면을 떠올릴수록 화가 치밀었다.“감히 나를 망신시켜?”그는 책상 위에 놓인 이혼합의서를 바라보았다.아직 이경의 서명이 없는 서류였다.재혁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가 거칠게 내려놓았다.“끝까지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군.”그의 시선이 다시 휴대전화로 향했다.이번에는 인사 담당 부서의 번호를 눌렀다.“서이경 교수의 다음 연구 평가 일정이 언제인지 확인해 주십시오. 그리고 최근 연구 실적 제출 현황도 함께 보고 싶습니다.”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연구 운영과 관련된 문제입니다.”전화를 끊은 재혁은 입술을 비틀었다.이경이 연구를 지키겠다고 나섰다면, 그 연구가 얼마나 쉽게 흔
이경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재혁의 손이 세린의 어깨 위에 놓여 있었다. 세린은 그 손을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가까이 기대었다.이경은 갑자기 자신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낯설게 느껴졌다.남편에게 버림받은 아내가 남편과 그의 연인 앞에서 자신의 연구를 지켜 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그녀를 질투에 사로잡힌 여자처럼 바라보고 있었다.이경은 손에 들고 있던 발표 자료를 정리했다.“연구 관련 자료는 정식으로 확인하겠습니다. 원본 파일과 수정 기록, 연구 승인 서류, 분석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의 기여 내용을 모두 확인할 거예요.”세린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이경은 그녀를 바라보았다.“유세린 선생님도 실제로 어떤 부분에 참여하셨는지 정리해 주세요.”세린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재혁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너 지금 우리를 연구윤리위원회에 신고하겠다는 거야?”“필요하면 정식 절차를 밟겠습니다.”재혁의 얼굴이 붉어졌다.“서이경!”그가 큰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이경은 몸을 움찔했다.오랫동안 익숙해져 있던 반응이었다. 남편이 목소리를 높이면 먼저 잘못한 일을 찾고,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사과하던 습관이었다.하지만 이번에는 사과하지 않았다.“제 연구를 허락 없이 발표하지 마세요.”그 말을 남기고 이경은 회의실을 나왔다.문이 닫히기 직전, 세린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재혁아, 이경 씨가 정말 신고하면 어떡해?”이경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이경이 복도 끝으로 사라지자 세린은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조금 전까지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재혁아, 나 때문에 당신까지 곤란해지는 건 싫어.”재혁은 짜증스럽게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네 잘못 아니야. 이경이가 괜히 일을 키우는 거지.”세린은 대답하지 않고 발표 자료를 바라보았다.첫 페이지에는 자신과 재혁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처음 이 자료를 봤을 때 세린은 놀랐다. 분석이 예상보다 정교했고,
이경은 잠시 말을 잃었다.그녀는 남편에게 연구비를 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연구에 필요한 승인과 자료 사용 절차를 거쳤고, 수많은 시간을 들여 직접 분석했다.그런데 재혁은 자신이 남편이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모든 노력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었다.“저는 당신 이름을 빌려서 연구한 적 없어요.”재혁이 비웃었다.“그래. 이제 와서 혼자 잘났다는 거지?”그는 발표 자료를 집어 들었다.“이경아, 현실적으로 생각해. 네가 그 연구를 발표한다고 누가 그렇게 관심을 가지겠어? 제대로 된 지원도 못 받으면서 몇 년을 붙들고 있을 거야?”이경은 남편을 바라보았다.“그래서 당신 이름으로 발표하려고 했어요?”“내가 발표하면 더 많은 사람이 보겠지. 세린이도 해외 연구 경험이 있으니까 도움이 될 거고.”이경의 손이 천천히 움켜쥐어졌다.재혁은 그 표정을 보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너는 계속 연구하면 되잖아. 굳이 이름 하나 가지고 일을 크게 만들 필요가 있어?”“이름 하나요?”이경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당신한테는 그게 이름 하나예요?”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발표 자료를 집어 들었다.자신이 직접 정리한 표와 그래프가 있었다. 환자의 상태가 나빠지는 과정을 수없이 되짚으며 작성했던 분석이었다.“저는 이 연구를 하면서 몇 번이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어요. 결과가 맞지 않으면 원자료를 확인했고, 해석이 잘못됐을 가능성이 있으면 다시 분석했어요.”이경은 잠시 숨을 골랐다.“당신이 집에 들어왔을 때 제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면 그만 좀 하라고 했잖아요. 그렇게까지 해서 뭐가 달라지겠느냐고.”재혁은 입을 다물었다.“그때는 아무 가치도 없다고 하더니, 이제는 당신 이름으로 발표할 만큼 중요한 연구가 된 거예요?”재혁의 턱이 굳어졌다.“말 다 했어?”“아직요.”이경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유세린 씨 이름은 왜 들어가 있어요?”재혁은 잠시 시선을 피했다.“세린이도 검토에 참여했어.”“어느 부분을요?”“외부 연구 동향이랑 발
민재혁.유세린.자신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서 교수?”재혁이 그녀를 발견했다. 그의 표정이 잠깐 굳어졌다.하지만 곧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회의 중인데 무슨 일이야?”이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스크린에 표시된 그래프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 자료는 어디서 받으셨어요?”재혁이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뜻이야?”“지금 발표하고 있는 분석 자료요. 제가 작성한 연구 초안입니다.”회의실 안이 조용해졌다. 몇몇 의사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세린은 회의실 한쪽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경과 눈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웃었다.“이경 씨, 오셨어요?”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한 목소리였다.이경은 그 웃음을 바라보았다.며칠 전 세린은 남편이 밤새 자신을 간호해 줬다고 말했다. 이경이 고열로 앓고 있던 밤이었다.그 여자는 이제 남편의 옆자리에 앉아 그녀의 연구 결과까지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고 있었다.“이 자료의 원본은 제 연구실에 있습니다. 분석 과정과 수정 기록도 모두 남아 있고요.”재혁은 발표용 리모컨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서이경,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제 이름이 빠져 있는 이유를 묻고 있어요.”재혁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참석자들을 한 번 둘러보았다.“연구라는 게 원래 혼자 하는 일이 아니잖아. 공동연구 자료를 가지고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이경은 남편을 바라보았다.“공동연구라면 각자의 기여를 정확하게 표시해야죠.”“지금 여기서 그걸 따지겠다는 거야?”“네. 이 자료를 외부에 제출하기 전에 확인해야 합니다.”재혁은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나가서 얘기해.”이경은 움직이지 않았다.“아직 검증이 끝나지 않은 결과도 포함되어 있어요. 이 상태로 최종 결과처럼 발표해서는 안 됩니다.”세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이경 씨, 오해가 있으신 것 같아요.”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저희도 연구를 빨리 발전시키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재혁이가 이경 씨 연구를 얼마나 높이 평가
한참 뒤 그녀는 눈물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오전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확인해야 할 연구 자료가 남아 있었다.***이경이 진행하던 연구는 수술 후 합병증의 위험 신호를 조기에 발견하기 위한 것이었다.그녀는 수술 전후 환자의 상태와 검사 결과가 어떻게 변하는지 분석하면서, 기존 방식으로는 놓치기 쉬운 위험 신호를 찾아내려고 했다.연구를 시작한 것은 몇 해 전이었다.한 환자의 상태가 갑자기 악화된 날이었다. 수술은 계획대로 끝났고 수술 직후에도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그러나 몇 시간 뒤 환자는 예상하지 못한 합병증으로 중환자실에 들어갔다.그날 이경은 밤새 환자의 기록을 다시 읽었다.분명 어딘가에 신호가 있었을 것 같았다. 의료진이 그 변화를 더 일찍 알아차렸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그 질문은 오랫동안 그녀를 붙잡았다.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실패도 많았다. 처음 세운 가설이 맞지 않아 분석을 다시 시작했고, 일부 자료에서는 기대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통계적 의미가 있어 보였던 지표가 다른 조건에서는 충분한 설명력을 갖지 못하기도 했다.그럴 때마다 이경은 원자료로 돌아갔다. 환자의 상태와 검사 시점, 치료 과정에서 달라진 조건들을 다시 확인했다.연구가 느리게 진행되는 것은 답답했지만, 결과를 서둘러 발표하는 것보다 정확하게 확인하는 일이 중요했다.그런데 남편은 그녀의 연구를 이해하지 못했다.'그걸 해서 뭐가 달라지는데?'재혁은 집에서 논문을 읽고 있는 이경을 볼 때마다 그런 말을 했다.'당신은 맨날 환자하고 논문밖에 모르잖아. 집에서도 병원 일만 생각할 거면 결혼은 왜 했어?'그 말을 들으면 이경은 컴퓨터를 덮었다.남편이 싫어하니까. 함께 보내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서운해하니까.그녀는 연구 자료를 새벽에 확인하는 날이 많아졌다. 재혁이 잠들면 조용히 일어나 거실로 나왔고,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전에 분석표를 수정했다.그렇게 쌓아 온 시간이 몇 년이었다.이경은 연구실 컴퓨터를 켰다.모니터에 익숙한 논문 초안이 나타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