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남편이 버린 아내는 천재 외과의였다: Chapter 1 - Chapter 10

18 Chapters

1화

서이경은 남편이 좋아하는 생선의 가시를 발라내다가 식탁 맞은편을 바라보았다.민재혁은 벌써 세 번째 휴대전화를 확인하고 있었다. 국에서는 김이 사라진 지 오래였고, 그가 좋아하는 반찬도 거의 손대지 않은 채였다. 이경은 생선 살을 접시 한쪽에 가지런히 모아 놓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재혁 씨, 국이 식었는데 다시 데워 드릴까요?”재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휴대전화에 메시지가 도착하자 조금 전까지 굳어 있던 그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이경은 그 표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언제부터였을까. 남편이 자신에게는 저렇게 웃어 주지 않게 된 것이.“재혁 씨?”“아, 왜 자꾸 불러?”그가 짜증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국이 식어서요. 다시 데워 드리려고…….”“됐어. 입맛 떨어지게 자꾸 말 걸지 마.”재혁은 수저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이경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음식이 마음에 안 들어요? 다른 거라도 해 드릴까요?”“서이경.”재혁이 돌아보았다.“내가 안 먹겠다는데 왜 그렇게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어? 네가 차려 준 밥은 무조건 먹어야 해?”이경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그런 뜻이 아니라……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드셨잖아요.”“그럼 그냥 내버려 둬. 내가 어린애야?”그는 재킷을 집어 들었다.이경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어디 가세요? 오늘은 일찍 들어온다고 하셨잖아요.”“약속 생겼어.”“그럼 저녁은…….”“너 혼자 먹어.”재혁은 현관으로 걸어가다가 다시 돌아보았다.“그리고 앞으로 나 기다린다고 밥상 차려 놓지 마. 퇴근해서 들어올 때마다 네가 그렇게 앉아 있는 것도 부담스러워.”이경은 식탁 옆에 선 채 움직이지 못했다.“저는 그냥…… 같이 밥 먹고 싶어서 그랬어요.”“알아. 그런데 나는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어. 그 정도는 알아서 눈치껏 해 주면 안 돼?”재혁은 구두를 신으며 덧붙였다.“집에 들어와서까지 네 기분 살펴 가며 행동하고 싶지 않아.”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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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재혁과 세린은 의과대학 시절부터 오랫동안 연인이었고, 한때 결혼까지 생각했던 사이라고 했다. 두 사람이 헤어진 뒤 재혁이 이경을 만났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경은 남편의 과거를 탓한 적이 없었다.그가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다.“한국에 돌아왔대요?”“응. 이번에는 아예 들어온 모양이야.”재혁은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며 웃었다.“여전하네. 사람 놀라게 하는 것도.”이경은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많이 반가운가 봐요.”“당연하지. 얼마나 오래 알고 지낸 사인데.”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이경은 더 묻지 않았다.오래된 친구가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남편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세린이 귀국한 뒤 재혁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주말마다 함께 가던 카페에 가지 않았고, 저녁 약속을 취소하는 날이 잦아졌다. 휴대전화에는 비밀번호가 생겼으며, 이경이 가까이 다가가면 화면을 뒤집어 놓는 버릇까지 생겼다.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사소한 다정함이었다.출근할 때마다 이경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 잠든 그녀의 이불을 끌어 올려 주던 습관, 병원에서 늦게 돌아오는 날이면 짧게라도 보내던 메시지.그런 것들이 하나씩 없어졌다.이경은 남편이 바빠서 그렇다고 생각하려 했다.그러나 재혁은 아내에게는 피곤하다고 말하면서도 세린에게 전화가 오면 늦은 밤에도 외출했다.그날도 그랬다.이경은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수술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온몸이 쑤셨고, 체온계에는 39.1도가 찍혀 있었다.그녀는 해열제를 먹고 잠시 누워 있었다.재혁이 저녁을 먹겠다고 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몸을 추슬러야 했다.이경은 침대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냄비에 쌀을 씻어 넣고 죽을 끓이는 동안 몇 번이나 조리대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몸이 떨려 칼을 쥐기도 어려웠지만 남편이 좋아하는 반찬 두 가지까지 꺼내 놓았다.재혁이 퇴근했을 때 그녀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왔어요?”남편은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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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바닥에 떨어진 컵은 손이 닿지 않는 곳에 굴러가 있었다.이경은 한참 뒤에야 몸을 숙여 컵을 주웠다. 물기를 닦으려고 걸레를 가져왔지만 쪼그려 앉자 어지럼증이 밀려왔다. 결국 주방 바닥에 주저앉은 채 잠시 눈을 감았다.눈을 뜨니 남편이 벗어 놓고 간 실내화가 보였다.이경은 그것을 가지런히 돌려놓았다.재혁이 돌아왔을 때 바로 신을 수 있도록.그렇게 실내화를 정리하다가 또다시 눈물이 쏟아졌다.그날 밤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새벽 두 시가 지나도록 잠들지 못한 이경은 몇 번이나 휴대전화를 확인했다.재혁에게서 연락은 없었다.그녀는 결국 메시지를 보냈다.'세린 씨는 괜찮아요?'한참 뒤 답장이 왔다.'별일 없어.'이경은 그 짧은 문장을 여러 번 읽었다.별일이 없다니 다행이었다.그런데 남편은 왜 돌아오지 않을까.그녀는 다시 메시지를 쓰다가 지웠다.'저도 아직 열이 높아요.'그 말을 보내면 남편이 돌아올까.잠시 망설이던 이경은 결국 메시지를 지웠다.재혁이 자신을 귀찮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다음 날 아침, 재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집에 돌아왔다.이경은 거실 소파에서 밤을 새운 상태였다. 해열제를 먹었지만 열은 충분히 내려가지 않았고, 눈가에는 울다 잠든 흔적이 남아 있었다.“왔어요?”그녀는 남편을 보자마자 몸을 일으켰다.“세린 씨는 괜찮아요?”“응. 별일 아니었어.”재혁은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쳤다.“다행이네요.”이경은 안도했다.그런데 재혁은 그녀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너는 아직도 그 모양이야?”이경은 손등으로 이마를 짚었다.“열이 조금 남아 있어서요.”“의사라는 사람이 자기 몸 하나 관리 못 해?”그는 한숨을 내쉬었다.“세린이는 사고가 나고도 나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라. 그런데 너는 감기 하나 가지고 며칠째 난리야.”이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재혁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마시며 덧붙였다.“오늘은 좀 쉬어. 괜히 아프다고 계속 나 붙잡지 말고.”그는 침실로 들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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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이경은 억지로 웃었다.“재혁 씨가 많이 걱정했나 봐요.”“네. 예전에도 그랬거든요. 제가 조금만 아파도 밤새 옆에서 간호해 주고, 먹고 싶은 게 있다고 하면 어디든 달려가고.”세린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사람이 참 안 변해요. 그렇죠?”이경은 대답하지 못했다.수화기 너머에서 세린이 낮게 웃었다.“참, 이경 씨. 재혁이한테 너무 서운해하지 마세요. 원래 마음이 약한 사람이잖아요. 누가 아프다고 하면 그냥 못 지나치는 거.”그 말이 이상하게 아팠다.이경도 아팠다.남편은 그녀가 열에 시달리며 울고 있을 때 다른 여자에게 달려갔다.하지만 세린은 그 사실을 모르는 듯 말을 이어 갔다.“아무튼 고마워요. 이경 씨가 이해해 주셔서 저도 마음이 편하네요.”전화를 끊은 뒤 이경은 한동안 휴대전화를 내려놓지 못했다.세린의 말은 친절했지만 마음속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이 남았다.그날 밤 세린은 재혁에게 따로 전화를 걸었다.“재혁아, 나 오늘 이경 씨랑 통화했어.”“왜?”“그냥 고맙다고 인사하려고. 그런데 이경 씨 정말 착하더라.”재혁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세린은 침대에 기대어 손톱을 만지작거렸다.“그렇게 착한 아내가 있는데 당신이 자꾸 나한테 오는 게 마음에 걸려.”“세린아.”“아니, 정말이야. 나 때문에 두 사람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재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싶었다.“그런 걱정 하지 마.”그가 대답했다.세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그래도 이경 씨가 불쌍하잖아.”“우리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게.”세린은 눈을 감았다.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이경이 재혁의 아내라는 사실은 여전히 거슬렸다. 자신보다 먼저 그의 집에 들어가고, 그의 옷을 정리하고, 그의 이름으로 된 가족관계증명서에 아내로 올라 있는 여자.그 자리를 이경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싫었다.재혁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했다.그가 이경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까지 확인하고 싶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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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밤 열 시가 지나고 열한 시가 되었다.거실 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이경은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를 확인했다.남편에게서 연락은 없었다.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그녀는 결국 전화를 걸었다.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왜?”재혁의 목소리 뒤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아직 밖이에요?”“응. 무슨 일인데?”이경은 식탁 위의 케이크를 바라보았다.“오늘 무슨 날인지 기억해요?”잠깐 침묵이 흘렀다.“이경아, 나 지금 사람들하고 있어.”“알아요. 그런데 오늘이 우리 결혼기념일이라서…….”“그런 건 나중에 챙기면 되잖아.”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재혁아, 아직도 통화해?”이경은 숨을 멈췄다.유세린이었다.재혁이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 대답했다.그러더니 다시 이경에게 말했다.“늦으니까 먼저 자.”통화가 끊겼다.이경은 한동안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앉아 있었다.식탁 위에서는 촛불을 켜 보지도 못한 케이크가 천천히 실온에 녹고 있었다.그녀는 결국 냉장고 문을 열었다.케이크를 넣으려다가 안쪽 선반에 놓인 반찬통들을 보았다. 모두 재혁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이경은 갑자기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다섯 해 동안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결혼 전에는 매운 음식을 좋아했다. 밤늦게 수술을 마치면 동료들과 얼큰한 찌개를 먹으러 가는 것도 즐거웠다. 여행을 간다면 사람이 많은 도시보다 바다가 보이는 작은 마을을 선호했고, 휴일에는 책을 읽거나 아무 계획 없이 걷는 것이 좋았다.하지만 재혁은 매운 음식을 싫어했다.여행은 늘 호텔 시설이 좋은 곳으로 갔고, 휴일에는 남편의 일정에 맞추어 움직였다.그렇게 살다 보니 이제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했는지조차 가끔 헷갈렸다.이경은 케이크를 냉장고에 넣었다.그리고 불을 끄고 침실로 들어갔다.남편의 베개는 아직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그녀는 침대 한쪽에 누워 오래도록 문 쪽을 바라보았다.새벽이 가까워졌을 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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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한참을 울다가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아 변기 앞에 주저앉았다.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토할 것은 없었지만 헛구역질이 멈추지 않았다.이경은 차가운 타일에 손바닥을 짚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세수를 하고 침실로 돌아왔을 때 재혁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그녀는 남편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불 끝을 조심스럽게 정리해 주었다.그리고 침대 가장자리에 누웠다.잠은 끝내 오지 않았다.재혁이 이혼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로부터 사흘 뒤였다.그날 이경은 예상보다 일찍 병원 일을 마쳤다.수술 일정이 변경되면서 저녁 시간이 비었고, 오랜만에 남편과 함께 식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재혁이 좋아하는 빵을 샀다. 저녁 메뉴를 고민하다가 그가 최근 입맛이 없다고 했던 것을 떠올리고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준비했다.현관문을 열었을 때 집 안에는 이미 불이 켜져 있었다.재혁의 구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이경은 반가운 마음에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재혁 씨, 오늘 일찍 왔네요?”대답이 없었다.그녀가 거실로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있던 재혁이 고개를 들었다.그는 외출복 차림 그대로였다. 넥타이만 느슨하게 풀어 놓았을 뿐, 평소처럼 편한 옷으로 갈아입지도 않았다.테이블 위에는 갈색 서류 봉투가 놓여 있었다.“앉아 봐.”그의 말투가 이상했다.이경은 손에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식탁에 올려놓았다.“무슨 일 있어요?”“할 얘기가 있어.”재혁은 그녀가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이경은 소파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지만, 좋지 않은 이야기라는 것만은 느껴졌다.“병원에서 무슨 일 생겼어요?”재혁은 대답 대신 테이블 위의 봉투를 그녀 앞으로 밀었다.“읽어 봐.”이경은 봉투를 내려다보았다.손을 뻗어 서류를 꺼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네 글자였다.이혼합의서.그녀는 한동안 글자를 읽지 못했다.눈앞에 분명히 적혀 있는데도 뜻이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이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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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서이경.”그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결혼한 뒤 남편이 그녀의 성까지 붙여 부르는 일은 드물었다.이경은 입을 다물었다.재혁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세린이가 돌아왔어.”이경의 눈꺼풀이 느리게 움직였다.“알아요. 전에 말했잖아요.”“나 세린이 다시 만나고 있어.”그녀는 서류를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종이 모서리가 손바닥을 누르고 있었다.“친구로 만나는 거잖아요.”재혁은 대답하지 않았다.이경은 그 침묵이 두려워졌다.“그렇잖아요. 오래된 친구라고 했잖아요.”“처음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재혁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그런데 아니더라.”거실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이경은 남편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찾으려 했다. 미안함이든, 망설임이든, 자신에게 아직 남아 있는 애정이든.하지만 재혁은 이미 결론을 내린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나 세린이 사랑해.”이경의 손에서 서류가 미끄러졌다.종이가 테이블 아래로 떨어졌지만 누구도 주우려 하지 않았다.“……뭐라고요?”“세린이 사랑한다고.”이번에는 분명하게 들렸다.이경은 숨을 들이마셨다.그런데 공기가 목 안쪽에서 걸리는 것 같았다.“저는요?”재혁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뭐?”“그럼 저는 뭐예요?”그녀는 남편을 바라보았다.“저는 재혁 씨 아내잖아요.”재혁은 대답하지 않았다.“우리 결혼했잖아요. 5년이나 같이 살았고, 앞으로도 계속 같이 살기로 약속했잖아요.”말을 이어 갈수록 목소리가 떨렸다.이경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인지 몰랐다. 병원에서는 위급한 환자를 앞에 두고도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예상치 못한 출혈이 생겨도 먼저 상황을 판단하고, 필요한 지시를 내리고, 가장 위험한 문제부터 해결했다.그런데 지금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저 아직 당신 사랑해요.”재혁의 시선이 잠시 흔들렸다.이경은 그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그러니까 우리 다시 해 봐요. 당신이 요즘 힘들었다면 제가 더 신경 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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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그래서 제가 맞췄잖아요.”그녀의 입에서 처음으로 원망에 가까운 말이 나왔다.재혁이 고개를 들었다.이경은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당신이 좋아하는 음식 먹고, 당신이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당신이 쉬고 싶을 때는 저도 약속 취소했어요. 당신이 불편해하는 일은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했고요.”그녀는 손등으로 눈가를 눌렀다.“그렇게 하면 우리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어요.”재혁은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언제 그렇게까지 하라고 했어?”이경의 입술이 벌어졌다.“뭐라고요?”“네가 좋아서 한 일이잖아. 내가 강요한 적은 없어.”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 말이 틀리지 않아서 더욱 아팠다.재혁은 억지로 시키지 않았다.그녀가 먼저 좋아하는 음식을 물었고, 먼저 일정을 맞췄으며, 먼저 양보했다.사랑하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그런데 그 사랑이 이제는 자신 혼자 선택한 일이라는 이유로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재혁은 잠시 이경을 바라보다가 서류를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그리고 이경아, 솔직히 말해서 네가 그렇게까지 맞추는 것도 가끔은 부담스러웠어.”이경은 고개를 들었다.“부담스러웠다고요?”“내가 조금만 피곤하다고 해도 밥 차려 놓고 기다리고, 뭘 먹고 싶은지 계속 묻고. 너한테는 그게 사랑이었겠지만 나한테는 꼭 그렇지만도 않았어.”그녀는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재혁은 여전히 침착했다.“세린이는 달라. 나를 편하게 해 줘. 내가 뭘 좋아하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굳이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맞아.”이경은 숨을 삼켰다.그녀가 남편을 위해 노력했던 시간들이 다른 여자와 비교당하고 있었다.“그럼 저는…… 당신을 불편하게 했어요?”재혁은 대답을 고르는 듯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적어도 지금은 그래.”이경은 손을 무릎 위로 내려놓았다.그 말은 그녀가 예상했던 어떤 비난보다도 아팠다.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남편에게 다가갔다.“재혁 씨, 제발…….”재혁은 인상을 찌푸렸다.“또 왜?”이경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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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그는 서류를 가리켰다.“그리고 너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으면 이제 그만해. 내가 다른 여자 사랑한다는데 이렇게 매달리는 거, 솔직히 보기 안 좋아.”이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재혁은 재킷을 집어 들었다.“서류는 이번 주 안에 정리해.”그녀가 고개를 들었다.“어디 가요?”“세린이 만나러.”이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지금…… 저한테 이혼하자고 해 놓고 그 여자 만나러 가요?”재혁은 귀찮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그럼 여기서 네가 우는 거 계속 보고 있어야 해?”이경은 입술을 깨물었다.재혁은 현관으로 향했다.그녀는 마지막으로 남편을 불렀다.“재혁 씨…….”그가 돌아보았다.이경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 여자하고…… 이미 다 결정한 거예요?”재혁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세린이한테 더는 상처 주고 싶지 않아.”이경은 그 말을 듣고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더는 상처 주고 싶지 않다.남편은 다른 여자의 상처를 걱정하고 있었다.지금 눈앞에서 울고 있는 아내를 두고.“저는요?”그녀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아졌다.“저한테는 상처 줘도 괜찮아요?”재혁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다가 잠시 멈췄다.“세린이는 오랫동안 힘들었어. 이번에는 내가 제대로 지켜 주고 싶어.”그는 이경을 돌아보지 않은 채 덧붙였다.“그러니까 너도 더는 일을 어렵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어.”현관문이 닫혔다.이경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복도에서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고, 잠시 후에는 아무런 기척도 남지 않았다.집 안에는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만 낮게 울렸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이경은 거실 바닥에 떨어진 이혼합의서를 주웠다.종이에는 두 사람의 이름과 재산 분할에 관한 항목들이 적혀 있었다. 재혁이 미리 준비했다는 사실이 이제야 실감 났다.그는 오늘 충동적으로 이혼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아내가 모르는 사이에 서류를 준비하고, 자신의 생활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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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수화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교수님, 죄송합니다. 간담췌외과 응급 환자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이경은 몸을 일으켰다.“무슨 환자인데요?”“수술 후 출혈이 의심되는 환자인데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고 있습니다. 현재 응급 처치 중이고, 당직 교수님께서도 확인하셨는데 교수님 의견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이경은 테이블 위에 놓인 이혼서류를 바라보았다.잠시 전까지 남편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조차 감당하기 어려웠다.그런데 병원에서는 누군가의 생명이 위태로워지고 있었다.“현재 혈압하고 맥박은요?”그녀의 목소리가 달라졌다.“혈압 78에 46, 맥박 132입니다. 수액 투여 중인데도 혈압이 계속 떨어집니다.”“소변량은요?”“최근 한 시간 동안 거의 없습니다.”이경은 곧바로 다음 질문을 던졌다.“배액관에서는 얼마나 나오고 있어요?”“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한 시간 동안 40밀리리터 정도입니다.”“배가 팽만해졌다는 보고는 없었어요?”수화기 너머에서 잠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잠시만요. 간호 기록에는 두 시간 전부터 복부 팽만이 증가했다고 되어 있습니다.”이경의 눈빛이 달라졌다.“배액관 양이 적다고 출혈이 적은 건 아니에요. 복강 안에 피가 고이고 있을 가능성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수술 후 몇 시간 지났죠?”“여섯 시간입니다.”“최근 헤모글로빈 수치는요?”“수술 직후 10.2였는데 지금 7.4입니다.”이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수술 후 여섯 시간, 진행되는 빈맥과 저혈압, 감소한 소변량, 급격한 헤모글로빈 저하. 여기에 배액량은 적지만 복부 팽만이 증가하고 있었다.단순히 수액이 부족해서 나타나는 변화로 넘길 상황이 아니었다.“지금 환자 상태에서는 검사 결과를 기다리느라 시간을 지체하면 위험할 수 있어요. 당직 교수님께 즉시 재수술 가능성을 보고하고, 마취과와 수술실에도 긴급 상황을 알려 주세요. 혈액은행에는 대량수혈 프로토콜 준비를 요청하고요.”“네, 교수님.”“환자 의식 상태와 호흡도 계속 확인해 주세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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