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서준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누나, 핸드폰 예정 누나한테 줘. 누나한테 몇 마디 할 얘기가 있어.”심효진이 투덜거렸다.“난 네 친누나야. 게다가 우리 집안일인데 나한테는 말도 안 하고 예정이한테 말하는 게 어디 있어? 이 자식, 네가 날 속일 수 있을 것 같아?”잠시 투덜거렸지만, 심효진은 이내 하예정에게 휴대폰을 건네며 말했다.“서준이 이 나쁜 녀석이 뭔가 숨기고 있어. 신비스럽게 굴면서 말이야.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너랑 얘기하고 싶다네.”하예정은 웃으며 휴대전화를 건네받고는 심서준에게 물었다. “서준아, 무슨 일이야? 누나한테 말해 봐, 효진 누나한테 비밀로 해줄게.”사실 심효진은 이미 심서준이 말만 하면 바로 엿들을 수 있게 옆에 붙어서 준비하고 있었다.심효진은 동생의 말에 호기심이 생겨 자기 집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궁금했다. 좋은 일이 생긴 것이라고는 했지만 도대체 어떤 좋은 일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예정 누나, 우리 누나 옆에서 엿들을 준비하고 있죠? 밖에 나가요. 누나를 옆에 있게 하지 말고요. 예정 누나 혼자 있을 때 다시 말해줄게요.”심서준은 자신의 누나를 너무나도 잘 안다.하예정은 심효진을 바라보았다.“이런, 이 녀석 천리안이라도 생겼나.”심효진의 투덜거리는 소리에 하예정이 웃으며 일어나 서점을 나섰다.심효진은 하예정이 안 이상 무조건 그녀에게 말해줄 것으로 생각하며 따라나서지는 않았다.심서준이 하예정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몇 분 후, 하예정은 돌아와서는 빙그레 웃으며 휴대폰을 돌려주며 말했다.“효진아, 가게 일은 신경 쓰지 말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 봐. 여긴 다른 사람들이 남아서 도와주면 되니까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가.”“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래? 예정아, 그 녀석이 뭐라고 했어? 말 좀 해 봐.”심효진은 호기심에 마음이 간지러워 났지만, 동생도, 절친마저도 그녀에게 말해주지 않았다.“돌아가 보면 알게 될 거야. 지금 알려주면 재미가 떨어져서 안 돼. 어쨌든 좋은 일이야, 빨리 돌아
“효진이가 돌아왔어.”누군가 심효진을 발견하고 큰 소리로 외치자, 심효진네 집 앞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즉시 양쪽으로 비켜서며 길을 내주었다.집 문 앞에 둘러선 사람들은 대부분 마을 사람이었고 근처의 세입자들도 있었다. 그들 모두가 그녀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모두가 비켜준 후에야, 심효진은 사람들이 무엇을 구경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집 문 앞에는 커다란 꽃바다가 펼쳐져 있었다.하루 종일 그녀에게 전화도 문자도 하지 않은 소정남이 장미 꽃다발을 손에 들고 꽃바다 옆에 서서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누나, 빨리 와.”스쿠터에서 내리기 바쁘게 심효진은 심서준에게 이끌려 꽃바다 앞에 섰다. 그곳에는 소정남이 수천 송이의 장미꽃으로 새긴 몇 글자가 있었다.「효진 씨, 나랑 결혼해 줄래요?」소정남의 깜짝 프러포즈였다.좀 촌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꽃으로 글자를 새기면 멋지고도 낭만적이라고 생각한 소정남이 오늘 사람들 앞에서 심효진에게 프러포즈하기로 했다.심효진은 평소에 주로 서점이 아니면 집에 있었다.학교 앞에 있는 가게에서 프러포즈하면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결국 심효진네 집 앞을 꽃바다로 만들어 프러포즈하기로 했다. 심씨네 가족들에게 자기의 성의를 보여줄 겸해서 말이다.사실 소씨네와 심씨네 양가 모두 두 사람이 빨리 결혼하기를 바라고 있었다.소정남의 어머니는 며칠에 한 번씩 심씨네 집을 방문했고, 두 집 어르신도 진작부터 허물없이 친해져 소정남이 프러포즈하기를 기다려서 결혼식을 올릴 생각이었다. “누나, 예쁘지? 매형이 얼마나 오랜 시간을 들여 이 글자를 새겼는지 알아? 오늘 관성의 모든 장미꽃을 다 사버리는 통에 많은 꽃가게에서 급하게 꽃을 들여와야 했어.”새빨간 장미꽃바다에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물들여졌고 심장이 쿵쾅댔다. 장미꽃으로 새긴 글자들을 바라보는 심효진의 마음도 따뜻해졌다.소정남의 프러포즈 방식이 비록 좀 촌스럽긴 하였지만, 그녀는 여전히 로맨틱하다고 생각했다.그가 꽃다발을 들고 걸어오자
심효진이 아직 프러포즈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보고 심효진의 고모가 말했다.“어서 프러포즈를 받아들이지 않고 뭐해, 소 이사 같은 훌륭한 남자는 등불을 들고 찾아도 찾기 바쁜데. 내가 너 대신 승낙하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지경이야.”“누나, 빨리 대답하지 마!. 그러면 누나가 시집가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이잖아.”엄마의 말에 김진우가 말했다.소정남과 결혼하기를 원한 심효진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그가 건네준 꽃다발을 손에 들고 웃으며 큰소리로 대답했다.“네, 좋아요.”소정남은 격동된 얼굴로 급히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내 심효진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심효진이 그를 일으켜 세우자, 그는 그녀를 껴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붉은 입술에 키스했다.주위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울렸다.“언제 이걸 다 준비했어요?”심효진이 낮은 목소리로 소정남에게 물었다.“오래전부터 계획을 세웠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하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았어요. 효진 씨 마음에 들어요?”심효진이 그를 올려다보며 웃었다.“싫었다면 프러포즈도 받아들이지 않았겠죠. 정남 씨의 마음이 진심이라면, 어떤 장소에서 프러포즈해도 다 허락했을 거예요.”물론, 소정남이 프러포즈를 세심하게 준비하니 기분이 더 좋은 건 당연했다. 그녀를 얼마나 중히 여기고 사랑하는지 보였기 때문이다.“깜짝 이벤트를 준비하느라 하루 종일 전화도 안 하고 문자도 없었던 거였네요.”소정남이 다정한 눈길로 심효진을 바라보며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효진 씨에게 깜짝 선물을 하고 싶어서 서준이 보고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그 녀석이 좋은 일이라고 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정남 씨가 프러포즈할 줄은 몰랐어요.”심효진의 마음은 꿀을 바른 것처럼 달콤해 났다.두 사람은 오랫동안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잠시 후, 가족과 이웃들이 여전히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심효진은 기쁨과 부끄러움으로 예쁜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서는 서둘러 소정남을 밀어냈다.“사진 찍을래요.”심효진은 지금 이 행복한
“어서 집 안으로 들어가지. 오늘은 여기서 식사해.”심효진의 아버지 심범수는 비록 예비 사위가 매우 만족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여전히 정중하게 대했다.“아버님께서 말씀 안 하셔도 여기서 저녁 얻어먹으려 했어요.”소정남이 뻔뻔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또 심효진의 고모에게 고모라고 부르고는, 김진우에게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진우야, 아버지께 퇴근하고 삼촌 집에 식사하러 오시라고 전화드려.”심미란이 기분이 좋아서 아들에게 분부했다.조카딸을 재벌 가문에 시집보내려고 맞선자리를 많이 주선해 주었지만, 안타깝게도 조카딸은 재벌과 결혼하지 않으려고 연회에서 땅바닥에 드러눕기까지 했다. 그 소문이 퍼지는 바람에 더는 조카딸을 대신해서 주선해 주기도 힘들었다.심미란은 조카딸이 재벌 집에 시집갈 수 없으면, 심씨 가문과 비슷한 집에 시집가도 괜찮다고 생각했다.그들 심씨네 집안 조건도 나쁘지 않으니 말이다. 셋집도 많이 가지고 있고 거리의 절반을 차지하는 상가도 있어서 모든 자산을 합치면 재산이 몇십억을 넘는다.하예정의 초고속 결혼 대상이 뜻밖에도 전씨 가문 큰 도련님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란 심미란은 하예정도 재벌 집으로 시집갈 수 있는데, 그녀가 가장 아끼는 조카딸은 왜 그런 복이 없냐고 한탄했다.나중에 전태윤과 하예정의 연줄로 소정남이 심효진을 좋아하게 되자, 그녀는 진심으로 조카딸을 위해 기뻐했다.그녀가 과거에 조카딸에게 소개하려고 했던 남자 중 누구도 소정남과 비교할 수 없었으니까.하예정을 짝사랑하는 아들이 하마터면 내연남이 될 뻔하자, 그녀는 아들을 구하고 김씨 그룹을 지키기 위해 마음을 모질게 먹고 아들을 외지로 보내 단련을 받게 했다.그녀는 줄곧 김씨 그룹을 지키지 못할까 봐 걱정했는데, 전태윤 부부가 조카딸과 소정남을 맞세우고 주선에 성공하자 마음을 놓았다.소정남과 심효진 덕분에, 그들 김씨 그룹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김진우가 웃으며 대답했다.“알겠어요, 지금 아버지께 퇴근 후에 오시라고 전화드릴게요.”예비 사위가 집
소정남의 말에 심효진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이 사람, 너무 조급한 거 아니야?’“그럼 약혼식부터 올리고, 혼인신고를 한 후에 결혼식을 올리는 거로 해요.”소정남은 심효진의 뜻을 매우 존중했고 그녀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이에 심씨 가족들을 매우 만족스러웠다.소정남의 신분에 맞춰 그와 심효진의 약혼식은 관성 상류사회의 유명 인사들을 초대하여 떠들썩하게 치를 것이다.그는 먼저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자신이 심효진에게 프러포즈했고 그녀도 이미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고 알렸다. 시간 되면 이리로 와서 장인어른, 장모님과 함께 혼사에 대해 상의해 달라고 부탁했다.아들의 말을 들은 최민주는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의 일이 아무리 바빠도 네 혼사만큼 중요하지는 않아. 알았어, 너희 아빠랑 큰아버지들까지 불러 후한 선물을 준비해서 사돈집으로 갈게.”“고마워요, 엄마.”“고맙긴 뭐가 고마워, 엄마도 기뻐. 정남아, 엄마가 몇 마디 당부할 게 있어. 앞으로 효진이를 잘 대해줘야 한다, 괴롭히면 안 돼. 엄마는 네가 아들이라고 무작정 돕는 사람이 아니니. 효진의 말이 맞는다면 넌 무조건 양보해야 한다. 설사 맞지 않대도 양보해야 하는 거야. 며느리를 얻기 쉽지 않아.”그녀의 아들은 눈이 너무 높은지라, 모처럼 심효진을 위해 솔로 생활을 끝내고 싶어 하는 것을 보고 미래의 며느리를 매우 중시했다. 게다가 전에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이미 집안 대대로 내려온 보물을 심효진에게 주었고 그녀를 맏며느리로 인정했다.“엄마, 알겠어요.”소정남의 표정은 진지했다. 이런 인생의 큰일에 있어서 그는 결코 장난을 칠 엄두를 내지 못했고 심사숙고하며 자기 마음속의 진실한 생각을 따랐다.“그래, 엄마는 우리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으니, 네가 효진에게 잘해줄 거라고 믿어. 이 정도로만 말할게. 먼저 너희 큰어머니한테 전화해서 대신 후한 선물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하려고.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사돈집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소정남은 그의 나이 또래에서 처음으로 결
심효진은 말했다.“이제 소지훈 씨가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거든 꼭 나한테 알려줘요. 어떤 여자가 소지훈 씨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 궁금하거든요.”소정남은 그녀에게 바짝 다가가 볼에 뽀뽀한 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앞으로 효진 씨도 우리 소씨 가문 사람이에요. 우리 형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분명 우리가 제일 먼저 알게 될 거예요.”심효진은 그를 가볍게 밀어냈다.“어르신들 계시잖아요.”‘뽀뽀까지 하고...’그녀가 아무리 대담해도 어른들 앞에서 그에게 뽀뽀하기는 부끄러웠다.“우리가 친밀하게 보일수록 어르신들이 더 좋아해요.”심효진은 재빨리 윗사람들을 바라보았지만, 그들은 한창 약혼 날짜를 의논하고 있었고 전혀 두 사람을 관심하지 않았다.“나가서 산책이나 할까요?”심효진이 제안하자 소정남은 기다렸다는 듯 이내 응낙했다.“엄마, 저 정남 씨랑 산책하러 갈게요.”심효진은 엄마에게 한마디 하고는 소정남을 끌고 집에서 나왔다.문 앞의 꽃바다는 여전했고 밤이 되니 불빛이 반짝거리기까지 했다. 그건 소정남이 꽃 위에 여러 컬러의 라이트들을 배치해 놓아 밤이 되면 반짝반짝 빛났다.심씨네 집 앞 가로등들도 켜져 있었다. 온갖 종류의 외제 차가 주차된 것을 보고, 심효진은 곁에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나는 우리 집안과 비슷한 남자를 찾아 다른 사람에게 세를 주며 자면서도 돈을 벌 생각은 한 적이 있지만 정남 씨와 함께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나도 상가를 비롯한 부동산이 꽤 있어요. 돈은 은행에 넣어두면 가치가 떨어지니까 모두 투자하는 편이에요. 그러니 효진 씨는 앞으로도 여전히 임대하며 살 수 있어요. 내 명의로 된 그 집들과 상가들을 임대한 후 전부 효진 씨에게 맡길게요. 받은 임대료는 효진 씨가 쓰고 싶으면 쓰고, 쓰고 싶지 않으면 땅을 사서 임대해주고 계속 돈을 벌어도 좋고요.”“지금은 땅을 사서 집을 지으려면 가격이 너무 높아요. 정책이 갓 바뀌었을 때는 아주 저렴한 값에 땅을 사서 집을 지을 수 있었어요. 지금은 임대료가 올라가는
하예정은 참지 못하고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정말 아직도 질투한다고?”하예정은 다시 전화를 걸지 않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그녀는 휴대폰을 카운터에 올려놓고 잠시 침묵에 잠긴 후 뜨개질 도구를 꺼냈다. 할 일이 없을 때는 다시 뜨개질을 시작하게 된다.2분도 안 지나 한 꽃다발이 불쑥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하예정이 고개를 들자, 전태윤의 그윽한 눈과 마주쳤다.“당신... 왜 자꾸 전화를 안 받아요? 메시지를 보내도 답장을 안 하고.”공예품을 짜는 것을 멈추고 하예정은 그 꽃다발을 받아 들고는 그에게 한마디 불평했다.전태윤은 계속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거의 다 왔으니, 전화 받을 필요가 없었어. 낮에는 일찍 퇴근하기 위해 일이 바빴거든.”그녀가 한 그루의 파키라를 다 짠 것을 보고 그는 그 공예품을 집어 들고 감상했다.“사람을 시키지 않았어? 더 이상 혼자 힘들게 하지 마. 손 좀 주의하고.”전태윤은 그 파키라를 다시 놓고는 전에 다친 손을 잡아 쥐었다. 상처는 이미 나았지만, 흉터가 남아 있었다. 그는 속상한 표정으로 그 흉터를 어루만졌다.전에 그녀가 손을 다친 것은 전태윤 때문이다.“이 꽃다발 참 신선하네요.”그녀는 그가 자책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손을 빼내며 화제를 돌렸다.“관성의 꽃집에 있는 장미꽃을 정남 씨가 다 사 간 거 아니었어요?”소정남이 심효진에게 프러포즈할 때 쓴 꽃이 너무나도 많아 그녀는 꽃집에 장미꽃이 남아있지 않을 거로 추측했다.“내가 이제야 온 이유가 바로 이 꽃다발 때문이야.”하예정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혹시 당신 집에 가서 꽃을 잘라 온 건 아니죠?”전태윤은 귀여운 듯 그녀의 코를 살짝 어루만지고는 그녀의 붉은 입술을 꼬집으며 말했다.“잘못한 말을 바로잡아줄게. 내 집도 당신 집이니까 우리 집이라고 말해야지. 심효진 씨에게 닭과 오리 한 트럭 사달라고 한 거 기억하지? 리조트 근처 과수원에서 키우고 있었는데 그 닭과 오리가 알을 많이 낳아서
하예정이 고개를 돌리자, 그의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볼에 닿았다.그녀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일어서더니 돌아서서 그와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진우는 편찮으신 어머님을 보러 온 것뿐이에요. 이틀 휴가를 내서 주말까지 모두 나흘이나 휴식하니 어머니를 보러 온 거에요. 서점에 온 것도 그저 지나가는 김에 사촌 누나인 효진이를 보러온 거예요, 나 보고 온 게 아니라. 효진이도 진우가 여기 오기 전에 일부러 전화 와서 내가 가게에 있는지 확인한 후에야 왔다고 하더군요. 내가 가게로 돌아와 진우와 마주쳤을 때는 이미 떠나려던 참이었어요. 같이 있은 시간이 5분도 안 되는 걸요. 경호원들도 밖에서 보고 있는데 정말 뭐가 있었으면 당신 집 경호원들이 가만히 있겠어요?”하예정은 다소 어이없다는 듯 그의 얼굴을 꼬집었다.“당신도 참, 질투가 너무 심해요. 예전에 내가 말했듯이, 나와 진우는 그저 남매일 뿐, 남녀간의 감정은 전혀 없어요.”전태윤은 그녀의 손을 잡아 자기 얼굴에 갖다댔다. 그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김진우와 그렇게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는 것이 신경 쓰인단 말이야. 둘이 알고 지낸 시간이 나보다 더 오랜 데다 김진우는 당신을 깊이 사랑했었잖아.”“무슨 방법이 있겠어요? 내가 진우를 10여 년이나 더 알고 지냈는데요. 당신이 시간을 되돌릴 수 있어요?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당신이랑만 알고 지내도 좋아요.”이 남자는 지금 그녀가 김진우를 먼저 알게 된 사실까지도 꺼내서 얘기하고 있다.그는 입을 꾹 다문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시간을 되돌릴 방법이 없으니까. 만약 그런 능력이 있다면 시간을 되돌려 그와 하예정을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죽마고우로 되게 하여 같이 자라게 했을지도 모른다.그가 여전히 매우 신경 쓰인다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하예정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여보, 진우는 이미 다 내려놓은 걸요. 비록 나랑 진우는 알고 지낸 지 십여 년이 되지만, 당신은 이제 나와 함께 남은 인생을 살
“할머니, 제가 뭐가 똑똑해요, 전 진짜 멍청해요. 할머니야말로 대단하신 분이죠.”전이혁은 할머니께 아부하는 멘트를 던졌다.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아부라고 할 수 없는 게, 할머니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전씨 가문 자손들은 이미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마치 삼장법사였고 자손들은 손오공 같은 존재로 손오공이 아무리 강해도 삼장법사 앞에선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할머니, 저 진짜 꼼수 같은 거 부리지 않아요.”“그건 네 사정이고. 어떻게 하든 네 마음대로 해. 할머니는 이미 너에게 신붓감을 골라줬고, 대시하든 포기하든 그것 역시 너에게 달린 일이야. 1년이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줬다고 생각한다.”“하지만 한 가지 경고할게. 지금까지 우리 전씨 가문에는 일편단심인 남자만 있었을 뿐 양다리를 걸치는 남자는 없었어. 네가 전씨 가문의 가풍을 망가뜨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전이혁은 최대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할머니. 저 이제 운전해야 해요. 도착해서 또 이야기 나눠요.”“그래, 운전 조심하고.”할머니는 전이혁에게 안전을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 할머니는 곧장 양씨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양 집사, 내 생선은?”할머니는 자신이 잡은 생선을 혹시 다른 사람이 먹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양씨 아저씨는 웃으며 대답했다.“어르신께서 구운 생선은 냄새가 정말 좋아요. 아무도 어르신의 생선을 뺏어 먹으려 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그들 몇몇 자식들 따라 직원 숙소에서 지내는 할머니들은 전씨 할머니가 좋은 분인 걸 알고 함께 수다도 떨고 낚시도 하지만 전씨 가문의 중심인 전씨 할머니의 권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전씨 할머니의 물건을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혹시나 건드렸다가 이곳에서 일하는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으니까.서원 리조트의 모든 직원은 훌륭한 대우와 복지를 받고 있었다. 산기슭에 지어진 숙소는 혼자인
두 사람은 함께 아침을 먹은 후, 방을 나섰다.그러자 집사는 전태윤이 다음에 올 때 묵을 수 있도록 스위트룸을 원래 상태로 정리하기 시작했다.도아영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다시 잠을 청했다.전이혁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고, 할머니가 전화를 받자 물었다.“할머니, 지금 어디 계세요?”“리조트에 있어. 무슨 일이야? 할머니 보고 싶어? 그렇다면 와서 할머니랑 같이 밥 한 끼 먹자.”그러더니 할머니는 한 마디 덧붙였다.“지금 생선이 막 익었어. 냄새 진짜 좋다.”전이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침부터 생선 구워 드세요?”“너한테 말한 거 아니야. 친구들이랑 얘기 중이었어. 아침부터 생선 구우면 안 돼? 그리고 지금 아침도 아니잖아. 아홉 시도 넘었네, 해가 중천에 뜨려고 하고 있어.”“오늘 날씨도 풀렸고, 할머니는 친구들이랑 낚시 갔다가 지금은 잡은 생선 구워 먹고 있어. 소풍하는 느낌이라 꽤 괜찮아.”전이혁은 그 모습이 쉽게 그려졌다. 산 아래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물 아래에는 물고기와 새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할머니는 가끔 몇몇 직원들의 어머니들과 함께 낚시하곤 했었다. 냇가에는 큰 나무 한 그루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돌로 된 테이블이 몇 개 있어 할머니의 한마디면 집사는 바비큐 그릴을 가져와 그들이 직접 구워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할머니가 말하길, 그들은 먹는 것보다는 굽는 과정을 더 즐겼다. 비록 직원이 구워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이 구워주는 건 맛이 없다며 투덜대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 먹지 못할 때면 남은 건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었다.서원 리조트의 직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권위를 내세우며 직원들에게 막 대하지 않고 옆집 할머니처럼 따뜻하게 대해준다는 사실을.“할머니, 생선 더 잡아서 구워주세요. 저 지금 갈게요.”전이혁은 결심한 듯 할머니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러 갈 생각이었다.“네가 와서 직접 잡아. 손질까지 하면 할머니가 구워줄게.”그러더니 할머니는 전이혁에게 물었다.“
“여긴 호텔 맞고, 당연히 아영 씨가 묵던 방일 수가 없죠. 어제 아영 씨가 취해서 방에 데려다줬는데 눕자마자 토하더라고요. 침대랑 바닥까지 모두 엉망이 돼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방으로 옮겼어요.”전이혁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도아영에게 말했다.“아영 씨 술 취하면 정말 감당하기 힘들어요. 앞으로 술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네요.”도아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뗐다.“제가 전이혁 씨랑 함께 많이 마신 건 알겠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요. 그런데 그 술 진짜 맛있었어요. 제가 해주시로 돌아갈 때 한 박스만 챙겨줘요. 기분 안 좋을 때 집에서 한두 잔 마시려고요.”“아영 씨가 그 정도로 술이 부족하진 않을 텐데요?”전이혁은 도아영의 집에 좋은 술이 부족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는 도아영의 말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맞아요. 술이 부족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전이혁 씨가 준 술은 부족하죠.”전이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래요. 아영 씨가 돌아갈 때 한 박스 챙겨줄게요. 그리고 관성 특산물도 좀 챙길 테니 같이 가져가요. 어찌 되었든 먼 길 왔는데 헛걸음하게 하면 안 되니까요.”도아영은 웃으며 대답했다.“맞아요. 헛걸음하게 만들면 안 되죠.”그러더니 그녀는 전이혁의 옆으로 다가가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전이혁 씨, 여기 꿀 있어요? 머리가 아파서 그러는데 저 꿀물 좀 타 주면 안 돼요?”“아까는 참을 만하다면서요?”전이혁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일단 세수 좀 하고요. 그리고 타 줄게요. 아영 씨도 세수해요.”“목욕할 거면 아영 씨 방에 가서 해요. 여긴 우리 형이 자주 묵는 스위트룸인데, 아영 씨니까 형이 허락한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형수님이 부탁해도 절대 안 된다고 했을 거예요.”전이혁의 큰형과 형수님은 도아영이 할머니께서 정해준 자신의 신붓감이라는 걸 알고,이미 도아영을 가족이나 다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어젯밤, 전이혁이 그런 말을 했을 때 도아영은 살짝 기분이 상했었다. 하지만
전이혁은 얼른 도아영을 부축하더니 살짝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아영 씨, 또 왜 그래요?”“저... 화장실... ”도아영은 눈이 풀린 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화장실 가고 싶어요?”도아영은 비틀거리며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태였고 전이혁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도아영을 혼자 화장실에 가게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자인 자신이 부축해서 데려가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다.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전이혁은 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혼자 괜찮겠어요?”도아영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이미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심하게 취해 있었다.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전이혁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부축해 화장실로 데려가야 했다. 전이혁은 가면서도 입으로는 끊임없이 투덜거렸다.그는 도아영을 화장실로 들여보내고 도망치듯 밖으로 뛰어나왔다.전이혁은 도아영이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1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았고, 노크를 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결국, 전이혁은 걱정된 마음에 문을 살짝 열어 안을 들여다봤지만 무슨 일인지 도아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 어디 간 거야?’전이혁은 의심스러운 마음에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보았다. 그 결과, 도아영은 화장실 문 옆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러니 문틈 사이로 도아영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이 여자 진짜!”도아영의 모습을 보자, 전이혁은 앞으로 절대 그녀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이혁은 앞으로 자신이 도아영과 함께 밥을 먹게 된다면 그녀에게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자신 말고는 도아영이 다른 누구와 함께 얼마나 마시든, 그건 전이혁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전이혁은 안으로 들어가 도아영을 안고 나온 뒤,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그는 원래 방으로 돌아가 쉴 예정이었지만, 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날 저녁,
한편 호텔에서 도아영을 돌보던 전이혁은 전창빈의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단독으로 그에게 음성 메시지로 물었다.[너 그 먼 곳까지 가서 가정 요리사를 하려고?]전창빈은 소파에 앉아 답장을 보냈다.[안 될 건 없지? 선우씨 가문의 가정 요리사 자리는 도전적이잖아. 내가 합격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었어. 다행히도 형 동생이 모든 경쟁자를 물리쳤지 뭐야. 난관을 하나둘씩 돌파했어.]전이혁이 회답했다.[요리사 하나 뽑는 걸 대통령 선거처럼 하는구먼. 얼마나 있을 계획이야? 설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명절에는 안 오려고?]전창빈이 답장했다.[설날에는 아마 못 갈 것 같아. 여기 주인이 날 해고하면 그때나 갈 수는 있겠는지.]전이혁이 피식 웃었다.[네 실력으로는 해고당할 리가 없잖아. 네가 주인을 해고하는 게 더 말이 되겠다. 이해가 안 가. 왜 그 먼 곳까지 가려고 한 거야? 넌 사업도 있는데... 어디서 요리하든 다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몇천 리나 떨어진 곳까지 갈 필요가 있나? 거기 추울 텐데 너 괜찮겠어?]전창빈이 대답했다.[우리 추위를 못 타본 것도 아니고. 형도 할머니에 의해 눈이 수북이 쌓인 산으로 버려지지 않았어? 내 얘긴 그만하고... 형은 어때? 우리 미래의 형수님께 구애하기 시작했어?]‘난 벌써 움직이고 있는데 형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내가 나중에 민아 씨와 함께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갈 때 형은 대체 어쩌려고?’전창빈은 속으로 생각했다.전씨 할머니의 지팡이가 전창빈의 등짝을 때리지 않는다면 해가 서쪽에 뜨는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말도 마라. 정말 귀찮아. 큰형수님이 오늘 저녁에 우리한테 밥 사주셨어.]전창빈이 웃으며 회답했다.[하하! 괴로웠겠네.][내 말이. 할머니께서 나에게 정해주신 그 여자분이 큰형수님을 찾아가 하소연했더니 큰형수님이 우리 두 사람에게 밥을 사주신 거 있지.][형이 우리 형수님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아직 너의 형수님이 아니거든!]전이혁은 전창빈의 호칭을 정정했다. 그는 도아영과
“저는 앞으로 큰아가씨의 평가에 근거해서 요리 방법을 조정해 나갈 거예요. 그렇게 해야만 실력을 키울 수 있을 테니까요. 제가 만드는 모든 요리를 큰아가씨께서 만족해하시면 제가 여기에서 졸업할 수 있겠네요.”강진은 웃으며 대답했다.“그렇게 되면 큰아가씨께서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걸요.”‘평생 선우민아 씨를 위해 요리해 드리는 건 기쁜 일이지.'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싶었지만 전창빈은 꾹 참았다. 이런 말은 입 밖에 내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오해를 살 수 있으니까. 설령 전창빈이 선우민아에게 애정 공세를 하는 것이 두 번째 목표라고 해도 이런 생각을 드러내서는 절대로 안 된다.선우민아가 가업을 운영한다는 건 그녀가 매우 유능한 인물이라는 증거다. 이렇게 강한 강한 여성은 쉽게 넘볼 수 없는 상대이다.전호영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너무 힘들어서 하예정의 도움을 받은 끝에야 지름길을 택할 수 있었고 고현의 마음을 얻었다.강진은 그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걸 깨닫고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전창빈 씨, 오늘 오후 내내 바쁘셨는데 일찍 쉬세요. 내일 아침 큰아가씨를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해야 합니다. 가장 일찍 아침을 드시는 분은 큰아가씨와 민기 도련님입니다. 민기 도련님은 학교에 가야 해서 일찍 식사하시고 큰아가씨는 매일 민기 도련님을 학교에 데려다주신 후 회사에 가시니까 두 분은 늘 함께 식사하시는 편이에요. 하여 아침 7시쯤이면 큰아가씨와 민기 도련님의 아침을 준비하시면 됩니다. 다른 분들의 아침은 9시 이후에 준비하시면 돼요.”전창빈이 말을 건넸다.“그 시간대면 아침과 점심을 함께 드시는 거네요.”“어르신과 사모님은 그렇죠. 점심 무렵에 일어나셨다가 식사 후에는 외출하셔서 저녁에야 돌아오세요. 때로는 안 오시기도 하는데, 그럴 땐 제가 미리 알려드릴게요. 안 오시는 날은 창빈 씨가 쉬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냥 자신의 배만 채우시면 돼요.”여기에서는 사실상 선우민아 자매만 아침을 먹는 셈이다.“큰아
동생 선우정아가 어이없어하는 모습을 보며 선우민아는 미소를 지었다.“알았어. 지금은 네가 전창빈 씨를 좋아하지 않는다 치더라도 앞으로 어떻게 될진 모르는 일이니까. 앞으로 매일 여기 와서 식사해. 전창빈 씨와 접촉할 기회도 많아져야 그에 대해 더 잘 알게 될 거 아니야. 만약 그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면 거리가 멀어도 너희 부모님께서도 어쩔 수 없이 동의하실 거야. 혹은 전창빈 씨에게 우리 지역에서 사업을 하게 하고 여기서 집을 사도록 하든가.”선우정아는 또 벙어리가 되어버렸다.선우민아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선우정아는 앞으로는 감히 그 집에 밥 먹으러 가기도 어려울 것 같다고 여겼다.선우민아가 자꾸 자신이 전창빈을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지 않는가.전창빈은 미래의 아내는 지금 미래 처제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전이혁은 강진을 따라 숙소로 돌아갔다. 강진은 웃으며 축하의 말을 전했다.“전창빈 씨, 이제 우리는 동료가 되었군요. 오래 함께 일했으면 좋겠습니다.”선우씨 가문의 여러 집안이 같은 대저택 안에서 함께 살고 있었지만 집안마다 독립된 공간이 있었다.선우민아의 요리사는 자주 교체되는 편이었기에 강진 역시 1년 정도는 함께 일할 사람을 원했다.요리사와 친해지기도 전에 퇴직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전창빈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저도 집사님과 오래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제가 요리들을 더 연구해서 큰아가씨께서 제 요리만 먹고 싶어 하도록 해야겠네요.”“큰아가씨께서 창빈 씨 요리만 고집하게 만들면 정말 대단한 거예요. 요리 대회에 나가면 ‘요리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을 만큼요.”선우민아의 입맛을 사로잡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전창빈은 웃으며 말했다.“‘요리의 신' 같은 건 관심 없어요. 저는 단지 제 요리 실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서 손님들을 만족시키고 싶을 뿐이죠.”전창빈은 그가 고용한 요리사들에게는 항상 조언을 해주곤 한다. 본인이 잘 배워야 현재 이끌고 있는 요리사들도
선우민아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저런 사업을 가진 사람을 네가 정말 좋아한다면 작은아버지와 숙모도 반대하지 않으실 거야. 다만 전창빈 씨가 관성 사람이라 우리랑 거리가 너무 멀어. 작은아버지와 숙모는 네가 먼 곳으로 시집가는 걸 아쉬워할 수도 있을 거야.”선우정아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언니! 제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요? 저는 정말 그런 마음 없단 말이에요. 오히려 저는 그분이 언니랑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우리 자매 일곱 명 중 언니가 맏이라 당연히 언니가 먼저 시집가야죠. 제가 언니를 앞지를 순 없잖아요.”착각인지 정말 본 건지, 선우정아는 전창빈이 선우민아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특별한 시선이 느껴졌다.그리고 전창빈은 사실 정말로 선우민아를 위해 온 거였다.아니, 정확히는 선우민아의 까다로운 입맛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온 것이다. 그녀를 만족시킬 수 있다면 다른 손님들도 분명히 만족시킬 수 있을 테니까.선우정아는 생각했다. 선우민아처럼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고.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동생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우리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잖아. 게다가 사촌 자매이기도 하기 때문에 네가 나보다 먼저 시집간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안 되거든. 나는 당분간 시집갈 생각 없어. 만약 고려한다 해도 이 지역의 사람일 거야. 생각해봐, 민기와 민수는 아직 몇 살밖에 안 됐는데 애들이 커서 사업을 이어받을 수 있을 때까지 적어도 20년은 더 기다려야 되잖아. 이 20년 동안 우리 자매는 계속 회사를 떠받쳐야 해. 만약 우리가 먼 곳으로 시집가면, 누가 회사를 이끌겠어? 셋째와 넷째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 지켜봐야 할 거야 아니야.”셋째 동생과 넷째 동생도 이제 성인이 되어 사업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거대한 가업을 떠받칠 능력이 되지 못했다.하여 선우민아는 자연스레 먼 곳으로 시집갈 생각이 없었다. 시집을 간다 해도 A시의 남자에게 시집갈 것이다. 그래야 시집가서도 친정 회사를 계속 관리할 수 있으니까.앞으로 선우민기
전창빈이 말했다.“행동으로 보여드리죠.”선우정아는 눈썹을 치켜들며 웃었다.“전이혁 씨는 정말 자신만만하신가 봐요.”선우민아는 선우정아를 한 번 흘겨보더니 전창빈에게 물었다.“그럼 언제부터 출근 가능하세요?”“이 자리를 위해 온 만큼 언제든지 가능합니다.”선우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내일부터 정식으로 출근하세요. 강 집사님께서 이미 숙소를 준비해 뒀을 테고 월급은 내일부터 계산됩니다. 한 달의 수습 기간이 있고 수습 기간 중 급여는 일당으로 지급됩니다. 공짜로 일을 시키진 않을 거예요.“누구든 마찬가지로 하루 일하면 하루 급여를 계산해 주었다.“집사님께서 어제 이미 숙소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급여는 어떻게 계산되든 상관없습니다. 전 도전을 위해 온 거지 월급을 위해 온 게 아니니까요.”전이혁은 돈이 부족한 게 아니었다. 아내만 부족할 뿐...“좋아요. 지금은 숙소로 가서 쉬세요. 우리 집에서의 하루 세끼 준비 시간은 집사님께서 알려주실 거예요. 아침을 제외한 점심과 저녁 식사 준비 시간은 변함없어요.”선우씨 가문의 사람들 아침 식사는 각자 일어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딱히 정해진 시간이 없었다.전창빈이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집사님께 여쭤보겠습니다.”그는 다시 모두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를 떠났다.전창빈이 떠나자 선우민아도 일어서서 가족들에게 말했다.“저는 아직 처리할 일이 있어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민기한테는 주말에 데리고 나가주겠다고 전해주세요.”선우민기는 그녀보다 스무 살이나 어렸기 때문에 남동생을 아들처럼 키웠다.선우민기는 선우민아를 무서워하면서도 잘 따랐다.선우정아도 그녀의 언니를 따라 일어섰다.“저도 일 보러 갈게요.”한경주가 딸에게 당부했다.“접대할 때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마. 몸에 해로워.”“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5년 전의 제가 아닌걸요.”선우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회사를 막 이어받았을 때 그녀는 많은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땐 위엄도, 경험도 없었고 회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