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은 두 사람이 함께 씻었고, 주방도 두 사람이 함께 치웠다.마지막으로 함께 외출을 하며 쓰레기를 버렸다.정은은 패딩을 입고 쓰레기를 들고 나갔다.재석도 집에 가서 두 포대의 쓰레기를 들고 나왔다.“선배님, 쓰레기를 안 버린 지 얼마나 됐어요?”“이주 정도?”“선배님이 이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다행히도 모두 포장함, 비닐 봉지들이었고 남은 음식찌꺼기나 과일껍질 같은 것은 없었다.“가자.”아래층으로 내려갈 때, 두 사람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이미 쓰레기를 버리고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그렇게 네 사람이 딱 마주쳤다.“조 교수랑 정은이 너도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거야?”“네.” 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정은을 바라보았다.“오늘 또 무슨 맛있는 걸 한 거야? 아래층에서도 아주 향기가 죽여주던데!”“버섯전골이요.”“어머! 조 교수가 어제 받은 그 버섯 맞지?”어제 재석이 택배를 받을 때, 마침 채소를 사서 돌아오는 할머니를 만났는데, 그녀에게 버섯을 보존하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할머니는 더욱 환하게 웃었다.“두 사람 하나는 식재료를 제공하고, 다른 하나는 음식을 책임지니 이웃이 된 것도 다 운명이지! 이렇게 친해졌으니 차라리 함께 하는 게 더 좋지 않겠어!”옛날 사람들은 시원시원하고 대담했다.정은은 처음에는 반응하지 못하다가, 재석의 기침소리를 듣고서야 갑자기 정신을 차리며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아니에요, 지금 오해를...”할머니는 즉시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끊었다.“설명할 필요 없어, 그럴 필요 없어. 너희들이 좋으면 되지! 가자 영감, 집에 가야지!”“그래...” 할아버지는 웃으며 대답했다.“당신도 참, 늘 허튼소리를 하기 좋아한다니깐. 정은이 얼굴이 다 빨개졌잖아.”“내가 무슨 허튼소리를 했다는 거야? 그 당시에 우리도 하나는 위층, 하나는 아래층에서 살다가 알게 되었잖아? 그때 사회가 이렇게 개방되지 않아서, 우리는 2년
정은은 줄곧 재석이 향수를 쓰는지 안 쓰는지가 궁금했다.그러나 이 문제는 좀 예민해서 잠시 마음속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정은은 어색하게 웃었다.“고마워요, 선배님. 외출할 때 목도리 챙기는 것을 잊어버렸어요...”사실 잊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귀찮았던 것이다.쓰레기를 버리고 바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이 정도면 목도리를 안 둘러도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다.재석은 정말 정은의 속마음을 몰랐을까?다만 간파하지 않았을 뿐, 묵묵히 자신의 목도리를 그녀에게 주었다.“방금 임 교수님과 장 교수님이 왜 아이를 가지지 않으셨냐고 물었지? 원하지 않은 게 아니라 임 교수님의 몸이 좋지 않아서 그래.”그 시대의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 사형을 선고받은 범인과 다름없었다.장 교수의 집안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두 사람이 이혼하도록 강요했다.임 교수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더 이상 매달리고 싶지 않아 스스로 악인이 되려고 이혼을 제기했다.그러나 장 교수는 한사코 동의하지 않았다.“후에 장 교수님이 그 당시의 아내를 되찾기 위해서 집안과 관계를 끊고 임 교수님을 찾아가셨다고 들었어.”“아무튼 20년 동안 집안사람들과 왕래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가족들도 서서히 이 현실을 받아들였고, 다시 연락하기 시작한 거야. 하지만 사이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야.”임 교수는 본래 고아였다. 장 교수도 그녀를 위해 자신을 고아로 만들었다.이때부터 그들의 인생은 서로뿐이었다.정은은 이 말을 듣고 눈시울을 붉혔다.“그 시절은 정말 로맨틱한 것 같아요. 비록 발달하진 않지만, 일생동안 딱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으니까요.”그녀는 앞을 바라보았다. 재석은 그런 정은을 바라보았다.여자는 풍경을 보고 있었고, 동시에 다른 사람의 풍경으로 되기도 했다.정은은 한숨을 내쉬었다. 숨은 흰 안개로 되어 마치 응결된 이슬과 같았다.그녀는 중얼거렸다.“올해 눈이 올지 모르겠네...”작년은 눈송이만 조금 날렸는데, 땅에 떨어지자마자 바로 물이 되어 전혀 쌓이지 않았다.재작
정은은 가장 빠른 속도로 정리한 다음, 패딩을 입고 목도리를 두르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래층에 도착했을 때, 수많은 아이들이 이미 출동하여 각자 도구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올 겨울의 첫눈이라 사람들은 유난히 기뻤다.사람들 외에, 재석은 눈이 쌓인 나무 밑에 서서 웃음을 머금으며 정은을 보고 있었다.정은은 눈앞이 환해지더니 바로 달려갔다.가까이 가서야 정은은 재석의 발 옆에 둥근 통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안에는 뜻밖에도 눈집게, 삽, 플라스틱 장난감 등이 있었다.그리고 눈집게는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가지 모양이 있었다.“이, 이건...”정은은 침을 삼켰다.“너 놀라고.”“아, 선배님,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그러나 2분 후...정은은 흥분해하며 재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선배님! 이 오리 좀 봐요! 엄청 잘 만들었죠?!”“그리고 이 아기 공룡도 너무 귀여워요!”“선배님, 이 작은 삽으로 저쪽에서 깨끗한 눈 좀 퍼 주세요. 새하얀 거요. 흙 조금이라도 있으면 안 돼요.”“선배님...”“선배님!”정은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지나가는 이웃들은 의아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어쩔 수 없었다. 정은이 자란 곳에는 겨울에 거의 눈이 내리지 않았다.오직 그녀 만이 이 큰 눈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고 있었다.정은은 아주 즐겁게 놀았다.재석은 정은이 노는 것을 지켜보며, 또 가끔 그녀의 지휘대로 움직였고, 심지어 꼬리처럼 바쁘게 정은을 따라다녔다. 그도 꽤 즐거운 모양이었다....진욱은 지금 실험실에서 머리를 잡고 있었다.“지금이 몇 시인데, 조 교수는 왜 아직도 안 온 거야? 어제 두 조의 데이터에 모두 문제가 생겨서 조 교수가 수정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태민은 은근히 놀랐다.“전 교수님, 조 교수님 기다리고 계셨어요?”“맞아, 왜 그래?”“그... 조 교수님 오늘 휴가 내셨어요.”“휴가?! 언제?! 난 왜 몰랐지?!”“교수님은 어젯밤 한밤중에 이메일로 통지를 보내셨어요. 그리고... 자신이 없는 동안
“선배님, 선배님, 그렇게 빨리 가지 마요...”정은은 재빨리 쫓아갔다.가까스로 따라잡자, 재석은 몸을 돌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은을 보았다.“그렇게 재밌어?”정은은 즉시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네, 재미있어요!”‘정말 너무 재밌지!’재석은 한숨을 쉬었다.“그런데 네 장갑과 목도리가 다 젖었잖아.”“괜찮아요!” 정은은 바로 입을 열었다.“15분 전에 너도 그렇게 말했는데. 또 조금만 더 놀면 집에 가겠다고 했어.”‘어?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왜, 왜 기억이 안 나지??’정은은 멍해졌다.재석이 말했다.“가자, 놀고 싶어도 돌아가서 장갑과 목도리, 그리고 신발 갈아입고 다시 놀아.”고개를 숙이자, 정은은 그제야 자신의 부츠가 이미 젖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 자신조차도 느끼지 못했는데, 재석이 오히려 발견했다.“그래요.” 정은은 재석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지만, 그 틈을 타서 재석의 손에서 통을 가져왔다. 그 안에는 그녀의 눈놀이 도구가 들어 있었다.“선배님, 이건 내가 들면 돼요.”재석은 할말을 잃었다.정은은 애꿎은 표정으로 입을 뗐다.“몰래 놀고 싶은 게 아니에요.”말을 마치자, 정은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재석은 더욱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녀가 이따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아는 듯, 정은이 집에 돌아와 옷을 싹 바꾼 뒤, 재석은 다시 그녀의 집 문을 두드렸다.“선배님?”“성설궁에 가서 눈 구경 할래?”“지금이요?”“음.”“그런데 오늘 입장권이 없는 것 같은데...”“나와 같이 가면, 입장권은 필요 없어.”“그럼 당연히 가야죠!”두 사람은 바로 출발했다.재석은 정은을 데리고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을 피해 다른 한 작은 문으로 들어갔다.들어가면 바로 궁전의 뒷마당이었다.앞으로 돌아가면 앞에 우물 하나, 살구꽃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다시 앞문으로 나가면 바로 넓은 광장이었다.다음 순간, 정은은 눈앞의 아름다운 경치에 어안이 벙벙해졌다.‘어쩐지 인터넷에서 그렇게
“인터넷에서 찾아보니까, 실험실은 건축회사의 자질에 대한 요구가 매우 높아서 일반 집을 짓는 것과 달라.”“게다가 실험실이 완공된 이후의 보안 시스템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건설 회사에 있어 아주 어려워.”세 사람은 커피숍에 모였다.정은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자신이 장악한 소식을 다른 두 사람에게 공유했다.민지 앞에는 티라미수 2인분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열심히 먹고 있었고, 동시에 귀를 기울였다.“저희 아버지는 많은 청부업자 아저씨를 알고 있어요. J시 이쪽에 업무가 있는 분들도 있고요. 그러나 어제 제가 물어봤는데, 그들은 집만 지을 줄 알고 실험실을 지을 줄 모른데요.”정은은 한숨을 내쉬었다.“전문적인 일은 그래도 전문적인 사람에게 맡겨야 돼.”서준이 말했다.“그리고 건축회사와 소통하는 디자이너를 따로 청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쌍방의 요구가 잘못 전달되어 최종 효과가 떨어질 수 있어요.”그후 며칠간 세 사람은 모두 쉬지 않았다. 수업을 제외하고, 남은 시간은 기본적으로 밖에서 돌아다녔다.업계에서 괜찮은 건축회사 몇 곳을 자세히 알아보니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디자이너가 실험실 건설을 모르거나 예산이 터무니없이 높았다.“안 되겠어, 너무 힘들어. 좀만 쉬자...”두 건축 회사를 찾아간 민지는 기진맥진했다.서준 쪽도 별 소득이 없었다.정은은 더 비참했다.민지는 콜라 두 병을 마시자, 순식간에 힘이 났다.“이렇게 큰 도시에 실험실을 건설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전 안 믿어요!”“5시에 내가 다른 회사를 예약했는데, 그 회사는 자질이 모두 갖추어졌고, 평판도 꽤 좋아. 일단 먼저 가서 상황 좀 볼게.”정은은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지금 4시 20분이니 택시 타고 가면 딱이었다.그러나 그녀가 택시를 타기도 전에 핸드폰이 울렸다.“여보세요?”[정은아, 바빠? 난 인훈 오빠야.]“오빠?!”할머니 생신 잔치 이후로 두 사람은 다시 연락하지 않았고, 게다가 전에도 통화를 한
정은은 이 말을 듣고 인훈을 위해 기뻐했다.“그래, 그럼 주문할게!”“응!”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은은 결국 채소 두 개에 국 하나만 시켰다.“이게 다야?”“응, 다야.”“안돼, 요리 두 개 더 추가해.”“아니야! 두 사람 그렇게 많이 못 먹어! 오빠, 오늘 돈 좀 쓰려고 결심한 거야?”‘자발적으로 바가지를 쓰다니.’인훈은 웃으며 말했다.“가끔 여동생이 바가지를 씌워도 나쁠 건 없지.”“정말 필요 없어, 낭비하지 마.”“좋아, 네 말 들을게.”인훈은 맥주 두 캔을 주문했다.곧 음식이 올라왔고, 남매는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요즘 학교는 좀 어때? 적응했어? 내 번호는 저장했고? 도움 필요한 게 있으면 직접 전화해.”같은 타지에 있으면서 남매는 당연히 서로를 도와주며 보살펴줘야 했다.“그럭저럭이야. 비록 전에 문제가 좀 생겼지만 지금은 다 해결됐어.”“그럼 됐어, 자, 얼른 밥 먹어...”인훈은 웃으며 말했다.중간에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정은아, 너 먼저 먹어. 난 나가서 전화 좀 받을게.”“좋아.”5분 후, 인훈이 돌아왔고, 다시 맞은편에 앉았다.정은은 단번에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오빠, 오빠도 좀 먹어.”“어! 그래!”인훈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이미 웃음을 지으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리 봐도 억지웃음이었다.정은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오빠, 무슨 일이야?”이 말이 나오자, 키가 1미터 80센티미터 넘는 사나이는 순식간에 눈시울을 붉혔다.“사실 나는 정말 이 사장님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니깐. 분명히 이미 얘기 끝낸 프로젝트에 계약까지 체결해면서 그렇게 많은 시간과 정력을 들였는데, 왜 갑자기 번복을 하는 거지?!”“그 사람들은 계약정신이 뭔지도 모르는 건가? 다른 사람의 노동 성과를 존중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아마도 나 자신의 문제겠지. 잔혹한 경쟁에 적응하지 못했고, 시장 파악도 잘 못했어...”처음에는 울분이 넘쳤지만, 마지막에는 낙담만 느꼈다.“상대가 계
인훈도 대학을 나왔으니, 정상이라면 이런 기본상식을 모를 리가 없었다.특히 계약처럼 중요한 일은 더 그랬다.“요즘 너무 바쁜 데다가, 이건 또 새로운 프로젝트거든. 참고할 만한 계약 템플릿이 없어서 계약을 작성할 때 계약 위반 조항을 함께 넣는 것을 잊어버렸어.”인훈은 상대방에게 당한 후에도 여전히 반응하지 못했다.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오히려 ‘상대방에게 계약정신이 없고, 남의 노동 성과를 존중하지 않는다’였다니. 이것은 매우 바보 같았다. 아니면, 무척 무던했다.아무튼 정은은 가장 먼저 배상금을 얼마 받을 수 있나에 대해 생각했다.“계약서 같은 것도 오빠가 직접 써야 돼?”인훈은 더욱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원래는 아닌데... 전에는 이것들 모두 동업자들이 관리하고 있었어. 난 공사장의 일만 책임졌고. 그러나 이주 전에, 그 사람은 회사에서 나가겠다고 했어...”인훈 이 어수룩한 사람은 만류해도 성과가 없어, 이를 악물고 회사의 가뜩이나 넉넉하지 못한 현금에서 대부분을 뽑아내어 당초에 투입한 돈을 그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경영 상황에 따라 손실을 계산하지 않은 거야?”“어? 손실을 계산해야 돼?”“그렇지 않으면?” 정은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당초에 두 사람 함께 회사를 차렸으니, 돈을 벌면 두 사람 함께 나눠야 하지 않겠어?”“그럼!”“그럼 같은 도리로, 손실이 생기면 두 사람 공동으로 부담해야 하지 않겠어?”현재 회사의 경영 상황이 좋지 않아 손실이 있는 게 뻔했으니, 어떻게 회사를 떠난 후에 자신이 낸 돈을 그대로 돌려주라는 요구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주식을 조금 샀다고 해도, 손해 볼 것은 손해 봐야 했다. 당장 팔아도 여전히 손해를 부담해야 했다.원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았다.“오빠, 그렇다면, 나도 오빠와 같이 일하고 싶어. 어차피 손해를 보지 않을 장사잖아.”정은은 한숨을 내쉬었다.“오빠는 이걸 계산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다만 돈 때문에 그 사람과 사이가 나빠지고 싶지
“그런데 정은아, 이걸 왜 물어보는 거야?”정은은 두 눈에서 빛을 발했다.“마침 나한테 프로젝트가 하나 있는데. 오빠는 어떡해 생각해?!”인훈은 멍해졌다.“무, 무슨 프로젝트?”“스마트 실험실. 하지만 토지 건설까지 함께 해줘야 돼.”그렇다. 정은이 원하는 것은 전통적인 실험실이 아니라 고도로 지능화된 실험실이었다.두 사람은 아주 급하게 밥을 먹었다.인훈은 정은의 수요를 듣고, 지체없이 떠나 회사로 돌아가 기획안을 쓰려 했다.그리고 정은은 그가 간 후, 바로 다른 두 명의 ‘파트너’에게 상황을 설명했다.민지와 서준은 자연히 두 손 들어 찬성했다.현재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었다.그날 저녁, 정은은 집에 돌아와 더욱 상세한 요구를 이메일로 정리하여 인훈에게 보냈다.며칠을 더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이튿날 아침, 인훈에게서 전화가 왔다.[정은아, 아니다, 소 사장님, 이 프로젝트는 내가 맡을게! 지금부터 넌 나의 존귀한 고객이자 하나님이야!]“풉...”정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오빠, 그 정도는 아니야, 왜 그래...”[아니야. 이것도 규정이야! 아무튼 앞으로 만족스럽지 못한 점이 있다면 얼마든지 제기해. 날 오빠라 생각하지 말고, 단지 네 일을 처리해줄 을이라 생각해. 넌 갑이잖아.]정은은 더 크게 웃었다.그러나 인훈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공적인 일은 공정하게 처리하며, 그 어떠한 사적인 감정도 섞지 않았다.“오빠, 왜 예산이 얼만지 물어보지도 않고, 가격에 대해 얘기도 하지 않는 거야? 밑지는 장사면 어떡하려고?”인훈은 너무나도 성실하고 단순했다.인훈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그럴 필요 없어.]“왜?”[우선, 넌 분명히 나로 하여금 손해를 보게 하지 않을 거야. 둘째, 돈을 벌지 않더라도 널 도울 수 있고, 동시에 내 회사를 계속 경영하게 할 수 있다면 그걸로 됐어!]“오빠...”정은은 한숨을 쉬었다.“앞으로 너무 실속 있게 행동하지 마. 쉽게 손해 볼 수 있으니까.”‘오빠는 따지기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