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집안 대대로 사랑이 끝나는 날짜를 보는 저주를 받은 결정사 ‘인연’의 팀장, 나예리. 그녀 앞에 재계 1위 해상 그룹 박 회장의 수상한 의뢰가 떨어진다. 제 아들 유은호에게 ‘최악의 결혼 상대’를 매칭해 달라는 것. 회사의 존폐 위기 앞에 의뢰를 수락했지만, 타겟인 유은호에겐 어찌 된 일인지 유효기간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얼음 왕자라던 소문과 달리, 그는 지독한 로맨스 드라마 덕후였다. “저도 나 팀장님처럼 팬지꽃의 힘을 믿습니다. 첫눈에 반한다는 그 말을요.” 순수한 눈망울로 운명을 말하던 그의 손목에 마침내 문양이 나타난다. 그런데 정해진 날짜가 없다니? 심지어 그 문양이 가리키는 상대가 바로 나다! 당황도 잠시, 예리는 직접 세상에서 가장최악의 신부가 되기로 결심한다.
View More“하아, 하아….”
오른팔을 타고 뜨거운 액체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수빈은 깊게 팬 상처를 움켜쥔 채 신음 섞인 숨을 몰아쉬었다.
고통으로 미간이 일그러졌으나, 두찬을 응시하는 눈빛만큼은 서늘할 정도로 생생했다.
“야, 곽두찬! 이제 그만 끝내자!”
먼저 죽음을 입에 올리는 당돌함에 두찬의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기괴하게 씰룩였다.
그는 수빈의 심장을 향해 총구를 고정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어, 오 형사. 아니… 오수빈.”
눈앞의 총구에도 수빈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오히려 가소롭다는 듯 남자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철컥, 안전장치를 푼 손가락이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그때였다.
“흑….”
침 삼키는 소리조차 들릴 만큼 무거운 정적 속에서, 이질적인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예리는 지끈거리는 두통에 눈을 질끈 감으며 미간을 짚었다.
“흑……, 흐윽.”
참다못한 예리가 무심하게 고개를 돌려 옆자리 남자를 째려봤다.
극이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부터 옆자리 남자는 넓은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맙소사, 요새도 이런 신파극에 우는 사람이 있어?’
축축하게 젖어 형체를 잃은 휴지로 연신 눈가를 찍어내던 은호가 다급하게 주머니를 뒤졌다. 하지만 이미 다 써버렸는지 빈손만 허무하게 휘저을 뿐이었다.
예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가방에서 정갈하게 접힌 손수건을 꺼내 옆으로 툭 건넸다.
갑작스럽게 시야에 들어온 손수건에 은호의 울음이 멎었다.
은호가 붉어진 눈시울로 고개를 돌렸으나, 예리는 여전히 시선을 무대에 고정한 채 무심하게 팔만 뻗고 있을 뿐이었다.
은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손수건을 받아 갔다. 손끝이 아주 잠깐 스쳤지만, 예리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정면만을 바라봤다.
“…감사합니다.”
은호의 속삭이는 듯한 작은 대답과 동시에 닫혀 있던 무대의 막이 다시 서서히 올라갔다.
총알이 관통한 듯 무대 위 남자 배우의 가슴과 입가에서는 붉은 선혈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주원아, 김주원!”
수빈의 절규 섞인 부름에도 주원은 그저 품에 안겨 흐릿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거칠고 힘겨운 호흡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로웠다.
“네가 왜! 도대체 왜...!”
주원은 떨리는 손을 간신히 들어 수빈의 젖은 뺨을 어루만졌다.
“네가 날 예전에 구해줬을 때부터… 내 목숨은 네 거나 마찬가지였어, 수빈아.”
“흑, 흐흑….”
수빈이 자신의 볼에 닿은 주원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쳐 잡았다. 뜨거운 눈물이 주원의 손등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김주원, 죽지 마! 나랑 끝까지 함께하기로 약속했잖아. 이렇게 무책임하게 가면 안 되는 거잖아!”
수빈이 피가 뿜어져 나오는 주원의 가슴을 두 손으로 필사적으로 눌렀다. 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생명력을 막을 길은 없었다.
“너랑 한 약속, 다 지키고 싶었는데…… 미안해.”
“너 절대 안 죽어. 아니, 죽게 안 놔둘 거야. 그러니까 벌써 미안하단 말 하지 마!”
간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주원은 희미한 미소를 남긴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힘없이 떨어진 그의 손이 무대 바닥에 툭, 부딪혔다.
주원을 끌어안고 오열하던 수빈이 품속에서 검은 물체를 꺼내 든 건 바로 그때였다.
금속 특유의 서늘한 빛이 반짝였다.
"어, 안 되는데…!"
은호가 작게 읊조렸다. 그의 시선은 수빈이 쥔 총구 끝에 못 박혀 있었다.
“주원아, 우리 천국에서 다시 만나. 사랑해…….”
수빈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관자놀이에 차가운 총구를 바짝 갖다 붙였다.
탕—! 찢어질 듯한 굉음이 극장 안을 집어삼켰다.
그와 동시에 무대 위의 모든 불이 꺼지며 지독한 암전이 찾아왔다.
여기저기서 억눌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은호의 커다란 어깨 역시 아까보다 더 위태롭게 흔들렸다.
‘이제 끝인가….’
예리는 습관적으로 은호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암전으로 가라앉은 어둠 속에서는 헛수고였다.
예리는 피곤한 듯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감긴 눈꺼풀 너머로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사랑이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목숨까지 거는 건지….’
예리의 눈시울은 건조하기만 했다.
총구 앞에서도 그렇게 당당하던 주인공이 고작 사랑하는 남자의 죽음 하나에 생을 마감하다니.
그렇게 예리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어두웠던 공간이 다시 밝아졌다. 배우들이 한 명씩 무대 위로 올라와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마지막으로 남녀 주인공이 손을 잡고 등장했다. 관객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열렬한 기립박수를 보냈다.
예리도 친구 주은의 등장에 마지못해 일어나 손바닥을 부딪쳤다.
그러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예리의 시야에 은호의 모습이 들어왔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으로 커다란 두 손을 성실하게 맞부딪치며 무대 위 배우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마지막 배우가 허리를 숙이자 객석 곳곳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지며 사람들이 일제히 출구로 몰려들었다. 이를 본 예리는 미련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예리가 무심하게 휴대폰을 확인하며 인파가 빠지길 기다리는 동안, 은호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손수건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객석이 어느 정도 비워지자 예리가 먼저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으로 향하려던 찰나,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불러 세웠다.
“저기, 잠시만요…!”
예리가 무심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서나 작다는 소린 듣지 않는 키였지만, 그의 넓은 가슴팍에 가로막힌 시선은 한참이나 올라가서야 겨우 눈을 맞출 수 있었다.
은호가 예리의 손수건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 주변은 짓무른 듯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직 가시지 않은 여운 탓인지 붉어진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방울이 묘하게 처연하고도 위태로워 보였다.
평소 타인이 우는 꼴이라면 치를 떨던 예리였다.
그런데 눈앞의 이 남자만큼은, 그 모습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예리는 혹시 속마음이 들린 건 아닌지, 괜한 걱정으로 심장이 쿵쾅거렸다.은호는 여유롭게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나 팀장님, 괜찮으십니까? 계속 다른 생각만 하시는 것 같더니, 갑자기 머리까지 내려치시고… 혹시 두통이 심해서 그런 겁니다?”그 다정한 추궁에 예리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전히 머리 위에 얹고 있던 손이 민망해진 예리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벅벅 긁적였다.“아휴, 왜 이렇게 가렵지? 오늘 아침에 머리를 잘못 감았나….”어설픈 연기 위로 회의실 안의 시선들이 일제히 무겁게 따라왔다. 팀원들은 하나같이 황당함돠 당황함이 적절하게 섞인 눈빛을 담아내고 있었다.이대로 미친 사람으로 확정될 것 같은 처지에 예리는 일부러 더 활짝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이거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머리가 가려워서 그랬어요, 가려워서. 여러분은 머리 감고 꼭 바짝 말리세요. 오늘 아침에 너무 바빠서 대충 말리고 왔더니 이 모양이네요….”영혼까지 끌어모은 변명으로 상황을 무마하고 나서야, 멀리에서 닿던 은호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조금은 옅어졌다.예리가 들키지 않게 한숨을 삼키던 찰나, 은호의 눈동자가 이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나 팀장님. 그래서 이제 박민수랑 오지연, 그 두 사람의 이름이 날카롭게 꽂히는 순간, 예리의 눈빛에서 사람의 이름이 예리의 귀로 꽂히는 순간, 조금 전까지 감돌던 민망함이 싹 가시며 눈빛에 서늘한 냉기가 서렸다.회의실 안의 호기심 어린 시선들도 다시금 일제히 그녀에게로 쏠렸다.예리는 그 시선 하나하나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입꼬리를 씨익, 끌어 올렸다.“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 있어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나쁜 마법을 쓰기 직전의 마녀 같은 그 웃음에 승호의 팔 위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다년간의 경험으로 저 웃음이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승호는 테이블 밑으로 제 팔을 슬그머니 문지르며 예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팀장님,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인데요
은호가 말은 그렇게 내뱉었지만, 설마 모든 스케줄을 다 따라올까 싶었다.그런데 지난주 월요일, 출근 준비로 바쁜 예리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수신 화면에 뜬 이름은 유은호.받기가 무섭게 ‘지금 데리러 가고 있다’는 제 할 말만 툭 내뱉은 그는, 예리가 되묻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날을 시작으로 그는 출퇴근 시간에 정확히 맞춰 매일 예리의 집 앞과 사무실을 제집 마당 드나들듯 찾았다.문제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은호는 아예 예리의 옆 책상에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곤 아무렇지 않게 제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예상과 달리 업무 시간에 그는 예리에게 딱히 말을 걸거나 방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공간에 그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예리는 일이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정작 그는 평온해 보이는데 자신만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 같아 은근히 짜증이 치밀었다.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예리와 함께 출근한 그가 회의실에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완벽하게 몸에 딱 맞는 스리피스 슈트를 차려입고 찻잔을 입술로 기울이는 은호는, 심란한 자신과 달리 여유롭게 꼰 다리까지 까딱이며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그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키던 예리는 어디선가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역시나, 가람이 자신과 은호를 번갈아 가며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는 중이었다.함께 출퇴근하는 것도 모자라 예리의 사무실에서 업무까지 같이 보겠다는 은호의 파격적인 행보에 인연 VIP 전담팀은 발칵 뒤집어졌으나, 곧 예리가 ‘신변 보호’ 때문이라고 적당히 둘러댄 탓에 다들 납득하는 눈치였다.단 한 사람, 가람만 빼고.지난주 내내 회의할 때도, 점심을 먹을 때도 은호와 자신이 함께 있는 모습만 포착하면 사설탐정처럼 집요하게 관찰하던 그녀였다.그리고 지난 금요일, 마침내 가람의 집요한 수사망이 예리를 덮쳤다.점심을 먹고 1층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한 예리에게, 먼저 나온 제 디카페인 아아를 쭉쭉 빨던 가람이 슬며시 다가와 은밀하게 속삭인 것이다.“팀장
사고 당일 밤, 은호가 입원한 응급실을 나와 집으로 향하던 차 안.예리의 휴대폰 너머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여보세요? 나예리 팀장님?속삭이듯 작게 들려오는 해진의 목소리에, 운전대를 잡고 있던 소진이 옆을 힐끔거렸다.“네, 해진 씨 저예요. 몸은 괜찮으세요?”-네, 검사 마치고 지금 막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런데… 혼자 있을 때 연락드려야 할 것 같아서 전화가 좀 늦었어요. 지금은 민수 씨가 씻는 중이라 그 사이에 조용히 건 거예요.“잘하셨어요.”예리의 짧은 다독임에도 불구하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해진의 음성은 사시나무 떨리듯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나 팀장님, 이제 말씀해 주세요. 아까 분명 범인이 누군지 안다고 그러셨잖아요….외면하고 싶었던 잔혹한 실체를 기어이 마주해야 하는 사람처럼, 해진의 목소리에는 다급함과 두려움이 기묘하게 뒤엉켜 있었다.“…….”잠시 숨을 고르던 예리가 마침내 무겁게 입을 열었다.“오늘 내내, 해진 씨 곁을 지키고 있던 사람.”차가운 차창 밖으로 도로의 불빛들이 빠르게 예리의 얼굴 위를 스쳐 지나갔다.“ 그 사람이 범인이에요.”-…설마 지연 씨요?순간적으로 목소리를 높인 해진이 되물었다. 스스로도 놀랐는지 다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졌다.“맞아요. 그리고… 민수 씨도요. 오늘 일, 두 사람이 철저하게 계획하고 벌인 살인미수극이에요.”예리의 입에서 나온 잔혹한 진실에 해진의 목소리가 마구 젖어 들었다.-아, 아니에요, 팀장님. 민수 씨랑 지연 씨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두 사람… 아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민수 씨는 절대 그런 사람 아니에요! 팀장님이 뭔가 잘못 아신 게 분명해요. 저 오늘 통화, 못 들은 걸로 할게요.현실을 부정하며 전화를 끊으려는 해진의 태도에, 예리가 차분하지만, 송곳처럼 단호하게 쐐기를 박았다.“못 믿으시겠다면, 두 사람의 대화가 담긴 녹음본을 지금 보내드리겠습니다.”예리는 어두운 숲속에서 숨을 죽인 채 켰던 휴대
예리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은호의 몸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은호는 쿵, 쿵 두근대는 심장을 깊이 눌러 삼키며 조심스레 예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네.”“저도 어릴 때 무척 아팠던 적이 있었거든요.”리클라이너 등받이 깊숙이 묻었던 등을 곱게 세워 앉은 예리가, 은호와 눈을 똑바로 맞추었다.그 순간, 은은한 주홍빛 불빛이 예리의 얼굴 반쪽을 집어삼키듯 짙은 음영을 만들어 냈다.그 기묘한 명암 탓일까. 늘 씩씩하기만 하던 그녀의 실루엣에, 숨겨진 낯선 그리움이 옅게 번졌다.“그럴 때마다… 엄마가,”순간, 예리의 말문이 턱 막혔다. 아주 찰나의 정적이었다.하지만 평소 늘 단단하고 흐트러짐 없던 예리의 눈동자가 조용한 어둠 속에서 잘게 흔들리는 것을 은호는 결코 놓치지 않았다.동시에 어제 행사에서 광수와 대화 후 어두워진 표정으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던 예리의 뒷모습이 떠올라, 은호의 가슴 한구석이 아리게 내려앉았다.도대체 예리와 임 대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복잡하게 얽히는 의문 속에서도 은호의 시선은 줄곧 미세하게 흔들리는 예리의 눈동자에 고정되어 있었다.밀려드는 기억을 떨쳐내려는 듯 잠깐 숨을 고른 예리가,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부드럽게 말을 이어 붙였다.“…아니, 아빠가 항상 제가 잠들 때까지 조곤조곤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해주셨어요.”예리는 추억을 더듬듯, 리클라이너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덕분에 그녀의 몸이 은호 쪽으로 더 기울어졌다. 좁혀진 거리만큼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선명하게 눈에 담겼다.하지만 은호의 시선은 예리의 말을 내뱉은 다정한 입술이 아닌, 닿을 수 없는 오랜 추억에 가닿아 있는 듯한 그녀의 아련한 눈망울에 그대로 묶여 버렸다.예리가 그 아련함을 붙잡으려는 것처럼 눈을 천천히 감았다.“그렇게 눈을 감고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면, 까맣던 눈앞에 이야기의 내용이 영화처럼 재생되기 시작하거든요.”예리의 입가에 처음 보는, 아련하면서도 가벼운 장난기가 섞인 미소가 부드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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