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주 교수와 우철한 교수가 떠나는 날, 연구팀 전원이 부두로 나갔다.이제는 부두가 있으니 더는 진흙 갯벌을 밟으며 신발을 더럽힐 걱정도 사라졌다.정은이 도균성에게 연락해 배를 따로 구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사라졌다.매일 정기 운항선이 드나드니 섬을 출입하는 것이 한결 수월해진 것이다.배 갑판 위에 선 장원주와 우철한은 연신 손을 흔들었다.“전에는 매일 귀국하는 꿈만 꿨는데, 막상 떠나려니 또 아쉽네.”장원주의 눈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그럼 남으셔도 돼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배 금방 돌아옵니다.”우철한이 능청스럽게 받아쳤다.“에이, 또 저 놀리는구먼...”장원주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가서 손자 보고 살아야죠.”“손자? 언제 생겼어요? 전 왜 몰랐죠?”“헤헤... 이번 달에 태어났어요.”“이 양반 봐요, 꼭꼭 숨기고 있다가 이제야 말하네요! 전엔 우리 아들한테 여자 소개해 준다고 해놓고선 감감무소식이더니...”“하하하, 장 교수님, 안달 난 거 다 보입니다!”부두에 서 있던 전해산은 이미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정말 잘 됐어. 이 나이에, 이제 편히 쉴 수 있으니.”그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는 부러움이 배어 있었다.이국의 섬, 낯선 땅과 바람... 누구든 결국은 고향을 그리워하기 마련이었다.주광빈이 묵묵히 전해산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자체로 충분한 위로였다.정은은 곧바로 모두의 아쉬움을 감지했다.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어쩌면... 머지않아 우리도 귀국할 수 있을 겁니다.”그러나 누구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다들 그저 정은이 분위기를 달래려 던진 말이라 여겼다.“자, 갑시다. 할 일 해야지.”전해산이 말했다.해야 할 일을 서둘러 끝내야, 그만큼 빨리 귀국할 수 있는 법이었다.사람들은 하나둘 발길을 돌렸다.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말했는데도 안 믿어주네. 뭐, 어쩔 수 없지.’정은이 그렇게 확신하는 데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었다....지난 반년 동안,
그건 마치 금이 가득한 금광을 발견한 것과 다름없었다.그냥 줍기만 하면 되는 보물을 누가 마다하겠는가? 바보나 거절할 일이다.정은은 그 속에서 움직이는 수많은 세력의 그림자를 떠올렸다.‘나는... 너무 작아. 이건 내 손에 쥘 수 없는 판이야.’‘그저 한 귀퉁이만 엿본 것도 이미 천군만마가 노니는 곳에 발을 들인 셈이지.’“그럼 내가 협조해야 할 건 뭔가요?”재석이 곧장 대답했다.“다른 건 없어. 주로 훈련소에서 남겨진 연구 성과 쪽이지. 게다가 난 의심 가는 부분이 있어.”“섬에서 PO-X 바이러스가 그렇게 활발하게 변이하고 퍼진 게,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훈련소 실험과 연관돼 있을 거라고.”잠시 뜸을 들이던 재석이 덧붙였다.“조금 더 나아가면... 지하에 생물 실험실이 있을지도 몰라.”바이오 분야라면 정은의 주 전공이었다. 그가 나서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정은은 다시 물었다.“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이 문건, 재석 씨는 언제 받은 겁니까?”재석은 숨김없이 털어놓았다.“이틀 전.”“팩스였습니까?”“위험하지. 그런 건 기밀에 절대 쓰지 않아.”“그럼...”재석이 정은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섬 안에 국가에서 파견된 잠입 인력이 있어.”정은은 무심결에 숨을 들이켰다.차가운 공기가 목구멍을 스쳤다.재석이 빙긋 웃었다.“그러니까 앞으로 우린 둘 다 감시를 받게 될 거야. 미리 말해 두지. 예상보다 더 빡세질 수도 있으니까... 자, 소정은 씨. 앞으로 잘 부탁해.”...시간은 유수처럼 흘러, 어느덧 반년이 지났다.맥스 군도는 열대 기후라 사계절 구분이 없었다.늘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고, 그 아래 반짝이는 파도와 끝없이 이어진 바다만 있을 뿐이었다.반년 동안 풍경은 변함이 없었으나, 사람의 모습과 일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예를 들면, 올리버의 조랑말은 어느새 훌쩍 커 버려 털빛은 반짝이고, 체구도 우람해졌다.올리버의 집도 수리와 단장을 거쳐 이전보다 훨씬 아늑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바뀌었
요양 빌라에서 이조화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때, 정은이 제일 먼저 이조화를 의심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그리고 이후 정은의 모든 행동은 이조화를 겨냥했다.만춘미는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속으로 수십 번이나 이조화를 욕했다.‘멍청하긴. 일이 다 끝났는데, 뭐가 급하다고 굳이 그때 섬으로 기어들어 가서 의심만 키우냐.’자신이라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끝까지 연기를 해 내며, 오미선 교수가 완전히 죽은 걸 확인한 뒤, 애도하는 표정으로 장례식장에 나타났을 것이다.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약물학적 걸작을 확인했을 것이다.그 후 태연히 섬으로 돌아갔겠지.그리고 물론 돌아가기 전에 반드시 주안나 간호사를 처리했을 것이다.이조화처럼 몇 달이 지나 정은이 호주까지 나타난 뒤에야 허둥대며 허점을 메우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결국 비밀 훈련소를 번거롭게 끌어들여 마무리하는 실수를 범하지는 않았을 터였다.문서 끝에 적힌 만춘미의 진술은 섬뜩할 정도로 뻔뻔했다.후회도, 반성도 없었다.반대로 이조화는 눈물로 용서를 빌며 모든 걸 털어놓았다.그러나 그것으로 자신이 저지른 죄가 가벼워지지는 않았다.감형 따윈 없었다.만춘미와 이조화의 결말은 뻔했다.두 사람에게는 다시는 감옥 문을 나서 바깥 공기를 마실 날이 없을 것이다....정은은 이를 악물었다. 억눌러도 억눌러지지 않는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쳤다. 손끝은 종이를 움켜쥔 채 떨렸고, 보고서 위엔 깊은 자국이 남았다.너무나 분하고 원통했다. 이조화와 만춘미의 잔혹함이 원망스럽고, 피도 눈물도 없는 비밀 훈련소의 냉혈함에 치를 떨었다.하지만 무엇보다... 왜 자신이 그때 오미선 교수를 끝까지 붙잡지 못했을까...‘그때 내가 조금만 더 단호하게 했다면...’‘목숨을 걸고라도 교수님을 말렸다면...’‘교수님은 이런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설령 교수님이 날 원망하고, 미워하더라도... 이렇게 교수님을 허망하게 보내버리는 것보다는 나았을 거야.’정은의 어깨가 떨
역시, 문서 속엔 오미선 교수의 사망 진상 조사 보고서가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서민호 일행이 이조화 교수와 만춘미 교수를 압송해 간 지도 이미 한 달이 넘었다.국가가 나서자, 입을 굳게 다물던 자들도 더는 입 다물고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다.문서는 사건의 경위를 비교적 상세하게 적시하고 있었다.발단은 섬에서의 일상적인 근무 중에 발생했다.오미선 교수가 우연히 이조화의 노트북을 보게 되었고, 그 안에 비밀 훈련소와 연락이 닿을 수 있는 단서가 있다는 사실을 의심해 이조화에게 물었다는 것이다.이조화는 ‘그건 제 개인용 컴퓨터일 뿐, 섬에서 개인적으로 인터넷을 쓰려고 가져온 것’이라고 해명했다.오미선 교수는 그 말에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았다.하지만 이조화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해, 비밀 훈련소 쪽에 보고를 올렸다.‘오미선 교수는 나를 의심하는 것 같다. 처리해야 한다’라는 취지였다.문서에는 이조화의 자백도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연구팀의 책임교수 자리를 노렸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일부러 거짓말을 꾸며 누군가를 이용해 제거하려 했다고 진술했다.결국 비밀 훈련소는 ‘잘못된 판단의 위험보다, 차라리 단호한 제거’를 택했고, 오미선 교수는 그렇게 표적이 되었다.비밀 훈련소는 연구팀 내부에 잠복해 있던 또 다른 말단 인물을 꺼냈다. 바로 만춘미 교수였다.“만춘미는 의학 박사였고, 약물학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만춘미를 통해 마치 ‘자연사’한 것처럼 보이게 처리하자는 것이었다.계획은 교묘했다.오미선 교수의 체력이 원래 약했던 점을 이용해, 약물 상호작용을 통해 서서히 신체를 망가뜨리는 방식이었다.초기에는 항암제를 경구 복용시키는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약물 작용인지, 혹은 다른 요인인지에 의해 오미선 교수의 면역력이 급격히 떨어졌고, 결국 PO-X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만춘미는 그제야 자신들의 계획이 통하리라 확신했다. ‘바이러스 감염으로 죽게 하면 사람들은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국내 상급 기관에서 내려온 메일의 요지는 이랬다.정부 측에서 재석에게 임시 임무를 내렸고, 그 기간에 그는 맥스 군도에 남아 연구팀과 함께 움직이며 협력해야 한다는 것.구체적인 임무 내용은 ‘절대 기밀’ 도장이 찍혀 있었다.“아...”주광빈 교수가 옆에서 전해산 교수를 흘겨봤다.“아침부터 뭔 소리예요? 말벌에라도 쏘였어요?”“주 교수님! 이거 좀 보셔야겠는데요!”주광빈이 화면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잠시 뒤...“헉, 진짜 있네요. 조재석 교수님 이름이...”이제는 공문으로 내려온 일... 누구도 더 이상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근데... 도대체 무슨 임무길래 이렇게 비밀스럽게 굴까요?”주광빈은 잠시 생각하다가 낮게 중얼거렸다.“내 경험상, 저건 절대 문서에 못 쓰는 일일 거야. 아니면 아예 빛을 못 보는 내용이거나?”순간, 무언가 떠오른 주광빈이 숨을 들이켰다.“설마... 그 비밀 훈련... 읍!”전해산은 재빨리 만두 하나를 주광빈의 입에 쑤셔 넣었다.그리고 표정은 의미심장했다.“너무 많이 알려고 하면 다칩니다, 조심해요.”주광빈은 억울한 표정으로 만두를 꿀꺽 삼킨 뒤, 성난 듯 또 한입 베어 물었다.“근데 맛은 좋네요.”...방 안.정은도 같은 메일을 확인했다.연구팀에서 메일에 접속해 볼 수 있는 건 자신과 전해산 교수뿐이었다.“대체 이 임무가...”정은은 무심코 재석 쪽을 바라봤다.하지만 곧 붉은색 ‘절대 기밀’ 도장이 떠올라,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궁금하지? 이리 와. 내가 귓속말로 알려줄게.”재석이 자기 무릎을 툭툭 치며, 여우 같은 미소를 지었다.정은은 입꼬리를 씰룩였다.“죄송하지만 전혀 궁금하지 않습니다. 그런 비밀은 혼자 간직하세요. 그런데... 이 수법, 혹시 조지언 대표님한테 배운 건가요?”정은이 의심할 만도 했다.며칠 전 리아를 찾으러 갔다가 지언을 마주친 적이 있었다.그때 지언은 바로 이런 식이었다.손짓, 눈빛, 가벼운 몸짓. 전형적인 아양 섞인 과장된 태도로 리아의 관심
전해산 교수가 혀를 끌끌 찼다.“좋지 뭐. 로봇 친구들이 계속 업그레이드돼서 아예 우리 일까지 다 해 줬으면 좋겠단 말이에요.”주광빈 교수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그러다 일자리 뺏기고 싶으셔요?”전해산은 입을 삐죽였다.“흥, 잘난 척하기는... 주 교수님도 솔직히 은퇴하고 싶잖아요?”‘뭐, 사실 좀 그렇긴 하지.’잠시 뜸을 들이던 전해산 교수가 슬쩍 화제를 돌렸다.“근데, 조재석 교수님 상처도 이제 꽤 나은 것 같은데... 슬슬 떠날 때가 되지 않았나요?”주광빈이 고개를 저었다.“제 느낌엔, 조재석 교수님은 계속 남고 싶어 하시는 것 같은데요.”“그건 좀...”머릿속에 여러 가지 계산이 오가는 전해산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끝을 흐렸다.연구팀 내부 규정상 재석은 분명 이곳에 오래 남을 수 없었다.무엇보다 ‘보안’ 문제가 컸다.팀 내 정식 임명된 인원 외엔 합류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으니까.그나마 지금까지 재석이 머물 수 있었던 건, 연구소 폭발 사건이라는 특수 상황이 있었고, 또 정은을 구하려다 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었다.그가 다리를 다친 뒤 연구팀이 치료 명목으로 받아들인 건 누구도 이견을 제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하지만 상처가 다 나은 뒤에도 계속 남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그리고 돈 문제도 있었다.지금은 재석의 의식주 비용을 정은이 개인적으로 부담하고 있었지만, 단순히 돈만의 문제는 아니었다.인력 배치가 얽혀 있었다.예를 들어 식사 준비.연구팀은 돌아가며 음식을 만들었다. 재석이 돈을 낸다고 해도 그건 재료비일 뿐, 인건비까지 다 낼 수는 없다.연구팀은 식당이 아니었고, 구성원 개개인은 요리사도 아니었으니까.전해산 교수와 주광빈 교수 본인은 이런 자잘한 걸로 시비를 걸 생각은 없었다.하지만 연구팀 전체로 보자면 얘기가 다를 수 있다.세상엔 별별 사람이 있으니까.정은은 연구팀 책임자였다.그 자리에 있는 이상, 더 많은 시선을 받고, 더 많은 구설에 오르기 쉽다.그래서 전해산이 걱정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