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었다.달빛은 또렷했고, 바람은 파도를 몰아와 바위에 부딪혔다.철썩- 철썩-바람 소리, 파도 소리, 부딪히는 소리가 한데 섞여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실내는 달랐다.창문과 커튼이 그 모든 소리를 눌러, 남은 건 가볍게 스치는 듯한 바람결뿐.그래서인지 밤은 더 고요하게 느껴졌다.머리맡 스탠드에서 번지는 은은한 불빛 아래, 정은은 옆으로 누운 채 눈을 감고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교수님...”말끝에 이슬처럼 맺힌 눈물이 눈꼬리에서 흘러내려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었다.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현빈 역시 좀처럼 잠을 청하지 못했다.머릿속은 정은의 모습으로 가득했다.렌즈 너머로 미소 짓던 얼굴, 햇살을 받아 바닷가를 걷던 뒷모습, 노을을 올려다보던 옆모습...‘정은아...’그녀의 웃음 하나, 눈짓 하나가 마치 마법처럼 현빈의 가슴을 옭아맸다.정은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현빈은 이미 알고 있었다....아침.햇살이 땅 위로 흘러내리며 창문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커튼의 좁은 틈 사이로 새어든 빛줄기가 카펫 위에 황금빛 기둥을 그렸다.빛은 사선으로 뻗어 침대 끝에 닿더니, 발치에서 두 갈래로 갈라졌다.정은은 가볍게 눈꺼풀을 떨며 천천히 눈을 떴다.낯설지 않으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방 안 풍경.그제야 자신이 교수님의 방에 와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렸다.정은은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확 젖혔다. 순간 쏟아지는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아래층 거실.정은이 내려왔을 땐 현빈이 이미 식탁에 앉아 아침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잘 잤어?”“네. 잘 잤어요.”정은이 자리에 앉자 가정부가 곧바로 음식을 내왔다.따끈한 조기죽 한 그릇, 오이무침 한 접시, 그리고 계란프라이 하나.이틀 내리 서양식만 먹었던 정은의 눈이 단번에 밝아졌다.그 반응에 현빈이 웃음을 터뜨렸다.“역시 맞췄네. 우리나라 음식이 그리웠던 거지?”정은은 고개를 숙인 채 죽을 한 숟가락 뜨며 대답
“왜? 주안나를 만나보고 싶어?”현빈이 물었다.“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이조화 교수님 말고, 교수님과 가장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낸 사람이 주안나 간호사잖아요. 게다가 치료도 늘 맡아 왔고, 교수님 몸 상태에 변화가 있었다면 제일 먼저 눈치챘을 사람도 아마 이 간호사일 거예요.”오미선 교수가 두 번째로 쓰러졌을 땐 너무 갑작스러웠다. 아무 전조 증상도 없이 병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폐가 절반 이상 하얗게 변해 있었다.‘아무리 바이러스가 독해도... 이렇게 순식간에 폐가 망가질 리는 없어.’‘병리 변화엔 시간이 필요해.’“주안나 간호사, 지금도 연락할 수 있어요?”현빈은 고개를 끄덕였다.“아마 가능할 거야.”그는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주안나 간호사가 어디 사는지 확인해. 찾으면 바로 보고하고, 신분은 드러내지 말고.”짧은 대답이 들려왔고, 통화는 곧 끊겼다.“곧 소식 올 거야. 이 근처에서 워낙 유명한 사람이니까 찾기 어렵진 않아.”정은은 책장 앞으로 다가갔다.몇 권 되지 않는 외국 원서들, 그 안엔 빼곡히 메모가 남아 있었다. 익숙한 필체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코끝이 시큰해졌다. 정은의 눈가가 금세 젖어 들었다.현빈은 조용히 정수기 앞으로 걸어가 종이컵에 따뜻한 물을 담았다. 정은에게 충분히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주려는 듯했다.그가 돌아왔을 때, 정은의 표정은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물 좀 마실래?”“고마워요.”정은은 두 손으로 컵을 받아들었다.“오빠는 여기 자주 와요?”“아니. 회사랑 거리가 너무 멀어. 출퇴근이 불편하지.”“그럼 그냥 비워 두는 거예요?”“완전히 비워 둔 건 아니야. 가정부랑 정원사, 경비는 상주하니까.”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컵을 들어 한 모금 삼켰다.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긴 정은의 모습은 현빈 눈에는 더할 나위 없는 풍경이었다.‘아무리 봐도 부족해. 더 보고 싶다... 한 번만 더.’정은이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 현빈의 시선은 곧바로 흔들림 없이
봉수진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직 정은이를 충분히 몰라서 그래요.”이춘재는 못마땅하다는 듯 반박했다.“내가 왜 몰라? 사람 마음은 변해.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건 사라지고, 또 어떤 건 남겨 두는 거잖아.”“그래도 절대 안 변하는 것도 있어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게 있다고요.”“난 못 믿겠어.”봉수진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좋아, 그럼 두고 봐요.”“그래, 어디 두고 보자고.”...정은은 그날 밤 단 한 번도 꿈꾸지 않고 푹 잤다.다음 날은 어제보다 더 늦게 눈을 떴다.그리고 커튼을 걷자 작열하는 태양이 이미 중천에 솟아 있었다.그녀는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자 마치 시간을 맞추기라도 한 듯 현빈의 전화가 걸려 왔다.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딱 알맞은 타이밍이었다.그날 현빈은 정은을 또 다른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이거 아침이에요? 점심이에요?”정은이 묻자 현빈이 웃으며 대답했다.“네가 뭐라고 부르느냐에 달렸지.”결국 정은은 이 식사를 점심 식사로 여겼다. 왜냐하면... 생각보다 너무 많이 먹어버려서, 점심에는 도저히 또 먹을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식당을 나서며 정은이 발걸음을 멈추고 현빈을 불렀다.“오빠.”현빈이 고개를 돌렸다.“왜?”“오미선 교수님이 계셨던 요양 빌라... 거기 가보고 싶어요.”현빈은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짧은 정적 끝에,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알았어.”...요양 빌라는 이름 그대로였다.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교외, 등 뒤로는 낮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멀리로는 바다가 내려다보였다.공기는 맑고 바람은 은은해, 마치 천연 에어컨처럼 빌라 안으로 스며들었다.주변은 고요했고, 풍경은 차분히 아름다웠다.병약한 이가 머물기엔 더없이 알맞은 공간이었다.현빈은 정은을 데리고 정원을 가로질러, 결국 한 방 앞에 멈춰 섰다.정은은 이미 짐작이 갔다.“여기가...?”“오미선 교수님이 계시던 방이야.”정은은 떨리는 손으로 문
사진 속 정은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눈동자는 밝게 빛나고 있었고, 바람에 흩날린 머리칼과 뒤편을 스쳐 지나가는 기차가 장면에 자유와 야성의 기운을 더해 주었다.현빈은 무심코 손끝으로 화면을 쓸었다. 이어서 시선은 점점 사진 속 한 사람에게만 고정됐다.‘오랫동안 기다렸다... 정은아, 결국 내 곁으로 와줬구나.’...J시, 이씨 가문의 본가.같은 사진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이는 봉수진이었다.그리고 입에서 길게 한숨이 흘렀다.“에휴...”“괜히 왜 한숨이야?”이춘재가 다가와 아내를 침대 쪽으로 앉히며 휴대폰 화면을 힐끗 보았다.“벌써 정은이 보고 싶어?”“응... 현빈이도요.”“걱정 마. 둘 다 이제 애 아니잖아. 알아서 잘할 거야.”“내 걱정은 그게 아니에요.”“그럼 뭔데?”봉수진은 잠시 망설였다가 입을 열었다.“남매 둘이 나란히 호주에 있는데, 정은이는 재석이랑도 헤어졌잖아요. 혹시 현빈이... 그 녀석 쓸데없는 마음이 또 고개를 드는 거 아닐까 해서...”이춘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또라니... 애초에 접은 적이 없었겠지. 그러니 ‘다시 고개 든다’는 말도 안 맞아.”그 말에 봉수진의 얼굴에 불안이 고스란히 번졌다.“그럼 어쩌라는 거예요? 이 상황... 어떡하면 좋아요?”이춘재는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말했다.“집착이란 게 원래 그래. 막으려 들수록 더 커져. 차라리 내버려두는 게 낫지. 현빈이는 자네가 아는 것보다 훨씬 끈질긴 애고, 정은이는 쉽게 흔들릴 성정이 아니야.”“결국 두 아이의 관계가 어디서 멈출지... 남매로 남을지, 아니면 그 이상이 될지는... 우리가 관여해서 될 일이 아니지.”그는 이어서 말했다.“만약 그날이 정말 온다 해도, 결과가 어찌 되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존중과 축복뿐이야. 지금부터 온갖 걱정을 다 끌어안는 건 아무 소용 없는 짓이고.”봉수진은 그제야 조금 안도한 듯 굳었던 미간을 풀었다. 눈에 어려 있던 근심도 조금씩 사라졌다.“사실 말이지...”이춘재가 무심히 운
열몇 시간을 넘게 날아와, 정은은 마침내 호주 땅을 밟았다. 공항 문을 나서자마자,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지만 곧 ‘그렇구나’ 하고 수긍했다.출국 전, 정은이는 교통이며 숙소며 호주 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현빈에게 물어봤으니, 그가 미리 눈치채고 공항에 마중 나온 것이 이상할 것은 없었다.“오빠, 내가 탄 비행기 편은 어떻게 알았어요?”현빈은 자연스럽게 그녀 손에서 캐리어를 받아 들고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할아버지, 할머니께 여쭤봤지.”“근데 난 말씀드린 적이 없는데?”현빈은 미소를 지으며 짧게 답했다.“두 분은 다 방법이 있으시잖아.”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역시 그렇지.’더 묻고 싶었지만, 현빈은 대화를 그쯤에서 끊고 정은이 예약해 둔 호텔까지 데려다주었다.“이것도 알고 있었어요?”“내가 추천해 준 곳 중 하나잖아.”‘추천은 세 군데나 했으면서...’체크인을 마치고 방에 들어서자, 현빈은 짐만 내려놓고는 정은의 방 안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긴 비행에 피곤할 텐데 오늘은 푹 쉬어. 내일 내가 시내 구경 시켜줄게.”“응, 알았어요.”샤워 후, 정은이는 짐 풀 새도 없이 커튼을 닫고 곧장 침대에 누웠다. 시차 때문에 잠이 안 올 거로 생각했는데, 눈만 감았을 뿐인데 금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그 잠은 아침까지 이어졌다....정은이 눈을 떴지만 방 안은 아직 어둑했다. 그래서 순간 밤인 줄 착각하고 몸을 돌려 다시 눕다가 몸에 닿는 시트와 베개, 낯선 공기의 감촉에, 비로소 실감이 났다.‘아, 내가 이제 한국에 있지 않구나.’더는 잠이 오지 않았다.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자, 창밖에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발밑까지 닿는 통유리창 앞에 서서, 정은은 호주에서 맞는 첫 일출을 바라봤다.따스하고 부드러운 햇빛이 몸 위로 흘러내리며, 낯섦과 두려움을 조금씩 지워주었다.창을 열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풋풋한 풀내음이 코끝을 스치자, 마치 고향에서 맡던 새벽 공기 같아 마
“내가 전화해볼게...”민지가 다이얼을 누르기도 전에, 톡 알림이 툭 하고 떴다.동시에 서준의 핸드폰에서도 같은 알림음이 울렸다.연구실 단톡방 ‘무한 팀’.정은: [미안, 직접 인사하면 민지가 크게 울 것 같아서... 대신 편지를 남겨놨어. 실험대 서랍에 있으니까, 시간 나면 읽어봐.]민지가 눈을 크게 뜨기도 전에, 두 번째 메시지가 연이어 도착했다.정은: [잘 있어, 얘들아. 내가 없는 동안 다들 무사히, 그리고 즐겁게 지내길!]마지막에는 귀여운 하트 곰돌이 이모티콘이 붙어 있었다.민지는 곧장 정은의 프로필을 눌러 영상 통화를 걸었다.하지만... 연결되지 않았다.다시 단톡방으로 돌아온 민지는 연달아 메시지를 쏟아냈다.민지: [정은 언니, 이게 무슨 소리예요?]민지: [내가 영상통화 걸었으니까 얼른 받아봐요.]민지: [언니, 혹시 해킹당한 거 아니죠?]민지: [언니, 대답 안 하면... 나 진짜 울 거예요!][...]그러나 정은의 프로필은 끝내 반응이 없었다.그때 진일과 재민이 방 안에서 허겁지겁 뛰쳐나왔다.“무슨 일이야? 정은이 오늘 안 온 거야?!”민지의 울먹이며 간신히 눈물을 참고 있는 얼굴, 그리고 서준의 굳어진 눈빛.모두가 이미 대답을 짐작하고 있었다.재민이 머뭇거리며 말했다.“정은 누나가... 편지를 남겼대요.”그 말에 모두 정신이 번쩍 들어, 다 함께 실험대 서랍을 뒤적였다.서준이 가장 먼저 봉투를 꺼내 들었다.봉투가 열리자, 네 사람은 자연스레 빙 둘러섰다.[사랑하는 내 친구들아.이런 방식으로 인사하게 돼서 미안해.직접 말하기엔 너무 울컥해서 눈물날 것 같고, 톡으로 쓰자니 너무 오글거려서... 흠, 나중에 대화창 다시 볼 때 닭살 돋을까 봐, 그냥 편지로 남긴다.조금 올드하긴 하지만, 나름 낭만적이잖아.]...여기까지 읽은 민지는 이미 웃다가 울다가 정신이 없었다.서준과 진일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허탈하면서도 묘하게 가벼워진 공기.‘역시 소정은이지... 이별까지도 이렇게 가볍고 유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