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하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허설아의 속마음이 아주 단순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지금도 권지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권지헌은 손을 뻗어 허설아의 오똑한 코끝을 톡 쳤다."네 딸이 영어 그림책 들을 때 딱 이런 표정이야."권지헌은 행동이 아주 빨랐다.허설아가 정신 차렸을 때 이미 손을 거둔 뒤였다.차가 앞으로 달려갔다."맞다." 권지헌이 허설아 무릎에 휴대폰을 휙 던졌다."유혜원이 네 연락처 추가하고 싶대. 연락처 리스트에서 찾아서 네 번호 보내줘."저번에 잠깐 얘기를 나눠봐서 유혜원 성격이 괜찮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직설적이고 사람 해칠 마음도 없는 단순하고 솔직한 사람이었다.허설아는 친구 사귈 생각은 없었지만 사람 하나 더 아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권지헌은 운전해야 했기에 휴대폰 보기 불편했다.권지헌 휴대폰은 케이스도 없고 보호필름도 없었다. 휴대폰 자체의 촉감을 더 좋아하고 긁히거나 깨지는 것도 신경 안 쓰는 듯했다.비밀번호는 여섯 자리였다.허설아가 나지막하게 말했다."대표님, 비밀번호 해제해서 주면 안 돼요?""예전 비밀번호 그대로야."허설아가 멈칫했다.예전 비밀번호라면 허설아가 갑자기 꽂혀서 꼭 바꿔주겠다고 한 거였다.허설아 휴대폰 잠금 비밀번호와 똑같았다.비밀번호도 커플이어야 한다며 말이다.그때도 권지헌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묵인했었다.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안 바꾼 거야?허설아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비밀번호를 입력해 잠금화면을 풀었다.권지헌 sns를 누르자 맨 위 상단에 고정된 대화창이 보였다.상대 계정은 이미 삭제된 상태라고 표시되었다.권지헌이 왜 이미 삭제된 계정을 상단에 고정해놨을까?유혜원 계정을 찾은 허설아는 연락처를 보내고 휴대폰을 도로 내려놓으려 했다.그런데 실수로 상단 고정 연락처를 눌러버렸다.대화창에는 상대가 메시지를 한 개 취소했고 권지헌은 물음표로 답한 게 보였다.더 위로 올리자 드문드문 이어지는 대화가 있었다.내용이 많지 않았지만 허설아는 알아볼 수 있었다.허설아가
지하철역으로 들어간 허설아는 아직 개찰구를 들어가기 전이었다. 휴대폰을 꺼내어 지하철 카드를 스캔하려는데 권지헌이 보낸 메시지가 보였다."급한 의뢰는 돈 더 주면 되는 거지."이 말도 덧붙어 있었다. 권지헌도 의뢰 플랫폼 절차를 알아본 것 같았다.허설아는 최근 작업 중인 남은 작업물을 대충 정리해 보았다. 몇 장을 제외하면 다 금전적 힘으로 일정을 앞당겨 달라는 의뢰였다.권지헌 의뢰는 오히려 가격은 제일 높고 그리기는 제일 간단했다.머릿속에 권지헌의 의뢰 요구 사항이 떠올랐다.허설아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돌아선 허설아는 지하철역 편의점에서 시원한 물 한 병을 사서 얼굴에 대고 굴렸다.불덩이 같은 얼굴을 식히려 했다.허설아가 그제야 휴대폰을 꺼내 답장했다."오늘 병원갔다가 연희도 데리러 가야 해요. 시간이 부족해요."권지헌이 휴대폰을 들고 화면을 타다닥 두드렸다."나와, 태워다줄게. 그러면 시간이 돼."허설아는 뚜껑을 열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얼음물이 쭉 타고 내려가며 열기를 식혀주어 스스로 상상했던 모습 때문에 달아올랐던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대학 다닐 때는 누드 모델도 그려본 적 있었다.'이미 의뢰를 받은 이상 속전속결로 끝내자.'잠시 뒤 허설아가 길가에 세워진 권지헌 차 문을 열었다.권지헌은 블루투스 이어폰을 끼고 전화로 업무를 지시하고 있었다. 허설아가 타자 권지헌이 손가락으로 톡톡 가리켰다.허설아는 권지헌을 너무 잘 알았다.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말이 필요 없이 권지헌의 뜻을 바로 알아차렸다.조금 전 거래처에서 가져온 품질검사 보고서를 펴서 건넸다.아주 호흡이 척척 잘 맞았다.상대가 뭔가 말하자 권지헌이 눈길로 허설아를 힐끗 보고는 낮은 러시아어로 대화를 이어갔다. 허설아는 러시아어를 못 알아들었다.하지만 권지헌이 허설아 얘기를 한다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게다가 권지헌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러시아어는 떨리는 음이 몇 개 있어서 잘하는 사람이 말하면 기타 줄을 튕
하지만 연동근이 세상을 떠난 뒤론 조금 전을 제외하면 연씨 집안 친척들을 다시 본 적이 없었다.친척이 아무리 가깝다 해도 결국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식이었다.인생은 결국 스스로 살아가야 했다. 허설아가 천천히 말했다."권지헌 씨, 전에 이런 말을 본 적 있어요. 누군가를 생각하면 그 사람의 인연에 들어가게 된대요.""제 전남편이 그렇게 신경 쓰여요?"허설아는 권지헌이라면 말속에 숨은 뜻을 알아들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권지헌이 되려 되물었다. "내가 뭘 신경 쓰는지 몰라서 그래?"허설아는 몰랐다.헤어지고 나서 바로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았다는 게 남자로서 자존심이 상한 건가?아니면 딸인 연희가 신경 쓰이는 건가?허설아가 권지헌을 쳐다보며 물었다. "내가 알아야 해요?"맑은 눈동자 속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함과 막막함, 혼란, 그리고 경계가 드러나 있었다. 권지헌에게 이런 감정들은 낯선 것이었다.예전의 허설아 눈에는 절대 이런 감정이 드러난 적 없었다. 하지만 왠지 또 익숙하기도 했다. 요즘 권지헌을 볼 땐 늘 이런 눈빛이었다.허설아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연민규에게서 온 전화였다."설아야, 아까 일은 오빠가 사과할게. 화내지 마."차 안 공간이 넓지 않았기에 수화기로 흘러나온 소리가 권지헌 귀에도 들렸다.허설아가 차갑게 말했다."신혼인데 오빠까지 같이 욕하고 싶진 않아.""아니, 설아야……""염치도 없어?"싸늘하게 뱉어내는 말에 연민규가 바로 두 손을 들며 항복했다."알았어, 알았어. 며칠 뒤에 연희 보러 가서 또 사과할게.""안 와도 돼, 끊을게."군더더기없이 짧은 답이었다.마치 작은 고슴도치가 날카로운 가시를 겉으로 드러낸 것 같았다.권지헌은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권지헌이 매번 느꼈던 건 부드러운 허설아였다.웃으며 맞이하든 겁먹고 숨든 적어도 부드러운 모습이었다. 허설아의 몸처럼 말이다."집안 사람들에게는 꽤 사납네. 역시 허씨 가문 따님다워. 나한테는 왜 그렇게 안 해?"
분위기가 싸해졌다.허설아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민규 오빠, 이쪽은 우리 회사 임원이야. 난 정말 업무가 있어서 먼저 가야 돼."말을 마친 허설아는 권지헌을 끌고 떠났다.더 있으면 숨이 턱턱 막힐 것 같았다.허설아는 또 성질을 못 참고 마음속에 숨겨둔 살기를 죄다 폭발시킬까 봐 두려웠다.허설아와 권지헌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던 연민규는 가슴이 두근거렸다.허설아 회사 임원인데 성이 권 씨라고?그럼 권율 그룹에 낙하산으로 온 그 대표 아닌가?연민규는 순간 뜨거운 숨을 내뿜으며 돌아서더니 현서 뺨을 찰싹 갈겼다!연민규는 현서네 친척들을 진작부터 참고 있었다.게다가 방금 현서가 권율 그룹 대표 앞에서 자기 여동생을 모욕했다."오늘 체면 봐준 거야.""네가 임신 안 했으면 이렇게 좋게 넘어가지 못했어."연민규는 현서를 쳐다보지도 않고 돌아서서 위로 올라갔다.연씨 집안 친척들도 전부 현서네 가족을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봤고 얼굴에는 혐오감이 넘실거렸다. "시골에서 온 사람들은 다 저렇지 뭐.""역시 설아가 출세했지. 저 청년 봐, 조건 엄청 좋더라.""설아가 어쨌든 우리 집안에서 나고 자란 아가씨인데 시골 사람과 같겠어?"현서 옆을 지나가던 연씨 집안 사람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수군거렸다. 연민규도 갔는데 누가 억지로 들러붙은 신부를 신경이나 써줄까?현서는 억울한 듯 얼굴을 감쌌다. 수치심과 창피함에 마음 속에서 허설아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이대로 떠나버리고 싶었지만 현서 부모가 길을 막고 귀를 확 비틀었다."뭐 해? 위로 올라가서 결혼해! 말썽 피우지 마!""결혼하고 빨리 예단 돈 내 카드로 보내, 들었어?"현서는 어쩔 수 없이 자존심이 짓밟히는 기분을 꾹 참으며 위로 올라가 결혼식을 이어갔다.호텔 밖으로 나오자 직원이 이미 권지헌 차를 가져왔다. 차 안 에어컨 온도가 적당하게 맞춰져 있었다. 차에 탄 허설아는 운전석의 권지헌을 바라보았다."방금 저 대신 나서줘서 고마워요."허설아도
권지헌의 시선이 신혼 부부를 쓱 훑었다. 권지헌이 옆을 지나칠 때 현서는 좀 긴장했다.권지헌 시선이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사양할게요. 저와 설아는 아직 볼일이 있어서요. 오늘은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어요."허설아는 몰래 안도의 숨을 쉬었다.뒤에 정말 업무가 더 있든 아니면 권지헌이 허설아가 여기 오래 있고 싶지 않다는 걸 알아챘든 거절해줘서 너무 고마웠다.현서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설아야, 왔으면 나에게 한마디라도 하지. 왔는데 위로 올라가지도 않을 거야?""수연이가 너에게 부딪힌 건 잘못했지만 너도 어쨌든 내 뱃속 아이 고모잖아. 봉투 안 주는 건 말이 안 되지."수연이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허설아는 현서를 빤히 쳐다봤다.오늘 신부는 화려하고 우아했다. 얼굴 화장도 티끌 하나 없이 완벽했다.허설아는 사무실에서 나와 공장까지 갔다 오느라 먼지투성이었다. 얼굴에도 화장기 하나 없었다. 대비되는 모습에 허설아가 입꼬리를 쓱 끌어올리며 가볍게 웃었다."가기 싫은데. 축의금은 저희 집안 규칙 상 초혼만 줘."저번에 연민규가 결혼할 때 연동근이 축의금을 2천만 원이나 줬었다.이번엔 일전 한푼도 안 줄 것이다.연동근이 살아 있어도 현서가 허설아를 괴롭혔던 사람이라는 걸 알았으면 이 결혼식엔 오지 않았을 것이다.허설아는 연민규를 망신 주고 싶지 않았다."민규 오빠, 신혼 축하해. 난 아직 처리할 업무가 있어서 올라가지는 않을게."현서의 얼굴이 굳어갔다.오늘 연민규와 결혼하는데 허설아가 체면도 안 세워준다니.연씨 집안 친척들은 현서와 허설아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오히려 현서가 잘못했다고 지적했다.게다가, 허설아가 저 지경이 됐는데도 권지헌과 얽혀 있다니!왜?!현서는 온갖 수단을 다 써서야 연씨 집안에 무시까지 당하며 연민규와 결혼할 수 있었는데!권지헌은 왜 허설아 같은 비열하고 더러운 여자를 만나는 거지?권지헌을 빤히 보던 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본인조차 낯설면서도 후련하게 느
허설아는 까맣게 잊고 있던 일이었다. 연민규는 허설아가 일부러 결혼식에 참석하러 온 거라 생각했다.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기뻐했다."설아야, 올 거면 미리 말하지. 내가 사람 보내서 데려올 텐데. 자자, 위로 올라가자."결혼식 장소는 위층 연회장이었다.연씨 집안은 한 층을 통째로 빌렸다.현서는 건영시에 친척도 없고 집도 없어서 옆 호텔에 신부에서 신부를 맞이했기에 복잡한 절차는 생략했다.이제 막 신부를 데려온 참이었다.현서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가슴이 드러나는 스타일에 머메이드 치마로 몸매가 날씬해 보이고 아름다웠다.치맛자락은 연민규가 손에 들고 있었다.얇은 면사포 너머의 현서는 원래 허설아를 알아보지 못했었다. 정면으로 봐도 알아보지 못했을 거였다.그때는 열정 넘치던 허씨 집안 따님이었다. 기숙사에 들어온 첫날 허설아는 처음 기숙사 생활을 해서 룸메이트와 잘 지낼 수 있을지 두렵다며 모두에게 선물을 줬다.현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명품 향수였다.막 시골에서 올라온 수험생인 현서는 짐을 전부 천으로 된 짐가방에 담아왔다.그래서 하늘과 땅 차이인 허설아 앞에서 주눅 들고 불안했다.허씨 집안이 파산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현서는 줄곧 허설아를 만나고 싶었다.현서 마음속엔 계속 한 가닥 동아줄이 남아 있었다. 한때 잘나가던 허씨 집안 딸이 나락으로 추락한 뒤에도 예전처럼 으스대는지 똑똑히 보고 싶었다.허설아에게 부딪힌 건 현서 쪽 친척이었다.현서 부모가 억지로 데려온 화동인데 아무것도 모르고 호텔에서 마구 뛰어다니기만 했다.아이는 허설아에게 쿵 부딪히고는 집에서 배운 대로 다짜고짜 손을 내밀어 돈을 달라고 했다."봉투 주세요. 큰 봉투 줘야 해요!"연민규는 급히 아이를 확 끌어당겼다.화동이 신랑 쪽 친척에게 봉투를 달라니 말이 안 되었다. 그런데 아이는 잡아당기자 화가 난다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와앙 울기 시작했다.꼭 허설아에게 봉투를 받겠다고 난리였다.허설아를 안고 고개도 돌리지 않던 권지헌이 이때 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