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현관문이 닫히기도 전, 엄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복도를 쨍하게 울렸다.
"그나저나 혜연아, 너 아직도 그 놈이랑 연락하니? 소영이 전 남친, 그 강상수인지 뭔지 하는 놈!"
"아니! 프로젝트 다 끝났어. 그런 놈팽이랑 왜 연락해? 안 해!"
혜연은 제 발 저린 도둑처럼 소리를 버럭 질렀다.
문밖 벽 뒤에 붙어있던 상수는 '놈팽이'라는 단어가 고막을 때리자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이 나왔다.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준 조향사로 대접받던 그가 졸지에 오피스텔 복도에서 놈팽이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엄마의 독설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 잘했다! 그 놈 아주 질이 안 좋다더만. 냄새로 여자들 홀리고 다니는 바람둥이라며?
한 시간쯤 흘렀을까.소영 아빠가 다시 혜연의 집을 찾았다.거실은 여전히 깨진 유리 파편들과 혜연 부모님의 충격으로 엉망진창이었다.혜연 아빠는 창백한 낯빛으로 소파에 주저앉아 있었고, 혜연 엄마는 거실에 주저 앉아 넋이 나간 듯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소영 엄마는 좀 괜찮아?”혜연 아빠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물었다.소영 아빠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식탁 의자에 무겁게 앉았다.“그냥 뭐… 머리 싸매고 누웠죠. 제정신이 아니에요. 소영이가 전화해서 울고불고 난리를 치니 저 사람도 눈이 뒤집힌 거죠. 뭐 이미 다 지난 일이라지만, 저도 제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소영이가 죽고 싶다고 저러니 가슴이 찢어집니다.”“대체 무슨 일인지… 자세히 좀 말해봐요. 우리 혜연이가 정말 그랬다는 거야?”혜연 아빠가 묻자, 소영 아빠는 소영에게 들은 전말을 조심스럽게 설명하기 시작했다.혜연과 상수가 6개월 전부터 남몰래 만나왔다는 사실, 프로젝트를 핑계로 소영을 속여왔다는 점, 그리고 어젯밤 카페에서 소영이 두 사람의 불륜 현장을 직접 덮쳤다는 이야기까지.소영 아빠의 입에서 나오는 문장 하나하나가 혜연 부모님의 심장에 대못을 박았다.이야기를 듣는 내내 혜연 부는 입을 굳게 다물었고, 혜연 엄마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20년 지기 친구 딸이 내 자식 같았고, 내 자식이 그 집 딸 같았는데. 그 믿음이 무너지는 소리가 거실의 정적보다 더 크게 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는 울음이라기보다 짐승의 비명에 가까웠다.소영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찢겨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엄마… 나 어떡해? 혜연이가… 박혜연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상수 오빠랑… 둘이서 나를….”휴대폰을 쥔 소영 엄마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거실의 적막 속에서 새어 나오는 딸의 절규는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엄마의 가슴을 사정없이 후벼팠다.평소 누구보다 당당하고 밝았던 딸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목소리에 소영 엄마의 눈등이 붉게 달아올랐다.옆에서 그 소리를 함께 듣고 있던 소영 아빠의 얼굴도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그는 착잡한 심경을 감추지 못한 채 마른세수를 반복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전화가 끊겼다.거실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누구도 먼저 입을 뗄 수 없었다.20년이다.제 자식처럼 예뻐하며 키웠던 친구의 딸 혜연, 그리고 8년 동안 당연히 사위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딸의 전 연인 상수.그 두 사람이 가장 소중한 딸의 심장에 비수를 꽂았다는 사실은 도저히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그 정적을 깨고 소영 엄마가 벌떡 일어났다.눈동자에는 핏발이 서 있었고, 입술은 분노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가만 안 둬. 이 배은망덕한 것들, 내가 그냥 둘 줄 알아?”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현관으로 향하는 아내를 소영 아빠가 다급히 붙잡았다.“여보, 진정
혜연은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멍하니 휴대폰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도면 수치들은 이미 의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점심시간부터 수십 번도 더 윤소영의 인스타그램 프로필을 들여다보았지만, 결과는 늘 같았다.[게시물 없음]검은 화면 위에 뜬 차가운 문구. 20년간 쌓아온 두 사람의 역사, 함께 해외여행을 가서 찍은 웃음 섞인 영상들, 서로의 생일을 제 일처럼 축하하던 기록들이 단 한순간에 증발해 있었다.마치 박혜연이라는 존재가 윤소영의 생애에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소영은 정교하게 추억을 도려냈다.'차단한 걸까? 아니면 정말 홧김에 다 지운 걸까?'혜연은 떨리는 손으로 소영에게 전화를 걸었다.사과를 하든, 무릎을 꿇고 빌든, 아니면 뺨이라도 맞든 일단 만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소영의 침묵이 불러오는 온갖 끔찍한 상상력이 혜연을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연결되지 않는다는 기계적인 안내음뿐이었다.불안은 이내 지독한 걱정으로 변질되었다.소영은 감정이 격해지면 '죽어버리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던 아이였다.혹시나 어제의 충격으로 정말 잘못된 선택을 한 건 아닐까 하는 공포가 혜연의 심장을 조였다.고민 끝에 혜연은 고등학교 동창이자 소영과도 자주 어울리는 민주에게 연락을 취했다."민주야, 나 혜연이야. 혹시 소영이랑 연락돼? 인스타가 갑자기 다 없어졌어. 무슨 일 생긴 거 아닐까 해서..."반대편에서 돌아온 민주의 목소리는 의아함과 밝은 기운
출근길, 엘리베이터 앞에 선 혜연의 등 뒤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평소와 다를 바 없는 동료들의 일상적인 대화가 오늘따라 유달리 날카로운 금속음처럼 고막을 긁어댔다.탕비실 쪽에서 들려오는 가벼운 웃음소리조차 마치 자신을 향한 조롱이나 비릿한 수군거림처럼 들렸다.'다들 알고 있는 걸까? 소영이가 벌써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한건가?'엘리베이터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생경했다.겹겹이 덧바른 화장으로 가린 수척함 뒤로, 지워지지 않는 배신자의 낙인이 선명하게 박혀 있는 것만 같아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문이 열리고 사무실로 향하는 짧은 복도가 마치 단두대로 향하는 길처럼 아득하고 위태롭게 느껴졌다.자리에 앉았지만, 모니터 속의 글자들은 제멋대로 일그러지며 기괴한 춤을 췄다.혜연은 몇 번이나 마우스를 쥐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다.평소라면 10분이면 끝냈을 기획안의 서두조차 한 단어도 채우지 못했다.머릿속은 온통 어젯밤 소영이 남기고 간 서늘한 저주와, 상수의 체온이 뒤섞여 진창이 되어 있었다.그때, 책상 파티션 너머로 화살 같은 시선이 꽂혔다.눈치 빠른 동기, 혜연이 유일하게 의지한 김민지 과장였다."박혜연, 너 오늘 제정신 아니지?"민지의 낮은 목소리에 혜연은 어깨를 크게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민지는 특유의 예리한 눈미로 혜연의 파들거리는 손끝과 퀭한 눈동자를 샅샅이 훑고 있었다."아냐... 별일 없어. 어제 잠을 좀 설쳐서 그래."
상수의 목소리에 짙은 자괴감이 섞였다.혜연은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어 상수의 젖은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아니요, 상수 씨 없이는 안 돼요. 이제 와서 착한 척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 이미 나는 소영이를 잃었고, 나 자신도 잃었어요. 그러니까... 앞으로 다가올 그 고난들, 상수 씨가 같이 해줘야 해요. 나 혼자 이 지옥에 두지 마요."상수는 예상치 못한 혜연의 간절한 결단에 숨을 들이켰다.그는 혜연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사실... 미안해서 차마 먼저 잡지 못했어요. 내가 당신을 아름다운 낙원이 아니라 지옥으로 안내한 것 같아서. 내 사랑이 당신의 삶을 망치고 있는 것 같아서..."혜연은 상수의 손바닥에 자신의 얼굴을 부비며 처연하게 미소 지었다."지옥이라도 함께해달라고 하세요. 그게 내가 바라는 당신의 사랑이에요. 혼자 천국에 가느니, 당신과 함께 불속으로 뛰어드는 게 차라리 숨이 쉬어질 것 같으니까.""혜연 씨...""약속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손 놓지 않겠다고. 소영이가 우리를 어떻게 파괴하려 하든, 세상이 우리에게 어떤 침을 뱉든... 상수 씨만 내 곁에 있으면 돼요."상수는 혜연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치며 낮게 뇌까렸다."어디든 함께 갈게요. 그게 지옥 밑바닥이라도, 내가 당신의 마지막 기둥이 될게요."그날 밤, 두 사람은 혜연의 좁은 원룸으로 들어갔다.소영의 흔적이 가득한 그 방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원하며 필사적으로 죄책감을 지워내려
상수가 조향해 주었다는 그 향수의 잔향이 코끝을 스쳤다.아까는 그토록 감미롭던 우디 향이, 이제는 썩어가는 나무 더미에서 나는 시취(屍臭)처럼 느껴졌다.혜연은 깨달았다. 자신이 상수와 나누었던 그 눈부신 사랑의 순간들은 사실 소영의 고통을 거름 삼아 피어난 악의 꽃이었다는 것을.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 감정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이기적인지, 소영의 무너진 눈빛을 통해 비로소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것이다.'우리는 정말 사랑일까? 아니면 그저 서로의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제물로 바친 괴물들일까.'소영의 마지막 경고가 귓가에 쟁쟁하게 울렸다.'무엇을 버리고 선택한 것인지 알게 해주겠다.'소영은 이제 혜연의 적이다.20년을 공유했던 친구가 적이 되었을 때, 그 공격이 어디를 향할지 혜연은 누구보다 잘 안다. 자신의 약점, 자신의 치부,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사회적 위치까지 소영은 낱낱이 파헤칠 것이다.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앞으로 상수를 대할 자신의 마음이었다.그를 볼 때마다 소영의 피눈물이 겹쳐 보일 텐데, 그 품 안에서 예전처럼 웃을 수 있을까?상수의 입맞춤에서 소영의 비명 소리가 들릴 텐데, 그 사랑이 과연 안식처가 될 수 있을까?혜연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카페를 나서는 계단은 아까보다 훨씬 더 깊고 어두운 나락처럼 보였다.혜연은 이제 알았다.오늘 밤, 그녀는 상수를 얻은 것이 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