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슬아는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나 안 그랬어!”“그런데 왜 봐?”슬아는 바로 등을 돌리며, 작게 중얼거렸다.“안 봤어.”하지만 그 말투는 누가 들어도 어딘가 찔리는 구석이 있었다.지훈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몸에 묻고 찢어지기까지 한 셔츠를 마저 벗어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슬아는 다시 한번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미안해...”고개를 들었을 때, 슬아는 또다시 어지럼증을 느꼈다.몸 전체에 힘이 풀린 슬아는 뒤쪽의 술장에 기대며 간신히 버텼지만,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그대로 아래로 미끄러지려 했다.그 순간, 상반신이 드러난 채였던 지훈이 슬아를 그대로 안아 올렸다.슬아의 눈에는 아직 취기가 남아 있었다.초점이 흐릿했고, 어딘가 멍한 표정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이처럼 보이기까지 했다.지훈은 슬아를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아무 말 없이 욕실로 향했다.곧...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슬아는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상황을 인지하고 양손으로 자기 뺨을 감쌌다.“하아... 왜 이렇게 덥지?”지훈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잠시 후, 흰색 가운을 걸친 채 욕실에서 나왔다.흰 가운의 교차하는 깃 사이로 지훈의 가슴 근육은 반쯤 가려진 상태였고,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목선을 따라 흘러 가운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꿀꺽-슬아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지훈이 갑자기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예뻐?”슬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어... 예, 예뻐.”슬아는 속으로 생각했다.‘분명 술에 취한 거야. 아니면 이런 말을 할 리가 없잖아.’지훈은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왜 그렇게 갑자기, 벼랑 끝처럼 이별을 통보한 거야?”“뭐?”슬아의 눈에 잠시 맑은 빛이 스쳤다.하지만 지훈은 더 가까이 다가왔다.눈앞에 가슴이 보일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고, 서로의 숨결이 섞이자 슬아는 다시 어질어질해졌다.“왜냐고. 응? 난 진짜 이유를 듣고 싶어.”“그건...”슬아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너 왜 왔어?”지훈은 천천히 걸어 식탁 쪽으로 다가갔다.식탁 위에는 반쯤 남은 와인과 식어버린 음식들, 그리고 미동도 없이 늘어져 있는 뱀 하나와 거미 하나가 있었다.마치 깊이 잠든 것처럼 보였다.‘이 여자, 진짜 이 두 위험한 동물들과 설날을 제대로 보내고 있었네.’지훈이 담담하게 대답했다.“지나가다 들렀어. 그냥 한 번 보려고.”“설날에? 가족들이랑 설날 안 보내고, 여길 지나가다 들렀다고?”슬아는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왜? 그러면 안 돼?”“안 될 건 없지. 근데 말이 안 되잖아.”“존재하면 다 이유가 있는 거야.”“너는 변호사라서 말은 잘해. 내가 말로는 못 이기겠는데, 그래도 너 머리에 문제 있는 건 맞는 것 같아.”지훈은 식탁을 한 번 더 훑어보며 말했다.“와인에 스테이크라. 너 설날 잘 보내고 있네?”“그럼! 혼자라도 설날은 제대로 보내야지.”말하다 보니 슬아는 갑자기 목이 말라졌다.몸을 지탱하며 상체를 일으켜, 테이블 위에 있는 물컵을 향해 손을 뻗었다.그런데 몇 번이나 손을 뻗어도, 컵이 잡히지 않았다.슬아의 시야에는 이미 잔상이 겹쳐 보이고 있었다.다음 순간, 남자가 컵을 들어 슬아 앞으로 가져왔다.슬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을 벌렸다.“아...”지훈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너 왜 이렇게 게을러? 나한테 먹여 달라고 하네...”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지훈의 손은 아주 정직했다.빨대를 잡아 슬아의 입가로 가져다주었다.슬아는 꿀꺽꿀꺽 몇 모금을 마시고 나서야 숨을 돌렸다.“조 변호사... 의외로 친절하네...”“흥. 이제야 알아?”“너 진짜 안 겸손하다.”“겸손해서 재판 하나 더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겸손해서 큰돈을 더 버는 것도 아닌데, 왜 겸손해야 해?”슬아는 말문이 막혔다.그러다 갑자기, 슬아가 벌떡 일어섰다.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했다.그 순간, 지훈이 재빠르게 슬아를 붙잡았다.“야, 너 뭐 해?”슬아의 얼굴색이 순식간에 안
그날 밤, 재석과 정은, 리아와 지언, 그리고 쌍둥이까지 모두 본가에 묵게 되었다.“지훈이는?”지언이 물었다.“나? 나 집에 가.”‘안 자. 절대 안 자.’내일 아침 식탁에서 오늘 밤 겪은 일을 또 한 번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지훈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진짜 안 자고 가?”지언이 목소리를 높였다.하지만 지훈은 이미 현관을 나서 있었고, 뒷모습은 밤공기 속으로 사라졌다.이내 밖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설 전날 밤의 거리.불빛은 밝았지만, 사람 그림자는 드물었다.지훈은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대로 아파트로 돌아갈 생각이었다.그런데 운전대를 잡고 가다 보니, 어느새 차는 자연스럽게 정향로로 향하고 있었다.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골목 입구였다.시계는 새벽 12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안개처럼 내려앉은 밤공기 속, 노란 가로등 아래의 좁은 골목은 유난히 고요하고 차분해 보였다.지훈은 차창을 내렸다.차가운 바람이 한꺼번에 훅 밀려 들어왔다.지훈은 무의식적으로 담뱃갑을 찾았지만, 손에 잡힌 건 공기뿐이었다.아마도 아까 아이들하고 놀다 바닥에 흘린 모양이었다.주머니에는 덩그러니 라이터 하나만 남아 있었다.지훈은 라이터를 손안에서 굴리며 만지작거렸다.시선은 허공을 떠돌았고, 생각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시간이 한참 지난 후.지훈은 갑자기 라이터를 꽉 쥐었다가,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그리고 차에서 내려,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민슬아는 조금 취해 있었다.‘괜히 분위기 탄다고 와인을 딴 게 아니었는데.’‘거기다 취기 오른 김에 너무 마셨고.’“‘은리’, 너까지 왜 이래? 뱀이 술을 마시면 어떡해.”테이블 위에 늘어져 있는 ‘은리’는 힘없이 뱀 혀를 내밀고 있었다.지금 이 순간 효과음이라도 있다면, 온몸이 분홍빛일 게 분명했다.‘화리’는 술은 마시지 않았지만, 간식 통을 엎질러 버린 탓에지금은 배가 불러서 그대로 기절해 있었다.쾅쾅쾅!민슬아는 자기 뺨을 두어 번 톡톡 두드리며
리아와 정은에게는 올해가 처음으로 조씨 집안 본가에서 보내는 설날이었다.강서원은 두 사람에게 세뱃돈을 건넸다.두 봉투는 크지도, 두껍지도 않았다.손에 쥐어도 거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강서원이 물었다.“안 열어봐?”리아와 정은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 나서 그 자리에서 봉투를 뜯었다.안에는 각자 한 장씩의 체크카드가 들어 있었다.강서원이 설명했다.“비밀번호는 너희 각자 생일이야.”조씨 집안의 재력과 스타일을 가장 조용하게 증명하는 방식이었다.“감사합니다, 어머님.”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말했다.말투까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그 ‘어머님’이라는 한 단어에 강서원이 눈시울을 단번에 붉혔다.“고맙다... 고맙다...”그동안의 오해와 날카로운 감정들이... 그 짧은 인사에 스르륵 녹아 사라졌다.설날 특집 방송이 중반을 넘기고도 집안의 활기는 식지 않았다.지훈은 현우와 현민을 데리고 집안을 뛰어다니며 먹고 놀고 장난치고 정신없이 돌아다녔다.세 사람이 힘 빠져서 소파에 퍼지면, 지훈은 팔로 현우와 현민을 한 번에 끌어안았다.비록 지훈에게는 여자친구가 없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양옆으로 껴안고 사는 삶이 나쁘진 않았다.정확히 말하면, 꽤 행복했다.현우가 물었다.“삼촌, 우리 아빠 엄마는요?”“그러게...”지훈은 거실을 쓱 둘러봤다.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있었는데...“어디 갔지...?”...지언과 리아는 복도 끝 작은 베란다에서 각자 와인잔을 들고 서 있었다.짠-잔벽이 부딪히며 맑은소리가 울렸다.리아가 먼저 말했다.“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지언 씨.”“사랑해. 리아 씨.”“보통은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대답하지 않나?”지언은 대답 대신 리아의 허리를 훅 끌어당겨 바로 키스했다.리아는 잠깐 놀랐지만 금세 웃으며 화답했다.시간이 한참 지난 후...지언이 천천히 입술을 떼었지만, 이마는 여전히 리아의 이마에 닿아 있었고, 코끝으로 코끝을 살짝 건드렸다.“새해 복보다... 지금 여기서 내가 더 하고 싶은 말은 이
결국 더 버티기 어려웠던 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현우와 현민 사이로 슬쩍 끼어 앉았다.현우가 이상하다는 듯 바라봤다.“지훈 삼촌, 왜 여기로 왔어요?”현민은 바로 대답했다.“여기만 여자친구 없는 사람 자리잖아.”지훈은 말도 나오지 않았다.‘우리 조카들... 왜 이렇게 눈치가 빠르냐고...!’몸이 괜찮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인지... 강서원은 무언가 내려놓은 사람처럼 얼굴이 환해졌고 웃음도 많아졌다.오늘 강서원은 붉은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설 분위기와 잘 어울렸고, 깔끔하게 올린 머리에 화장기는 없었지만, 예전의 날카롭고 완벽한 분위기 대신 어디선가 여유롭고 편안한 집 안주인의 느낌이 났다.조기봉 역시 얼굴에 웃음이 떠 있었다.지난 1년 사이 조기봉은 새치가 늘고, 피부는 더 그을렸으며, 몸도 눈에 띄게 야위었다.자주 낚시하러 다니는 탓인지 팔엔 근육까지 잡혀 있었고, 성격도 한층 더 묵직하고 차분해졌다.지금의 조기봉과 강서원은 예전처럼 정답고 다정한 부부 사이는 아니었지만, 서로를 존중하고 챙기는 관계로 돌아와 있었다.부모가 이런 상태가 된 건, 조씨 집안 세 형제에게 더없이 반가운 변화였다.식사를 마치고 모두 거실에 모여 설 특집 방송을 보았다.정은과 리아는 과일을 내놓으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리아는 찬장에 등을 기대며 슬쩍 물었다.“조 교수님하고 정은 씨는... 결혼식 언제 할 생각이세요?”“네?”정은이 고개를 들었다.“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보세요?”“그게... 혹시 우리도 같은 날 할 수 있을까 해서요.”정은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리아 씨랑 아주버님이요?”“지언 씨가 어제 저한테 프로포즈했어요.”리아는 손을 들어 올렸다.무명지엔 큼직한 다이아 반지가 번쩍였다.“식사 자리에서도 물어보고 싶었는데, 정말 프로포즈 반지였네요. 축하드려요. 아주버님도 드디어 마음고생 끝났네. 어쩐지 오늘 계속 웃으시더라구요.”“그렇게 티 났어요?”리아는 정작 본인은 몰랐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변 선생님, 나가면 거울
슬아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말했다.“‘은리’랑 ‘화리’ 있잖아. 설날엔 늘 이 둘이랑 같이 보냈어.”그 말을 듣자 지훈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이 둘이면 너 외롭진 않겠다. 그럼 올해는...”“고마운데, 난 안 갈래.”설날은 원래 가족이 모이는 날이다.자신 같은 완전한 외부인이 남의 집에 끼어드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슬아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지훈은 돌아갈 때 별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슬아도 그걸 눈치챘지만, 그것까지 신경 쓸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혼자 남아 두 반려와 함께 보내는 설날이라 해도, 슬아는 대충 넘길 생각이 없었다.며칠 전부터 슬아는 마트에 가서 설에 먹을 음식과 집안을 꾸밀 장식들을 미리 사두었다.슬아는 대문에 붙일 설맞이 장식 문양도 하나 골라 준비해 두었다.여러 개까지는 필요 없고, 하나만 있어도 충분했다.모양은 단정한 둥근 패턴인데, 위아래를 어느 쪽으로 두어도 상관없어서 슬아는 괜히 마음이 끌리는 방향으로 살짝 비틀어 붙였다.그게 더 ‘올해는 운이 좀 트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작은 설 장식 등은 여섯 줄을 사서 건전지를 넣고, 집 밖 처마의 여섯 군데에 하나씩 달아 두었다.밤이 되면 은은한 불빛이 번져 나와, 집이 조용히 살아나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었다.그리고 귀여운 작은 리본 두 개.이건 ‘은리’와 ‘화리’를 위한 것이다.하나는 ‘은리’ 몸에 묶어주고, 또 하나는 ‘화리’ 등에 예쁘게 얹어주었다.슬아 자신도 빨간 목도리와 빨간 비니를 썼다.그리고 ‘은리’, ‘화리’와 셋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찍고 나서는 즉시 사진 인화기로 출력해 앨범에 끼웠다.그 앨범 안에는 매년 슬아와 ‘은리’, ‘화리’가 함께 보낸 설날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은리’가 아직 새끼 뱀처럼 손가락만 했던 시절부터, 꼬맹이였던 ‘화리’가 합류하고, 둘이 조금씩 커가고, 그러는 동안 슬아의 얼굴도 해마다 조금씩 달라졌다.조금 더 성숙해지고, 선이 잡혀가고.앨범을 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