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은 웃으며 말했다.“치파오는 약간 엄숙한 숙녀 스타일인 것 같아서 다르게 바꾸면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서영숙은 안색이 무척 어두워졌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작할 수도 없어 화를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연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비참하게 질 줄은 전혀 몰랐다.백지영은 두 사람의 표정을 눈여겨보며 입가를 구부렸다.“어떤 사람은 돌을 진주로 여기다니. 정말 웃겨 죽겠네! 이 두 벌 다 포장해줘요, 바로 계산할게요.”백지영은 손을 들어 판매원에게 말했다.“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판매원은 싱글벙글 웃으며 카드를 긁으러 갔다.“정은아, 가자, 다른 가게에 가서 한 번 보자.”“네.”백지영과 정은이 떠난 후, 서영숙은 자신이 입은 옷을 보면서 즉시 벗어서 땅에 밟고 싶었다.방금 백지영과 함께 서 있을 때, 자신이 두꺼비처럼 된 것을 생각하면 서영숙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연희를 가리키며 말했다.“정말 재수 없어! 너 나한테 창피함을 가져다주는 거 말고 뭘 더 할 수 있지? 옷을 매치해 주는 간단한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다니, 넌 왜 이렇게 멍청한 거야?!”연희도 자신이 남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고, 배를 안고 억울하게 입을 열었다.“아이를 가진 후부터 정력이 없어서요. 어젯밤 도겸 씨는 또 한밤중에 돌아왔고요. 도겸 씨를 돌보기 위해 저도 밤새 잠을 자지 못했어요. 그래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을 건데... 정말 죄송해요. 아주머니를 실망시켜드려서...”서영숙은 연희의 배를 보며 심호흡을 했다. 자신의 친손자를 생각해서 그녀는 겨우 분노를 억눌렀다.하지만 연희가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됐어, 내 손자를 봐서 용서해 주지. 하지만 넌 품위와 안목이 어쩜 그렇게도 없는 거니! 노력하지 않고 어떻게 명문가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겠어? 나중에 널 데리고 나가면, 창피한 사람은 나라고!”연희는 이 말을 듣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명문가에 발을 들여놓다니? 강씨 가문이 날 인정한
“수고는 무슨. 아주머니와 같이 쇼핑하면 엄청 즐거워요.”정은 자신도 적지 않은 수확을 거두었다.“아, 참,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백지영은 제발 도와주길 바라는 표정을 지었는데, 너무 귀여웠다.“무슨 일이세요?”“그게 말이야, 내가 티파티를 준비했어. 모두들 함께 모여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다례를 토론하는 그런 파티 말이야... 원래 정한 선생님은 심화원의 오랜 다례사로서, 계약까지 체결했지만 어젯밤 갑자기 병이 도져 밤중에 병원에 호송되었지 뭐야. 아직도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내일이 바로 티파티인데, 그 선생님은 틀림없이 참가할 수 없을 거야. 나도 지금 적합한 사람을 찾을 수 없고. 수민이가 그러던데, 너도 차에 대해 잘 안다며? 심지어 차를 잘 끓였고. 그래서 말인데...”백지영은 잠시 멈추며 계속 말했다.“난 네가 다례 선생님을 대신해서 대리수업을 해줬으면 좋겠어. 우리에게 차문화에 대해 강의하는 동시에 차를 끓이는 기술까지 보여주는 거야.”이번 모임은 그녀가 조직한 것으로, 만약 무슨 실수라도 한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할 것이다.백지영은 정은의 다례를 본 적이 없었고, 유일한 정보도 수민에게서 전해들은 것이었다. 어차피 차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차를 만들 줄 알면 된다.백지영도 정은이 높은 수준을 갖추기를 기대하지 않았다.“그렇군요...”정은은 잠시 망설였다. 백지영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보며 그녀는 마음이 약해졌다.“그래요, 그럼 주소 보내주세요.”“그래! 고마워 정은아! 네가 날 사렸구나!”그날 저녁, 정은은 재석에게 휴가를 신청했다.재석은 원인을 물었고, 그녀도 숨기지 않고 직접 티파티에 대해 말했다.그는 또 정은에게 주소까지 물어봤다.정은은 바로 톡으로 보냈다.실험실과 약 5킬로메터 정도 떨어진 불가리 호텔인 것을 보고, 재석은 또 언제 끝나는지 물었다. 오후 5시였다.[저녁에 택시를 잡기가 쉽지 않을 거야. 내일 그 근처에 학술 세미나가 있는데, 너와
백지영은 그런 강서원의 태도에 익숙해져 오히려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방긋 웃기만 했다.“온종일 집에서 놀아도 심심하니,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죠. 최근 티파티가 한창 인기를 끌어서 이 주제로 정한 거예요. 형님은 평소에 이런 모임에 거의 참가하지 않으셨는데, 오늘 이렇게 찾아오시다니, 정말 영광이에요. 얼른 안으로 들어가시죠...”백지영은 말을 듣기 좋게 했고, 태도도 간절했기에, 평소에 그녀가 싫은 강서원도 트집을 잡지 못했다.이윽고 서영숙도 연희를 데리고 도착했다.낯선 얼굴이 이런 자리에 나타나자, 수많은 여사님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도겸 엄마, 이 아이는 누구야?”“어디서 온 아가씨야? 정말 젊게 생겼구나!”서영숙은 오기 전에 이미 준비를 했기에 즉시 활짝 웃으며 모두들에게 소개했다.“내 친구의 딸인데, 연희라고 해. 지금 이과 대학교를 다니고 있어.”연희는 바로 미소를 지으며 현장에 있던 여사님들에게 인사를 했다.“어머! 아직 학생이구나. 어쩐지 이렇게 젊고 영리하더라니.”“그래, 이과라며? 지금 이과 대학에 다니는 여자아이는 그지 많지 않잖아.”그렇다, 이과 대학은 이과 전공을 위주로 했기에, 남자에게 더 적합했고, 물론 경쟁도 많이 치열했다.이과 전공에 응시하는 여자는 상대적으로 적었으니 자연히 더 쉽게 붙을 것이다.이게 무슨 칭찬일까?다만 모두들 알아들었지만, 유독 서영숙과 연희만 알아듣지 못했다.다른 귀부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비록 미소를 지으며 듣기 좋은 말을 했지만 사실 서로에게 눈짓을 하며 두 사람을 비웃었다.‘지금 입고 있는 그 치마 말이야, 3년 전의 셀린느 아니야? 시대에 뒤떨어진 옷을 어디에서 끄집어냈을까? 너무 못생겼어.’‘그래, 오늘이 무슨 자리인데, 정말 촌스럽게도 입었어.’‘그 시어머니에 그 며느리 아니겠어?’귀부인들은 멍청하지 않았다. 강씨 가문의 아들이 여대생을 임신시켰다는 소문이 이미 쫙 퍼졌다.그러나 지금 서영숙은 그 여자를 당당하게 데리고 나오다니,
서영숙은 웃음이 굳어졌다.‘상대방의 반응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좀 다른 것 같은데?’“흥, 당신이 뭐라고 우리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거죠?” 강서원은 콧방귀를 뀌며 차갑게 서영숙을 훑어보았다.“우리 사이가 잘 맞지 않아도, 그것은 우리 조씨 가문의 일이지, 남이 간섭할 차례가 못 돼요!”말을 마치서면 바로 일어서더니 다른 자리로 옮겨 앉았다.서영숙은 창피함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백지영은 이 장면을 눈여겨보았고, 서영숙을 향한 혐오를 감출 수가 없었다.강서원은 확실히 백지영과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그것은 단지 성격과 처사 방식의 차이일 뿐이었다. 비록 가끔 다른 관점으로 말다툼을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여전히 한집안 식구들이었다.남과 함께 자기 가족을 욕하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서영숙은 정신이 나간 거야 뭐야?’강서원은 비록 다른 자리로 자리를 옮겼지만,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고개를 들면 바로 연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쭈뼛쭈뼛 맞은편에 앉아 손발을 어떻게 놓아야 할지 모르는 데다가, 자신과 눈을 마주하면 바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강서원은 이런 여자를 가장 싫어했다.백지영도 약간 이런 타입이었지만, 그래도 강서원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연희와 같은 사람은 한 번만 더 봐도 자신의 눈을 더럽힐 것만 같았다.그래서 강서원은 시선을 돌리며 연희를 보지 않기로 했다.‘더러운 것을 보지 말자. 괜히 기분만 나빠지겠어.’이때 백지영이 강서원의 곁으로 걸어갔다.“형님, 이쪽은 등불이 어두우니 저쪽에 가서 앉으시는 건 어때요?”그렇게 강서원은 백지영이 마련해준 곳으로 갔다.‘응, 여기가 좋네. 드디어 서영숙과 서연희 그 두 여자를 볼 필요가 없어.’그녀는 백지영에게 ‘잘했다’는 눈빛을 주었다.백지영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어쩔 수 없지. 형님은 성격이 원래 그랬으니까. 큰 도련님도 형님을 아끼시고, 온 가족들도 양보를 했으니 나도 당연히 그런 형님을 많이 봐드려야지.’얼마
모두들 넋을 잃고 정은의 강의를 들었다.“백 여사, 이번에 청한 선생님은 꽤 괜찮은데? 어디서 찾은 거야? 왜 전에 그 늙은이가 온 거지?”티파티는 이미 여러 차례 열렸는데, 매번 다른 귀부인들이 책임졌다.이번에 마침 백지영의 차례가 되였고, 그 선생님은 또 마침 병 때문에 입원했기에 그제야 정은을 찾아온 것이었다.전에는 이런 ‘실수’가 없었다.다른 한 귀부인은 그 말을 듣고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이렇게 아름다운 선생님이 있었다면 왜 진작에 청하지 않고, 줄곧 그런 늙은이만 찾아온 거야? 이 선생님이 얼마나 좋은데?”“예쁘기도 하고 목소리도 듣기도 좋네요.”“이 선생님은 정말 괜찮네요.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마음이 편해지는 거 있죠?’연희와 서영숙은 정은이 나타난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그리고 그녀는 태연자약하게 무대에 앉아 차 문화에 대해 여유롭게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연희는 모두의 평가를 듣고 있었다. 모두들 정은이 얼마나 좋고, 얼마나 예쁘며 기질이 얼마나 뛰어난 지에 대한 칭찬이었다!‘왜? 왜 모든 사람들이 소정은을 좋아하는 거지? 하지만 소정은은 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 위에 앉아서 아주 그럴 싸하게 이 귀부인들에게 수업을 해 줄 수 있는 거냐고? 대체 소정은이 뭔데?’연희는 마음이 불쾌해졌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질투일 뿐이었다!“잠깐만요.” 연희는 일어서더니 정은의 말을 끊었다. 그 순간, 사람들의 시선은 전부 그녀에게 떨어졌다.서영숙은 연희를 막을 겨를이 없었다.백지영도 눈살을 찌푸렸다.정은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무슨 문제라도 있어요?”연희는 웃으며 말했다.“선생님, 오늘 우리에게 차 문화에 대해 강의를 하러 오셨잖아요? 그럼 선생님은 다례사인가요? 그렇기엔 너무 젊지 않나요? 그리고 왜 당신이 한 말이 조금도 프로 같지가 않은 거죠? 심지어 다큐멘터리의 대사까지 말하시다니?”이 말이 나오자, 모두들 의논하기 시작했다.“그래, 왜 갑자기 선생님이 바뀐 거야?
‘엥?’연희는 멍해졌다.그녀는 단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을 뿐이니, 정은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비록 어젯밤에 공부를 했지만, 임시로 벼락치기를 한 것일 뿐, 그 지식들을 똑똑히 기억하지 않았다.연희는 눈알을 굴리더니 다시 정신을 차렸다.“지금 제가 선생님에게 묻고 있잖아요. 다례사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화제 돌리지 마세요.”“난 지금 선생님으로서 학생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물어보며 의혹을 풀어주고 있어요.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예요? 화제를 돌리다뇨? 내가 프로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반드시 그 이유를 말해야죠. 나는 이런 터무니도 없는 비난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이렇게 강한 정은을 연희는 당해낼 수 없었다.모두들의 눈빛이 자신에게 떨어지자, 연희는 입술을 깨물며 등을 곧게 폈다.“방금 말한 것은 확실히 큰 잘못이 없어요. 그러나 다례에 관한 상식이라면 이 자리에 있는 분들 누가 모르시겠어요? 모르시더라도 인터넷에서 조금만 찾아보면 그럴듯하게 말할 수 있죠. 다례사의 등급이 다르면 강의의 깊이도 분명히 다를 거예요. 설마 오늘 우리가 그런 기초 지식을 듣기 위해서 찾아온 거라고 생각하세요?”일부 귀부인들은 이미 마음이 흔들렸는데, 이 말을 듣고 찬성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이 아가씨 말도 맞네. 만약 자격증이 없다면 선생님이 무슨 사람인지 누가 알겠어? 만약 사칭을 했다면, 이 참에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그래, 지금 사기꾼이 그렇게 많은데. 그냥 자격증을 모두에게 보여 주는 것뿐이잖아. 그래야 모두들 안심하지. 정말 자격증이 있다면 그리 어렵지 않을 텐데?”백지영의 표정은 이미 무척 어두워졌다.정은은 그녀가 청한 사람이니, 지금 정은을 의심하는 것은 자신을 의심하는 것과 같았다.긴장과 분노를 느끼는 백지영에 비해, 강서원은 무척 여유로웠다. 그녀는 차를 천천히 마시면 이 장면을 구경했다.‘오늘 정말 잘 왔어. 구경거리가 생겼으니 정말 재밌네.’강서원은 비록 정은을 본 적이
정은은 빨간 자격증 하나를 꺼냈다.표지 위에 영문과 한글로 된 글자가 몇 개 있었는데, 고급 다례사라고 똑똑히 적혀 있었다.“이제 됐어요? 좀 가까이 가져가서 똑똑히 보게 해줘요?” 정은은 고개를 들어 연희를 담담하게 바라보았다.연희는 믿을 수 없단 듯이 눈을 부릅떴다.‘소, 소정은이 정말 이 자격증을 땄다니?!’비록 사실이 이미 눈 앞에 놓였지만, 연희는 여전히 인정하려 하지 않고 발뺌을 했다.“조작된 자격증일 수도 있죠.”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국가에서 발급한 자격증은 모두 유일무이한 번호가 있어요. 지금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체크해 봐요.”어떤 사람은 재빨리 휴대폰으로 정은의 자격증 번호를 입력했다. 그리고 고의로 큰소리로 말했다.“어머! 정말 나왔어! 정보도 일치하고, 등급도 일치한데, 확실히 조작하지 않았어.”연희는 이를 악물고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 했다.“자격증이 있으면 또 뭐가 달라지는데요? 그렇다고 다례가 정말 훌륭하다는 것을 증명할 순 없잖아요. 지금 자경증으로 남을 속이는 사람 엄청 많아요. 돈으로 고급 다례사라는 증명을 받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죠.”정은은 연희가 이렇게 말할 줄 예상한 듯 고개를 들더니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그럼 지금 눈 크게 뜨고 똑똑히 봐요. 내가 어떻게 이 자격증을 땄는지.”말이 끝나자, 정은은 손을 움직였다.그녀는 전원을 켜고 주전자에 물을 넣으며 말했다.“차를 우려내는 과정은 총 7단계가 있어요. 우선 물을 끓이는 것이죠. 물은 차를 우려내는 것이 관건인데, 맑은 샘물이 가장 좋으며, 그 물을 끓여야 해요.”“다음은 주전자를 따뜻하게 하는 거예요. 끓는 물로 주전자를 씻으면, 주전자의 온도를 높일 수 있고, 찻잎의 향기가 퍼지는 데 도움이 되죠. 동시에 다기를 씻는 목적도 달성해서 청결을 보장할 수 있어요.”“그리고 세 번째 단계는 차를 넣는 거예요. 적당한 찻잎을 넣어야지, 너무 많이 넣으면 차가 씁쓸해질 것이고, 너무 적으면 맛이 싱거울 거예요. 따라서 찻잎을 넣을 때 양을
“‘늙으면 떠나는 친구들과 차를 함께 마실 수도 없네’, ‘양을 잡을 때 술을 마시면서 또 차를 마셔야 제맛이다’라는 위인들의 평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겠죠.”“고인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여전히 모여 차를 음미하는 것은 그 속의 인생을 깨닫고, 생명의 진리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겠어요?”“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네요. 봄이 찾아와도 차가 있길 바라며, 해마다 행복하고 건강하기를! 감사합니다.”말이 끝나자, 정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을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현장은 한순간에 고요했지만, 이어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어머!”“선생님 말씀을 너무 잘하시네!”도연 가구의 도 부인은 전에 차를 재배하고 차를 팔아서 가구 장사를 하게 되었다.그녀는 오늘 훌륭한 스승이 강의를 한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에 찾아왔다.그러나 임시로 젊은 다례사로 바꾸자, 도 부인도 마음속에 불만이 있었다.젊으니 경험이 없을 것이고, 아는 것도 얼마 없는 게 분명했다.그러나 정은의 우아한 차를 만드는 과정과 흥미진진한 설명, 시와 옛말까지 인용하는 것을 보며, 도 부인은 정말 깜짝 놀랐다.많은 다례사들은 시작하자마자 이론과 도리를 말하기를 좋아하지만, 차를 우려내라고 하면 정말 볼품도 없었다.찻잎으로 부자가 된 도 부인은 어릴 때부터 차 향기를 맡으며 자랐기에, 그런 사람이 정말 눈에 거슬렸다.그러나 정은은 달랐다!말을 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차를 우려내는 기술도 대단했다.전반 과정은 여유롭고 거침이 없었으니, 매 단계를 정확하게 통제했다.‘정말 훌륭해!’정은은 무대에서 내려와 연희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이제, 내가 실력으로 자격증을 땄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겠지?”“너...” 연희는 어쩔 수 없이 뒷걸음질쳤다.“그럼 이제 너도 네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겠어?”“만약 정말 내놓을 수 있다면, 저에게 어떻게 사과하라고 해도 저는 상관없어요. 됐죠?”연희는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