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숙 훈련’이라는 건, 솔직히 말하면 급하게 ‘부처님 발 잡는 수준’이었다.전문 지식을 단기간에 얼마나 배울 수 있겠는가?애초에 공부는 평소에 해야 실력이 되는 법이었다.벼락치기식 주입은 한계가 뚜렷했다.그래서 이 훈련의 핵심은 지식을 ‘채워 넣는 것’보다, 경시대회 운영 방식, 문제 유형, 답변 요령, 발표 분위기 등에 익숙해지도록 만드는 데 있었다.말하자면, 실전 전에 한 번 맛만 보는 예비 체험 같은 거다.진짜 무대에 올라가서 당황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서준이 말했다.“정은 누나, 이번에 학교에서 파견된 교수가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이래요.”각 팀은 본교에서 선정한 지도 교수들과 동행했는데, 대부분 경시대회 경험이 있거나 이전에 팀을 이끌어본 적이 있는 교수들이었다.민지가 말을 받았다.“나 아까 화장실 가면서 옆방 지나쳤는데, 연성대 팀이더라? 그쪽은 이번에 물리 단위 경시에 나가는 거래.” “작년에도 물리 분야 우승했대. 올해도 작년 멤버 그대로 나와서 완전 홈그라운드 느낌이더라. 시작부터 답변 연습만 하던데? 필기는 패스.”정은이 웃음을 터뜨렸다.“그걸 다 알아봤다고?”“당연하죠!”민지가 입꼬리를 올리며 자랑스럽게 말했다.“세상에 내가 못 캐내는 정보는 없어요. 굳이 있다면... 그건 돈이 부족했을 뿐이죠.”“돈?”“네, 화장실 갔다가 매점에 들렀는데, 거기서 그 팀 여자 한 명이랑 마주쳤어요. 그래서 밀크티 한 잔이랑 치킨 한 마리 사줬어요!” 여기서 숙식은 제공되지만, 매점은 별도 결제였다.밀크티나 치킨 같은 건 시내에선 만 오천 원이면 해결되는데, 여기선 무려 6만원까지 뛰었다.물가만 따지면, 무려 4배.물론, 안 사 먹으면 그만이다.밀크티 없다고, 치킨 못 먹는다고 죽는 건 아니니까.그런데 한번 사주면?그게 바로 관계고, 인맥이 되는 법이었다.사람 사이 거리가 가까워지면, 정보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그게 현실이다.정은은 조용히 민지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역시 넌 정보력 만렙이야.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하늘만 알고, 땅만 알고, 민지만 알고, 그리고 서준만 알았다....어느새 추석 연휴가 다가왔다. 다른 학생들이 환호하며 고향으로 떠나는 그때, 정은, 민지, 서준, 이 세 사람은 학교 측의 배려를 받아 2주간의 합숙 훈련에 돌입했다.장소는 시외에 있는 한 수련원.숙소와 식사가 제공되며, 훈련 기간 핸드폰은 전원 제출.같이 훈련받는 자는 전공별 경시대회에 출전하는 서비대와 타 명문대의 학생들이었다.연구 일정이 있는 학생들을 배려해 노트북은 반입할 수 있었다.입소 전날 밤.재석이 직접 나서서 정은의 짐을 하나하나 챙기고 있었다.짐을 다 넣고도 한참을 정리하며 이것저것 체크하고 있었다.“거기 수련원은 나도 안 가봤는데, 시외라 벌레 있을 수도 있잖아. 모기약이랑 훈증기 다 넣었으니까 이중 방어해.”“산속은 시내보다 기온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긴팔은 두 벌 챙겼어. 얇은 거, 두꺼운 거.”“이건 너 스킨케어 샘플들. 2주밖에 안 되니까 소량으로 넣었어.”“그리고 이건... 또 이건... 아, 이건 혹시나 몰라서...”“...”재석은 마치 딸을 기숙사에 보내는 아빠처럼, 조심스럽고 꼼꼼하게 짐을 싸며 중간중간 계속해서 주의 사항을 읊었다. 소파에 앉아 과일을 한입 먹던 정은은, 그 모습 보며 피식 웃었다.‘어쩜 저렇게 또박또박 걱정해 줄까?’‘참 귀엽긴 하지만, 뭔가 안심이 안 되는 건가...’정은은 가끔 ‘네’, ‘알겠어요’라고 말하며 맞장구까지 쳐줬다.물론,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참을 쏟아내던 말이 끝나고 드디어 재석은 여행용 가방 지퍼를 닫았다.“이제 다 한 거죠?”정은이 천천히 일어섰다.“응, 다 했어. 더는 없을걸.”그때, 정은이 손바닥을 쑥 내밀었다.“응?”재석은 무슨 의미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정은은 한숨을 쉬었다.“나... 샤워했어요.”“그래서?”“이럴 땐, 침대로 안아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재석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하지만 곧, 그는 그 설
한중기는 마지막으로 다시 물었다.“진짜 주는 거예요? 석박사 통합 전형, 무려 세 자리나 된다고요!”송영한은 턱을 굳게 다물며 이를 악물었다.“줘. 1등만 하면, 세 자리고 뭐고...”“뭐요? 삼백 자리도 줄 기세인데요?”한중기 눈이 휘둥그레졌다.‘내가 그렇게 바보로 보여?’...서비대학교 정문 앞.정은이 먼저 도착한 재석에게 다가갔다.“많이 기다렸어요? 미안해요, 생각보다 길어졌어요.”정은은 들고 있던 양산을 재석 쪽으로 조금 더 기울이며 말했다.“20분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30분은 넘게 붙들려 있었네요.”재석은 조용히 우산 손잡이를 넘겨받더니, 다시 정은 쪽으로 더 기울였다.“잘 됐어?”“네, 잘 됐어요.”재석은 눈썹을 살짝 올렸다.“총장님이? 부총장님이 오케이 한 거 아냐?”“아니에요. 마지막에 총장님이 직접 ‘OK’ 했어요. 왜요? 이상해요?”“음... 네가 그 조건을 놓고 송영한 총장님이랑 협상해서 통과됐다? 흠... 그 양반 스타일 아는데... 쉽지 않았을 텐데?”‘30분 만에 끝났다니, 더 수상한데.’정은은 입꼬리를 올렸다.“당신 여자 친구 좀 멋지지 않아요?”재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응, 멋있어. 감히 따라잡을 수 없는 수준.”정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내가 비장의 무기가 있었거든요.” “무기?”재석이 피식 웃으며 눈썹을 올렸다.“네, 무소유 마인드요.”“하?”“참여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석박사 통합과정 자리? 받아도, 못 받아도 그만... 인생 길잖아요. 걸리는 게 없으면 부담도 없죠.” 욕심이 없으면, 흔들릴 것도 없다.정은은 이미 알고 있었다.이 판, 지는 법이 없는 싸움이란 걸.반대로, 송영한과 한중기는 ‘이겨야만 하는’ 입장이었기에 처음부터 판이 기울어 있었던 것이다.“가요.”정은이 웃으며 재석의 팔짱을 살짝 끼며 말했다.“오늘 저녁 뭐 먹을까요?”“내가 레스토랑 예약했어.”“오? 웬일로 양식이에요?”“가끔은 분위기 좀 내줘야지.”두 사람은 손을
정은은 말을 마치자마자 그대로 돌아서서 문 쪽으로 향했다.“잠깐만!”한중기가 다급히 불러 세웠다.“아니, 벌써 가면 어떡해? 온 김에 천천히 얘기 좀 하고 가야지.”한중기의 태도는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우리 뭐든 대화로 풀 수 있잖아. 서로 윈윈하려면, 좀 유하게 갑시다.”정은은 코웃음을 흘리며 말했다.“부총장님, 조금 전까진 하나도 유하지 않으셨던 것 같은데요? 저요... 흥정은 좋아하지만, 흥정 당하는 건 딱 질색이에요.”“이렇게까지 삐걱대는 조건이라면 애초에 협상 안 하는 게 속 편하죠. 서로 부담도 없고요. 그게 더 낫지 않아요?”‘이야... 진짜, 조금도 안 물러서네.’한중기의 등줄기엔 식은땀이 흘렀다.“알았어, 알았어... 그냥, 일단 다시 앉자. 우리 진짜 성의 있어.”정은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어차피 말 몇 마디로 끝날 일이잖아요. 바로 결론 듣고 갈게요. 수락하실 건가요, 아니면 안 하실 건가요?”그 말에 한중기는 정은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더 끌면... 진짜 끝이다.’이를 악물고 한중기가 말했다.“두 명! 진짜 이게 한계야. 더는 어려워.”정은은 단박에 말했다.“아, 그러시구나.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정은이 다시 몸을 돌리려 하자 한중기는 울컥해서 외쳤다.“아니, 이 친구야... 어떻게 한 치 양보도 없어? 협상이면 서로 조금씩 물러나는 거야. 우리를 너무 쉽다고 생각하는 거 아닌가?”정은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래서 강요는 안 하잖아요. 그냥 서로 각자 방식대로 가자는 거죠.”정은은 시계를 슬쩍 본 뒤 말했다.“그럼 부총장님, 잘 판단해 보시고요. 전 약속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잠깐! 정말 이대로 거절하는 게 맞는 건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 셋이 한 팀인데, 혼자서 결정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다른 두 사람 의견도 들어봐야지?”정은은 피식 웃었다.“오기 전에 이미 얘기 다 했어요. ‘하나라도 빠지면 안 한다’는 결
“저희는 아무도 해내지 못한 걸 해냈어요. 그 정도면, 특별 대우받을 자격 있지 않나요?”직구였다.한 글자 한 글자, 강하게 박히는 말.순간, 송영한과 한중기의 입이 동시에 막혔다.‘틀린 말은 아니야.’정은이 말한 건, ‘우승’이 달린 일이었다.우승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테니까.그게 실력이 아니면, 뭐가 실력인가?‘그렇다고 지금 인정해 버리면...’‘그동안 룰을 지킨 학생들에 대한 설명은... 어떻게 하지?’송영한은 한참을 침묵하다가 겨우 입을 뗐다.“예전에 우리 학교에서도 바이오 유닛 분야에서 1등 한 팀이 있었어. 근데 그 팀도 석박통합과정 기회는 못 받았지. 소정은 학생팀만 특별 대우하면, 그 친구들한테 불공평하지 않을까?”정은은 잔잔하게 웃었다.“맞아요. 하지만 총장님이 말씀하신 건 ‘예전’이잖아요. 그땐 어쨌든 계속해서 결과를 냈으니, 학교 성과도 나쁘지 않았죠. 하지만 지금은... 4년 연속 패배...”“올해도 질 가능성 높아요. 그땐 ‘플러스알파’였지만, 지금은 ‘마이너스에서 제로’로 겨우 끌어올리는 겁니다. 위기일 땐, 룰도 유연해야죠.”“너...”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제가 틀린 말 했나요?”“학교가 꼭 너희 팀만 필요한 건 아니야. 그건 알고 있지?”송영한의 말은 단호했지만, 그 안에 실린 ‘불안’은 이미 드러난 상태였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하게 받아쳤다.“네, 물론이죠. 저희도 꼭 참여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박사요? 원하면 알아서 시험 보고 들어가면 됩니다.”“솔직히 말씀드리면, 연성대든 다른 명문대든 기회는 넘쳐나요. 선택권 많은 쪽이 저희라는 건, 총장님도 알고 계시잖아요?”말을 마친 정은은 두 손을 들어 올려 어깨를 으쓱였다.‘강하게 나오면 우리가 물러날 줄 알았나 보지?’그 말투, 그 표정... 더할 나위 없이 여유롭고 도발적이었다.송영한의 표정은 순간 완전히 굳어버렸다.‘처음 조재석한테 ‘메시지’ 전하라고 했을 때부터 이미 주도권은 넘겨준 거였지... 그걸 왜 이제야
송영한은 정은의 말을 끝까지 듣고, 거의 웃음이 나올 뻔했다. 물론, 비웃음 쪽에 가까운 웃음.‘이게 지금... 조건을 걸고 협상하자는 거야?’화가 난 송영한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홱 돌려 한중기를 쏘아봤다.‘들었지? 지금 얘, 우리한테 조건을 걸고 있어!’눈빛이 말하고 있었다.하지만 한중기는 재빨리 눈짓을 보내며 말렸다.‘진정하세요, 제발. 지금 화내면 손해예요.’‘게다가, 이 판 이미 소정은이 주도하고 있다고요.’‘감정적으론 맞지만, 실무적으론 틀렸다’는 걸... 한중기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결국 송영한이 얼굴에 올라온 화기를 간신히 누르자, 한중기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받았다.“그 말, 충분히 이해해. 당연히 달리는 말한텐 제대로 된 풀을 줘야지.” 정은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봐, 부총장님은 확실히 말이 통하네.’“그렇죠. 아무래도 제대로 된 풀을 먹지 못 한 말은, 못 달리는 법이니까요.” “맞아, 맞아.”한중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정은 학생은 잘 모를 수도 있는데, 사실 이런 대회 참여는 대학원생 입장에서 이점이 꽤 많아.”“예를 들어, 해외 공동연구 기회가 생길 수 있고, 논문 등재 시 가산점, 그리고 지도교수랑 연결되는 글로벌 네트워크도 생기고. 또 학교 차원에서도 논문 성과 인정, 심사면제 같은 혜택도 가능해.”한중기의 설명은 차분했고 설득력 있었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 들었습니다. 말씀하신 건... 다 기본적인 거네요.”“기, 기본?”한중기는 순간 당황했다.‘아니, 이게 기본이면... 뭘 얼마나 더 바라는 거지?’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혹시, 정은 학생이 생각하는 조건은 어떤 걸까?”정은은 웃음을 머금은 채, 명확하게 말했다.“모자라요. 좀 더, 특별해야죠.”‘이게 지금 어느 정도의 ‘조건’을 말하는 거야?’송영한의 눈이 다시 벌게지려던 순간, 한중기가 조용히 손을 뻗어 송영한의 손등을 눌렀다.화산이 다시 조용히 잠잠해졌다.‘총장님, 감정관리... 거의 예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