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순간 멈칫하던 노현우는 휴대폰 잠금을 풀지 않고 그대로 김지유한테 돌려주었다."문자가 온 거 같네요."김지유는 화면에 뜬 문자를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권지헌 얘기는 전에 노현우한테 한 적이 있었다. 다만 둘이 만나는 사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문자 두 통을 보자 예전에 받고 무시해 버렸던 문자가 떠올랐다.학부 시절 겪었던 일과, 이제는 다 잊은 줄로만 알았던 사람까지 머릿속에 한꺼번에 떠올랐다.현서.문자 말투가 현서와 지나칠 정도로 닮아 있었다.벌써 출소한 건지 김지유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허설아한테 전화를 걸려다가, 임신 후기라는 게 떠올라 방해할 순 없겠다 싶어 그만두었다.김지유가 아랫입술을 깨물자 노현우가 걱정스레 물었다."아는 사람이에요? 미안해요, 방금 본의 아니게 문자 내용을 봐버렸어요.""내가 아는 사람인지는 확실치 않아요. 전에 학교 다닐 때 권 대표님을 짝사랑했다고 말했잖아요? 그때 누가 권 대표님 여자친구 행세를 하면서 나한테 경고 문자를 엄청 보냈거든요.""그 밖에도 안 좋은 일이 좀 있었고요."김지유는 호감 가는 남자 앞에서 제 상처를 들추는 게 싫었다.학교 다닐 때 괴롭힘당한 일이든, 복수하겠다고 미행해 두들겨 팬 일이든 전부 입에 담기 힘든 과거였다.굳이 꺼내고 싶지 않았다.다 알고 나면 노현우가 어떤 생각을 할지도 알 수 없었다.희박한 가능성만 믿고 사람 마음을 시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노현우가 알겠다는 듯 콧등에 걸친 안경을 벗어 닦았다."그 얘기라면 나도 어렴풋이 기억나요. 학교 다닐 때 한바탕 시끄러웠잖아요. 지유 씨 일이었을 줄은 몰랐지만."학교 측은 사건을 쉬쉬하며 덮어버렸다.학생들 대부분은 사건이 있었다는 것만 알았지 당사자가 누군지는 몰랐다.노현우도 사건이 권지헌과 얽혀 있고 현서가 일을 벌인 장본인이라는 것까지만 알았다.허설아가 현서한테 사과하라고 강하게 밀어붙였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다른 피해자가 누군지는 아무도 몰랐다.김지유
요즘 김지유는 마치 운세 달력을 확인하지 않고 집을 나선 기분이었다.확인했더라면 분명 '휴대폰 도둑 주의'라고 적혀 있었을 것이다.예전 휴대폰에 몰래 프로그램이 깔렸던 일을 여태 노현우한테 말한 적이 없었다.그런데 마침 말할 계기가 생긴 것이다.다만 노준서를 의심한다는 부분만은 언급하지 않았다.노현우와 노준서는 엄연한 형제였기에 근거 없는 추측을 함부로 얘기할 수는 없었다.노현우는 김지유와 함께 근처 경찰서로 걸어가다가 그 말을 듣고 물었다."충전이요? 그 휴대폰 전에 어디서 충전했었어요?""마지막으로 충전한 건 철한선 여행 때 민박집이었어요. 기억나요?"노현우도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기억나요. 그런데 그날 밤에 지유 씨 휴대폰을 만진 건 나뿐이었잖아요. 다른 사람이 만진 적 있어요?""기억 나지 않아요."김지유는 대충 둘러댔다."전에 쓰던 사람이 충전기에 뭘 해놨을 수도 있죠. 어차피 내 충전기도 아니었잖아요."그때 충전기는 민박집 서랍에 있던 걸 대충 쓴 거였다.때문에 그럴 가능성도 아예 없진 않았다.노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별일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네요."김지유가 농담처럼 맞받아쳤다."그 휴대폰 잘 안 써서 다행이에요. 그걸로 업무를 본 적도 한 번도 없고요. 안 그랬으면 무서워서 잠도 못 잤을걸요.""업무 자료를 빼돌리려 했으면 훨씬 전문적인 프로그램을 깔았을 거예요."노현우가 김지유를 이끌고 길을 건너며 차가 오는 방향을 막아섰다."보통 이런 프로그램은 목적이 분명해요. 카드를 몰래 긁고 업무 정보를 빼돌리고 도청까지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것도 있는데 그건 훨씬 어렵죠."다만 배제할 수 없는 가능성이 하나 있었다.애초에 목적을 갖고 그런 프로그램을 미리 준비해 둔 경우였다.하지만 노현우는 생각만 해도 어이가 없었다.대체 누가 김지유 휴대폰에 그렇게 전문적인 프로그램을 깔았을까?노현우는 왜인지 문득 예전에 노준서가 그런 프로그램에 관심을 보였던 게 떠올랐다.하지만 바로 고개
그런 약재들로 담근 술 맛을 본 건 오랜 세월 통틀어 이번이 처음이었다.상상했던 것보다 조금 더 쌉쌀했지만 그렇다고 대단히 고급스러운 맛도 아니었다.술을 한 모금 마시자 따뜻한 기운이 목을 타고 내려가 뱃속까지 훈훈해졌다.김지유가 마시는 걸 보던 노현우도 한 모금 마셨다.가게에 다른 손님이 들어오자 사장님은 손님 맞으러 갔다.술기운이 바로 드러나는 김지유는 술 한 모금에 얼굴이 발그레해졌다.노현우는 그 모습을 보다가 손가락을 들어 발그레한 뺨을 톡 건드렸다.손끝이 약간 뜨끈했다."술 못 마셔요?""마실 수 있어요. 이 정도로 취하진 않는데 술만 마시면 얼굴에 바로 티가 나요."산골에서 나고 자란 김지유는 어릴 때부터 추운 지역에서 살아서인지 얼굴 피부가 남들보다 예민했다.술만 마시면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지는 편이었다.그 말에 노현우가 김지유 앞에 놓인 반 남은 술잔을 가져갔다."술 마시면 얼굴 빨개지는 사람은 알코올 알레르기예요. 앞으론 마시지 마요."탕수육을 먹다가 고개를 든 김지유는 노현우가 방금 가져간 술잔을 입에 털어넣는 걸 발견했다.김지유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인 듯했다.잔이 워낙 작아서 굳이 돌려 마실 것까진 없었겠지만 립스틱 자국은 모른 척하기 어려웠다.노현우는 못 본 것처럼 그냥 마셔버렸다.김지유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계속 밥을 먹었다.사장님의 음식 솜씨는 확실히 좋았다. 하지만 배부르게 먹었는데도 음식이 많이 남자 김지유가 아쉬운 듯 한마디 했다."집 근처였으면 포장했을 텐데.""지유 씨 이렇게 알뜰했어요?""뭐 이 정도는 기본이죠."김지유는 정말 알뜰했다.쪼들리고 궁한 살림에 워낙 익숙했으니까.지금은 손에 돈이 있어도 절약하던 습관이 더 몸에 배어서 집도 인테리어를 최대한 적게 하고 그냥 살 수 있을 정도로만 가꾸었다.권서진이 보다 못해 한가득 챙겨주지 않았다면 김지유는 회의할 때 입을 옷조차 급하게 사야 했을 것이다.그마저도 사고 나면 한참을 고민할 뻔했다.회사 근처에서 먹었다면 남은 음식은
병원의 일부 사업은 실제로 이미 중단하고 정산까지 마친 뒤였다.그전에 진 빚이 워낙 많은 데다 병원을 넘기는 절차도 복잡해서 노현우는 그때까지도 빚이 꽤 남아 있었다.병원을 넘기고 나서야 빚을 다 갚았지만 병원에 관한 모든 것에서 손을 떼야만 했다.권지헌한테도 따로 생각이 있었기에 병원을 완전히 리모델링해서 다시 오픈할 계획이었다.노현우는 권지헌이 분명 훨씬 잘 해낼 거라고 믿었다.사업에서만큼은 두말할 것 없는 천재였기에 어쩌다 마음이 움직여 자선 사업에 뛰어든 노현우와는 아예 달랐다.사장님은 그 말에 통통한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지었다."정말요? 그럼 진짜 다행이네요! 사장님이 말씀하지 않았으면 모를 뻔했어요!""나중에 병원에 한번 연락해 보세요. 필요하면 제가 의료팀에 얘기해서 병상이 남았는지 알아봐 드릴게요.""그럼 너무 민폐죠, 그렇게까지 귀찮게 할 순 없어요! 연락처만 하나 주시면 우리가 직접 물어볼게요!"사장님 입장에서는 노현우가 예전에 아이 숙제를 공짜로 봐준 것만 해도 이미 큰 도움이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수술까지 도와준다니 너무 신세 지는 것 같았다.김지유가 웃으며 설명했다."그 병원, 예전에 노 대표님이 세운 곳이라 직접 연락하는 게 나을 거예요."적어도 의료팀 사람들이 노현우를 알고 있을 테니까.사장님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넋 나간 얼굴로 노현우를 바라보더니 앞치마에 손을 닦고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했다."청담이 노 사장님이 세운 병원이라고요? 그럼 우리가 예전에 공짜로 받은 수술비가 전부 사장님 돈이라는 거잖아요!"노현우가 손을 내저었다."꼭 그런 건 아니에요. 병원에 여러 가지 프로젝트가 있는데 각각 맡은 협력사가 따로 있어요. 저는 그냥 사람들을 모아서 병원을 차린 것뿐이에요."김지유가 옆에서 한마디 보탰다."그리고 본인 돈을 몽땅 쏟아부어서 완전히 망해버렸고요?""경영에는 확실히 재능이 없더라고요."권지헌의 말을 빌리자면 노현우는 병원을 차려놓고도 돈을 못 버는 사람이었다.아동병원에서 심사를
보고 있으면 봄바람을 쐬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지는 얼굴이었다.노현우가 멀지 않은 빌딩 하나를 가리켰다."저기가 예전 회사예요. 그때 저 건물에서 일해서 마침 이 근처에 살았거든요.""노 대표님한테 과외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노현우는 놀리는 듯한 말투를 알아챘지만 화내지 않았다.오히려 젠틀하게 받아넘겼다."지유 씨도 과외가 필요하면 동생 외국어 과외는 해줄 수 있어요. 전에 아이엘츠 점수 꽤 높게 받았거든요."김지유는 노현우가 완전히 영어로 진행한 회의를 본 적이 있었다.확실히 나무랄 데가 없이 유창하고 발음이 정확했다.김지유가 눈썹을 치켜올렸다."나도 외국어 잘해서 굳이 대표님까지 모실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지유 씨는 너무 바쁘잖아요. 그에 비하면 내가 훨씬 한가하죠."두 사람의 업무량은 엇비슷했지만 김지유는 학교에 가서 과제를 완성할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그에 비하면 오히려 노현우가 시간이 더 넉넉한 편이었다.김지유가 말끝을 길게 늘이며 말했다."아, 그럼 노 대표님 과외비는 비싸요?""밥 한 끼면 돼요. 비싼가요?"밥 한 끼로 이렇게 수준 높은 과외 선생을 구할 수 있다면 김지유한테는 그야말로 횡재였다.요즘 건영대 학생들도 과외 한 타임에 20만 원 정도는 받았다.김지유가 차를 홀짝였다."과외 비용이 너무 싸서 나중에 다른 걸로 갚으라고 할까 봐 겁나서 안 되겠네요."돈을 안 받는 건 곧 신세를 져야 한다는 소리였다.노현우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여유롭게 웃었다."그럼 횟수대로 비용 받을게요. 자주 가진 않을 거고요.""그 정도면 생각해 볼 만하네요."김지유는 눈이 휘어져라 웃었다.요리 실력이 좋은 사장님은 삼십 분쯤 기다리자 주문한 요리 네 가지와 국 하나를 전부 상에 올렸다.이 시간대엔 가게에 다른 손님이 없었다.사장님은 옆 테이블에 앉아 두 사람이 밥 먹는 모습을 싱글벙글 웃으며 지켜보았다."사장님은 지금 어디서 일하세요? 우리 애가 전에 사장님이 나온 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었거든요."
노현우는 손바닥을 위로 펼친 채 재촉하는 기색 하나 없이 느긋하게 기다렸다.경원시의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길 양쪽에 매달린 등불을 흔들고 김지유의 겉옷 자락까지 나부끼게 했다.노현우의 손바닥은 큼직해서 고개만 숙이면 손금 하나하나가 또렷하게 보였다.김지유는 문득 어릴 적, 산골 마을 어귀에 늘 앉아 있던 할머니가 손금을 봐주겠다고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산골 아이한테 손금이랄 게 어디 있었을까.손은 언제나 흙투성이였고 땔감에 긁힌 상처가 가득했으며 손금 틈새까지 씻기지 않는 흙때가 끼어 있었다.김지유한테는 유년기라고 부를 만한 시절이 없었다.연애라는 것도 한 번 해본 적 없었다.굳이 꼽자면 대학 시절의 남부끄러운 짝사랑 한 번이 전부였다.고작 몇 년 사이에 그 시절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도 모자라 이렇게 한 남자가 눈앞에 서서 손을 내밀고 있을 줄은 그때의 김지유는 상상조차 못 했다.뒤쪽 골목에서 누군가 불쑥 튀어나와 김지유와 부딪쳤다.노현우가 빠르게 팔을 뻗어 김지유를 옆으로 끌어당겨 피하게 했다.김지유는 부딪힌 사람이 누구인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지나가던 행인인 듯한 상대는 벌떡 일어나더니 사과 한마디 없이 허둥지둥 달려갔다.노현우의 팔이 김지유를 감싸고 있었다.따뜻한 손바닥이 얇은 옷 한 겹을 사이에 두고 김지유의 등에 닿아 있었다.고개를 숙인 노현우가 김지유를 내려다보았다."왜 이렇게 말랐어요? 지유 씨 평소에 밥 안 먹어요?"김지유가 눈을 깜빡거렸다."그럼 대표님이 밥 한 끼 사는 건 어때요?""얼마든지요."해프닝을 계기로 노현우는 자연스럽게 김지유의 손을 잡고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전에 이 동네 출장 왔을 때 가본 식당인데 대표 메뉴가 꽤 괜찮았어요. 같이 가서 먹어봐요.""좋아요."식당은 아담했고 여자 사장님은 키가 작고 통통한 체형이었다.사장님은 노현우가 들어오는 걸 보더니 뜻밖에도 한눈에 알아보았다."노 사장님 맞죠? 우리 가게에 한참 안 오시더니 이렇게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사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