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은 멍한 얼굴로 재석을 바라봤다.“말이 없는 건 동의하는 걸로 알게.”“좋아, 그럼 그렇게 확정.”“...”그렇게 둘만의 여유로운 시간은 눈 깜짝할 새 흘러갔다.원래 5일 일정으로 왔던 여행이었는데, 어느새 10일이나 지나서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하자, 정은은 재석 손에 이끌려 걸으면서 중얼거렸다.“근데 신기하네요, 전 교수님은 왜 전화로 잔소리 안 해요?”“진욱이 투덜거릴 땐 투덜거려도, 눈치 볼 땐 또 기가 막히게 잘 보잖아.”재석은 시크하게 웃으며 말했다.“눈치 챙긴다고요? 무슨 상황에?”“우리 둘만의 세상. 그게 중요하지, 안 중요해?”‘이 사람 진짜...!’정은은 웃음이 터질 뻔해 입꼬리만 실룩였다.“전 교수님은 작년부터 짝사랑 중인데 아직도 혼자잖아요. 당신이 이렇게 대놓고 자랑하다가 한 방 맞아도 나는 모릅니다.”“괜찮아. 어차피 진욱이 내년 연봉이랑 보너스 내 손에 달렸는데.”‘철벽 같으면서도 은근 치사해, 이 사람.’...물론 전진욱도 사람인지라, 재석과 정은의 휴가 동안 연락은 안 했지만, 막상 재석이 실험실로 돌아오자마자 한참 잔소리 폭격을 날렸다.그날 저녁, 진욱은 태민을 옆에 앉혀놓고 말했다.“이게 뭔지 아냐?”“네?”태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말 있지? 울고 징징대야 뭐라도 챙길 수 있는 거야.”진욱은 평소 피로에 찌든 표정을 걷어내고, 셔츠 깃까지 다듬으며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예를 들면, 내일부터 난 연차다. 무려 일주일. 헤헤...”태민의 눈이 커졌다.“젊은이, 인생 배워야지.”진욱은 으쓱하며 자리를 떴다.태민은 자리로 돌아와 실험대 앞에 섰지만, 마음 한켠에서 속마음이 새어 나오는 걸 어쩌지 못했다.‘부럽다...’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리아가 지나가자, 태민은 재빨리 불렀다.“변 선생님! 내일 전 교수님 연차 쓰시는 거 아세요? 교수님이랑 제가 맡은 3단계 실험 있잖아요, 그거 시간 맞춰서 같이 검토하는 거 맞죠?”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정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혹시 따로 생각해둔 계획이라도 있어요?”재석은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대답했다.“입주자 명단쯤이야, 어렵지 않지.”‘뭐...?’정은은 눈을 크게 떴다.그날 밤.안내 데스크 직원이 야간 근무를 서던 중, 새벽 1시, 재석은 룸서비스를 불렀다.“물 두 병만 부탁드립니다. 수고 많으세요.”심야라 여유 인력이 없었던 탓에, 직접 물을 가져온 건 다름 아닌 그 안내 직원이었다.그로부터 15분 후.직원은 물을 전해주고 방을 나섰고, 재석은 자연스럽게, 이 호텔 최근 5년간의 투숙 기록을 손에 넣었다.가격은 100달러였다.“어떻게 확신했어요? 그 직원이 줄 거라고?”정은이 감탄 섞인 눈빛으로 물었다.“사기꾼들이나 스팸 전화나 다 똑같아. 손님 정보 팔아먹는 거, 누구한테 파는지가 중요하겠어? 많이 팔수록 더 남는 거지.”재석은 태연하게 웃었다.‘진짜... 대단하다, 이 사람.’정은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러다 문득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근데 이거... 불법 아닌가요, 조재석 교수님? 타인의 개인정보 불법 취득이잖아요?”“국내에서라면 그렇지. 근데 우린 지금 해외잖아.”정은이는 반박할 수 없었다.‘뭐야, 이 사람. 왜 이렇게 논리 정연해...’어쨌든 명단은 손에 넣었다.이미 새벽 2시에 가까워진 시각.두 사람은 말없이 눈을 마주치더니 동시에 결론 내렸다.“일단 자자. 내일 일어나서 보자!”다음 날 아침.잠깐 비가 내렸다가 멈췄다.둘이 일어났을 땐, 이미 햇살이 찬란했고, 바닷물은 여전히 맑고 푸르게 일렁였다.조식을 먹고 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각자 소파에 편히 기대어 앉은 채, 전송받은 파일을 열어봤다.당시 정은과 수민이 머물렀던 날짜를 기준으로 전후로 대조하기 시작했다.물론, 뭔가 단서를 바로 발견할 거란 기대는 크지 않았다.투숙 인원도 많았고, 외국인 이름은 중복도 흔하니, 드넓은 바닷속에서 한 마리 특별한 물고기를 찾는 기분이었다.정은은 그렇게 생각하며
나가는 길에, 설수환은 전화를 한 통 받았다.짧게 몇 마디만 주고받고는 곧 전화를 끊었다.그 후, 그는 룸미러 너머로 뒷좌석의 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리아, 나 이번에는 호텔 예약 안 잡았어.”“그럼 대디 어디서 자요?”현민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너희랑 같이 자면 어때?”“좋아요!”현민이 바로 환호성을 질렀다.“그럼 그렇게 하자.”수환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지언의 표정이 잠깐 굳어졌다.그는 본능적으로 리아 쪽을 바라봤지만, 리아는 두 아이를 안느라 정신없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이 없다는 건, 곧 동의한다는 뜻이었다....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수환이 차에서 내리며 웃으며 말했다.“조지언 씨, 일부러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오늘은 푹 쉬세요.”지언은 다시 한번 리아를 바라봤다.하지만 리아는 현민과 현우를 품에 안은 채, 전혀 남자들 쪽을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언은 잠깐 멈췄다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전 이만 갈게요. 필요하면 연락하고요.”그제야 리아가 고개를 돌렸다.“조심히 가.”왠지 모르게, 괜히 서운하고, 괜히 화가 났다.지언은 묵묵히 차를 몰아 골목을 빠져나왔다.백미러로 본 집 앞 풍경.수환과 리아, 그리고 두 아이.마치 그 네 명이 진짜 가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정하게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젠장...’지언은 모르게 운전대에 힘을 주었다.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할 만큼, 꽉. 더 꽉....해변.부드러운 모래 위로 황금빛 햇살이 내려앉아, 마치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 빛났다.철썩이는 파도 소리, 그리고 짭조름한 바닷바람 냄새가 공기 속에 스며들었다.재석과 정은은 손을 맞잡고 천천히 해변을 거닐었다.재석은 반바지에 반팔, 정은은 등이 드러난 긴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바람이 불어와, 정은의 치맛자락을 살짝살짝 들추었다.“여기, 나 예전에 수민이랑도 왔었어요.”정은이 문득 입을 열었다.“그럼... 추억 여행?”재석이 웃으며 물었다.“
공연이 끝나자, 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졌다.지언은 현우의 손을 잡고 리아 쪽으로 걸어갔다.“현우야, 시간도 딱 맞네, 오늘은 이쯤 하고 집에 가자.”리아가 말했다.지언은 잠깐 멈춰 섰다.현우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엄마, 아직 3시도 안 됐잖아요. 조금만 더 놀면 안 돼요?”“그만해, 우리 공항에도 가야 하잖아.”옆에서 현민이 단호하게 끊었다.지언은 리아에게 눈빛으로 물었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친구 한 명 만나기로 했어요. 기사님한테 차 가져오라고 했으니까... 한 10분이면 도착할 거예요.”“내가 데려다줄게요. 그게 더 빠를 것 같아요.”지언이 말했다.리아는 거절하려다가, 그 순간 기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여기 좀 막혀서요, 한 삼십 분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지언은 알겠다는 듯 미소 지었다.“가자. 내 차 타는 게 낫겠네요.”“그럼, 신세 좀 질게요.”“리아 씨는 별말을 다 하네요.”...공항, 도착 홀.“대디! 여기!”현민이 제일 먼저 뛰어나갔다.“우리 딸,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설수환은 현민을 번쩍 안아 올리더니, 고개 숙여 볼에 크게 뽀뽀했다.‘으악, 수염 따가워...’현민은 웃으면서도 얼굴을 살짝 밀었지만, 목소리는 한껏 애교로 가득했다.“에이, 설마? 방금 VIP 라운지에서 면도하고 나왔는데? 만져봐, 깨끗하지?”그 모습을 본 지언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반면 리아는 담담한 얼굴, 마치 이런 장면쯤은 익숙하다는 듯했다.갑자기, 지언은 손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현우가 지언의 손을 살짝 놓은 것이다.지언의 깊어진 눈길 속에서, 현우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가더니 얌전하게 말했다.“대디!”한 번, 대디.또 한 번, 대디.지언의 눈동자가 점점 어두워졌다.그 시선을 감지한 듯, 수환이 현민을 안은 채 고개를 들어 지언을 바라봤다.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순간, 공기 중에 보이지 않는 전류가 흘렀다.수환이 먼저 눈길을 거뒀
“당연히 돼요! 아직 많이 남았어요.”지언은 바로 리아의 그릇에 면을 더 담았다.그걸 본 현우와 현민이 입을 삐죽이며 외쳤다.“아빠, 우리도 더 먹고 싶어요!”결국 한 냄비 가득하던 국수는 엄마와 두 꼬마, 셋이서 싹 비워버렸다....집을 나설 때, 지언은 두 아이의 손을 하나씩 잡고 앞장섰다.리아는 문단속 하느라 조금 뒤처졌다.그녀는 저 앞... 크고 든든한 어깨와, 양옆에 매달린 꼬마 둘을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찼다.‘이 남자, 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끓이네.’‘외모도 괜찮고. 경제력은 말해 뭐해, 넘치지.’‘총점으로 치면 꽤 높네, 이거.’‘게다가... 국수 만든 실력으로 미뤄보건대... 집밥도 잘할 것 같은데?’‘가장 중요한 건... 공짜.’‘아니, 오히려 ‘역으로 챙겨주는 쪽.’...30분 후, 네 사람은 놀이공원에 도착했다.토요일답게 입구는 부모와 아이들로 인산인해였다.줄은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길었다.그런데 지언은 차를 세우자마자 아이들 손을 잡고, 따로 마련된 패스트 트랙으로 직행하여,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로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리아는 놀란 눈으로 그걸 지켜봤다.“이런 방법이 있었어요?”자기도 전에 이곳에 아이들을 데려왔을 땐, 한 시간 넘게 뙤약볕에서 줄만 섰는데.지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미리 알아봤어요. 이렇게 들어가면 된다고 하더라고요.”조금 더 비용을 내면 되는 ‘그린 패스.’돈으로 풀 수 있는 건, 애초에 문제도 아니었다.‘애들 데리고 나가면서 사전 조사까지 해오는 남자라니.’리아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고, 지언을 보는 눈빛에 살짝 더 호감이 얹어졌다.‘내가 생각보다 운이 좋았나?’‘그저 남자 대충 골랐다고 생각했는데...’‘지금 보니... 꽤 괜찮네.’...놀이기구 존에 도착하자, 현우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폴짝폴짝 뛰며 외쳤다.“우와!! 진짜 많아요! 다 재밌겠다!!”지언이 웃으며 물었다.“우리 보물들, 뭐부터 탈까?”현우는 신이 나서 멀리 보이
리아는 저녁 8시에 실험실을 나서, 8시 40분쯤 조씨 본가 앞에 도착했다.지언은 두 꼬마와 함께 대문 앞에 나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엄마!!”리아가 차에서 내리자, 두 아이는 와다다 뛰어와 안겼다.“재밌었어?”리아가 웃으며 물었다.“완전 재밌었어요! 할아버지가 우리 집에 실내 스키장 만들어준다 그랬어요!”현우가 씩 웃었다.현민도 조용히 덧붙였다.“그리고 야외 놀이터도...”지언은 헛기침을 살짝 하며 말했다.“사실이에요. 아마 다음 달쯤 완공될걸...”...두 꼬마를 뒷좌석에 태우고, 지언은 차 문을 닫은 뒤, 운전석 쪽으로 돌아가 창문을 내린 채 리아를 바라봤다.“이번 주 토요일... 시간 돼요?”리아는 잠깐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아마 돼요. 왜요?”“애들 데리고 놀이터 갈까 해서요.”“좋아요.”지언의 입꼬리가 저절로 살짝 올라갔다.리아는 시동을 걸며 말했다.“그럼, 먼저 갈게요.”“조심히 가.”지언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그때, 조기봉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났다.“가버렸는데 뭘 그렇게 쳐다보냐, 아예 돌로 굳겠네, 망부석도 아니고.”아들은 장난기 어린 아버지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지언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아버지, 요즘 말씀이 많아지셨어요.”“뭐야, 나 잔소리한다고 한마디 하는 거냐?”“아시네요.”지언은 툭 내뱉고,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야! 이놈아!!”조기봉은 성큼 따라붙으며 말했다.“너 말이야, 이제 좀 더 힘써서 변리아 씨한테 잘해야, 내가 할아버지 타이틀 좀 제대로 가져야 할 거 아니냐?”“그리고 친구들 모임에서 자랑하려고? ‘우리 집은 손주도 쌍으로 있다.’ 이러시게?”지언이 반박했다.조기봉은 한참 말이 막히더니,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그건 그렇지.”...토요일, 화창한 아침.지언은 일찍 일어나 면도하고, 세수하고, 옷까지 깔끔히 챙겨 입은 뒤, 곧장 리아의 집으로 향했다.띵동-문을 연 리아는 그를 보곤 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