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내 친구의 남자였던, 그에게 향하다.: Chapter 1 - Chapter 10

12 Chapters

완벽한 폭풍의 전야 #1

​4월의 햇살은 잔인할 만큼 다정했다.햇살이 유달리 다정한 평일 아침이었다. 창문을 넘어 들어온 빛줄기가 침대 머리맡을 부드럽게 훑고 지나갔다. 혜연은 천천히 눈을 떴다. 평소라면 출근 전쟁을 앞두고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켰겠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원룸 안으로 길게 들이친 빗줄기 속에서 먼지들이 느릿하게 춤을 췄다. 혜연은 침대 끝에 걸터앉아 그 빛의 입자들이 그리는 무의미한 궤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늘은 그를 만나는 날이었다. 가슴 한구석이 설렘으로 부풀어 오르면서도, 동시에 묵직한 돌덩이가 얹힌 듯 옥죄어오는 감각. 이 모순된 감정은 이제 그녀의 일상이자,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마주해야 하는 형벌이 되어버렸다.​진동 소리와 함께 스마트폰 화면이 창백하게 밝아졌다. 알림 문구를 확인하는 그 짧은 찰나에도 심장이 늑골을 때리는 소리가 귓가에 선명했다.​[강상수 : 잘 잤어요? 오늘 아침은 꽤 쌀쌀하네요. 따뜻하게 입고 출근해요. 이따 퇴근하고 회사 앞으로 갈게요.]단조로운 문장이었지만, 혜연의 입가에는 옅은 경련 같은 미소가 번졌다. '따뜻하게 입으라'는 평범한 안부조차 그에게선 특별한 암호처럼, 혹은 은밀한 초대장처럼 느껴졌다.혜연의 손끝이 자판 위를 한참이나 망설이며 배회했다. '저도 기다렸어요', '보고 싶어서 잠을 설쳤어요' 같은 날것의 진심을 꾹꾹 눌러 담고, 겨우 차갑고 사무적인 가면을 덧씌운 답장을 밀어 넣었다.​[박혜연 : 네, 좋아요. 이따 봐요.]​'보고 싶다'는 직설적인 문장을 계속 바라보며 혜연의 가슴이 간질거렸다. 오늘 퇴근 후, 그 시간만을 이정표 삼아 하루를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거울 앞에 선 그녀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생기가 돌았다. 옷장 문을 열자 갇혀 있던 서늘한 공기가 쏟아졌다. 늘 입던 무난한 검은 니트를 만지작거리다 다시 걸어 두었다. 어쩐지 오늘만큼은 평소보다 더 선명해지고 싶었다.그에게 조금이라도 더 예뻐 보이고 싶은 원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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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폭풍의 전야 #2

​흐트러짐 없이 늘어뜨린 긴 생머리, 늘 생기 넘치던 그녀의 얼굴은 마치 석고상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소영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겹쳐진 두 사람의 손, 그리고 그 옆에 놓인 작은 향수병에 날카롭게 꽂혔다.​"아."​혜연의 입에서 신음 같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손을 빼야 한다는 본능적인 생각조차 못 한 채, 온몸이 화석처럼 얼어붙었다. 상수가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지만, 소영의 목소리가 채찍처럼 날아와 그를 자리에 짓눌렀다.​"앉아. 도망갈 생각 말고."​소영은 기어코 두 사람의 맞은편 의자를 거칠게 빼내 앉았다. 하이힐이 바닥을 치는 소리가 비명처럼 카페 안에 퍼졌다. ​혜연의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카페 안을 흐르던 부드러운 재즈 음악이 괴기스럽게 뒤틀려 들려왔다. 소영의 등장과 동시에 카페 안의 온도는 순식간에 영하로 얼어붙었다.​"설명할게, 소영아.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어."​혜연의 떨리는 음성을 소영이 단칼에 베어 물었다.​"설명? 아니, 대답만 해. 언제부터였어?"​소영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한 글자씩 증오를 담아 내뱉었다. 그녀의 눈빛은 배신감과 깊은 슬픔이 뒤엉켜 시커멓게 타버린 잿더미 같았다.​"내가 지난번에 물었을 때, 넌 분명 동료라고 했지. 박혜연, 나한테 거짓말한거야. 우리, 20년 동안 비밀 하나 없던 친구 아니었어? 내 밑바닥까지 다 본 유일한 사람이 너잖아!"​소영의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랐다. 배신감에 젖은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혜연은 소영과 보냈던 수많은 계절이, '영원'을 약속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모든 아름다웠던 기억들이 지금 이 순간, 자신을 난도질하는 가장 날카로운 흉기가 되어 돌아왔다.​"대답해. 8년 만난 내 남친이랑, 내 제일 친한 친구인 네가… 대체 언제부터 나 몰래 이 지랄을 떨었냐고!"​​"6개월 전이야."​소영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눈물이 섞인, 부서질 듯한 웃음이었다.​"6개월? 그 긴 시간 동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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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된 흔적, 유예된 비극 #1

​비극은 예고 없이 찾아오지만, 그 흔적은 지독하리 만치 오래 남는다. 아니, 어쩌면 비극은 가장 평온한 일상의 얼굴을 하고 우리 곁에 이미 와 있는지도 모른다. 5년 전, 그해 가을은 혜연과 소영에게 그런 계절이었다. 8년이라는 긴 시간이 단 몇 마디의 무미건조한 문장으로 해체되던 날, 혜연의 세상 한 축도 소영과 함께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혜연아…… 나, 상수 오빠랑 헤어졌어.”​새벽 2시, 정적을 찢고 울린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이미 짓눌린 울음소리에 형체를 잃어버린 상태였다. 혜연은 겉옷을 제대로 챙겨 입을 겨를도 없이 택시에 몸을 실었다. 새벽 공기를 가르는 택시 안에서 혜연은 소영의 목소리를 곱씹었다. 8년. 강산이 변한다는 그 긴 시간 동안 두 사람의 연애는 혜연에게도 하나의 상수(常數)였다. 결코 변하지 않을 것 같던 그 견고한 성벽이 무너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소영의 자취방 문을 열었을 때, 복도까지 새어 나오던 그 서늘한 침묵이 혜연의 심장을 먼저 할퀴었다. 좁은 현관에는 주인을 잃은 듯 삐딱하게 놓인 남자의 신발 한 켤레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텅 빈 공간이 주는 압박감 속에 기묘한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상수가 본의 아니게 회사에서 나오게 된 후, 재취업 대신 조향사라는 불투명한 꿈에 매달리며 처음으로 완성했다는 그 향이었다. 하지만 소영에게 그 향기는 꿈의 결실이 아니라, 무책임한 방황과 비겁한 도피의 증거물일 뿐이었다.​“이게 뭐야, 소영아. 정신 차려. 응? 제발…….”​혜연은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진 빈 술병들을 치우며 소영을 일으켰다. 소영은 뼛속까지 시린 사람처럼 덜덜 떨며 혜연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부짖었다. 8년의 세월이 고작 술병 몇 개와 엉망이 된 침구로 요약될 수 있다는 사실이 혜연을 더 아프게 했다.​“어떡해, 혜연아. 나 진짜 죽을 것 같아. 8년이야, 우리……. 청춘을 다 바쳤다고.”​소영의 목소리는 갈라진 틈 사이로 피가 배어 나올 듯 위태로웠다.​“오빠가 회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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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된 흔적, 유예된 비극 #2

소영의 회복은 계절의 변화보다 느렸지만, 분명했다. 그녀는 단 한 순간도 상수의 과거에 머물기를 원치 않았다. ​이별 직후 한 달은 오직 청산의 시기였다. 소영은 집안 곳곳에 숨어 있는 상수의 흔적을 박멸하듯 도려냈다. 함께 쓰던 커플 머그컵은 아파트 쓰레기 집하장 구석에서 산산조각을 냈고, 상수가 즐겨 입던 낡은 가디건은 헌 옷 수거함 깊숙이 처박았다. 침대 시트 틈에 박힌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집요하게 찾아내 100리터 쓰레기봉투에 담으며 소영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미련이 남아서 버리는 게 아냐, 그냥 내 인생에서 이 '오답'들을 완전히 삭제하고 싶은 거야. 8년 동안 내가 참았던 건 사랑이 아니라 그냥 지독한 습성분이었던 것 같아."​소영은 핏기 없는 얼굴로 혜연에게 웃어 보였다. 혜연은 말없이 그 무거운 봉투들을 몇 번이고 대신 들고 나갔다.석 달이 지났을 무렵, 소영은 철저한 '자기 복구'에 들어갔다. 과감한 실루엣의 원피스를 입고 혜연과 주말 브런치를 즐겼다.​"나 이제 알 것 같아. 내가 그동안 얼마나 그 인간한테 맞추고 있었는지. 나도 모르게 상수오빠가 싫은티 내는걸 피했던 것 같아. 말로 안할 뿐이지 다 티나는 사람이잖아. 이제는 내 마음대로 입고, 내 마음대로 향수 뿌릴 거야."​소영은 포크를 내려놓으며 선언하듯 말했다. 그것은 이별에 대한 슬픔이 아니었다. 상수의 무기력함에 전염되어 한동안 놓았던 커리어를 다시 다잡았다. 그녀는 평소 좋아하던 선명하고 화려한 스타일을 회복했다. 상수가 옆에서 멀뚱히 서 있기만 해서 차마 입지 못했던 높은 힐을 신었고, 본인이 주도하는 삶의 활기를 되찾았다.​"혜연아, 나 이제야 내 속도로 걷는 것 같아. 그동안은 뒤에서 안 움직이는 사람을 억지로 밀면서 가느라 내 다리가 다 부서지는 줄 알았거든. "​소영은 브런치를 먹으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상수의 수동적인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강력한 주도권을 회복한 당당한 선언이었다.이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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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재앙의 시작 #1

혜연에게 ‘향기’란 평온한 일상의 다른 이름이었다.공간 디자이너로서 그녀가 다루는 것은 물리적인 벽과 가구였지만, 그 공간의 끝에 머무는 미세한 잔향들이야말로 혜연이 추구하는 디자인의 완성이었다.그날 아침도 그랬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정갈한 햇살, 갓 내린 커피 향, 그리고 어젯밤 소영과 주고받은 다정한 통화 내용까지. 혜연의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하고 안정적이었다.소영은 혜연에게 단순한 친구 이상이었다.고등학교 시절, 소영의 집에서 지내며 겪었던 따뜻한 온기. 소영의 어머니가 차려주던 집밥과, 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상수라는 한 남자만을 바라보며 울고 웃던 소영의 순애보를 곁에서 지켜본 혜연에게 소영은 지켜줘야 할 가족이자 분신과도 같았다.5년 전, 상수의 8년 연애가 비극적으로 끝났을 때, 소영을 붙잡고 함께 밤새워 울어주었던 것도 혜연이었다. 그 시절, 상수라는 남자는 혜연에게도 ‘지워버려야 할 나쁜 기억’ 그 자체였다.그런 혜연에게 이제 막 출근한 아침부터 그 기억이 다시 등장했다.“이번 ‘블루밍 프로젝트’ 파트너, 최종 결정됐어. 강상수 작가야.”팀장 김진우의 말은 맑게 개인 하늘에 떨어진 벼락이었다. 혜연은 마시던 커피를 컵 째로 떨어뜨릴 뻔했다. 강상수. 5년 반 전, 소영의 인생을 흔들어놓고 제 발로 떠나버린 그 무뚝뚝한 남자. 혜연은 헛것을 들었다고 믿으며 팀장을 바라봤다.“팀장님, 지금 뭐라고…?”“강상수 작가. 왜, 혹시 아는 사람이야? 성수동에선 이미 감각 좋기로 정평이 난 조향사거든. 이번 카페 컨셉이 ‘피어나는 기억’인데, 이 친구 향기가 아주 딱이야.”혜연의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아는 사람이라니. 세상에서 제일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혜연은 애써 당황한 기색을 지우려 펜을 만지작거렸다.“아, 그… 강상수요? 혹시 그 강상수 씨인가요?”“어? 강상수? 유명한 조향사인데, 혜연 씨 그 사람 알아?”팀장의 되물음에 혜연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망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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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재앙의 시작 #2

그는 혜연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테이블 위에 놓인 자신의 가방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과거의 차가움은 어디 가고, 마치 처음 소개팅 나온 사람처럼 서툴고 어색한 태도였다. 혜연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묘한 괴리감을 느꼈다.‘뭐야, 이 답답한 사람은? 소영이한테 그렇게 무심하게 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왜 이렇게 쭈뼛거리는 건데? 나를 보고 놀란 건가? 아니면 아직도 내가 소영이 친구인 걸 알고 있는 건가?’혜연은 상수의 그 수동적이고 답답한 태도를 보자마자, 오히려 방어 기제가 풀리며 묘한 오기가 생겼다. 혜연은 성큼성큼 다가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강상수 작가님이라고 하셨죠? 저는 이번 공간 디자인을 맡은 박혜연입니다. 본격적인 협업 전에 제가 한 가지 말씀드릴게요.”상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혜연을 바라봤다. 혜연은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쐐기를 박았다.“이 프로젝트는 철저히 카페 ‘블루밍’의 컨셉을 위한 거예요. 제 디자인은 직선적이고 정교합니다. 작가님의 향기가 제 작업에 방해가 된다면, 저는 즉시 파트너십 교체를 요구할 겁니다. 디자인의 일관성은 제 자존심이거든요. 아시겠어요?”상수는 당황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잠시 아무 말 없이 혜연의 얼굴을 살피더니, 아주 작고 좁쌀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 최대한… 혜연 씨 디자인에… 방해되지 않도록… 맞춰보겠습니다. 저도… 이 프로젝트가 중요하니까요.”그의 너무나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대답에 혜연은 오히려 할 말을 잃었다. 더 세게 밀어붙이려던 혜연의 공격이 허공에 붕 뜬 느낌이었다. 상수는 혜연의 눈치를 살피며 수첩을 펼쳤다. 그 모습이 마치 숙제를 검사 받는 학생 같아 혜연은 어이가 없었다.상수는 향기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철학을 이야기하면서도 혜연의 눈치를 계속 살폈다. 소영과 함께 있을 때 보여주었던 그 완고한 고집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시종일관 혜연이 낸 의견에 “그것도 좋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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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개로 지워진 이름 #1

[5년 전]​저녁 식사 자리는 내내 위태로웠다. 툭 치면 깨질 것 같은 정적 속에서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만 날카롭게 울렸다. 결국 소영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너랑은 말이 안 통해. 정말 지긋지긋해, 강상수."​소영은 짧은 비난을 남기고 먼저 식당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겨진 상수는 식어가는 음식 앞에서 한참을 앉아 있다가, 계산을 마치고 형 재현과 함께 사는 낡은 다세대 주택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희망퇴직 후 몇 달째 이어지는 재취업의 실패, 그리고 매일같이 이어지는 소영의 독촉. 그 숨 막히는 현실 속에서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었던 조향 수업조차 소영은 '돈 안 되는 짓'이라며 혐오했다.​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실에서 TV를 보던 재현이 고개를 돌렸다.​"어, 왔냐? 왜 그래, 표정이 왜 이래? 또 소영이랑 싸웠냐?"​"……아니, 별일 아니야."​상수는 건조하게 대답하고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기어들어 갔다. 평소 같았으면 벌써 몇 번이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라는 문자를 보냈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조차 없었다. 침대에 몸을 던진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8년이라는 시간이 마치 젖은 솜처럼 온몸을 짓누르고 있었다.​그때, 정적을 깨고 휴대폰이 진동했다. 소영이었다. 상수는 잠시 멈칫하다 전화를 받았다.​[그만하자, 우리.]​수화기 너머 소영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차가웠다. 8년의 무게가 무색할 만큼 명료한 선언이었다. ​[……듣고 있어? 우리 여기까지 하자고.]​"……그래. 알겠어. 네가 원하면 그렇게 해."​상수의 목소리는 평온하다 못해 무미건조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 같았다. 소영은 그 짧은 긍정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상수는 귀에서 휴대폰을 떼고 한동안 그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멍한 시선이 허공을 헤맸다.​'끝났다. 정말로.'​심장 한구석이 뻥 뚫린 것 같다가도, 이내 기묘한 박동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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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개로 지워진 이름 #2

​상수의 기억은 다시 아주 오래전, 낡은 아파트의 거실로 돌아갔다. 초등학생 상수에게 그림은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캔버스 위에 자유롭게 색을 칠할 때만큼은 아버지가 아닌 '나'로 존재할 수 있었다. 어느 날, 군인 출신인 아버지가 예고 없이 집에 돌아왔다.​"상수야, 그림 그리고 있니?"​아버지는 늘 무표정했다. 그 표정은 상수에게 거대한 장벽이었다. 상수는 그림을 그리다 말고 어깨를 움츠렸다."네!""운동은 안 하고?"​아버지의 말에 다른 의견을 제시 하지 않고 상수는 붓을 놓았다. 그것은 상수가 생각하는 아버지가 정해준 '올바른 소년'의 길이었기 때문이다.​"…아, 네. 운동 할게요.""그래."​아버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 무미건조한 ‘그래’라는 한마디는 상수에게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중학생이 되어 진로 상담을 할 때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선택할 때도 상황은 같았다. 아버지는 묻고, 상수는 ‘네’라고 답한다.​"너는 뭐 하고 싶으니?""…잘 모르겠어요.""이공계는 어때?""네!""그게 네 생각이니?"​상수는 아버지의 눈을 피했다. 아버지는 상수를 빤히 바라보며 조금 더 깊은 대답을 기다리는 듯했으나, 상수는 그 침묵조차 압박으로 받아들였다.​"네!""그래."​상수는 자신의 의지가 무엇인지조차 고민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원하는 ‘이공계’라는 틀 안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것이 상수에게는 곧 ‘가족의 평화’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네’라고 답하는 순간, 아버지의 굳은 표정이 미세하게 풀리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상수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었다.​대학 선택도, 전공도, 결국은 아버지의 ‘그래’ 한마디를 듣기 위한 반복된 연극이었다.​"어느 대학 갈 거니?""…잘 모르겠어요.""공대는 어때?""네, 공대 갈게요.""그게 네가 원하는 거니?""네!"​상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게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지조차 모른 채, 그저 아버지가 원하는 답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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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구덩이 속의 블루밍 #1

카페 ‘블루밍’의 공사 현장은 그야말로 거대한 아수라장이었다.혜연은 방진 마스크를 눌러쓴 채,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벽면을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한때는 화려한 조명과 웃음소리가 가득했을 이 공간은, 이제 막 뜯어낸 콘크리트 가루와 녹슨 철근의 비릿한 냄새, 그리고 오래된 습기가 만들어낸 퀴퀴한 곰팡이 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혜연이 밤을 새워 설계한 디자인은 완벽한 직선과 차가운 미니멀리즘의 정수였다. 하지만 그 차가운 완벽함은 현장의 거친 먼지 속에 갇혀 좀처럼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손에 든 도면을 거칠게 말아 쥐었다. 현장 소장의 무성의한 마감 처리가 눈에 가시처럼 박혔고, 무엇보다 이 공간에 스며들어야 할 '향기'라는 불확실한 요소가 그녀의 통제 본능을 자극하고 있었다.그때, 공사장 입구의 가림막이 들리며 둔탁한 발소리가 들렸다. 상수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먼지 구덩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깨끗한 린넨 셔츠 차림이었지만, 손에 든 작은 샘플 병들을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심장을 다루듯 품에 안고 있었다.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를 보호하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운 그 걸음걸이를 보며, 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저 유약한 태도. 소영의 곁에서 8년 동안이나 그림자처럼 지내며 키워왔을 그 지독한 수동성이 이 거친 현장에서도 고스란히 묻어났다. 혜연에게 상수는 여전히 스스로의 의지라고는 거세당한 채, 타인의 취향에 기생하는 무능한 존재일 뿐이었다.“늦었네요. 현장 시간은 도면의 선 하나만큼이나 정확해야 한다는 걸 모릅니까?”혜연의 날 선 목소리가 공사장 천장에 부딪혀 날카롭게 공명했다. 상수가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마스크 위로 드러난 그의 눈동자는 혜연의 복잡한 도면만큼이나 읽기 힘든 감정들로 일렁이고 있었다.“죄송합니다. 이 공간의 습도와 자재 냄새를 이겨낼 적절한 향의 베이스를 찾느라… 조금 늦었습니다.”“변명은 됐어요. 작가님, 착각하지 마세요. 이 공간은 내 정교한 계산 위에 서 있는 건축물이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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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구덩이 속의 블루밍 #2

혜연은 수치심과 분노가 동시에 치밀어 올랐다. 자신의 치부를 들킨 아이처럼 방어 기제가 작동했다.“그쪽이 뭔데 내 디자인에 의미를 부여해요? 소영이를 만날 때도 그렇게 남의 세계에 제멋대로 의미를 부여하며 살았나요? 그래서 8년이나 소영이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다가,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은 낙오자가 된 거 아니에요? 당신은 그냥 소영이가 버린 찌꺼기일 뿐이야!”혜연은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공사장의 먼지가 혜연의 격앙된 목소리에 놀란 듯 허공으로 흩어졌다. 현장의 인부들이 잠시 망치질을 멈추고 그들을 쳐다보았지만 혜연은 멈출 수 없었다.상수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는 혜연의 잔인한 독설을 피하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 그것은 비난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혜연이 뱉어내는 말들이 사실은 스스로를 향한 비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자의 초연함이었다.“혜연 씨.”상수가 한 걸음 다가왔다. 혜연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려다 발밑의 철근 뭉치 때문에 멈춰 섰다. 상수는 혜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소영의 뒤에서 멍한 눈으로 서 있던 그 남자가 아니었다. 아주 미세하지만, 타협할 수 없는 뚜렷한 의지가 담긴 눈빛이었다.“혜연 씨가 지금 나한테 퍼붓는 그 모진 말들, 소영이가 나한테 해주길 바랐던 진심들 아닐까요? 아니면… 혜연 씨 스스로가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던 말들이거나.”“…뭐라고?”“소영이는 8년 동안 제게 한 번도 묻지 않았습니다. 내가 어떤 향을 만들고 싶은지, 내 내면이 어떤 냄새로 썩어가고 있는지. 그저 소영이가 원하는 화려한 껍데기만을 내놓기를 바랐죠. 혜연 씨는 지금 저를 소영의 찌꺼기라고 비난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제 향기에 반응하고 있어요. 자신의 디자인을 지키기 위해 저를 공격하는 그 절박함… 그건 아주 솔직하고, 그래서 저에게는 그 어떤 위로보다 더 날카롭게 다가오네요.”상수의 말은 혜연의 심장에 비수처럼 박혔다. 부정하고 싶었다. 소영은 순수한 피해자였고, 상수는 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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