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이 요즘 회사 일이 잘 안 풀린다는데요? 회사에서 줄곧 잘나갔잖아요. 대체 무슨 일이죠?”김은희는 입으로 중얼거리면서 바로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서인은 전화를 받자마자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나도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자꾸만 일부러 내 흠을 잡는 것 같고 종일 제대로 되는 일이 없어. 엄마, 형인이 이혼하겠다면 그냥 이혼하게 놔둬. 어차피 엄마 아들 훌륭하잖아, 재혼 못 할 걱정은 없어.”“예진이가 어디서 증거를 모았는지 네 동생한테 엄청 불리해. 협박까지 당해서 네 동생이 하는 수 없이 걔 모든 조건을 들어주기로 했어. 이혼하면 2억 원 넘게 줘야 하고 우빈이 양육권도 예진이한테 넘어갈 뿐만 아니라 매달 우빈이 양육비를 60만 원씩 줘야 해.”“형인이한테 돈이 그렇게나 많았어?”주서인마저 처음 듣는 소리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형인이가 예전부터 재산을 빼돌린 증거를 예진이가 갖고 있어. 됐어, 너 기분도 안 좋고 일도 잘 안 풀리는데 같이 안 가도 돼. 내일 아침 나랑 네 아빠 예진이네 자매를 찾아가서 얘기해볼게.”주서인이 말했다.“엄마, 차라리 하예정을 찾아가. 하예정을 설득하면 동서를 설득한 거나 마찬가지야.”“엄마도 그렇게 생각해.”두 모녀는 한참 동안 통화하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퇴근 후 하예정은 먼저 언니네 집에 가서 주씨 가문을 나온 후 머무를 곳을 상의했다. 역시 그녀의 예상대로 하예진은 동생네 집에서 지내지 않으려 했다.“형인 씨가 돈만 많이 주면 너희 집에서 안 살아도 돼. 일단 월세를 구한 다음 집 보러 다니다가 대출해서 작은 집을 살 거야. 그리고 노씨 그룹에서 계속 일할 수 있으면 하고 정 안 되면 사직해서 나머지 돈으로 조식 식당 같은 거 차릴 생각이야.”하예정은 그녀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언니, 만약 돈이 부족하면 나한테 말해. 급한 돈은 내가 빌려줄게.”“걱정하지 마. 부족하면 너한테 빌려달라고 할게.”하예정은 언니 품에 안겨있는 조카를 어루만졌다.“이모.”“이모가
휴대 전화도 침대에 떨어진 걸 보니 기다리긴 했지만 자면서 기다리는 격이 돼버렸다.기대에 부풀었던 그의 마음이 한순간에 식어버렸다. 할머니에게서 산 다이아몬드 반지를 오늘 저녁에 하예정에게 끼워줄 생각이었지만 그녀는 깊이 잠들어버렸다.전태윤은 침대 옆에 앉아 하예정의 얼굴을 어루만졌다.“누가 업어가도 모르게 자네.”그러고는 상체를 숙여 하예정의 볼에 입맞춤했다가 입술에도 키스한 후 그녀의 휴대 전화를 침대 머리맡 서랍장 위에 올려놓았다.비록 아내가 잠이 들긴 했지만 그의 방에서 기다린 것이라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이튿날 아침 잠에서 깬 하예정은 문득 눈앞에 나타난 꽃다발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꽃다발 뒤에는 전태윤의 잘생긴 얼굴이 있었다.하예정은 두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눈앞의 남자가 전태윤인 걸 확인하고는 벌떡 일어나 앉더니 생긋 웃었다.“왔어요?”“여보, 굿모닝.”‘굿모닝?’“벌써 날이 밝았어요? 날 밝을 때까지 야근한 거예요?”“아니, 어젯밤에 들어왔어. 날 기다리겠다고 하더니 먼저 쿨쿨 자더라?”하예정은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예쁜 꽃다발을 받았다.“꽃가게가 참 일찍 오픈하네요?”“내가 사고 싶으면 언제든지 살 수 있어.”그녀가 꽃다발을 받자 전태윤은 상체를 숙이고 그녀의 아리따운 얼굴을 그윽하게 쳐다보면서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모닝 키스라도 해줘야 하지 않아?”그녀에게 선물한 꽃은 본가의 양 집사에게 전화하여 본가의 정원에서 가장 예쁜 꽃을 잘라서 포장하여 전용차로 보내달라고 한 것이었다.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꽃다발을 받은 하예정은 전태윤의 정성과 낭만적인 모습에 감동하여 모닝 키스를 아낌없이 해주었다.“예정아.”“하고 싶은 얘기 있으면 해요.”하예정은 예쁜 꽃을 마음껏 감상했다.“어느 꽃가게에서 샀어요? 참 예쁘게도 피었네요. 내가 발코니에서 기르는 것보다 훨씬 더 예뻐요.”“내가 특별히 꽃밭을 가꾸는 분한테 연락해서 주문한 꽃다발이야. 그분이 전용차로 가져다주셨어. 이른 시간이라
“예정아.”하예정이 그에게 반지를 끼워줄 때 전태윤이 매력적인 중저음으로 말했다.“앞으로 무슨 일이 있든 절대 헤어지지 말고 이혼 얘기 꺼내지도 말자, 응?”하예정은 두 반지가 그들에게 참 어울린다고 생각하여 그가 보는 눈이 있다고 속으로 칭찬하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고르지 않아도 그녀에게 어울리는 걸 골랐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그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이건 약속할 수 없어요. 만약 태윤 씨가 주형인처럼 인간쓰레기만도 못한 짓을 저질러도 이혼 얘기 못 꺼내요? 바람피운 남자는 한시라도 빨리 차버리는 게 나아요. 남겨둬봤자 역겹기만 하니까.”전태윤은 나중에 자신의 정체를 밝혔을 때 하예정이 떠나지 않게 하려고 그녀의 약속을 받아내려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 방법이 그녀에게 전혀 먹히지 않았다. 이렇게나 감동적인 상황에서도 그녀는 냉철한 판단을 했다. 역시 전태윤이 사랑한 여자는 달랐다.“그럼 내가 바람피우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무슨 일이 있든 절대 이혼 얘기 꺼내면 안 돼. 우리 평생 부부로 함께 지내자.”전태윤은 절대 바람을 피울 남자가 아니다. 그의 성격에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평생 그 여자만을 사랑할 것이다.바로 이것 때문에 그는 더욱 두려웠다. 나중에 그녀가 그의 정체를 알게 된 후 가차 없이 차버릴까 봐.“나한테 무슨 미안한 짓을 했어요?”하예정이 되물었다.“오늘 참 이상해요. 아침부터 꽃을 선물하지 않나, 결혼반지도 주지 않나... 비록 내가 다이아몬드를 감별할 줄은 몰라도 이 반지가 엄청 비싸다는 건 알아요. 평소랑 너무 다르니까 의심하게 되잖아요. 나한테 무슨 미안한 짓을 했죠? 그래서 지금 이런 이벤트로 날 감동하게 해서 대충 넘어갈 심산인 거죠?”전태윤은 입을 꾹 다문 채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참 상상력도 풍부하단 말이야. 큰마음 먹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더니 음모론이나 제기하고.”“내 예측이 틀렸어요?”그의 표정이 전혀 흔들림이 없자
“그건 아직 모르겠어. 일만 처리하면 바로 올 거야.”“그럼 출장 가는 날에 나한테 얘기해요. 내가 짐도 챙겨주고 공항까지 바래다줄게요.”그의 방에 그녀의 옷이 없어 하예정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씻고 옷을 갈아입으려 했다. 그녀가 방을 나서려 하자 전태윤은 손을 내밀어 잡더니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의 아리따운 얼굴을 바라보았다.“고작 그뿐이야?”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하예정은 눈만 깜빡였다.‘그러면 뭘 더 바라는데요? 출장 가는 도시까지 바래다줄 수는 없잖아요.’“가족이 함께 따라가도 돼요?”전태윤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공항까지 바래다주면 안 돼요?”전태윤은 그녀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하예정은 그의 손을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요즘 말 좀 잘하나 싶더니 또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거예요? 자꾸 나한테 맞춰보라고 하지 말아요. 나 머리가 나빠서 모른단 말이에요. 방에 가서 옷 갈아입고 나올게요. 아침은 이따가 나가서 먹을래요, 아니면 직접 해 먹을래요?”하예정이 밖으로 나가며 물었다.“네가 알아서 해.”삐진 듯한 그의 말투에 하예정은 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의 눈치를 살핀 후에야 방문을 열고 나갔다.전씨 할머니와 마주친 하예정은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인사했다.“할머니, 굿모닝이에요.”“그래, 굿모닝.”할머니는 손자의 방에서 나오는 하예정을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해도 한 침대에서 자는 것만으로도 아주 큰 발전이었다.그들은 집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하예정은 할머니와 전태윤에게 간단하게 국수를 만들어주었다.“따르릉.”하예정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언니의 전화인 줄 알고 휴대 전화를 꺼내 보았는데 낯선 번호였다. 그녀의 낯빛이 순식간이 어두워졌다. 요즘 걸려오는 낯선 전화는 대부분 그녀 본가의 친척들이었다.지난번에 성소현이 나서서 한마디 한 후에 한동안은 잠잠했다. 그런데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전화한 것일까?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던 하예정이 전화를 끊어버리자 곧바로 또 울
“전 그런 얘기 한 적 없어요. 할아버지가 하신 거예요.”하 영감은 잠깐 말문이 막혔다.“너 지금 어디야? 시간이 몇 시인데 아직도 가게 문 안 열었어? 다른 사람은 진작 돈 벌었겠다.”“태윤 씨, 할아버지가 가게 문 언제 여냐고 내 걱정하세요. 해가 서쪽에서 뜬 건 아니죠? 얼른 발코니 가서 봐봐요, 해가 서쪽에서 뜨나. 서쪽에서 뜨면 기이한 광경을 찍어서 남겨야죠.”하 영감이 굳은 얼굴로 욕설을 퍼부었다.“하예정, 말 돌리지 마, 할아버지가 얘기하고 있잖아. 나 지금 네 삼촌, 외숙모들이랑 가게 문 앞에 있어. 당장 와서 문 열어! 우리 아직 아침도 못 먹었으니까 올 때 아침도 사 와.”“근처에 조식 식당이 많아요. 식당 가서 드시기 싫으면 그냥 굶으세요.”그녀는 그들에게 아침까지 사다 바칠 마음이 없었다. 아침을 배불리 먹고 힘이 남아돌아서 더 욕하려고?하 영감은 하예정의 태도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계속 욕하려는데 하지문이 휴대 전화를 낚아채고 다정하게 말했다.“예정아, 나 둘째 사촌오빠야. 우리 지금 가게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얼른 와. 너한테 할 얘기 있어.”“아침 다 먹고 갈게.”“그래. 기다릴게.”하지문은 용건만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친정집 친척들이 또 찾아왔어?”전태윤은 하예정이 휴대 전화를 내려놓는 걸 보고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 전태윤이 뒤에서 몰래 복수한 탓에 일도 뜻대로 풀리지 않을 텐데 감히 또 찾아온다고?소정남의 말대로 빈털터리가 된 그들이 더는 두려울 게 없어서 하예정에게 뻔뻔스럽게 돈을 요구하는 건가?“네, 아무래도 온 가족이 총출동해서 가게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요. 대체 왜 저러는 건지... 나한테 할머니 병원비를 감당하라고 하는데 그건 절대 불가능해요. 저들이 머릿수로 밀어붙여도 난 두렵지 않아요.”할머니에게 효심이 가득한 손자가 그렇게나 많은데 할머니의 예쁨도 받지 못한 손녀가 병원비를 낸다는 게 말이 되는가?그녀의 사촌오빠들은 하예정 자매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을 보내
하예정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하늘이 무섭지도 않아요? 그러다 벌 받아요.’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곧 그 죄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그 사람들이 널 찾아온 목적이 뭐든 같이 가. 싸움이 일어나면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잖아.”전씨 할머니는 하예정과 함께 가겠다고 고집했다. 하예정은 자신이 싸움을 꽤 잘한다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만만치 않은 친척들과 가게 앞에서 정말 싸우기라도 한다면 혼자서는 당해내기 힘들 거로 생각하여 더는 할머니를 말리지 않았다.언니에게서 할머니가 엄청 대단하고 만만한 분이 아니라는 얘기를 들었었다.셋이 국수를 뚝딱 비우고 하예정이 설거지하려 하자 할머니가 손자에게 눈치를 주었다. 전태윤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하예정의 손에서 그릇을 받고는 설거지하러 주방으로 들어갔다.“예정아, 태윤이한테 뭐든지 다 해주지 마.”할머니가 하예정에게 가르쳤다.“쟤한테 집안일도 좀 시켜. 이 집은 너희 두 사람 것이고 부부가 함께 꾸려나가야지. 쟤가 밖에서 일하느라 힘들겠지만 너도 출근하잖아. 넌 안 힘들어? 집에서 손가락 까딱 안 하게 하지 말고 집안일도 시키면서 부려 먹어. 그래야 네가 덜 힘들지.”“할머니, 태윤 씨 지금도 잘하고 있어요. 가끔 집안일도 도와줘요.”퇴근하고 집에 와서 손가락 까딱 안 하는 건 그녀의 쓰레기 같은 형부였다. 무슨 일이든 다 언니에게 맡겼고 손발이 멀쩡하면서 왜 아무것도 하지 않냐고 한마디 하면 종일 출근하느라 힘들다면서 집에서는 쉬고 싶다고 당당하게 얘기했었다.그리고 맨날 집에서 애만 보는 게 얼마나 쉬운데 집안일까지 도와달라고 한다고 언니를 게으른 여자라고 욕하기도 했다...인간쓰레기만도 못한 남자를 이젠 욕하기도 귀찮을 지경이었다. 그녀의 언니는 이젠 그에게서 벗어나 서현주에게 그대로 넘겨주기만 하면 된다.서현주 같은 여자를 만난 주형인이 과연 집안일에 손을 대지 않아도 될까?“쟤네 몇몇 형제들한테 내가 어릴 적부터 자립 능력을 가르쳐서 뭐든지 다 잘해. 쟤가 밖에서 힘들게 일한다고 네가
전태윤은 주방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전부 다 들었다. 할머니가 하예정을 편애하는 건 이미 진작 익숙해졌다. 할머니는 손녀가 생기길 무척이나 바라셨지만 결국 손자가 아홉이나 생겼다.할머니는 하예정을 보자마자 첫눈에 마음에 들어 하예정을 손녀로 삼고 싶어 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손녀를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바로 생각을 바꾸었다. 할머니는 하예정을 자신의 손자며느리로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그러면 평생 전씨 가문의 사람이 될 테니까.전태윤은 설거지를 마친 후 싱크대 주변도 빛이 날 정도로 깨끗하게 닦았다. 그다음 세정제로 행주를 말끔하게 빨고는 손까지 씻고 주방에서 나왔다.하예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양복 외투와 넥타이를 가져다주었다. 비록 아직 넥타이를 맬 줄은 모르지만 그녀의 적극적인 모습에 전태윤도 흐뭇했다.설거지하면 미인의 사랑을 누릴 수 있으니 꽤 괜찮은 것 같다.할머니도 하예정의 모습이 만족스러웠다. 전태윤에게 적당한 보상을 주면 전태윤도 앞으로 그녀 말만 들을 것이다.부부라면 서로 아껴주고 희생해야만 영원히 함께할 수 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헌신하고 다른 한쪽은 누리기만 한다면 헌신한 쪽이 언젠가는 마음이 식어가게 돼 있다.30분 후, 가게에 도착해보니 가게 문이 열려있었다. 심효진이 먼저 와서 가게 문을 열었는데 하씨 가문 사람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하 영감은 하지명에게 가게로 들어가서 의자 하나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렇게 하 영감만 의자에 앉아있었고 다른 이들은 문 앞에 서 있거나 쪼그리고 앉아서 기다렸다. 그들의 얼굴에 저마다 짜증이 잔뜩 섞여 있었다.하지문은 하예정을 기다리며 담배를 몇 대나 피웠는지 모른다.전씨 가문 도련님에게 익명의 편지를 보낸 후 그는 자신이 전씨 그룹에 입사할 줄 알고 자신만만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전씨 그룹은커녕 다른 작은 회사도 그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업자가 된 하지문 말고도 가족들이 하던 일도 전부 영향을 받
“하예정.”하지명과 하지문이 할아버지와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왔고 나머지 친척들은 밖에서 대기했다.“네 남편이야?”하 영감은 전태윤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왠지 하예정의 남편이 하예진의 남편보다 훨씬 더 나아 보였다. 그와 동시에 두 손녀를 시집보내면서 예물을 일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남 좋은 노릇만 했다는 생각에 불만도 생겼다. 만약 셋째 아들이 저승에서 알았더라면 아마 화가 나서 살아 돌아올지도 모른다.하예정의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직 생전이라 예물은 당연히 두 사람의 몫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하예진 자매는 일전 한 푼도 그들에게 주지 않았다.“할아버지 손자사위예요. 어때요? 잘생겼죠?”하예정은 전태윤 옆으로 다가가 한 손을 전태윤의 어깨에 걸치면서 일부러 할아버지에게 물었다.“우리 부부 참 잘 어울리죠?”하 영감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한참 후에 전씨 할머니에게 물었다.“그쪽은 누구시죠?”“사돈.”‘남자 쪽 가족이구나.’하 영감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두어 모금 피운 뒤 말을 이었다.“예정이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우리한테 얘기하지 않아서 사돈의 존재도 모르고 있었어요. 오늘 처음 뵙네요.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면서요? 그럼 사돈댁에서 우리 예정이한테 예물을 얼마 정도 줄 계획인가요? 집이랑 자동차는 이미 다 준비했겠죠? 예정이 부모가 일찍 돌아가긴 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직 살아있어요. 예전에 서로 얼굴을 붉힌 일이 있어도 내가 쟤 할아비란 사실은 변함이 없어요. 그러니까 예정이한테 주는 예물은 우리한테 주는 게 당연해요.”대부분의 재벌 집 할머니라면 하 영감처럼 만나자마자 돈 얘기부터 꺼내면 당장 얼굴을 붉히고 자리를 박차고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사돈댁, 예물은 당연히 드려야지요. 하지만 예물은 예정이한테 줄 겁니다. 예정이가 예물을 어떻게 쓰는지는 예정이가 알아서 할 일이니 우린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좋겠어요.”그 말인즉슨 예물을
“할머니, 제가 뭐가 똑똑해요, 전 진짜 멍청해요. 할머니야말로 대단하신 분이죠.”전이혁은 할머니께 아부하는 멘트를 던졌다.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아부라고 할 수 없는 게, 할머니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전씨 가문 자손들은 이미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마치 삼장법사였고 자손들은 손오공 같은 존재로 손오공이 아무리 강해도 삼장법사 앞에선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할머니, 저 진짜 꼼수 같은 거 부리지 않아요.”“그건 네 사정이고. 어떻게 하든 네 마음대로 해. 할머니는 이미 너에게 신붓감을 골라줬고, 대시하든 포기하든 그것 역시 너에게 달린 일이야. 1년이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줬다고 생각한다.”“하지만 한 가지 경고할게. 지금까지 우리 전씨 가문에는 일편단심인 남자만 있었을 뿐 양다리를 걸치는 남자는 없었어. 네가 전씨 가문의 가풍을 망가뜨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전이혁은 최대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할머니. 저 이제 운전해야 해요. 도착해서 또 이야기 나눠요.”“그래, 운전 조심하고.”할머니는 전이혁에게 안전을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 할머니는 곧장 양씨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양 집사, 내 생선은?”할머니는 자신이 잡은 생선을 혹시 다른 사람이 먹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양씨 아저씨는 웃으며 대답했다.“어르신께서 구운 생선은 냄새가 정말 좋아요. 아무도 어르신의 생선을 뺏어 먹으려 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그들 몇몇 자식들 따라 직원 숙소에서 지내는 할머니들은 전씨 할머니가 좋은 분인 걸 알고 함께 수다도 떨고 낚시도 하지만 전씨 가문의 중심인 전씨 할머니의 권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전씨 할머니의 물건을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혹시나 건드렸다가 이곳에서 일하는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으니까.서원 리조트의 모든 직원은 훌륭한 대우와 복지를 받고 있었다. 산기슭에 지어진 숙소는 혼자인
두 사람은 함께 아침을 먹은 후, 방을 나섰다.그러자 집사는 전태윤이 다음에 올 때 묵을 수 있도록 스위트룸을 원래 상태로 정리하기 시작했다.도아영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다시 잠을 청했다.전이혁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고, 할머니가 전화를 받자 물었다.“할머니, 지금 어디 계세요?”“리조트에 있어. 무슨 일이야? 할머니 보고 싶어? 그렇다면 와서 할머니랑 같이 밥 한 끼 먹자.”그러더니 할머니는 한 마디 덧붙였다.“지금 생선이 막 익었어. 냄새 진짜 좋다.”전이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침부터 생선 구워 드세요?”“너한테 말한 거 아니야. 친구들이랑 얘기 중이었어. 아침부터 생선 구우면 안 돼? 그리고 지금 아침도 아니잖아. 아홉 시도 넘었네, 해가 중천에 뜨려고 하고 있어.”“오늘 날씨도 풀렸고, 할머니는 친구들이랑 낚시 갔다가 지금은 잡은 생선 구워 먹고 있어. 소풍하는 느낌이라 꽤 괜찮아.”전이혁은 그 모습이 쉽게 그려졌다. 산 아래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물 아래에는 물고기와 새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할머니는 가끔 몇몇 직원들의 어머니들과 함께 낚시하곤 했었다. 냇가에는 큰 나무 한 그루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돌로 된 테이블이 몇 개 있어 할머니의 한마디면 집사는 바비큐 그릴을 가져와 그들이 직접 구워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할머니가 말하길, 그들은 먹는 것보다는 굽는 과정을 더 즐겼다. 비록 직원이 구워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이 구워주는 건 맛이 없다며 투덜대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 먹지 못할 때면 남은 건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었다.서원 리조트의 직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권위를 내세우며 직원들에게 막 대하지 않고 옆집 할머니처럼 따뜻하게 대해준다는 사실을.“할머니, 생선 더 잡아서 구워주세요. 저 지금 갈게요.”전이혁은 결심한 듯 할머니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러 갈 생각이었다.“네가 와서 직접 잡아. 손질까지 하면 할머니가 구워줄게.”그러더니 할머니는 전이혁에게 물었다.“
“여긴 호텔 맞고, 당연히 아영 씨가 묵던 방일 수가 없죠. 어제 아영 씨가 취해서 방에 데려다줬는데 눕자마자 토하더라고요. 침대랑 바닥까지 모두 엉망이 돼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방으로 옮겼어요.”전이혁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도아영에게 말했다.“아영 씨 술 취하면 정말 감당하기 힘들어요. 앞으로 술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네요.”도아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뗐다.“제가 전이혁 씨랑 함께 많이 마신 건 알겠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요. 그런데 그 술 진짜 맛있었어요. 제가 해주시로 돌아갈 때 한 박스만 챙겨줘요. 기분 안 좋을 때 집에서 한두 잔 마시려고요.”“아영 씨가 그 정도로 술이 부족하진 않을 텐데요?”전이혁은 도아영의 집에 좋은 술이 부족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는 도아영의 말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맞아요. 술이 부족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전이혁 씨가 준 술은 부족하죠.”전이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래요. 아영 씨가 돌아갈 때 한 박스 챙겨줄게요. 그리고 관성 특산물도 좀 챙길 테니 같이 가져가요. 어찌 되었든 먼 길 왔는데 헛걸음하게 하면 안 되니까요.”도아영은 웃으며 대답했다.“맞아요. 헛걸음하게 만들면 안 되죠.”그러더니 그녀는 전이혁의 옆으로 다가가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전이혁 씨, 여기 꿀 있어요? 머리가 아파서 그러는데 저 꿀물 좀 타 주면 안 돼요?”“아까는 참을 만하다면서요?”전이혁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일단 세수 좀 하고요. 그리고 타 줄게요. 아영 씨도 세수해요.”“목욕할 거면 아영 씨 방에 가서 해요. 여긴 우리 형이 자주 묵는 스위트룸인데, 아영 씨니까 형이 허락한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형수님이 부탁해도 절대 안 된다고 했을 거예요.”전이혁의 큰형과 형수님은 도아영이 할머니께서 정해준 자신의 신붓감이라는 걸 알고,이미 도아영을 가족이나 다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어젯밤, 전이혁이 그런 말을 했을 때 도아영은 살짝 기분이 상했었다. 하지만
전이혁은 얼른 도아영을 부축하더니 살짝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아영 씨, 또 왜 그래요?”“저... 화장실... ”도아영은 눈이 풀린 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화장실 가고 싶어요?”도아영은 비틀거리며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태였고 전이혁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도아영을 혼자 화장실에 가게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자인 자신이 부축해서 데려가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다.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전이혁은 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혼자 괜찮겠어요?”도아영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이미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심하게 취해 있었다.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전이혁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부축해 화장실로 데려가야 했다. 전이혁은 가면서도 입으로는 끊임없이 투덜거렸다.그는 도아영을 화장실로 들여보내고 도망치듯 밖으로 뛰어나왔다.전이혁은 도아영이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1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았고, 노크를 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결국, 전이혁은 걱정된 마음에 문을 살짝 열어 안을 들여다봤지만 무슨 일인지 도아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 어디 간 거야?’전이혁은 의심스러운 마음에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보았다. 그 결과, 도아영은 화장실 문 옆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러니 문틈 사이로 도아영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이 여자 진짜!”도아영의 모습을 보자, 전이혁은 앞으로 절대 그녀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이혁은 앞으로 자신이 도아영과 함께 밥을 먹게 된다면 그녀에게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자신 말고는 도아영이 다른 누구와 함께 얼마나 마시든, 그건 전이혁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전이혁은 안으로 들어가 도아영을 안고 나온 뒤,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그는 원래 방으로 돌아가 쉴 예정이었지만, 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날 저녁,
한편 호텔에서 도아영을 돌보던 전이혁은 전창빈의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단독으로 그에게 음성 메시지로 물었다.[너 그 먼 곳까지 가서 가정 요리사를 하려고?]전창빈은 소파에 앉아 답장을 보냈다.[안 될 건 없지? 선우씨 가문의 가정 요리사 자리는 도전적이잖아. 내가 합격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었어. 다행히도 형 동생이 모든 경쟁자를 물리쳤지 뭐야. 난관을 하나둘씩 돌파했어.]전이혁이 회답했다.[요리사 하나 뽑는 걸 대통령 선거처럼 하는구먼. 얼마나 있을 계획이야? 설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명절에는 안 오려고?]전창빈이 답장했다.[설날에는 아마 못 갈 것 같아. 여기 주인이 날 해고하면 그때나 갈 수는 있겠는지.]전이혁이 피식 웃었다.[네 실력으로는 해고당할 리가 없잖아. 네가 주인을 해고하는 게 더 말이 되겠다. 이해가 안 가. 왜 그 먼 곳까지 가려고 한 거야? 넌 사업도 있는데... 어디서 요리하든 다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몇천 리나 떨어진 곳까지 갈 필요가 있나? 거기 추울 텐데 너 괜찮겠어?]전창빈이 대답했다.[우리 추위를 못 타본 것도 아니고. 형도 할머니에 의해 눈이 수북이 쌓인 산으로 버려지지 않았어? 내 얘긴 그만하고... 형은 어때? 우리 미래의 형수님께 구애하기 시작했어?]‘난 벌써 움직이고 있는데 형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내가 나중에 민아 씨와 함께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갈 때 형은 대체 어쩌려고?’전창빈은 속으로 생각했다.전씨 할머니의 지팡이가 전창빈의 등짝을 때리지 않는다면 해가 서쪽에 뜨는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말도 마라. 정말 귀찮아. 큰형수님이 오늘 저녁에 우리한테 밥 사주셨어.]전창빈이 웃으며 회답했다.[하하! 괴로웠겠네.][내 말이. 할머니께서 나에게 정해주신 그 여자분이 큰형수님을 찾아가 하소연했더니 큰형수님이 우리 두 사람에게 밥을 사주신 거 있지.][형이 우리 형수님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아직 너의 형수님이 아니거든!]전이혁은 전창빈의 호칭을 정정했다. 그는 도아영과
“저는 앞으로 큰아가씨의 평가에 근거해서 요리 방법을 조정해 나갈 거예요. 그렇게 해야만 실력을 키울 수 있을 테니까요. 제가 만드는 모든 요리를 큰아가씨께서 만족해하시면 제가 여기에서 졸업할 수 있겠네요.”강진은 웃으며 대답했다.“그렇게 되면 큰아가씨께서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걸요.”‘평생 선우민아 씨를 위해 요리해 드리는 건 기쁜 일이지.'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싶었지만 전창빈은 꾹 참았다. 이런 말은 입 밖에 내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오해를 살 수 있으니까. 설령 전창빈이 선우민아에게 애정 공세를 하는 것이 두 번째 목표라고 해도 이런 생각을 드러내서는 절대로 안 된다.선우민아가 가업을 운영한다는 건 그녀가 매우 유능한 인물이라는 증거다. 이렇게 강한 강한 여성은 쉽게 넘볼 수 없는 상대이다.전호영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너무 힘들어서 하예정의 도움을 받은 끝에야 지름길을 택할 수 있었고 고현의 마음을 얻었다.강진은 그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걸 깨닫고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전창빈 씨, 오늘 오후 내내 바쁘셨는데 일찍 쉬세요. 내일 아침 큰아가씨를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해야 합니다. 가장 일찍 아침을 드시는 분은 큰아가씨와 민기 도련님입니다. 민기 도련님은 학교에 가야 해서 일찍 식사하시고 큰아가씨는 매일 민기 도련님을 학교에 데려다주신 후 회사에 가시니까 두 분은 늘 함께 식사하시는 편이에요. 하여 아침 7시쯤이면 큰아가씨와 민기 도련님의 아침을 준비하시면 됩니다. 다른 분들의 아침은 9시 이후에 준비하시면 돼요.”전창빈이 말을 건넸다.“그 시간대면 아침과 점심을 함께 드시는 거네요.”“어르신과 사모님은 그렇죠. 점심 무렵에 일어나셨다가 식사 후에는 외출하셔서 저녁에야 돌아오세요. 때로는 안 오시기도 하는데, 그럴 땐 제가 미리 알려드릴게요. 안 오시는 날은 창빈 씨가 쉬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냥 자신의 배만 채우시면 돼요.”여기에서는 사실상 선우민아 자매만 아침을 먹는 셈이다.“큰아
동생 선우정아가 어이없어하는 모습을 보며 선우민아는 미소를 지었다.“알았어. 지금은 네가 전창빈 씨를 좋아하지 않는다 치더라도 앞으로 어떻게 될진 모르는 일이니까. 앞으로 매일 여기 와서 식사해. 전창빈 씨와 접촉할 기회도 많아져야 그에 대해 더 잘 알게 될 거 아니야. 만약 그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면 거리가 멀어도 너희 부모님께서도 어쩔 수 없이 동의하실 거야. 혹은 전창빈 씨에게 우리 지역에서 사업을 하게 하고 여기서 집을 사도록 하든가.”선우정아는 또 벙어리가 되어버렸다.선우민아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선우정아는 앞으로는 감히 그 집에 밥 먹으러 가기도 어려울 것 같다고 여겼다.선우민아가 자꾸 자신이 전창빈을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지 않는가.전창빈은 미래의 아내는 지금 미래 처제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전이혁은 강진을 따라 숙소로 돌아갔다. 강진은 웃으며 축하의 말을 전했다.“전창빈 씨, 이제 우리는 동료가 되었군요. 오래 함께 일했으면 좋겠습니다.”선우씨 가문의 여러 집안이 같은 대저택 안에서 함께 살고 있었지만 집안마다 독립된 공간이 있었다.선우민아의 요리사는 자주 교체되는 편이었기에 강진 역시 1년 정도는 함께 일할 사람을 원했다.요리사와 친해지기도 전에 퇴직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전창빈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저도 집사님과 오래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제가 요리들을 더 연구해서 큰아가씨께서 제 요리만 먹고 싶어 하도록 해야겠네요.”“큰아가씨께서 창빈 씨 요리만 고집하게 만들면 정말 대단한 거예요. 요리 대회에 나가면 ‘요리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을 만큼요.”선우민아의 입맛을 사로잡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전창빈은 웃으며 말했다.“‘요리의 신' 같은 건 관심 없어요. 저는 단지 제 요리 실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서 손님들을 만족시키고 싶을 뿐이죠.”전창빈은 그가 고용한 요리사들에게는 항상 조언을 해주곤 한다. 본인이 잘 배워야 현재 이끌고 있는 요리사들도
선우민아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저런 사업을 가진 사람을 네가 정말 좋아한다면 작은아버지와 숙모도 반대하지 않으실 거야. 다만 전창빈 씨가 관성 사람이라 우리랑 거리가 너무 멀어. 작은아버지와 숙모는 네가 먼 곳으로 시집가는 걸 아쉬워할 수도 있을 거야.”선우정아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언니! 제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요? 저는 정말 그런 마음 없단 말이에요. 오히려 저는 그분이 언니랑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우리 자매 일곱 명 중 언니가 맏이라 당연히 언니가 먼저 시집가야죠. 제가 언니를 앞지를 순 없잖아요.”착각인지 정말 본 건지, 선우정아는 전창빈이 선우민아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특별한 시선이 느껴졌다.그리고 전창빈은 사실 정말로 선우민아를 위해 온 거였다.아니, 정확히는 선우민아의 까다로운 입맛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온 것이다. 그녀를 만족시킬 수 있다면 다른 손님들도 분명히 만족시킬 수 있을 테니까.선우정아는 생각했다. 선우민아처럼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고.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동생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우리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잖아. 게다가 사촌 자매이기도 하기 때문에 네가 나보다 먼저 시집간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안 되거든. 나는 당분간 시집갈 생각 없어. 만약 고려한다 해도 이 지역의 사람일 거야. 생각해봐, 민기와 민수는 아직 몇 살밖에 안 됐는데 애들이 커서 사업을 이어받을 수 있을 때까지 적어도 20년은 더 기다려야 되잖아. 이 20년 동안 우리 자매는 계속 회사를 떠받쳐야 해. 만약 우리가 먼 곳으로 시집가면, 누가 회사를 이끌겠어? 셋째와 넷째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 지켜봐야 할 거야 아니야.”셋째 동생과 넷째 동생도 이제 성인이 되어 사업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거대한 가업을 떠받칠 능력이 되지 못했다.하여 선우민아는 자연스레 먼 곳으로 시집갈 생각이 없었다. 시집을 간다 해도 A시의 남자에게 시집갈 것이다. 그래야 시집가서도 친정 회사를 계속 관리할 수 있으니까.앞으로 선우민기
전창빈이 말했다.“행동으로 보여드리죠.”선우정아는 눈썹을 치켜들며 웃었다.“전이혁 씨는 정말 자신만만하신가 봐요.”선우민아는 선우정아를 한 번 흘겨보더니 전창빈에게 물었다.“그럼 언제부터 출근 가능하세요?”“이 자리를 위해 온 만큼 언제든지 가능합니다.”선우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내일부터 정식으로 출근하세요. 강 집사님께서 이미 숙소를 준비해 뒀을 테고 월급은 내일부터 계산됩니다. 한 달의 수습 기간이 있고 수습 기간 중 급여는 일당으로 지급됩니다. 공짜로 일을 시키진 않을 거예요.“누구든 마찬가지로 하루 일하면 하루 급여를 계산해 주었다.“집사님께서 어제 이미 숙소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급여는 어떻게 계산되든 상관없습니다. 전 도전을 위해 온 거지 월급을 위해 온 게 아니니까요.”전이혁은 돈이 부족한 게 아니었다. 아내만 부족할 뿐...“좋아요. 지금은 숙소로 가서 쉬세요. 우리 집에서의 하루 세끼 준비 시간은 집사님께서 알려주실 거예요. 아침을 제외한 점심과 저녁 식사 준비 시간은 변함없어요.”선우씨 가문의 사람들 아침 식사는 각자 일어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딱히 정해진 시간이 없었다.전창빈이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집사님께 여쭤보겠습니다.”그는 다시 모두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를 떠났다.전창빈이 떠나자 선우민아도 일어서서 가족들에게 말했다.“저는 아직 처리할 일이 있어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민기한테는 주말에 데리고 나가주겠다고 전해주세요.”선우민기는 그녀보다 스무 살이나 어렸기 때문에 남동생을 아들처럼 키웠다.선우민기는 선우민아를 무서워하면서도 잘 따랐다.선우정아도 그녀의 언니를 따라 일어섰다.“저도 일 보러 갈게요.”한경주가 딸에게 당부했다.“접대할 때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마. 몸에 해로워.”“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5년 전의 제가 아닌걸요.”선우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회사를 막 이어받았을 때 그녀는 많은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땐 위엄도, 경험도 없었고 회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