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눈빛은 경악으로 가득 찼다.귓가에 갑자기 정은이 했던 말이 울렸다.“인생에는 항상 기복이 있는 법이지. 사람이라면 다 운이 나쁠 때가 있는 거 아니겠어? 그러나 너희들도 조심해, 앞으로 무슨 일이 들이닥칠지 모르니까.”지예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당황하여 얼른 송지혜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이모, 소정은 정말 실험실을 지었어요, 이제 어떡하죠?! 총장님도 아셨으니 우리가 한 일들이 설마...”너무 놀란 나머지, 지예는 호칭을 바꾸는 것조차 잊었다. “입 닥쳐!” 송지혜는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우리 뭘 했는데? 우리는 아무것도 안 했어! 말 조심해!”재민과 진일만이 이 건물을 진지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눈빛은 더욱 번쩍였다.“진일 형, 5층으로 된 실험실은 얼마나 넓을까요?”진일은 가슴을 안으며 감탄을 하고 있을 뿐, 그리 놀라지 않았다.‘역시 정은이 답네. 한다면 최선을 다하는 이런 정신.’“이따가 들어가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재민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그래도 돼요? 우리는 초청장을 받지 못했잖아요...”이곳에 올 수 있었던 것도 단지 백두강의 초청장 덕분이었다.진일은 웃으며 말했다.“누가 없다고 했어?”재민은 멍해졌다.“그, 그게 무슨 뜻이죠?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겠죠?”진일이 외투 지퍼를 열더니, 주머니에 넣은 빨간 봉투를 드러냈다.“형! 대박이에요!”“쉿, 조용히 해.”재민은 흥분을 억눌렀지만 심장은 쿵쾅쿵쾅 뛰었다.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정은이 준 거예요?”“음.”“두 사람 친해요?”진일은 진지하게 생각했다.“사실 친분이 별로 없어.”“그럼 왜?” 재민은 깜짝 놀랐다.“아마도... 우리더러 구경을 하라고 부른 것 같은데?”바로 이때.“어머, 부학장님 오셨네요, 정말 귀한 손님이시네요!” 오미선은 웃으며 맞이했다.백두강은 마지못해 웃음을 지었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렇게 많은 권위자 앞에서 제가 어찌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안녕하세요, 저희는 서비대의 사진작가와 기자입니다. 현장보도를 해도 될까요?”정은은 오미선과 눈을 마주쳤다.“그럼요.” 정은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그런데 누가 불렀는지 물어봐도 될까요?”“생명과학대학의 백두강 부학장님이요. 이 대학의 학생들이 스스로 실험실을 짓고, 또 총장님을 초청했다며 저희를 일부러 불러 보도하게 했습니다.”“아, 백 부학장님 정말 신경을 써주셨네요.”백두강은 지금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기자가 실험실에 관한 몇 가지 질문을 한 후 갑자기 물었다.“왜 총장님을 보지 못한 거죠?”말이 끝나자마자 송영한과 한중기가 도착했다.“오 교수, 정말 축하해요.” 송영한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웃으며 축하했다.그가 오늘 왜 왔든, 이미 충분히 자신의 예의를 표시했다.한중은 그리 침착하지 않았다.그는 먼저 5층 높이의 작은 건물을 보더니, 또 현장에 있던 하객 라인업에 깜짝 놀랐다.반응을 할 때, 송영한은 이미 웃으며 정은과 이야기하고 있었다.“역시 오 교수의 학생답군. 정말 훌륭한 인재를 두었어. 총장으로서 난 학생들이 끊임없이 성장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해!”“방금 오 교수의 말에 의하면, 이 실험실은 네가 혼자서 계획한 것이라며? 정말 대단한 학생이야.”송영한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정은은 오히려 민지와 서준을 앞으로 끌어당겼다.“총장님, 그 말씀은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실험실은 우리 세 사람이 함께 계획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대단한 게 아니라 저희가 해낸 것입니다.”“하하... 그래, 너희들이 대단하구나!”민지와 서준은 앞에 설 때 어리둥절해졌다. 정은의 동작이 너무 빨라 그들은 전혀 반응하지 못했다.송영한과 한중기가 떠나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러 갔을 때, 민지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정, 정은 언니, 방금 학장님이 저를 칭찬한 거 맞죠?”“응.”“세상에, 꿈 꾸는 것만 같아요.”그것은 송영한, 서비대학교 1인자, 가장 유명한 학장이었
“정은의 팀이 교외에서 스스로 실험실을 지은 이유가, 학교에 있던 실험실이 소방 정돈 시정서를 받았기 때문이라며?”‘소방정돈’이라는 말을 듣자, 백두강은 가슴이 찔렸다.그의 뒤에 있던 송지혜 역시 두피가 저려왔다.진호와 지예, 서정 세 사람은 더욱 벙어리로 변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백두강은 억지로 입을 열었다.“네, 그런 일이 있었어요...”“이 안에 무슨 속사정이 있는 거 아니야?”“이, 이건...”백두강은 눈알을 마구 굴렸다.“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구, 구체적인 상황을 다시 조사하고 확인해야...”“몰라? 넌 생명과학대학의 부학장으로서, 전교에서 유일하게 시정 지시를 받은 실험실에 대해 모른다고? 그 시 소방 쪽은 누가 책임지고 소통을 한 거야?”“시정 방안은 또 누가 확정한 거지? 관련 상황을 제대로 알렸어? 당사자에게 어떻게 설명할 건데? 이건 네가 부학장으로서 잘 이해하고 독촉해서 완성해야 하는 거 아닌가?”송영한이 한마디 할 때마다 백두강은 고개를 푹 숙였다.마지막에 이르러 그는 마치 사죄하는 것 같았다.한중기는 옆에서 구경을 하더니 유유히 입을 열었다.“백 부학장의 이 표현을 보니, 그 안에 다른 속사정이 있는 것 같긴 하네요.”송영한은 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사정이 있는 이상, 보고서를 제출해. 그리고 이번 일은 오 교수에게도 결과를 알려. 오 교수의 학생이 쫓겨났고, 뜻밖에도 스스로 돈을 들여 실험실을 건설해야 했다니.”“모르는 사람이 보면 우리 서비대학교 학생들이 능력이 있다고 칭찬하겠지만, 아는 사람은 전국 최고의 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실험실 한 칸을 제공하는 이런 작은 일도 할 수 없다고 비난을 할 거야!”“생명과학대학은 요 몇 년 동안 국가의 경비, 학교 측 경비를 가지고 학술 성과를 얼마 내지 않았는데, 사고가 오히려 하나둘씩 이어지다니. 그동안 너무 편하게 지낸 것 같아. 어떤 사람들은 뿌리부터 썩기 시작했어.”송영한은 말을 마치고 떠났지만 백두강은 온몸에 식은땀을 흘려 하마터면 허리를
송지혜가 입을 열자, 모두의 주의력을 이끄는데 성공했다.“뭐하는 거야?!” 백두강은 그녀가 못된 짓을 하려는 것을 알아차린 듯 송지혜를 잡아당기려 했다.송지혜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백두강을 보지도 않고 오직 정은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왜 말을 안 해? 대답할 수 없는 거야?!”“그럼 너희들의 이 실험실은 정규 수속이 없고, 불법 건설에 속한다는 거잖아!”정은은 웃음이 나왔고, 민지와 서준도 웃었다.“너, 너희들 왜 웃어?!” 송지혜는 당황했다. 민지가 말했다.“다행히 정은 언니가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미리 예상했어요. 실험실이 완공되면 분명 누군가 질투해서 문제를 제기할 거라고 해서, 저희에게 모든 절차를 철저히 준비하라고 당부했거든요. 송 교수님, 어떤 서류를 확인하고 싶으신가요? 바로 가져다드릴게요.” “ 제7조에 따르면, 3급 또는 4급 실험실, 혹은 3급이나 4급 이동식 실험실을 신축, 개축, 증축하려면 환경영향평가 보고서를 작성하고, 정해진 절차에 따라 국가환경청에 보고해 심사와 승인을 받아야 하지. 너희는 이 절차를 다 밟았어?”송지혜는 미소를 지었다.‘정말 내가 호락호락한 줄 알아?’이 새로운 규정은 지난해 3월에야 하달된 것인데, 바로 생물실험실의 수량을 통제하여 환경에 부담을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통제를 했으니 또 어떻게 쉽게 통과할 수 있겠는가?올해 초, 연성대학교 생물대학의 임상화 교수도 독립 실험실을 신청하려고 했는데, 보고가 제출되자마자 학교 측에서 잠시 연기하라고 설득했다.3개월을 기다리다가 가까스로 학교 측이 서명을 하겠다고 했지만, 또 절차에 따라 신청 보고서를 더 높은 부서에 제출해야 했다. 그 결과, 신청서는 감감무소식이었다.반년이나 기다렸는데도 소식이 없었다.임상화는 사람을 찾아 여러 번 부탁을 하고서야 자신의 보고서가 건네지자마자 부결되었다는 것을 알아냈다.임상화는 아직 단념하지 않았고, 올해도 계속 신청할 생각이었다...송지혜는 그녀와 관계가
교육 채널, 국내 학술지, 과학 주간지, 생물 연구소... 모두 정규인 동시에 유명한 매체들이었다.심지어 J시 뉴스의 기자들도 여기에 있었다.백두강은 이 장면에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정은도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민지와 서준을 바라보더니 의혹을 드러냈다.서준은 손을 흔들었고, 민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럼... 누구일까?’기사에 극도로 예민한 기자들은 즉시 마이크를 송지혜 앞으로 내밀더니 던진 문제도 무척 날카로웠다.“방금 소정은 학생이 말한 CPRT 사건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소방 시정의 경과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겠습니까?”“이런 일로 다른 연구팀을 괴롭히고 배척하신 겁니까?”“학생들을 난처하게 하고, 악의적으로 모함한 게 사실입니까?”“이 중에 교수님 사이의 원한이 얽혀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학생들은 그저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 아닙니까?”...송지혜는 마이크와 카메라에 둘러싸였고, 한 무리의 사람들은 그녀를 구석으로 몰아넣었다.“저... 그, 그만 좀 찍어요!”말로 지려 하지 않던 사람이 그 자리에서 말문이 막혀 온전한 말도 하지 못했다.지예는 이 상황을 보고 얼른 가서 도와주려 했다.그러나 많은 기자와 촬영기자가 현장에 있어서, 지예는 전혀 비집고 들어갈 수 없었다. 그녀는 다급한 마음에 계속 중얼거렸다.“다 내 잘못이야... 나, 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도 일부러 이런 게 아니란 말이야... 흑흑흑... 이모...”백두강은 옆에서 이 말을 듣고 즉시 지예를 잡아당겼다.“너 방금 뭐라고 했어? 네가 잘못했다고?!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지예는 호통을 듣고 그만 멍해졌다.“저, 저는 단지 두 언론의 SNS 계정에 문자를 보냈을 뿐이에요. 와서 이번 일을 보도하라고...”그러나 기자들이 왔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우르르 모일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그들은 정은이 허풍을 떤 게 아니라 정말 실험실을 지을 줄은 더욱 생각지도 못했다.“누가 이
이런 화려한 세리머니에 많은 사람들은 놀라움에 저마다 고개를 쳐들고 구경하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정은은 생각을 하다 현빈을 향해 걸어갔다.현빈은 그런 정은을 보며 놀란 듯했다.“고마워요.” 정은은 현빈의 앞에 멈추며 진지하게 말했다.“그 기자들도 심 대표님이 초청한 거죠?”“부학장님 쪽에서 두 언론에 연락했어. 아마도 너희들이 실험실을 지을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말이야.”“이를 통해 일을 크게 만들려고 했지만, 총장님이 나선 덕분에 그러지 못한 거야. 나도 단지 부학장님을 도와 일을 좀 더 크게 만들고 싶었던 거고. 그래야 당할 때 제대로 당하는 게 아니겠어?”현빈은 다른 한 중요한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그는 전에 백두강에게 경고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백두강은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그럼 내가 수단을 좀 썼다고 탓하면 안 되지. 어떤 사람은 매를 맞지 않으면 아픈 줄 모른다니깐.’‘만약 맞아도 아픈 줄 모른다면, 그건 충분히 얻어맞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하지.’멀지 않은 곳에서, 성달수는 박수를 치면서 오미선의 어깨를 밀쳤다.“이제 안심하겠지? 정은이는 남의 괴로움을 가만히 당하는 아이가 아니야. 생각이 아주 많다고. 실험실을 짓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바로 그렇게 했잖아. 초청장 받았을 때 나 정말 놀라 자빠질 뻔했어!”오미선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정은이는 확실히 줏대가 있어. 반격할 줄도 알고...”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나보다 훨씬 낫지.”성달수는 오미선이 자괴감을 느낀 것을 알아차리고 얼른 입을 열었다.“어허, 아무리 강해도 그것은 우리가 가르친 학생이야. 강한 장군 밑에 약한 병사가 없다고, 우리 둘도 꽤 훌륭한 교수님이잖아!”오미선은 눈을 부라렸다.“난 성 교수처럼 낯가죽이 두꺼운 사람이 아니야.”공연이 끝나자, 시간이 다 된 것 같다고 생각한 정은은 오미선을 청하여 실험실의 이름을 짓게 했다.민지와 서준은 하나는 탁자를 옮기고 하나는 종이와 붓을 가져왔다.오미선은 책상 앞에
도겸을 떠난 후에야 정은은 다시 목표를 찾았고, 서서히 예전의 빛나는 자신을 되찾았다.자신이 결국 이 여자를 놓쳤다는 생각에, 도겸의 미련은 짙은 후회로 대체되었다.한쪽의 경혜는 묵묵히 남자의 표정을 눈에 담고 있었는데,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먼저 도겸의 손을 잡았다.도겸은 고개를 돌리며 이해하지 못했다.경혜는 웃으며 말했다.“오늘 정은이를 축하해주러 선물까지 가져왔잖아요. 그럼 당연히 직접 정은이에게 줘야 하지 않겠어요?”말이 끝나자 경혜는 도겸을 데리고 앞으로 나아갔다.“정은아, 축하해! 나도 네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네. 이 선물은 나와 도겸 씨가 함께 고른 거야. 너희들이 새로운 실험실에서 수확이 가득하기를 바랄게.”“고마워.” 웃는 얼굴에 침을 뱉지 않는다고, 정은은 평온하게 받았다. 그리고 눈빛은 오직 경혜만 바라보았는데, 도겸에게 눈빛 하나 더 주지 않았다.도겸은 몸 옆에 늘어진 두 손을 자기도 모르게 꽉 쥐었다.진일과 재민도 이 기회를 틈타 앞으로 다가가서 축하했다.진일은 손에 든 물건을 꼭 쥐었다. 경혜처럼 말주변이 좋지 않은 그는 그저 밋밋하게 선물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축하해. 이건 우리 어머니가 만드신 복조리인데, 그리 비싼 게 아니야. 안에 약초가 있어서, 아무데나 걸어두면 정신을 차리고 벌레를 내쫓을 수도 있어.”복조리는 총 세 개였다.정은뿐만 아니라 민지와 서준의 몫도 있었다.진일은 자신의 선물이 너무 초라해서 그들이 싫어할까 봐 걱정했지만, 또 귀중한 것을 부담할 수가 없었다.그러나 뜻밖에도 정은 그들은 싫어하는 대신 오히려 무척 좋아했다.민지는 복조리를 손에 들고 호기심에 훑어보았다.복조리 안에는 쑥과 이름 노를 약초가 들어 있어, 처음에 맡으면 냄새가 좀 강했지만 확실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좀 더 맡으면 향기가 옅어지면서 은은한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너무 신기해!’약초 복조리 하나에 뜻밖에도 향수와 같은 향기 구분이 있었다.“고마워요. 저희 모두 너무 마음에 들어요.”정은
앞으로 더 가면 문 하나를 사이에 둔, 정은이 특별히 만든 휴식실이었다.무려 8개의 스위트룸, 각 스위트룸은 침대와 옷장, 심지어 전신거울과 세면대까지 구비되어 있었다.바깥의 공공구역에는 커피머신, 책꽂이, 그네, 당구대가 있어 여가를 즐길 수 있었다.이밖에 정은은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기에 또 작은 주방을 꾸렸는데, 솥과 그릇 등 물건은 이미 잘 준비되어 있었다.이 구역은 지능 시스템에 의해 관리되며, 실험구역과 엄격히 분리되어 서로 교란하지 않았다.“위층에는 전문 헬스장이 있고, 뒤뜰에는 수영장이 있어요. 그쪽의 풍경도 괜찮아서, 피곤하면 여기에 서서 커피를 마시며 먼 곳을 내다볼 수 있어요. 참, 여기에 간식 코너를 하나 차릴 예정이에요. 저희 팀에 미식가가 있거든요.”애초에 실험실을 디자인할 때, 정은도 이렇게 많은 휴식 구역을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그건 일반 실험실이랑 많이 다르니까.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평소에 실험을 하고 논문을 쓰려면 이미 엄청난 집중을 해야 했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었기에 어떻게 줄곧 쉬지 않고 일할 수 있겠는가?적당한 휴식은 여전히 필요했다.기왕 할 거면 합리적으로 계획하고 최적한 환경으로 만들어야 했기에, 지금 이렇게 된 것이다.재민이 말했다.“이게 무슨 실험실이야? 리조트와 다름없잖아!”서준은 입술을 구부렸다.“민지도 그렇게 말했어.”“이 휴식실은 너무 화려하네. 뜨거운 물로 샤워도 할 수 있고. 밤을 새워 실험을 한다면 여기서 잘 수도 있잖아. 자기 집처럼.”재민은 문틀을 만지면서 동경을 드러냈다.진일도 마찬가지로 부러움을 느꼈다.‘언젠가 나도 그들처럼 주변의 사람과 일을 아랑곳하지 않고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겠지?’서준은 진일의 반응을 자세히 관찰하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때로는 인내보다 반항이 훨씬 쉬워요.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게 시도하려 하지 않을 뿐이죠.”“만약 반항에 실패했다면?”서준은 웃으며 말했다.“이 세상에 꼭 성공할 수 있는 일이 또 어디 있겠어요?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