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 오래 기다릴 줄 알았는데, 동건이 그 녀석이 이렇게 빨리 여자친구를 찾을 줄은 정말 몰랐어. 이제 드디어 내 며느리에게 줄 수 있다니.”‘역시, 경매장에서 찍으신 거구나. 적어도 몇 억, 심지어 수십 억이 들지도 몰라.’“안 돼요, 어머님, 저는 이 팔찌를 가질 수 없어요.” 수민은 즉시 거절했다.만약 그녀가 동건의 진짜 여자친구라면, 아무리 비싼 팔찌라도 받을 수 있지만, 문제는 수민이 가짜 여자친구였던 것이다.‘가짜인 내가 수십억짜리 팔찌를 받다니, 쯧쯧... 그건 너무하지.’“팔찌 하나일 뿐, 뭐 대단한 것도 아니잖아. 안심해, 이건 너희들에게 압박을 주는 것도, 결혼하라고 재촉을 하는 것도 아니야. 난 단지 너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을 뿐이야.”송보미는 팔찌를 상자에서 꺼내 직접 수민에게 끼워 주었다.“크기가 딱 맞네. 어머, 네 피부톤과 너무 잘 어울린다.”“최고급 비취 팔찌이니 당연히 잘 어울리겠지!’두 사람이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동건은 소파에 앉아 히죽거리며 물었다.“무슨 얘기를 방에 가서 한 거야? 그것도 이렇게 오랫동안 얘기를 하다니...”“됐어, 내가 네 여자친구를 빼앗아갔다고 질투하는 거지? 지금 돌려줄게.”송보미는 웃으며 수민을 밀었다.“엄마, 저한테 그런 누명 씌우지 마세요. 전 그런 뜻이 없었단 말이에요...”동건은 턱을 들더니 은근히 부인했다.오후에 수민은 편안하게 마사지를 받았는데, 바깥의 미용실보다 훨씬 더 좋은 것 같았다.그녀는 물을 마시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는데, 수민은 물컵을 들고 거실 창문 앞으로 가서 받았다.“여보세요?”[날 기억하시나요? 진성후예요.]수민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날 밤 호텔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는 웃으며 물었다.“당연하지. 그런데 무슨 일이야?”[그날 이후로 나한테 연락도 안 했으니까요. 난 누나가 날 잊어버린 줄 알았어요.]남자가 억울해하며 말하자, 수민은 마음이 약해졌다.“너도 전화번호를 안 남겼잖아?”[아니요,
정확히 말하면 수민과 동건을 주시하고 있었다.송보미가 입을 열었다.“어머, 두 사람 얼마나 달콤한지 좀 봐요!”“저는 도련님께서 이렇게 주동적으로 한 여자에게 다가간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수미가 일반 여자아이겠어요? 출신이든 교양이든 모두 훌륭하단 말이에요. 이 녀석도 마침내 제대로 된 신붓감을 찾았네요.”“도련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절대로 실수를 하지 않으셨죠.”“이대로 수민이와 결혼을 할 수 있다면, 난 자다가도 행복해서 일어날지도 몰라요.”“어? 그런데 도련님의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으시죠?”“그래요?” 송보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바라보았다.“정말이네요... 수민이의 몸이 좀 뻣뻣해 보이지 않아요?”‘두 사람 분명히 그렇게 가까이 붙어있는데, 이상하다...’아래층에서 동건이 먼저 입을 열었다.“움직이지 마, 우리 엄마는 이미 의심하기 시작하셨어.”“언제부터 그곳에 서 계셨죠?”“네가 전화를 받을 때부터.”‘망했네.’송보미가 말했다.“왜 껴안기만 하고 진도를 안 나가는 거죠?”수민은 이 말을 똑똑히 들었다.그녀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기에 자신이 저지른 일을 스스로 해결할 줄 알았다.수민은 동건을 바라보며 말했다.“키스해줘.”“뭐?”“왜 멍을 때리고 그래? 빨리!”동건은 침을 삼키더니 눈빛이 점점 짙어졌다. 마치 바닥이 보이지 않는 바다처럼 맹렬한 소용돌이가 일어났다.다음 순간, 동건은 여자의 가녀린 허리를 포악하게 감싸더니 강렬하고 거친 키스를 했다.축축하고 건조하며 입술과 혀가 얽히고설켰다.“어머! 키스하고 있는 것 좀 봐요. 이모님, 우리 얼른 피해야겠죠? 아이들이 난처함을 느낄지도 몰라요.”“그러니까요.”송보미가 떠났다.찰싹!깔끔한 소리가 울려퍼졌다.동건은 영문을 몰랐다.“아니... 왜 내 얼굴을 때리는 거야?”수민은 다리가 나른해졌다.“너 왜 진짜로 키스하는 건데?”게다가 수민은 동건의 얼굴을 때린 게 아니라 그저 가볍게 밀어냈을 뿐이었다.따귀와는 그래도 차이가 있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는데, 안에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정은은 그제야 한동안 재석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두 사람은 외출하는 시간이 많이 비슷해서 전에 자주 마주쳤지만, 최근에 정은은 재석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너무 바빠서 그동안 실험실에서 지냈겠지.’정은은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저녁에 그녀는 도서관에서 잠시 책을 보다가 돌아왔는데, 집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이미 8시였다.복도에 들어서자마자 뒤에 한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재석이 조깅을 하고 있었다.정은은 재빨리 입을 열어 그를 불렀다.“선배님.”그러나 남자는 못 들은 것처럼 곧장 지나갔다.‘내 목소리가 너무 작았거나 이어폰을 끼고 있어서 그런가?’정은은 집에 가서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나가서 몇 바퀴 뛸 작정이었다.마침 재석에게 CPRT의 구매 경로를 물어볼 수도 있었다.사실 기계를 사겠다고 할 때, 정은은 가장 먼저 재석과 오미선을 떠올렸다.오미선은 최근에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늘 병원에 찾아갔다. 그래서 정은은 그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그들이 자신의 돈으로 기계를 산 일이 터진다면, 송지혜가 악의적으로 실험실을 강점했다는 사실도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것이다.‘아마도 병원에서 직접 뛰쳐나와 송지혜 교수님과 학교를 찾아가서 따지시겠지.’그러나 현재 학교는 분명히 송지혜의 편을 들고 있었다. 그러니 오미선이 찾아가도 아무런 좋은 점을 얻지 못할 것이다.‘괜히 화를 내시면 건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그냥 말을 하지 말자.’그래서 재석을 찾는 게 최상책이었다.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정은이 문자를 보내고 또 전화를 걸어도 재석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너무 바빠서 핸드폰을 볼 시간이 없는 거겠지.’그러나 재석을 찾으려 했지만, 오늘에야 결코 만났던 것이다.원래 정은은 이미 현빈에게 연락했는데, 내일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재석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그녀도 자신이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에 대해 분석해 본
진욱이 물었다.“너 요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 무슨 일 있었어?”재석이 대답했다.“그건 네 착각이야.”말을 마치고 휴식실로 걸어갔다.그는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왔는데, 서랍에 넣으려 했다.서랍은 안쪽에 있었고, 문을 열자, 정은이 전에 쓰던 접이식침대가 원래의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그때 자신이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왔을 때, 마침 낮잠을 자고 있던 정은과 부딪친 것을 생각하면, 재석은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리며 숨이 거칠어졌다. ‘마치 꿈속에서처럼...’재석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이 순간, 괴로움과 부끄러움이 일제히 밀려왔다.이런 자신 때문에 재석은 창피함을 느꼈다.“조 교수, 내가 야식 좀 시켰는데. 같이 먹을래?” 진욱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아니야, 너 혼자 먹어.”“치킨과 족발이야, 정말 안 먹을 거야?”“응.”“이 치킨은 말이지, 그래도 정은이가 한 게 가장 맛있다고 생각해... 그나저나, 정은이 이미 개학한 거 아니야? 왜 줄곧 실험실에 놀러 오지 않았지? 다음에 정은이 만나면 자주 오라고 전해줘. 우리 모두 정은이가 엄청 보고 싶단 말이야.”휴식실에서 나온 재석은 이미 진정을 되찾았다.“그럼 네가 직접 가서 말하든가.”정은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곳곳에 그녀의 흔적이 있었다.진욱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아니, 두 사람 이웃이니 매일 볼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냥 우리의 그리움을 전해줄 수 있잖아?”“응, 안 돼.”한참 후, 진욱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조 교수, 너 최근에 정말 무슨 병이라도 걸린 것 같아.”재석은 실험대 앞에 서 있으면서 들은 체 만 체했다.진욱은 계속 중얼거렸다.“설마 실연당한 건 아니겠지? 매일 엄숙한 표정으로 실험실에 나오다니. 정말 무서워 죽겠네.”재석은 고개를 숙이고 실험에 전념했다. 그의 방해를 전혀 받지 않은 모양이었다.“이것 봐, 또 이러네...”진욱은 혀를 찼다....다음 날 저녁, 하늘에는 붉은 구름이 떠돌았고, 푸른 하늘도 금
서준의 시선을 알아차린 현빈은 담담하게 고개를 돌렸는데, 눈빛이 약간 어두워졌다.“얼른 와서 앉아.”“감사합니다.”민지와 서준은 정은의 곁에 앉았다.현빈은 종업원을 불렀다.“그릇과 젓가락 두 개 가져와. 주방 쪽에 요리 두 개 정도 더 만들어달라고 하고.”“네, 어떤 구체적인 요구라도 있으신가요?”현빈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민지가 말했다. “고기요.”서준도 입을 열었다. “해산물은 안 돼요.”“네.”종업원은 나갈 때 문을 살며시 닫았다.그렇게 룸에는 네 사람만 남았다.현빈은 웃으며 정은을 바라보았다.“소개 안 해줄 거야, 정은아?”‘정, 정은아?’민지는 눈을 깜박거렸고, 서준도 눈알을 굴렸다.정은은 안색 하나 바꾸지 않았다.“두 사람은 내 동창생이에요. 임서준과 하민지.”그리고 현빈을 가리켰다.“이 사람은 내 친구인데, 심현빈이라고 해.”“정은이는 나와 만나자고 먼저 말한 적이 없어. 이번은 특수 상황인 셈이야. 그래서 너희들은 어떤 난제에 부딪힌 거지?”현빈은 정은이 대신 ‘너희들’이라고 말했다.그는 관찰력이 정말 대단했다.민지와 서준은 눈을 마주치며 입을 열지 않았다.정은이 입을 열었다.“내가 말할게요...”...“그래서, 너희들은 스스로 돈을 내서 천양 테크놀로지에게서 CPRT를 구매하고 싶은 거야?”“맞아요.”현빈은 잠시 침묵했다.“학교는 이 일에 대해 알고 있는 거야?”정은은 고개를 저었다.“아직 학교 측과 소통하지 않았어요.”결국 기계를 살 수 있을지조차 문제였다.“혼자 돈을 내서 사도 되고, 천양도 CPRT를 너희들에게 팔 수 있지만, 이 일은 반드시 학교에 알려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남들이 트집을 잡을 거야.”민지는 그 이유를 잘 몰랐다.“저희가 돈을 내서 산 것인데, 왜 오히려 남을 두려워해야 하는 거죠?”“이 기계를 사도 학교의 실험실에 두어야 하니까. 돈을 낸 사람은 너희들이지만, 그 사람들을 가만두고 싶은 거야?”민지는 흥분을 금치 못했다.“어떻게 그 사람들을 혼
정은이 말했다.“다른 사람 좋아할 때 되지 않았어요?”“다른 남자는 그렇겠지만, 난 정말 너한테 일편단심이야.”...레스토랑을 나서자, 정은 그들은 집이 같은 방향이었다.민지는 핸드폰을 꺼내 차를 부르려고 했다.이때, 고급스러운 벤츠 한 대가 몇 사람 앞에 세워졌다.차창이 내려오자, 현빈이 입을 열었다.“타, 내가 집까지 바래다 줄게.”민지는 정은의 ‘지시’를 기다렸다.현빈은 웃으며 계속 말했다.“여기서 택시를 잡기가 많이 어려울 거야. 내가 데려다 주지 않으면, 적어도 두 시간 후에 집에 도착할 걸.”서준은 말을 하지 않았는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민지는 핸드폰을 확인했는데, 2시간 정도 기다려야 했다.‘아마 4시간 후에 집에 도착하겠지...’정은이 말했다. “그럼 너희들도 같이 타자. 그럼 심 대표님에게 잘 부탁할게요.”현빈은 웃으며 대답했다.“고맙긴, 내 영광이야.”...네비게이션을 따라 가장 먼저 차에서 내려야 할 사람은 정은, 그 다음은 민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준이 내려야 했다.그러나 한 사거리를 지날 때, 우회전을 해야 했지만 현빈이 차선을 잘못 들어간 바람에 직진할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가장 먼저 차에서 내린 사람은 민지로 변했고 그 다음이 서준, 정은은 마지막에 내렸다.차는 골목 앞에 세워졌다.현빈은 내려오더니 다른 쪽에 가서 직접 차 문을 열어주었다.“머리 조심해.”정은은 차에서 내려 고개를 들어 현빈을 바라보았다.“고마워요.”“차 문을 열어줘서? 아니면 기계를 팔아줘서?”“둘 다요.”“그럼 날 집으려 초대해야 하는 거 아니야?”정은은 말을 하지 않았다.“농담이야, 나를 이상한 남자로 취급하지 마.”정은은 현빈을 바라보더니 정색했다.“정말 이상한 남자 아니에요?”남자는 입술을 구부렸다. “난 아니지만, 내 생각에는 그런 사람인 것 같아. 아마도 그런 사람일 거야.”“못 알아듣겠어요.”“그럼 알려고 하지 마. 어떤 일들은 이해할 필요가 없으니까.”‘이유가 없었
도겸의 주먹은 현빈의 광대뼈를 스치며 펑 하는 소리를 냈다.상대방이 주먹을 들어 다시 공격을 하려 할 때, 현빈은 도겸의 옷깃을 잡아 힘을 주었다. 그 바람에 도겸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현빈은 이 틈을 타서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아!” 그는 광대뼈를 만졌는데 몹시 아팠다.“강도겸, 너 미쳤어?!”“아니, 넌 아직 더 맞아야 돼!”현빈은 냉소를 지으며 이를 갈고 노발대발하는 도겸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가 달려온 방향을 보더니 바로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그는 더욱 환하게 웃었다.“다 봤어?”도겸이 다시 주먹을 들 때, 그의 눈에 이미 핏발이 섰다.“왜? 벌써 못 참겠어? 앞으로 이런 상황이 더 많아질 텐데. 심지어 이보다 더 심한 장면을 볼 수 있을 거야. 어쩌려고? 날 볼 때마다 때릴 작정이냐? 그런데 소용없어. 날 때린다고 해서 일이 달라지는 게 아니잖아?”도겸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만약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현빈은 이미 갈기갈기 찢어졌을 것이다.무슨 생각이 났는지, 도겸은 갑자기 냉정해졌다.“정은이가 네 고백을 받아들인 거야?”현빈의 미소가 굳어졌다.이번에 도겸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그건 아닌가 봐. 그때 넌 정은이의 마음을 얻을 수 없었으니, 지금은 또 무슨 근거로 자신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적어도 정은이를 가졌었어. 하지만 너는?” “정은이와 스킨십을 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지. 심현빈, 넌 무슨 자격으로 날 비웃는 거야? 남이 신었던 신발이 그렇게 좋은 거야? 넌 새것을 살 수 없는 거야, 아니면 남이 신던 신발만 원하는 거야?!”현빈은 웃음을 거두며 앞으로 다가가서 도겸의 옷깃을 잡았다.“다시 한번 말해보지 그래?!”“내 말이 사실이잖아?”“날 어떻게 욕해도 되지만, 정은이를 모욕하지 마. 너를 위해 정은이는 6년의 청춘을 바쳤고, 모든 사랑과 관심을 너에게 줬다고!”현빈이 자신의 옷깃을 잡아당겨도 도겸은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냉소를 지으며 비웃었다.“인정해
그러나 두 사람이 고개를 돌릴 때, 그곳에 아예 정은이 없었다.동건은 어깨를 으쓱거렸다.“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너희들 또 계속 싸울 거잖아?”도겸과 현빈은 말을 하지 않았다.“다들 어른인데, 왜 자꾸 이렇게 유치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거야?”현빈이 말했다.“이 자식이 먼저 손을 썼단 말이야.”“네가 얻어맞을 짓을 했으니까!”“됐어, 둘 다 진정해. 이따가 정말 소정은이 나타난다면, 너희 둘 다 무시를 당할 거야.”현빈은 입술을 깨물었고, 도겸은 침묵에 잠겼다.이때 선우가 입을 열었다.“가요, 먼저 병원에 가서 상처를 처리해야죠.”“아니.” 도겸은 고개를 들어 차갑게 현빈을 바라보았다.“여전히 그 말이지만, 넌 정은이를 얻을 수 없어. 그러니 일찌감치 포기해.”“그래?” 현빈은 가볍게 웃었다. “그래도 시도를 해봐야 하지 않겠어? 난 그래도 성공할 가능성이 있지만, 넌 이미 아웃됐잖아.”도겸은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또다시 손을 쓰려 했다. 다행히 선우가 재빨리 그를 붙잡았다.“병신.”현빈은 차갑게 말한 다음 차 문을 열고 곧장 떠났다.도겸은 선우를 밀어냈다.“이거 놔! 저 자식 이미 떠났잖아. 그런데 왜 아직도 날 붙잡고 있는 거야?”선우는 한숨을 쉬었다.“도겸이 형, 대체 왜 그래요?”도겸은 핏발이 선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이 문제는 심현빈에게 물어봐!”‘한때 우린 좋은 친구였는데, 왜 하필이면 정은이에게 반한 거야?’말을 마치자, 도겸도 차에 올라탔다.선우와 동건은 서로를 마주 보더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내 마음이 다 괴롭네요.”“그 두 녀석이 기어코 일을 이렇게 만들었으니, 우리도 간섭할 수 없잖아.”“현빈이 형은 대체 왜 이러는 거죠?”‘왜 하필이면 정은 누나를 좋아하게 된 거지?’동건은 멈칫했다.무엇이 생각났는지 그는 유유히 말했다.“한 사람을 좋아하는 데에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어. 가끔은 이성까지 잃을 수 있으니까.”‘엥? 형 예전에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