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술에 취한 얘기를 꺼내자, 수민은 어색하게 코를 만졌다.“다 우리 엄마 탓이야. 굳이 그 무슨 연회에 가라고 하신 거 있지? 가 보니까 맞선 파티였던 거야.”젊은이들은 마치 물건처럼 사람들의 지적을 받았고, 마음에 들면 번호를 교환했다.백지영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걱정이 많아서 탓이었다.집안이 좋지 않으면 틀림없이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엄마도 다 겪어봐서 하는 말이다, 돈이 없는 남자와 결혼한다면 결국 불행해질 것이다.수민은 이런 말만 들으면 짜증이 났다.지난번에 돌아간 후, 그녀는 백지영과 약속을 했다. 재벌 집안 도련님을 찾아도 되지만 사람은 자기가 골라야 한다고.이 조건으로 백지영은 앞으로 더 이상 수민에게 소개팅이나 맞선 파티를 주선할 수 없었다.정은이 물었다.“너 혼자 선택한다고?”“그래, 어차피 집안 형편이 그리 나쁘지만 않으면 우리 엄마는 다 받아들일 수 있거든. 그럼 그냥 J시의 재벌 집 도련님들 중에서 고르면 되지!”“진심이야?”정은은 눈을 깜빡였다.수민은 연하남을 좋아했다. 재벌 집안의 남자들은 연하도 적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을 잘 듣고, 그녀를 달랠 수 있으며 동시에 그녀를 받들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출신이 우월하면 자연히 일반인보다 오만할 것이다. 모두들 재벌 집안의 도련님 아가씨였으니 그들은 절대로 자존심을 내려놓고 수민을 달래려 하지 않을 것이다.수민은 가볍게 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낮추었다.“당연히 골라봐야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 엄마 또 잔소리를 할걸. 하지만 난 결혼 상대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협력 파트너를 고르는 거야.”“파트너?”“그래,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집안에서 일찍 결혼하라는 강요를 당하기 일수거든. 집안의 안배를 원하지 않은 이상, 서로 협력을 하는 거지.”“어떻게 협력할 건데?”“사람들 앞에서는 연기를 하고, 사람들 뒤에서는 각자들끼리 노는 거지!”이렇게 하면 집안사람들도 안심할 수 있고, 매일 잔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엄호를 빌어 밖에서 자유자재
세 사람은 함께 레스토랑을 나섰다.“오빠, 인기가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그 늙은이들이 오빠를 둘러싸고 있으니까 꼭 팬들이 아이돌을 둘러싸고 있는 것 같잖아요.”“아이돌?”“그러니까 연예인이요.”재석은 담담하게 웃었다.“이익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야. 연예인은 무슨.”수민은 냄새를 맡았다.“오빠 술 마셨어요? 운전하고 온 거예요?”“술 좀 마셨지만 차는 안 갖고 왔어.”“잘됐네요, 그럼 차에 타요. 내가 오빠와 정은이 데려다줄게요.”수민의 차는 골목 앞에 세워졌고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다.정은과 재석은 차에서 내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달은 휘영청 밝았고 별이 보이지 않았으며 밤바람은 무척 부드러웠다.조용한 골목에서 가끔씩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재석은 실수로 쓰레기 봉투를 밟았다. 술을 마셨기 때문에 그는 걸을 때 좀 비틀거렸다.“괜찮아요?“미안, 오늘 저녁에 술 좀 많이 마셨어.”술기운 때문에 정은이 불편할까 봐 재석은 일부러 두 사람의 거리를 벌리기도 했다.미안하다는 말이 재석의 입에서 나오자, 정은은 잠시 넋을 잃었다. 그 말에 진심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전에 도겸도 늘 술을 마셨고 툭하면 취했지만, 그는 종래로 정은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래서 사람과 사람은 정말 다르구나.’전에 정은은 남자들이 모두 도겸, 선우, 동건처럼 퇴근하면 술집에 가서 즐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아니면 소진헌처럼 성격이 부드럽고 착실한 일반인이라든가.그러다 그녀는 재석을 만났다.그는 뭇별들에 둘러싸인 달이었고, 도도한 존재였지만 오만하거나 까칠하지 않았고, 오히려 조용하고 차분했다.자신을 단속하는 것과 자신을 방임하는 것, 성공과 오만은 결코 필연적인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재석은 방종하고 구속받지 않은 삶을 살 자격이 있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더 엄밀하고 자제했다.정은은 의혹을 느꼈다.“교수님들도 접대가 필요한 거예요?”“사회에 처해 있으니, 우리도 인정이 오고 가는 것을 중시하
정은은 처음으로 한 사람을 동경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이런 복잡한 감정이 바로 강자를 숭배하는 마음이란 것을 몰랐다....수민은 두 사람을 집으로 데려다준 뒤, 다시 술집으로 찾아갔다.가는 길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술집 앞에서 차를 세우고 내리려 할 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펑!뒤에서 마세라티 한 대가 나타났는데, 마침 그녀의 차를 들이받았다.수민은 화가 났다.문을 세게 닫으며 직접 상대방의 차 앞으로 달려갔다.“야, 넌 운전할 줄도 모르는 거야?! 브레이크를 밟을 줄 몰라?! 이런 곳에서 그렇게 빨리 운전하는 것도 모자라 길까지 보지 않다니? 난 아직 안으로 주차하지도 않았는데, 넌 눈이 없는 거야 뭐야?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내 차와 충돌할 수가 있는 거냐고?!”마세라티 운전석의 문이 열리자, 한 남자가 웃으며 내려왔다.“아, 난 또 누구라고. 이런 일 가지고 왜 화를 내고 그래?”동건은 히죽거리며 수민 앞으로 걸어갔다.“허, 너였구나, 우리 고동건 도련님.”그녀는 일부러 동건을 비아냥거렸다.동건은 페라리의 상황을 체크했다.‘어... 확실히 좀 심각하네.’그러나 그는 여전히 태연하게 말했다.“에이, 큰 문제가 아니네. 방금 속도가 좀 빠른 데다가 주의하지 않아서 널 들이받은 것일 뿐이야.”“날 들이받았다고?” 수민은 눈을 부라렸다.“말 좀 똑바로 해.”“에헴! 네 차를 들이받았어, 됐지?”수민은 입을 삐죽거렸다.“내 책임이라 치자. 보험회사에게 전화해서 네 차를 수리하라고 할게.”“네 책임이라 치자고? 이거 원래 네 책임이잖아! 네가 보험회사에게 연락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고! 내가 한동안 차를 몰지 못하게 됐잖아...”“우리 조수민 아가씨의 차고에 차가 많을 텐데? 웃기고 있네!”수민은 동건과 말하기 귀찮아서 차 키를 던졌다.“난 아직 다른 일 있으니까 너한테 맡길게.”말을 마치고 바로 술집에 들어가려고 했다.바로 이때, 한 여자가 갑자기 달려오더니 동건의 얼굴을 향해 따귀 한 대 때렸다.찰싹
여자는 말을 마치고 또각또각 하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동건은 코웃음을 치며 그녀가 한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사랑의 고통? 허, 내가 어떻게 그런 고통을 받겠어!’여자가 떠나자마자 술집에서 짧은 치마를 입은 한 젊은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하얗고 긴 다리에 곱슬머리를 뒤로 한 그녀는 정교한 화장을 하고 있어 마치 인형과도 같았다.“동건 도련님...”그녀는 애교를 부리며 다가왔다. 남자가 거절하지 않을 줄 알았지만, 동건은 즉시 몸을 피했다.긴 팔을 뻗더니 오히려 수민의 허리를 안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옆에서 한창 재밌게 지켜보던 수민은 깜짝 놀랐다.동건은 고개를 들어 그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미안, 넌 너무 늦게 왔어.”여자아이는 입술을 깨물고 원망에 찬 눈빛으로 수민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녀는 투덜대며 가버렸다.“방금 날 이용한 거야?” 수민은 두 팔을 안고 냉소를 지었다.“그 더러운 손 치우지 못해?!”동건은 원래 손을 떼려고 했지만, 수민이 이렇게 말하니 오히려 그러고 싶지 않았다.“싫어, 네가 뭘 어쩔 건데?”수민은 화가 나서 되려 웃었다.“나랑 놀자 이거야? 그래.”동건은 수민의 사악한 웃음에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다음 순간, 여자는 그의 팔을 잡고 한바퀴 돌렸다.“아! 아파, 아프다고!” 남자의 비명소리가 울렸다.“앞으로 계속 이럴 거야?”“아니, 내가 잘못했어! 빨리 놔줘, 내 팔이 부러질 것 같단 말이야!”수민은 눈을 부라렸다.“쫄긴...”말을 마치고 수민은 바로 힘을 풀었다. 그러나 동건을 놓아주는 대신 오히려 그의 손을 자신의 허리에 놓았다.동건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민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제 이 손 좀 치워 줄래? 고마워.”남자는 화가 나서 웃음이 나왔다.‘정말 화가 나네. 내 손을 원래의 위치에 올려놓은 다음 다시 치우라고 하다니? 받는 대로 되갚는 스타일이군.’ 마치 부모님이 넘어진 아이에게 제자리에서 얼른 일어나라고 요구하는 것처럼.동건은 어린이
‘그래도 난 그 진씨 가문의 자식보다 훨씬 낫지.’수민은 자신감 넘치며 허세를 떨고 있는 동건을 바라보더니 눈빛이 좀 이상했다.“정말 나와 합작하고 싶어?”“물론이지. 그 눈빛은 또 뭐야? 누굴 무시하는 거야?”수민은 동건을 위아래로 여러 번 훑어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고씨 가문은 J시의 8대 호족 중 하나로, 진씨 가문보다 훨씬 훌륭했다.‘방금 여자가 자신의 뺨을 때려도 반격하지 않았어. 정서가 안정되고 나름 매너가 있는 셈이지. 비록 바람둥이인 데다가 스캔들도 많지만, 난 진짜 연애하고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게다가... 바람둥이라면 나도 마찬가지야! 잘됐네! 서로 간섭할 필요가 없어! 클럽에서 부딪치면 같이 놀 수 있을지도 몰라.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남자가 깔끔하게 여자와 헤어진다는 거지.’‘좀 찌질하긴 하지만 이렇게 보면 절대로 집적대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앞으로 우리 갈라져도 나한테 매달릴까 하는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어.’수민은 보면 볼수록 두 사람 아주 잘 맞다고 생각했고, 생각하면 할수록 동건이 마음에 들었다.“그래, 그럼 우리 들어가서 이야기할까?”동건은 가볍게 흥얼거렸다.“흥, 내가 두려워할 것 같아?”수민은 흐뭇하게 웃었다.“뭐해? 얼른 들어가지 않고.” 그녀는 동건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아!” 동건은 비틀거렸다.‘이 여자는 왜 툭하면 손을 쓰는 거야? 조금도 부드럽지가 않아.’...손자가 없어진 일로 서영숙은 이틀 동안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딱 그 이틀뿐이었다.서연희를 챙겨줄 필요가 없고, 심지어 앞으로 다시는 그녀를 볼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서영숙은 마음속으로 무척 기뻤다.그녀는 다시 예전처럼 모임에 나가며 한가로운 나날을 보냈다.이날, 다른 집안의 부인이 티파티를 준비했다.품질이 아주 좋은 차와 정교하고 맛있는 과자가 탁자에 놓여 있었다. 서영숙은 샤넬이 새로 출시한 기성복을 입은 채로 부드럽고 편안한 가죽 소파에 앉아 음악을 즐기면서 다른 부인들과 잡담을 나누었다.
“경비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빨리 이 사람들 좀 막아...”사람들이 몰려오자, 이순정은 즉시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서영숙 지금 어딨어? 나 지금 서영숙을 찾고 있으니까 당장 나오라고 해!”이순정과 아들 서철봉은 이틀전에 J시에 도착했다. 그들은 먼저 병원에 있는 연희를 보러 간 다음 병실에서 밤을 보냈다.이순정이 말했다.“호텔? 공짜로 호텔에서 지낼 수 있는 거야 뭐야? 이 병실은 크고 넓으니까 딱이네. 문제는 돈을 쓸 필요가 없잖아!”“하지만 침대가 하나밖에 없잖아, 엄마랑 철봉이는...”“에이, 우리 두 사람 같이 자면 되지.”점심을 다 먹은 철봉은 이를 쑤시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평소에 나도 줄곧 엄마랑 같이 잤단 말이야. 에어컨 한 대만 켜면 되니까 돈을 엄청 절약할 수 있어.”설득할 수가 없자, 이순정과 철봉은 병실에서 묵었다.병원 규정에 따르면, VIP 병실에는 간호 침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환자의 가족은 확실히 이곳에서 지낼 수 있었다. 그래서 병원 쪽에서도 뭐라 하지 않았다.어차피 돈은 도겸 쪽에서 내는 것이니, 연희는 원하는 대로 병원에 누워있을 수 있었다. 그럼 가족이 여기서 지내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이순정은 병원에서 이틀 보냈다. 이미 소독수 냄새에 습관이 되었지만, 도겸 쪽의 사람이 찾아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심지어 가정부조차 오지 않았다.“허, 숨어 있으면 될 줄 알아? 절대로 그렇게 할 순 없지!”“엄마,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는데?” 철봉은 주먹을 휘두르며 기대를 하고 있었다.“우리를 만나러 오지 않는 이상, 우리가 직접 찾아가면 되잖아!”그렇게 아침에 연희는 SNS를 통해 서영숙이 모임에 나갔다는 것을 알았다. 배경은 모 호텔의 룸이었는데, 전에 서영숙이 그녀를 데리고 한 번 간 적이 있었다.연희는 즉시 호텔 주소를 이순정에게 알려주었다.모자 두 사람은 1초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달려왔다.서영숙은 원래 먼 곳에 서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듣자,
바깥의 소란을 듣고, 룸에서 모임을 즐기고 있던 사모님들은 전부 나와서 구경을 했다.한 여자가 서영숙의 머리채를 꽉 붙잡으며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어머! 이게 무슨 일이래?!’사모님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재빨리 눈빛을 교환했다.이순정은 사람들이 모여서 구경하는 것을 보고 더욱 신이 났다.“다들 좀 보세요. 이 여자의 아들이 내 딸을 가지고 놀았어요. 내 딸을 임신시켰는데, 책임을 지고 싶지 않다며 바로 차버린 거예요! 내가 귀하게 키운 딸의 인생을 망쳐 놓고 뜻밖에도 우리를 피하고 다니다니! 지금 우리에게 돈이 없다고 무시하는 거야?”이순정은 말하면서 소매를 걷어붙였다.“다들 빨리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려요. 강씨 가문이 얼마나 더러운지, 서영숙은 또 얼마나 악독한지를. 그리고 그 찌질한 아들은 책임감도 없는 남자일 뿐이에요!”철봉은 호텔 직원을 막으면서 자기 어머니의 말에 따라 핸드폰을 꺼내 서영숙을 찍기 시작했다.동시에 욕설을 퍼부었다.“정말 싸네요! 강씨 가문은 사람도 아니에요. 우리 누나를 임신시켰으면서 되려 책임을 지려 하지 않다니! 우리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럴 리가 없죠!”서영숙은 그제야 반응하더니 황급히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또 자신을 잡아당기고 있는 이순정을 피해야 했기에 무척 낭패했다.“찍지 마! 네 딸이 일부러 임신한 건데, 내 아들이랑 무슨 상관이야? 난 그 아이에게 충분히 잘해 주었어. 스스로 이상한 짓을 꾸미다 아이가 없어진 거라고! 계속 이렇게 억지를 부린다면, 나, 난 바로 경찰에 신고할 거야!”이순정은 이 말을 듣고 두려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허리를 짚으며 냉소를 지었다.“신고해. 마침 나도 경찰에게 물어보고 싶군. 도대체 누가 옳고 그른지 한번 보자고! 난 시골 사람이라서 자존심 따위를 버릴 수 있는데, 재벌 집 사모님인 당신은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네.”서영숙은 멈칫했다.이 말은 그녀의 마음을 찌른 셈이었다.“경고하는데, 오늘 이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않
[너 지금 어디야? 내가 그동안 전화를 그렇게 했는데 왜 하나도 받지 않은 거야?! 이제 네 친엄마까지 무시하는 거야?]서영숙은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호통을 쳤다.도겸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출장 때문에 바빠서 전화 받을 시간이 없었어요.”[지금 당장 돌아와! 당장! 돌아오지 않으면 앞으로 날 어머니라고 부르지도 마!]서영숙이 엄숙하게 말하자, 도겸도 더 이상 묻지 않고 바로 본가로 달려갔다.현관에 도착하자마자 꽃병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도겸은 멈칫하더니 집으로 들어갔다.“어머니, 저 왔어요.”서영숙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바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도겸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넌 왜 그렇게 사람 보는 눈도 없는 거야?! 서연희 그 천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여자의 가족들도 얼마나 건방지게 구는지. 특히 서연희의 엄마는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촌놈과 다름없어!”“야비하고 천박해서 생각하기만 해도 징그럽다고! 난 서연희가 악독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그런데 넌 기어코 그 여자를 원하다니. 심지어 임신까지 시켰어! 이제 그 여자가 유산했는데, 모든 죄를 우리에게...”“잠깐만요.” 도겸은 서영숙의 말을 끊었다.“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서연희가 유산을 했다고요?”“그래, 너 몰랐어?!”설령 서영숙이 자신의 아들이 나쁜 놈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이 순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도겸도 은근히 놀랐다. 그러나 그는 곧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그 아이는 원래 이 세상에 오지 말았어야 했어. 없어진 것도 다행이지.’서영숙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오늘 서연희의 엄마가 모임이 열린 호텔에 찾아가서 한바탕 소란을 피웠는데, 지금 아마 온 J시에 퍼졌을 거야. 만약 네 아버지에게 이 일이 알려지면...”강구염의 그 차가운 얼굴을 떠올리자, 서영숙은 참지 못하고 몸서리를 쳤다.부부로 30여 년을 함께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남편이 두려웠다.“어차피 난 더 이상 서연희와 관련된 사람들을 보고 싶지 않아. 네가 저지른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
아침 햇살이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들었다. 부드럽게 퍼진 빛이 정은의 잠든 옆얼굴을 은은하게 감쌌다.살랑이는 바람에 커튼 끝자락이 가볍게 흔들렸고, 고요한 침실에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아버지?”이춘재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직 자고 있었구나? 그럼 내가 이따가 다시...]“아뇨, 괜찮아요. 이제 깼어요. 요즘 집에서 쉬고 있어서요, 실험실을 좀 멈췄거든요.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전화기 너머에서 이춘재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어젯밤에... 내 친구 하나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단다. 병원에서 못 버티고... 그냥 그렇게.]‘헉...’[오늘 아침에 그 집 식구한테 연락이 왔어. 장례 준비도 해야 하고, 남은 가족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니 내게 좀 도와달라고 하더구나. 그 친구는 진짜, 훅 떠났지만 남겨진 식구들은... 참 마음이 아프지.]이춘재는 말을 멈췄고, 한참 후에 덧붙였다.[원래는 오늘 네 외할머니가 병원 가는 날이라 내가 같이 가기로 했는데... 현빈이는 출장이란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부탁할 사람은 너밖에 없더라.]정은은 웃으며 말했다.“외할아버지, 그게 어떻게 부탁이에요. 당연히 제가 가야죠. 외할머니랑 병원 가는 건 제 몫이에요. 외할아버지는 마음 놓고 다녀오세요.”[그래, 그래. 고맙다, 정은아.]...오전 9시. 정은은 외할머니댁 앞에 도착했다. 봉수진은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치고 작은 가방을 손에 든 채 문 앞에 서 있었다.그 옆엔 이춘재가 말없이 함께 서 있었고, 두 사람은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당신 진짜 왜 그래요? 정은이는 실험실에서도 바쁜 애인데, 이런 일까지 시켜서 되겠어요? 괜히 애 걱정하게 만들고, 또 미안하게 만들고...”봉수진의 잔소리가 이어졌고, 이춘재는 구겨진 어깨로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맞아, 당신 말이 다 맞아. 근데 정은이가 요즘 쉰다길래... 그냥 부탁한 거지 뭐...”“쉰다고 병원까지 같이 가야 해요? 그
수민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한 대 갈겼다.짝!동건은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이마를 맞았다.“야! 미쳤어?!”수민은 인상을 팍 구기며 외쳤다.“너 귀신이야 뭐야? 소리도 없이 뒤에서 들이대고... 맞을만 하니까 맞은 거지.”“뭐? 지금 그딴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뭐야? 딴 남자 생각하다가 놀란 거 아냐? 장은혁? 그 잘난 척하는 새끼?”수민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맞아. 잘생겼지, 말도 잘해, 심지어 마술도 하지. 매력 넘치는데?”“푸... 마술? 그건 여자들 꼬시려고 배운 거지. 허세로 가득 찬 새끼야.”“오히려 더 좋지 뭐... 허세라도, 적어도 표현은 하잖아. 넌 뭐 있어?”동건은 이를 악물었다.“그런 애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딱 봐도 겉멋만 잔뜩 든 애송이잖아.”“내가 좋으면 된 거지. 근데... 잠깐만.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수민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그냥.”“고동건!!!”“야, 소리 좀 그만 질러. 힘 좀 아끼라고. 이따가 쓸 데가 있을 테니까.” “꺼져.”수민은 문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동건은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대신, 그녀를 천천히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너 요즘... 왜 이렇게 자꾸 도망치는데? 솔직히 말해봐. 내가 그리웠지?”“웃기지 마.”“아닌데... 지금도 눈 흔들리는 거 보이거든.”수민은 숨을 고르며 조용히 말했다.잠시 후, 그녀는 동건에게 그대로 안겨 침대 위로 내던져졌다.동건은 셔츠 단추를 풀며 천천히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한다고 했잖아. 내가 농담하는 사람으로 보여?”수민은 몸을 살짝 일으키며,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너 하나로 되겠어?”“해보면 알겠지.”밤은 길었고, 봄기운처럼 뜨거웠다.누군가는 그 열기를 마음껏 즐겼고, 누군가는 답답한 숨을 눌러 삼켰다....불 꺼진 침실. 어둠 속,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창문 너머로 달빛만이 희미하게 커튼 틈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왔다.재석은 거실 창 앞에 서 있었다. 등
부재중 10통 중 9통은 고동건, 그리고 나머지 1통...‘어? 우리 조재석 교수님?’수민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톡 알림도 확인했다.읽지 않은 메시지 42개.대부분은 역시나 고동건.수민은 손가락으로 휙휙 넘기며 대충 읽었다.[야, 또 남자랑 밥 처먹냐?][여사친 모임엔 남자 안 끼운다며?][그 장은혁, 꽃미남 새끼 남자 아니냐?][조수민 너 진짜 표리부동이다?] [답장 안 해?][전화도 안 받아? 10초 준다!][기다려, 오늘 밤에 너 좀 혼나야겠어!!]수민은 손가락으로 한 번에 쭉 밀어내고, 심드렁하게 한 마디만 보냈다.[꺼져!!!]10초도 안 돼서 동건한테서 바로 또 메시지가 왔다.[답장할 줄은 몰랐네...][넌 진짜 사람 마음 찢어놓고 아무렇지 않지?] [아냐, 넌 원래 마음이 없지.][...]수민은 무표정하게 창을 닫았다. ‘이 인간은 진심으로 질린다...’그리고 재석과의 메시지함을 열었다.단 두 줄.[정은이랑 어디서 밥 먹었어?][장은혁도 함께였어?]수민의 눈썹이 절로 올라갔다.‘어라...?’‘우리 조재석 교수님이? 이런 문장을? 이렇게 빠르게? 이렇게 직접적으로?’‘우리 조 교수님... 평소에 ‘응’ 하나 치는 데도 심장 박동 조절하듯 하던 사람이었는데...’게다가 이 두 문장, 보통 사람이 보냈다면 ‘그냥 궁금했나 보다’ 하고 넘겼을 거다.하지만, 그게 ‘조재석’이라는 이름으로 오면 느낌이 전혀 달랐다.‘이거... 약간... 삐쳤다고 읽어야 하나?’수민의 눈이 반짝였다.‘뭐야, 이거 진짜네?’그녀는 살짝 웃으며 미용실에서 찍어둔 사진을 열었다.정은과 은혁이 나란히 앉은 각도, 분위기도 꽤 그럴싸한 장면.‘자, 실험 들어가자.’사진을 톡에 업로드. 손끝으로 부드럽게 터치.전송 완료.바로 이어 핸드폰에 내장된 스톱워치를 켰다.“시... 작!”1초, 2초, 3초... 5초...띵-[지금 어디야?]수민은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내려놨다.‘오케이, 확정. 조재석 교수님
“은혁아, 우리 먼저 가볼게.”은혁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려던 찰나, 정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은혁 씨, 같이 식사하시죠? 어차피 저도 아직 안 먹었는데요.”“마침 예약도 해뒀으니까 괜찮다면 같이 가요.”“정, 정말요?! 괜찮을까요?”은혁은 말끝이 떨릴 정도로 들뜬 기색이었다.수민은 표정으로 정은에게 물었다. ‘진심이야?’정은은 눈빛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수민은 한숨 쉬듯 웃으며 말했다.“좋지 뭐... 사람 하나 늘어난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 같이 가자.”은혁은 기뻐서 입꼬리를 다 못 내렸다. ‘정말 같이 가는 거야...? 나 지금 약간... 꿈꾸는 거 아냐?’...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직원이 안내한 자리로 세 사람이 들어갔다. 따로 마련된 룸이라 분위기도 아늑했다.음식이 나오기 전, 은혁이 갑자기 말했다.“기다리는 김에... 작은 마술 하나 보여드릴까요?”수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마술도 해? 그러고 보니, 정은이 외할머니 생신 때도 뭐 하나 보여줬었지.”“이번엔 새로 배운 거예요.” 은혁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해봐, 해봐!” 수민은 벌써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 준비 완료 상태로 들고 있었다.“도구 필요해?” 그녀가 묻자, 은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옆 캐비닛에서 종이 티슈 한 팩을 꺼냈다.그중 다섯 장을 쏙쏙 뽑아냈다. 마침 티슈에 프린트된 꽃무늬가 하나하나 다 달랐다.그는 정은을 향해 말했다.“정은 씨, 가장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골라주세요.”정은은 망설이지 않고 무심하게 한 장을 집어 들었다.은혁은 그걸 받아 조심스럽게 반으로 접고 말했다.“잘 봐요.”다시 펴서 말한 뒤, 조용히 티슈를 손안에서 뭉쳤다. 그리고 그 주먹을 천천히 펴자 손안에는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선물이에요.”은혁은 웃으며 그 꽃을 정은에게 건넸다.“진짜 꽃이에요?”정은은 놀란 듯 꽃을 받았다. 손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다.‘이거... 어떻게 한 거지?’수민은 슬쩍 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