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 마실래.” 수민은 잔을 내려놓고 일어났다.술을 많이 마시면 문제가 생기기 쉬웠는데, 특히 지금 집에 남자가 한 명 더 있었다.‘이 정도의 분수는 그래도 잘 알고 있지.’동건은 멈칫했다.“아직 다 마시지 않았는데, 왜 벌써 일어서는 거야?”“진짜 우리 집을 술집으로 취급한 거야? 여기서 계속 마시고 싶어?”“이 좋은 술을 다 마시지 않으면 너무 아깝잖아?”“하나도 안 아까워. 남은 건 내일 나 혼자 마실 수 있으니까.”동건은 말을 하지 않았다.“시간도 늦었으니 얼른 가.”수민은 벽에 걸린 벽시계를 가리켰다.“아니, 너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내가 뭘?”“필요할 때는 사람한테 달라붙고, 필요하지 않을 때는 사람을 쫓아내다니. 이 세상에 너 같은 여자가 어딨어?”“아니면? 여기서 자게 하라고?”“남자친구가 여자친구 집에서 밤을 보내는 건 정상 아니야? 우리는 비록 가짜로 사귀는 거지만, 그래도 척을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어?”“어이가 없네! 누가 그딴 걸 신경 쓴다는 거야?”말이 막 떨어지자 동건의 핸드폰이 울렸다. 톡 영상전화였다.그는 확인하더니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여기 있네, 신경 쓰는 사람!”수민이 미처 반응하지 못할 때, 동건은 이미 수신버튼을 눌렀다.“네, 어머니.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맞은편의 송보미가 물었다.[너 지금 어디야? 네 별장 같지가 않은데?]동건은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수민이 집이요.”[정말이니?]송보미는 깜짝 놀랐다.[너 거짓말하지 마...]“제가 그런 사람이에요? 수민이 불러올게요. 수민아, 우리 어머니 전화야...”수민은 즉시 미소를 지으며 동건의 곁에 앉았다.“어머님, 안녕하세요.”[그래! 이 자식이 정말 너와 같이 있을 줄은 몰랐네. 이제 쉴 건가?]“네.”[그럼 꼭 머리 말리고 자. 너무 오래 싸고 있으면 좋지 않으니까.]“네, 어머님. 바로 말리러 갈게요.”[동건이 시켜.]“네.”[이 팔찌를 끼고 있으니 정말 예쁘구나. 정말 잘 샀어
동건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자.” 그는 드라이를 껐다.수민은 머리카락을 만져 보았는데, 건조하지 않고 아주 매끄러웠다.“어때?”수민은 처음으로 동건의 실력을 인정했다.“헤어샵 하나 차려. 난 네 단골손님이 될 테니까.”‘이 여자 정말 어이가 없네...’그녀는 하품을 하며 곧장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뒤로 누워 이불을 꼭 껴안았다.“나 잘 거니까 불 좀 꺼줘. 문도 꼭 닫고. 그럼 안녕!”‘내가 네 종이냐?!’속으로는 투덜댔지만 동건은 그래도 시킨대로 했다.불을 끈 다음 그는 또 가볍게 문을 닫았다.술을 좀 마셨기에, 살짝 취한 상태로 자니 정말 너무 편했다. 그렇게 수민은 곧 잠이 들었다.동건은 나간 후 거실에 놓인 다 마시지 못한 와인을 보았다. 잠시 생각하다 그는 잔을 들어 술 한 잔을 따랐다.그리고 와인 병이 다 비워질 때까지 한 잔 한 잔 마셨다.그는 머리가 어지러웠고, 술에 취해 눈이 흐리멍덩했으며 온몸은 날아갈 정도로 가벼웠다.하지만 여전히 의식이 있었다.‘술기운이 밀려오고 있군.’술이 좋아서 이런 느낌도 아주 신기했다.그는 아예 소파에 누워서 좀 쉬었다 떠나려 했다.그러나 바로 잠이 들 줄이야.밤중에 목이 말라서 일어난 수민은 침대에서 내려왔다.침실 문을 열자, 거실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살펴보더니, 자신이 불 끄는 것을 잊어버린 줄 알고 스위치를 눌렀다.물을 마시고 소파를 지나갈 때, 누군가 갑자기 수민의 손목을 잡았다.수민은 소름이 돋더니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바로 그 검은 그림자를 향해 공격했다.그러나 따뜻한 손이 수민의 손을 꽉 잡았다.그녀는 지금 통제를 당한 셈이었다.“고동...”‘앗!’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수민은 동건에게 끌려 앞으로 넘어졌다.그렇게 그녀는 결국 술기운으로 가득 찬 품에 안겼고, 단단하고 따뜻한 가슴에 떨어졌다.“이게 뭐하는 짓이야?!” 수민은 약간 화가 났다.그러나 동건의 손가락은 그녀의 머리카락
이른 아침, 햇빛이 구름을 뚫고 대지에 쏟아졌다.거실 소파에서 침실 침대까지, 벗겨진 옷들이 바닥에 쫙 깔렸다.대부분은 남자의 옷이었고, 여자의 옷은 잠옷 하나밖에 없었다.동건은 눈을 천천히 떴다. 깨어난 순간, 그는 어젯밤의 뜨거운 장면을 떠올렸고, 입가가 절로 올라갔다.옆에서 깊이 잠든 여인을 바라보니, 동건은 자신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부드러움과 온정을 드러냈다.수민은 아직도 자고 있었는데, 두 눈을 꼭 감으며 호흡은 평온했다.동건의 시선은 여자의 예쁜 이목구비에서 목으로 옮겨졌다. 하얀 피부에는 어젯밤에 그가 남긴 흔적으로 가득했다.동건은 경험이 많은 남자인 데다가, 이성의 몸에 집착할 나이가 아니었지만, 어젯밤 그는 처음 고기를 먹은 짐승처럼 피곤한 줄도 모르고 계속 힘을 썼다.수민이 뺨을 한 대 때리고서야 동건은 비로소 멈추었다.정말 아팠지만 그 느낌도 정말 짜릿하고 즐거웠다.이렇게 생각하니 남자는 더욱 환하게 웃었다.여자의 미간에 키스를 한 다음, 그는 일어나 살금살금 방을 나갔다.물론 동건은 수민이 계속 쉬도록 가볍게 문을 닫는 것을 잊지 않았다.주방에서, 동건은 몸을 돌려 라면 두 그릇을 탁자 위에 놓으려 했다, 이때 수민은 실크 잠옷치마를 입고 문을 기댄 채로 서 있었다.언제 왔는지, 거기에 얼마나 서 있었는지 모른다.눈을 마주치자, 동건은 어색해했지만 곧 애틋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일찍도 일어났네? 어젯밤에 내가 힘을 좀 더 썼어야 했나.”그러나 수민은 웃지 않고 시선을 그의 손에 떨어뜨렸다.라면 두 그릇 위에 계란 프라이가 하나씩 있었다.계란 프라이는 그리 맛있어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약간 탄 것 같았다.동건은 가볍게 기침했다.“한 바퀴 찾았지만 먹을 수 있는 게 없어서 라면 좀 끓였어. 그러니까 그냥 먹어...”말하면서 수민을 지나 그릇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수민은 몸을 돌렸다. 라면을 보는 눈빛이든 동건을 바라보는 눈빛이든 무척 복잡했다.“이리 와, 얼른 앉아서 먹어. 왜 날
동건은 미소가 굳어졌다.“그게 무슨 뜻이야?”옷 들고 나가는 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앞으로 여기에 오지 말라니, 그건 또 무슨 뜻인가?“말 그대로야. 내가 전에 말했었지, 협력 대상과 얽매이지 않을 거라고. 어젯밤에 우린 이미 관계를 가졌어,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사실이니 유일한 해결책은 바로 협력을 그만두는 거야.”동건은 똑바로 앉으며 어둡고 무서운 눈빛으로 수민을 바라보았다.“난 어젯밤에 취하지 않았어. 너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맞지?”“응.”관계를 맺을 때, 두 사람은 모두 정신이 멀쩡했다. 그래서 서로를 남이라 착각한 상황은 존재하지 않았다.“허...”동건은 헛웃음을 지었다.“나랑 자자마자 바로 책임을 떠넘기겠다 이거야? 나 지금 옷도 입지 않았는데?”수민은 입가를 실룩거렸다.“그건 너 자신이 옷을 입지 않은 거잖아? 왜 내 탓을 하는 거야? 그리고 내가 무슨 책임을 떠넘겼다는 건데?”“지금 네가 하는 말이 그렇잖아!” 남자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조수민, 너 지금 뭐 같은지 알아?”“뭐?”“순진한 여자를 침대로 꼬신 다음 바로 차버린 남자!”수민은 침묵하다가 불쑥 물었다.“네가 순진한 여자야?”동건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네가 피해자인 것처럼 말하지 마. 어젯밤의 일은 우리가 원해서 일어난 상황이잖아, 너랑 나랑 모두 성인인데, 무슨 순진한 척을 하고 있는 거니? 그동안 네가 잤던 여자들은 적게 말해도 50명은 되겠지.”“그럼 넌 너와 잔 모든 여자들에게 소리를 치면서 자신을 책임지라고 떠들어댈 거야? 그렇지 않다면 나도 너에게 책임을 질 필요가 없잖아? 왜 자신이 할 수 없는 일로 남을 강요하는 건데?”동건은 이처럼 방탕했던 자신을 싫어한 적이 없었다. 이 순간, 예전의 기억들이 밀려오면서 그는 후회에 잠겼다.“쳇, 누가 책임지라고 했어?! 나한테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닌데, 네가 책임질 필요가 있을까?”수민은 한숨을 돌렸다.“그럼 됐어.”동건은 무거운 짐을 벗은 듯한 수민의 모습을 보며 묵묵히
남자가 떠난 후, 수민은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식탁 위의 그릇과 젓가락을 바라보았다.‘치우고 가라 할 걸 그랬어...’“여보세요, 청소부 하나 보내줘요. 두 시간 정도면 될 것 같아요. 맞아요, 집안 구석구석 모두 깨끗이 청소해야 되거든요. 특히 소파...”동건은 문을 박차고 나간 후, 바로 차를 몰고 별장으로 돌아갔다.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으며 신호등까지 무시했다.집에 들어서자, 그는 바로 옷을 벗고 샤워를 하며 어제 남긴 냄새를 씻어내려 했다.그러나 이상하게도, 씻고 나오니 동건은 여전히 수민의 독특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젠장.”그는 화가 나서 소파에 걷어찼다.그러나 머릿속에서 어젯밤 두 사람이 먼저 소파에서 뒹굴다 침실로 들어간 화면이 떠올랐다.얽히고설키며 미친 듯이 키스를 하는 화면.동건은 정말 몰랐다. 왜 어젯밤까지만 해도 그렇게 열정적으로 도발하던 여자가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자마자 차가운 모습으로 변했는지를. 심지어 무정하게 다시는 오지 말라는 말까지 했다.문제는 수민이 동건이 끓인 라면을 먹었단 것이다.‘내가 이 20여 년 동안 처음으로 주방에 들어가 한 여자를 위해 밥을 해 주었는데. 비록 라면이지만 그래도 정성을 다해서 만들었단 말이야. 그러나 그 여자는 다 먹은 다음 바로 날 차버리다니!’“미친!”동건은 또다시 소파를 걷어찼다. 그러나 그 결과...“아! 아파 죽겠네, 정말 아파 죽겠어! 너까지 나와 맞서는 거야?! 그래, 널 발로 찼다, 어쩔래! 어쩔 거냐고!”소파는 묵묵히 모든 것을 감당했다.“그래, 협력을 중지하겠다 이거지? 그럼 중지해! 나도 네가 싫어!’여기까지 생각한 동건은 핸드폰을 꺼내 수민의 모든 연락방식을 차단했다.그러고는 핸드폰을 소파에 던지며 침대에 가서 누우려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초인종이 울렸다.딩동.동건은 잔뜩 긴장을 하더니 숨소리를 죽였다.‘흥! 쫓아와서 사과하면 내가 용서해줄 것 같아? 나도 성질이 있다고! 그래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가와서 사과를 한 다음 나에게 술을
“아니... 어머니, 저는 어머니 아들이잖아요! 조수민은 남이고요. 그런데 제가 욕을 좀 했다고 제 다리를 부러뜨리시겠다뇨?!”“수민이는 내가 인정한 며느리이니까 그 누구도 우리 수민이를 괴롭힐 수 없어. 너도 마찬가지야.”동건은 코가 찡해졌다.‘며느리...’그는 등을 돌리고 팔짱을 안으며 가볍게 중얼거렸다.“그 여자는 안목이 높아서 이런 건 눈에도 안 찰 거예요...”‘어머니 아들도 마음에 안 들고요!’“하긴.” 송보미는 고개를 끄덕였다.“수민이는 안목이 확실히 높지. 하지만 그 아이는 더 좋은 것을 가질 자격이 있어! 넌 누구나 다 너 같은 줄 알아? 하루 종일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 채 매일 술집에 다니기나 하고...”동건은 고개를 홱 돌리더니 화가 나서 와와 소리를 질렀다.“저는 어머니의 아들이라고요! 친아들!”“알아, 이렇게 소리를 지르며 내 정곡을 찌를 필요는 없어.”“네?”“이건 너한테 맡길게. 시간 나면 수민이에게 가져다줘. 가능한 한 빨리, 들었어?”동건은 못 들은 척했다.송보미는 직접 그의 귀를 잡으며 말했다.“들었냐고?”“아파요, 아프다고요! 알았어요!”“참, 그리고, 다음 주말에 내가 티파티에 참가할 예정이니까, 수민이 데리고 와. 마침 나도 수민이를 내 그 친구들에게 소개해줘야지!”“그,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동건은 시선을 돌렸다. ‘이미 협력을 중지한 데다가 연락처까지 삭제했으니 어떻게 데려가겠어? 차라리 날 죽여!’송보미는 안색이 어두워졌다.“왜 필요가 없어? 넌 그냥 내가 시킨대로 해. 무슨 쓸데없는 말이 그렇게 많아? 됐어, 나 친구랑 쇼핑해야 하니까 먼저 갈게. 넌 이따가 수민이한테 전화하는 거 잊지 말고.”“네!”송보미는 그제야 흐뭇하게 웃으며 떠났다.이쪽의 동건은 골치가 아파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수민은 정상적으로 출퇴근하며 편하게 지내고 있었다.예전과 다름없이 가끔 술집에 가거나, 테니스를 쳤다.그러나 그녀도 나름 고민이 있었다.[수민아, 너도 동건이랑 사귄 지 꽤
“왜 그래?” 정은이 입을 열었다.두 사람은 고개를 번쩍 들더니 마치 억울함을 당한 아이가 마침내 부모님을 만난 것 같았다.민지는 바로 달려왔고, 말을 하기도 전에 눈시울이 빨개졌다.서준은 그녀의 뒤를 따랐는데, 팽팽한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쥐고 있었다.정은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그러나 그리 당황하지 않았다.“무슨 일이야? 왜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앉아 있어?”“정은 언니...”민지는 억지로 눈물을 참았다. 눈물이 이미 눈가에서 맴돌고 있었지만 흘러내리지 못하게 했다.“이제 실험실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못 들어간다니?” 정은은 깜짝 놀랐다.“어제 학교의 검사팀과 소방대가 갑자기 실험실에 찾아와서 검사하겠다고 했는데...”소방점검을 정상적인 검사이기 때문에 두 사람은 별다른 생각하지 않고 문을 열고 협조했다.그러나 이 사람들은 들어온 후에 이리저리 만져보고 몇 바퀴 돌아보더니 그들에게 청천벽력의 소식을 알려주었다.“소방 점검이 불합격이니 일주일 내로 실험실에서 나가세요!”말을 마치자, 그들은 두 사람에게 설명과 반응할 시간을 주지 않고 직접 문에 붉은 딱지를 붙였다.민지는 계속 말했다.“그때 저와 서준이는 모두 어리둥절해졌어요. 지난주에 맞은편 실험실에서도 소방점검을 받았지만, 그 사람들은 들어와서 한 바퀴 둘러본 다음 바로 떠났거든요. 그런데 저희가 검사를 받을 때 불합격이라니? 심지어 실험실에서 나가야 한다잖아요!”방금 정리된 실험실에 새로 산 CPRT, 그들은 실험실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나가라니?정은은 여전히 냉정을 유지했다.“그럼 너희들 왜 문 앞에 앉아 있는 거야? 일주일안으로 나가면 되는 거잖아? 그럼 얼른 들어가지 않고 뭐 하고 있어?”서준이 대답했다.“이번에는 시 소방대에서 점검을 진행했는데, 백 부총장님은 학교에서도 검사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실험실 열쇠를 가져가셨어요.”그러나 정은에게 다른 열쇠가 하나 있었다.그녀는 문을 열었다. “일단 들어가서 다시 이야기
민지가 말했다.“당시 우리는 모두 있었어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기기도 잠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동으로 꺼졌단 말이에요. 이따가 또 써야 하는데, 누가 전원을 끊어버리겠어요?”정은은 이미 대충 그 이유를 추측해냈지만 지금은 증거가 없었다.“가자, 맞은편 실험실로.”민지는 영문을 몰랐다.“거긴 왜요? 그것은 다른 전문적인 실험실인 것 같은데. 저희와는 상관이 없어요...”서준도 수상함을 예민하게 감지하며 얼른 따라갔다.“가라면 그냥 가, 넌 왜 문제가 그렇게 많아?”‘이 자식이, 이젠 간이 부었구나!’세 사람이 맞은편 실험실에 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벽 모퉁이에 이미 소방 기자재가 갖추어져 있었다.“아니...” 민지는 놀라서 아연실색했다.“지난달까지만 해도 없었는데!”세 사람은 또 다른 몇 개의 실험실을 확인했다. 모두 예외 없이 부족했던 기자재는 이미 보충되었고, 전에 없었던 것도 지금은 전부 갖추게 되었다.민지는 오싹하기만 했다.“이, 이건 우리를 겨냥한 것 같은데?”전 실험실은 모두 소방설비를 갖추었지만 오직 그들의 실험실만 배제되었다. 그전에 민지는 줄곧 우연이라고 여겼다.우연히 그들이 당첨되었고, 또 우연히 붙잡혔다고. 누군가가 일부러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정은은 냉소를 지으며 직접 두 사람을 데리고 부총장 사무실로 갔다.백두강은 한눈에 그들이 오미선이 올해 새로 모집한 대학원생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특히 정은은 올해 신입생 중 처음으로 학술지 에 논문을 발표한 천재로서, 그날 정기회의에서 만장이 들끓는 장면은 지금도 눈앞에 선했다.“정은 학생, 무슨 일로 날 찾아온 거지?”얼마 전 현빈과 재석의 연이은 타격을 떠올리며 그는 바로 웃음을 지었다.“부학장님, 저희 실험실이 강제로 시정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백두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지?”“문제라면 정말 많죠. 우선 왜 다른 실험실의 소방 기자재가 완전한데, 유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