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면서 서영숙은 저도 모르게 정은 일가족을 떠올렸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크리스털 샹들리에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소정은을 받아들이는 건데...”‘그럼 적어도 이렇게 쪽팔리고 무식한 사람과 접촉할 필요가 없잖아.’서정도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게요...”‘그때 엄마가 소정은을 받아들였다면, 두 사람은 지금 아이까지 낳아서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고 있겠지? 그럼 그 여자도 대학원 입학시험에 참가해서 내 자리를 빼앗지 않았을 테고. 하지만 아쉽게도 후회해 봤자지. 예전으로 돌아갈 순 없으니깐.’...수민은 전화 한 통을 받고 바로 레스토랑을 떠났다.가기 전에 계산까지 했다.그녀는 정은에게 경고했다.“아저씨와 아주머니에게 쏘는 거니까, 넌 그냥 가만있어.”말을 마친 후, 수민은 성큼성큼 레스토랑을 나서며 차를 타고 바로 사라졌다.30분 후, 그녀의 차는 메이플 엔터테인먼트 앞에 세워졌다.한 젊은 남자가 회전문 옆에 서 있었는데, 수민의 차를 보자마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바로 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았다.“누나, 왜 이제야 왔어요.”남자는 도민우라고, 웹드라마로 데뷔한 배우였다.민우는 생김새가 괜찮고 피부가 아주 희며 키가 1미터85센티미터 넘어, 외모가 상당히 훌륭했다. 심지어 성격이 좋고 애교까지 넘쳐 수민이 가장 좋아하는 타입이었다.“왜 급하게 날 부른 거야? 무슨 일 있어?”민우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매니저 형이 식사 자리를 하나 마련했는데, 좀 무서워서요. 저와 같이 가주시면 안 돼요?”말을 마치자, 민우의 눈시울도 따라서 빨개졌다. 피부가 하얬기에 더욱 선명했다. 특히 조심스럽고 불쌍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니, 수민은 전혀 당해낼 수가 없었다.“그래, 같이 가줄 테니까 겁먹지 마.”“누나, 정말 누나밖에 없어요...”민우는 바로 웃었고, 참았던 눈물도 따라서 쏟아졌다.수민은 또 마음이 약해지더니 남자의 턱을 어루만졌다.“그만 울어, 넌 왜 그렇게 울기를 좋아하는 거야?”“제
민우는 고분고분 수민 옆에 앉은 뒤, 술잔을 들고 입을 열었다.“늦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마시겠습니다.”세 잔을 마신 다음, 민우는 웃으며 계속 사람들과 인사를 했다.오늘의 주인공은 중간에 앉아 있는 중년 남자였다. 그는 판타지 엔터테인먼트 대표이자 연예계의 유명한 스폰서인 성택준이었다.성택준은 수민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웃으며 입을 열었다.“수민아, 넌 언제부터 연예계의 비즈니스에 관심을 돌린 거야?”“관심은 없고, 그저 막 놀고 있을 뿐이에요.”“젊으니까 노는 것도 나쁠 건 없지. 내 도움이 필요한가?” 성택준은 민우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수민과 말만 했다.“관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삼촌. 저는 이 분야에 대해 잘 모르니 이제 저 좀 그만 놀리세요.”성택준과 수민의 아버지 소기동은 좋은 친구였기에 수민은 그를 삼촌이라고 불렀다.그들의 대화를 듣고, 민우의 눈빛이 변했지만, 놀라움도 잠시일 뿐이었다.‘어쩐지 형이 오늘 밤 꼭 누나를 데리고 가라고 신신당부하셨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구나.’“성 대표님, 수민 누나는 확실히 연예계의 일에 관심이 없으세요. 전에 이런 일들은 멀리서 바라보면 재밌지만, 접촉하면 오히려 재미가 없다고 하셨거든요.”“하하... 확실히 수민이의 성격답군. 그런데 넌 누구지?”성택준은 그제야 민우를 바라보았다.남자는 웃으며 허리를 푹 숙였다.“저는 도민우라고, 메이플 엔터테인먼트의 배우로 데뷔한지 2년이 되었습니다. 아직은 대표작이 없습니다.”“음, 참 성실한 젊은이군. 이런 장소에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주 많거든.”민우는 얼른 손을 흔들었다.“대표님 앞에서 어떻게 감히 거짓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수민은 갑자기 지루하다고 느꼈다. 그녀는 잘 참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죄송합니다, 갑자기 일이 좀 생겨서요. 먼저 가볼게요.”성택준은 기분 나쁘긴커녕 오히려 수민을 관심했다.“죄송하긴, 얼른 가서 일봐. 돌아가서 네 아버지에게 전해, 나중에 차
민우는 당황해졌다.“누나,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다 매니저 형이 시키신 거예요. 누나가...”“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문제는 네가 나를 이곳으로 불렀다는 거야. 그리고 넌 날 이용해 택준 삼촌의 주의를 끌었어. 이건 사실이잖아? 설마 이것도 다 네 매니저가 가르쳤다고 할 거야? 그럼 그 사람도 너무 대단하네!”“누나, 제 설명 좀 들어보세요... 저는 누나를 속인 적도, 이용한 적도 없어요. 저는 정말 이런 자리가 부담돼서 누나를 부른 거라고요.”“부담돼? 방금 여유롭게 사람들과 잔을 부딪치며 아주 즐기고 있는 것 같던데, 지금 부담이라고 했어?”“저는...”민우는 할 말이 없었다.“우리 사이는 여기까지야. 나중에 만나면 그냥 모르는 척하자.” 수민은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렸다.그러나 이때, 남자의 차갑고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날 차버리려고요? 내가 쉽게 동의할 것 같아요?”수민은 고개를 돌렸다. 줄곧 해맑고 솔직했던 민우가 지금 음흉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눈빛은 탐욕으로 가득 넘쳤다.“2억 원, 그리고 이 인기 드라마 남자 주인공의 자리를 나에게 줘요. 그럼 나도 더 이상 누나에게 매달리지 않을 거예요.”수민은 웃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민우에게 다가갔다.“너 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민우는 이를 악물었다.“그렇다고 할 수 있죠.”“네가 뭔데? 날 협박할 자격이 있는 거야?”“나한테 우리 두 사람이 같이 잔 사진이 있어요. 이래도 내가 자격이 없는 거예요?”수민은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환하게 웃었다.“만약 내가 거절한다면? 넌 어떻게 할 건데? 그 사진을 공개할 거야?”“맞아요.”“그래, 그럼 공개해.”“뭐라고요?” 민우는 깜짝 놀랐다.“난 얼굴도 예쁘지, 몸매도 나쁘지 않지. 아무튼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디 부족한 곳이 없잖아. 그런데 너는? 그 사진이 공개되면 네가 여자와 자서 유명해졌다는 소문이 쫙 퍼질 텐데. 나야 상관없지. 난 연예계에 진출하고 싶지도 않고,
동건은 피식 웃더니 바로 수민을 쫓아갔다.‘여자친구가 실연당했으니 나도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어?’...민우는 초라하게 룸으로 돌아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계속 스폰서들에게 술을 따랐다.수민은 그를 차버렸고, 심지어 민우의 협박조차 듣지 않았기에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다.“전 대표님, 저희 예전에 몇 번 만난 적이 있죠. 오늘 처음으로 대표님과 술을 마시는 것이니, 앞으로도 잘 부탁하겠습니다.”전에 민우는 이런 식사 자리에 나온 적이 있었지만, 스폰서들에게 접근할 기회조차 없었으니 같이 술을 마시는 것은 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선우는 쌀쌀하게 웃으며 가슴을 안았다.“도... 이름이 뭐라고?”“도민우입니다.”“그래, 도민우. 너 주량이 꽤 좋은 것 같은데?”“에이, 아닙니다. 그저 몇 잔 정도 마실 수 있을 뿐입니다.”“오늘 성 대표님의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어서 나왔다며?”민우는 진지하게 말했다.“전 대표님,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못 주는 것도 아니지. 안 그래요, 성 대표님?”성택준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비록 선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잘 몰랐지만, 그는 여전히 고개를 끄덕였다.“물론이지.”민우는 눈빛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선우는 계속해서 말했다.“하지만 아주 작은 요구가 있어. 너에게 있어 아마도 큰 문제가 아닐 거야.”“말씀하세요.”“이 테이블 위의 모든 술을 다 마셔. 그럼 남자 주인공을 너로 정할게.”이 말이 나오자, 사람들은 잇달아 시선을 돌리며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민우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전 대표님, 농담도 참.”“농담? 난 엄청 진지해. 물론 내 제안을 거절할 수도 있어. 그렇다면 남자 주인공은 당연히 남에게 줘야겠지.”테이블 위에 여러 종류의 술이 있었다.와인, 소주, 맥주.이것을 다 마시면 죽지 않아도 병원에 한동안 입원해야 할 것이다.그러나 민우는 잠깐 망설이더니 바로 결정을 내렸다.“마실게요.”선우는 박수를 쳤다.“그래.”민우가 고개를 쳐들고 술을 마
“에이, 그건 네 착각이고. 다른 여자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 조수민은 감정이 없는 여자야.”동건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쯧쯧, 넌 왜 자꾸 웃어?” 수민은 입을 삐죽거렸다.“그럼 울라고?”“그래, 내가 휴지 줄게.”동건은 말없이 라이터를 꺼냈다.수민이 손을 흔들자, 그는 자연스럽게 라이터를 건네주었다. ‘이야, 이 여자가 드디어 눈치 있게 불을 붙여주려는 건가?’하지만 이것 역시 동건의 착각이었다.탁.수민은 동건의 손을 세게 내리쳤다.“담배 달라고! 왜 엉뚱하게 라이터를 주는 거야? 넌 눈치도 더럽게 없네...”동건은 어이가 없었다. 먼저 자신의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이번에 수민이 말할 필요도 없이 얌전하게 라이터로 그녀를 위해 불을 붙였다.불빛은 여자의 얼굴을 밝게 비추었다.수민은 고개를 숙였다. 하얀 이빨로 담배꽁초를 문 다음 붉은 입술을 가볍게 오므리자, 담배꽁초에 선명한 립스틱 자국이 나타났다.동건은 뜻밖에도 그 모습이 넋을 잃었다.“야, 불 꺼.”“어? 아!”동건은 라이터를 다시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두 사람은 클럽에서 두 시간 넘게 얘기를 나누었다. 와인 한 병을 마시고 나왔을 때, 이미 새벽이 되었다.둘 다 술을 마셨기에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수민은 대리를 부르려고 했지만, 1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다.“야,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여기 전부 클럽이잖아. 한밤중이라서 오랫동안 기다려야 해.”“그럼 직접 택시 하나 잡으면 되겠다. 내일 시간 내서 다시 내 차 몰고 가야지.”그러나 그 결과, 택시를 타려면 3시간 이상 기다려야 했다.수민은 말문이 막혔다. 이때 그녀는 눈알을 굴리더니 동건에게 물었다.“넌 어떻게 돌아갈 거야?”“난 어디도 안 가.”“그게 무슨 뜻이야?”“맞은편 호텔 봤어?”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어, 그런데?”“내 거야.”“그래서?”“직접 호텔에서 자면 되잖아. 귀찮게 왜 집에 가? 너 바보 아니야?”수민은 그제야 깨달았다.“역시 너야. 그럼
이 말을 듣고 동건은 미간을 찌푸렸다.‘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닌데.’“필요 없어, 그냥 데리고 가.”지배인은 여전히 웃고 있었고, 지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눈치 있게 물러났다.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지연이 물었다.“도련님께서 호텔에 오시면 꼭 여자를 찾으셨다면서요? 왜 오늘은...”“전에는 줄곧 그랬지만, 가끔 예외도 있는 법이야. 도련님께서 여자 때문에 호텔에 오신 줄 알아?”“그런데 저는...”지연은 어렵게 이번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지배인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도련님의 생각에 달렸으니까. 탓하고 싶으면 너 자신을 탓해. 어쩜 이렇게 운도 없는 거야? 도련님께서 오늘 지치셨기 때문에 쉬고 싶으신 거겠지. 넌 얼른 가서 일이나 해. 주제넘은 생각하지 말고...”여자가 이를 갈았다.다른 한편, 수민은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그녀는 동건인 줄 알았다.“밤늦게 무슨 일... 어?”동건이 아닌 한 젊은 남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수민을 보자,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미안해요, 내가 문을 잘못 두드린 것 같아요.”“괜찮아.” 말을 마치자마자 수민은 다시 문을 닫으려 했다.그러나 남자는 문을 받치며 그녀가 닫지 못하게 막았다.수민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또 다른 일 있어?”“정말 날 모르는 거예요?” 남자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의 눈빛은 섭섭함으로 가득 찼는데 은근히 울먹이고 있었다.수민은 웃으며 진지하게 그를 훑어보았다.그녀는 처음부터 문을 잘못 두드렸다는 이유를 믿지 않았다.이곳은 꼭대기층이었고, 스위트룸이 딱 두 칸밖에 없었으니까.그리고 다른 하나는 동건의 방이었다.남자는 자신이 문을 잘못 두드렸다고 했지만, 한밤중에 이렇게 입고 동건을 찾으러 갈 리가 없었다.그는 흰색 티셔츠에 연두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운동화까지 신고 있으니 그야말로 해맑은 대학생이었다.‘청춘이여!’
달빛은 물처럼 부드러웠고, 기나긴 밤이 지났다.이튿날 오전 9시, 동건은 깨어나자마자 수민을 찾아갔다.노크를 하려고 할 때, 문이 안에서 열렸다.“조...”‘엥!’한 젊은 남자가 문 앞에 나타났다. 그는 머리카락이 약간 흐트러져 있었는데, 딱 봐도 금방 잠에서 깨어난 게 분명했다.두 사람이 시선을 마주치자, 동건은 아예 멍해졌다.이에 비해 성후는 훨씬 담담했다. 그는 동건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쉿하라는 손짓을 했다. 그리고 안쪽을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작게 말해요. 누나 아직 자고 있어요.”말을 마치고 바로 가버렸다.동건은 복도에서 멍을 때리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X발!”‘조수민이 뜻밖에도 내 호텔에서, 내가 안배해준 방에서, 내 맞은편에서 다른 남자와 잤다니?!’동건은 얼른 들어가서 고의로 문을 닫으며 큰 소리를 냈다.그러나 그의 호텔은 최고급이라 전부 무음문을 사용했기에 전혀 큰 동정을 낼 수 없었다.동건은 화가 나서 의자를 발로 찼지만, 바닥에 카펫을 깔았기 때문에 여전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그 카펫은 심지어 퀄리티가 가장 좋은 것이었다.촤악.하다 못해 동건은 창가에 가서 커튼을 열었다. 햇빛이 방안에 쏟아지자, 수민은 마침내 깨어났다.“진성후, 이게 무슨 짓이야?! 방금 한 말 다 잊은 거야?!”수민은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났지만 햇빛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녀는 침대 앞에 한 남자가 서 있는 것밖에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그 사람이 성후인 줄 알고 명령했다.“커튼 닫으라고!”수민은 다 좋은데 유독 아침에 일어날 때 성질이 좀 있었다.평소에 정은조차 아침에 그녀를 건드리지 못했다.동건은 이 말을 듣고 냉소를 지었다.여자의 목과 가슴에 키스 자국이 널려 있었고, 심지어 색깔조차 달랐다. 모두 성인이었기에 동건은 두 사람이 어젯밤과 오늘 아침에 뜨겁게 사랑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조수민! 너 아주 신이 났구나?”이 목소리에 수민은 멍해졌다.그녀가 눈을 깜박거리
“왜 날 그렇게 쳐다봐? 빨리, 나 목말라 죽겠어!”동건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섰다.얼음물 한 잔을 마시니, 수민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나한테 무슨 볼일 있어?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니까 좀 부끄럽네...”남자가 물을 따르러 가는 틈을 타서 수민은 이미 옷을 다 입었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어머, 벌써 11시라니!’“부끄러워? 우리 조수민 아가씨가?! 넌 아주 당당하던데!”동건은 마치 찔려 터진 고무공과 같았다. 전에는 겨우 참을 수 있었지만, 이번에 쌓인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했다.“당당하게 나에게 물 좀 따르라고 시켰잖아? 그게 부끄러워서 한 말이 아닌 것 같은데?”말을 마치자 동건은 작은 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수민은 눈살을 찌푸렸다.“너 뭐 잘못 먹었어? 왜 나한테 성질이야?”“오늘 아침에 네 방에서 나간 그 남자부터 설명해야 하는 거 아니야?”수민은 영문을 몰랐다.“설명할 게 뭐가 있어? 넌 여자와 잤다고 특별히 남에게 설명할 거니?”동건은 말문이 막혔다.“아니, 나도 지금 어쨌든 네 남자친구잖아? 네가 이렇게 나오면 난 뭐가 되는 건데?”그를 바라보는 수민의 눈빛은 더욱 의혹에 빠져들었다.“첫째, 넌 내 가짜 남자친구야. 둘째, 난 남들 앞에서 다른 남자와 잔 게 아니라, 단지 내 방에서 잤을 뿐인데. 이게 너한테 무슨 영향을 준다는 거지? 합작하기 전에 우리 이미 약속했잖아, 서로의 감정에 간섭하지 말자고. 난 계약을 위반한 적이 없어. 그런데 너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동건은 말로 수민을 이길 수가 없어서 짜증이 났다.수민은 방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그나저나, 이 호텔 정말 좋네. 앞으로 여긴 내 방이야. 다음에 또 와야지.”‘방금 다음에 또 올 거라고 했어?!’“참, 이따가 프론트에 전화해서 룸 카드 한 장 더 준비해 달라고 해.”“뭐 하려고?”“한 장은 나 혼자 쓰고, 다른 한 장은 남에게 주려고!”‘이렇게 간단한 문제를 물어보다니.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아예 바보로 된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