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 학생, 이 교환학생 좀 맡아줘야 할 것 같아.]학교로 돌아가는 길, 정은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한중기였다.[그리고 잠깐 부총장실로 와줄래?]평소와 다름없는 차분한 목소리였다....똑똑똑-“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가며,“부총장님, 찾으셨다고요?”한중기가 시계를 흘끔 본다.“오미선 교수 배웅하고 왔어?”“네.”“사실 오미선 교수가 신청서 올렸을 때 나도 고민 많이 했어. 말리기도 했고. 근데 본인이 너무 강경하더라고. 결국 학교로서도 어쩔 수 없었지.”“네, 알고 있어요. 오늘 그 얘기만 하시려고 부르신 건 아니겠죠?”“역시 똑똑하네.”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한중기.“오미선 교수가 이렇게 떠날 줄 몰랐거든. 그래서 거기에 맞춰서 교환학생도 배정해놨는데, 지금 교수는 가버렸고, 학생은 남았지... 한참 고민하다가...”정은, 살짝 눈썹이 올라간다.“네가 좀 맡아줄래?”“제가요?”웃음이 나올 뻔했다.‘내가 학생인데 학생을 맡으라고?’‘장난하나?’“크흠! 그게 말이지, 정은 학생. 지금 정은 학생은 이미 동기들 수준을 훨씬 넘어섰잖아. 연구 성과도, 논문 실적도 탑급이지. 학생이긴 한데, 그냥 학생은 아니지.”한중기가 몸을 앞으로 약간 숙이며 말을 이었다.“게다가, 지금도 임서준 학생이랑 하민지 학생 지도 중이지? 오미선 교수도 떠나기 전에 탁재민 부탁하고 갔잖아? 학교는 자네의 지도력이 충분하다고 봐.”“하...”어이없어 웃음이 새어 나왔다.“부총장님, 저희 사정 되게 잘 아시네요? 탁재민까지 저한테 넘어온 거 어떻게 아셨어요? 평소에 꽤 열심히 지켜보셨나 봐요?”“크흠!”한중기, 머쓱한 듯 코를 만진다.“부총장이 학생들의 교육과 발전에 관심 가지는 게... 당연한 일이지.”더 돌려 말할 필요 없다고 느꼈다.“못 맡아요. 다른 분 찾으세요.”“잠깐...!”“또 뭘요?”“오미선 교수, 교환학생 쪽에 이미 확답했거든. 거기서도 만족도가 엄청 높았고. 이제 와서 교수님이 갑
정은은 숨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그래서요? 그다음은요?”“재석 아버지가 나한테 와서 도움을 청했어. 연구 방향이랑 아이디어 좀 보태달라고. 결국 그 대회에서 1등을 했지. 그때부터였을 거야, 재석이 아버지가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진 게.”“그리고... 둘이 사귀게 된 거예요?”정은은 조심스레 물었다.“그렇게 바로는 아니었지.”그 순간, 정은은 처음 보았다. 오미선 얼굴에 엷게 스친, 아주 미묘하고 조용한 수줍은 표정.“그 후로 재석이 아버지가 내 연구실에 자주 왔어. 처음엔 학문 관련한 질문으로, 나중엔 이런저런 핑계로... 그러다 보니 나도 조금씩 마음이 갔던 거지.”“결국 우린 2년 정도 비밀 연애를 했어. 아무도 몰랐지.”“근데 왜 헤어지셨어요?”정은은 속삭이듯 물었다.“재석이 아버지가 졸업하고, 집에서 정해준 혼처가 있었어. 당연히 재석이 아버지는 거부했지. 근데 집안의 벽은 높았고, 나는 연구에 몰두하느라 늘 바빴어. 대부분 시간을 실험실에서 보내고 있었으니까.”오미선의 눈동자에 살짝 그늘이 내렸다.“재석이 아버지가 찾아오면 난 시간이 없었고, 내가 시간을 내 찾아가면 연락이 안 닿고. 반년 넘도록 내내 그렇게 엇갈렸어. 우리 둘 다 마음에 금이 간 걸 느끼면서도 어떻게 붙잡아야 할지 몰랐던 거야.”“결국, 재석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양보했지. 날 인정해주겠다고. 조건은 단 하나, 당장 결혼할 것, 그리고 결혼 후엔 대학 강의는 계속해도 되지만 연구는 접고 가정을 돌볼 것.”정은은 괜히 가슴이 묵직해졌다.너무 익숙한 얘기였다.강서원, 재석의 어머니도 비슷한 말을 했으니까.“나는...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었어. 마침 그 무렵, 재석이 할아버지 건강이 악화됐고, 재석이 아버지는 회사를 물려받아야 했지.”“결국 우린, 선택의 방향이 너무 달랐던 거야. 멀어질 수밖에 없었어.”“마지막은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어. 재석이 아버지가 몇 번 붙잡았지만, 나는 마음을 굳혔고. 그렇게 끝났지.”오미선은 가만히 웃으며
두 사람이 눈을 맞춘 채, 주변의 모든 소음이 스르르 사라진 듯 고요해졌다.정은은 너무 놀라 두 눈이 동그래지고,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오 교수님이랑... 재석 씨 아버지?!’‘이거...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박애영은 그 표정을 보고는 재빨리 눈치껏 정은을 안으로 이끌었다.“들어가자, 들어가자. 두 분이서 얘기 좀 나누시게.”...“아주머니, 교수님이랑 재석 씨 아버지... 두 분 무슨 사이예요?”정은이 조심스레 물었다.박애영 아주머니는 무겁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다 지난 일이야.”정은은 순간 말이 막혔다.“재석 씨도 알아요?”“알지.”“혹시 자세히 들려주실 수 있어요? 교수님한테선 한 번도 그런 얘기 들은 적 없어서...”박애영은 채소를 다듬으며 낮게 말했다.“나도 다 아는 건 아니야. 젊었을 때 둘이 한때는 함께였는데, 어느 순간 이유도 모른 채 헤어졌어.”갈라진 뒤로 둘은 각자의 길을 갔다.조기봉은 예정된 대로 결혼해, 자식을 셋 두었고, 오미선은 평생 학문에만 몰두하여, 세상에 남긴 건 연구 성과뿐이었다....20분쯤 지난 후, 밖에서 오미선의 목소리가 들렸다.“정은아.”“네, 나가요!”정은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달려나갔다.“교수님, 부르셨어요?”오미선은 부드럽게 웃었다.“손님, 문 앞까지 배웅 좀 해드려.”조기봉은 무언가 말을 꺼낼 듯하다 멈췄고, 정은은 몸을 비켜 길을 터주며 말했다.“제가 모실게요.”“그래.”둘은 정원을 지나 문 앞까지 걸었다.그때, 조기봉이 갑자기 물었다.“정은아, 오 교수가 연구팀이랑 호주 간다던데, 너는 그거 찬성이야?”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저보다 교수님을 더 잘 아시잖아요. 교수님은 한 번 마음먹은 일엔, 쉽게 흔들리는 분이 아니에요.”조기봉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나는... 그저 그 사람 몸이 걱정돼서 그래. 평생 연구 하나만 보고 달려왔는데, 이제 그 나이에 또 그 위험한 데를 간다고... 내가, 내가 정말 오 교수처럼 고집 센 사람은 처
저녁상을 물리자 재석은 곧장 일어났다.강서원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이 녀석, 이대로 그냥 가게? 잠깐 앉았다 바로 가는 거야?”조기봉은 묵묵히 앉아있었다.“그리고, 당신은 왜 또 말이 없어요? 아들에게 뭐라고 말 좀 해보라고요! 응?”강서원이 팔꿈치로 조기봉을 쿡 찔렀다. 그제야 조기봉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뭐라고? 나 방금 못 들었는데...”강서원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진짜, 하나같이 사람 미치게 하네!’...밤이 깊고, 달빛이 조용히 내려앉은다.안방은 숨죽인 듯 고요했고, 강서원은 어느새 깊게 잠들어 있었다.그런데 어둠 속에서 조기봉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발소리 없이 발코니로 나간 그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손끝이 미묘하게 떨렸다.몇 년, 아니 수십 년 만에 처음 눌러보는 번호였다.신호음이 두 번 울렸을 때쯤,‘아, 지금 새벽인데... 자고 있겠지.’조기봉은 순간적으로 끊을까 했다.그런데...[여보세요? 네, 누구세요?]목구멍이 뻣뻣하게 굳은 듯했다.조기봉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야.”...“메이크업이요?”전화를 받은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저쪽에서 애영 아주머니가 말했다.[응, 교수님께서 그러시더라고. 메이크업 좀 하고 싶다고... 혹시 와줄 수 있겠니?]“네, 당연히요! 메이크업 박스 챙겨서 갈게요. 음... 한 30분쯤 걸릴 것 같아요.”[그래, 그래! 내가 교수님께 전할게.]...정은이 도착했을 땐, 오미선 교수는 미리 마당에 나와 있었다.짙은 쪽빛 전통풍 원피스를 입고, 은빛 구름 무늬가 소매와 깃에 수놓아져 있었다.작고 가지런한 옥색 단추가 줄지어 있고, 하얗게 센 머리는 곱게 틀어 나무 비녀로 고정해 두었다.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은, 마치 고요하면서도 우아한 그림 같았다.“정은아, 고생스럽게 이 밤중에 불러서 미안하다.”정은은 씩 웃었다.“교수님, 또 그렇게 거리두시면 저 진짜 섭섭해요?”“알았어, 알았어. 거리 안 둘게.
정은의 눈가가 붉어지고, 콧끝이 찡했다.“가고 싶으면 가세요... 근데 무슨 죽네 사네 그런 말은 하지 마요, 에이! 퉤퉤퉤! 얼른 퉤퉤퉤! 교수님은 무조건 백살까지 사셔야 해요!”“그래, 그래.”오미선은 웃음을 터뜨렸다.“나도 노력할게.”“그러셔야죠.”...밤이 되어, 정은은 이 얘기를 재석에게 전했다.남자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자기야, 왜 하나도 안 놀라요? 나만 이렇게 충격 받은 거예요?”“내 기억이 맞다면, 그 특별 조사팀은 몇 년 전부터 준비 중이었어. 오 교수님 성격에, 그땐 접어뒀어도 언젠간 다시 꺼낼 거라고 예상했지.”정은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왜, 걱정돼?”재석이 물었다.“응... 그 나이에 이제 좀 쉬셔도 될 텐데, 왜 굳이...”그러자 재석은 살짝 웃으며 정은 등을 다독였다.“너한텐 현명하지 않은 선택으로 보여도, 오 교수님한텐 그게 자기 삶을 사는 방식이겠지. 평탄한 길은 교수님 스타일이 아니잖아. 늘 좁은 길을 찾아가는 사람이니까.”...다음 날, 재석은 원래 살던 아파트로 가지 않고 본가로 향했다.“아이고! 재석 도련님 오셨네요...”가사도우미가 반갑게 맞았다.소리를 들은 강서원이 2층에서 후다닥 내려왔다.“재석이? 웬일이야? 잠깐 기다려봐, 부엌에 너 좋아하는 반찬 몇 개 더 올리라고 할게. 오늘은 집에서 저녁 먹고 가.”“네, 좋아요.”재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강서원은 기분 좋게 부엌으로 향했다.재석은 가사도우미에게 물었다.“아버지 어디 계세요?”“회장님은 서재에 계셔.”재석은 서재 문 앞에서 잠깐 멈춰 섰다가, 손을 들어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들어오게.”“아버지.”문을 열고 들어서자, 조기봉은 살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웬일이냐, 네가 다 오고.”“왜요, 오면 안 돼요?”재석이 웃었다.“그럴 리가 있냐. 잘됐다, 이리 와서 이것 좀 봐라. 방금 쓴 글씨다, 어때? 감상평 한마디 해봐라.”재석은 다가가 글씨를 내려다보고, 짧게 한마디.“괜찮네요
오미선 교수가 웃음을 터뜨렸다.“이젠 나한테 잔소리까지 하네?”정은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당당했다.“맞아요, 잔소리할 거예요! 제가 잔소리해도 안 들으시잖아요.”“참나, 이 녀석...”오미선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지만, 그 얼굴엔 한없이 부드러운 기색이 맴돌았다.“그래도, 난 갈 거야.”“교수님...”“정은아, 일단 내 말 좀 들어봐.”정은은 꾹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네, 말씀하세요.”“나는 평생 연구 하나에만 매달리며 살아왔어.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고, 결국 혼자야. 근데 이건 내가 선택한 거니까. 좀 아쉽긴 해도, 후회는 안 해.”“사람이 다 가질 순 없다는 걸, 나는 평생 걸려서 깨달았거든. 5년 전, 처음 그 바이러스가 터졌을 때 이미 해외로 나가서 데이터 모을 계획이었어. 위에서도 허락했고, 관련 전문가들과 특별 연구팀까지 꾸렸었지.”정은은 놀란 눈으로 물었다.“그렇게 일찍 준비하신 거예요?”“그렇지.”“근데... 왜 안 가신 거예요?”오미선은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었다.정은은 숨을 멈췄다.“저 때문이에요?”순간 머릿속이 번쩍였다.그리고 시간을 거꾸로 계산해 보니, 퍼즐이 맞아떨어졌다.“제가 교수님 연구실에 들어온 해... 그때죠?”“너 같은 학생은, 내가 정말 오래 기다렸던 학생이었거든. 겨우, 정말 겨우 제대로 된 길로 들어섰는데, 내가 그때 너 버리고 가버리면 안 되겠다 싶더라. 적어도 몇 년은 옆에서 붙어 있어야 마음 놓을 수 있을 것 같았어.”오미선은 그때 리더였다. 리더가 빠지자 전담 팀 전체가 멈출 수밖에 없었다.“근데 이제는 됐어.”오미선의 눈빛이 달라졌다.“너 이젠 혼자서도 잘하잖아. 서준이도, 민지도 잘 이끌고 있고. 그래서 마음이 놓여. 나에게는 지금까지 기다려준 사람들이 있어. 그 사람들한테도, 그리고 내 자신한테도, 이제는 내 역할을 다해야 할 때야.”그 말을 마친 오미선은 웃으며 말했다.“가족이 없으면, 학문에 충실하면 되지. 아내, 엄마는 못 되더라도,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