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지와 서준도 와서 도와주었다.곧 구급차가 도착했다.간호사와 의사는 환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간단하게 검사를 한 후에야 재석, 현빈과 함께 정은을 들것에 옮겼다.간호사가 물었다.“환자 가족분 여기에 계세요? 빨리 타세요!”“제가 갈게요!”“저요!”“저예요!”세 남자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간호사는 눈살을 찌푸렸다.“두 분이면 충분해요. 나머지는 혼자 병원으로 가시면 되고요.”그녀는 재석과 현빈을 가리켰다. 방금 이 두 남자가 가장 먼저 달려왔고, 초조함과 초췌함도 연기 같지가 않았다.‘남은 그 남자는...’차 문이 닫힌 순간, 간호사는 도겸을 힐끗 쳐다보았다. 온몸에서 심한 술냄새가 풍겼을 뿐만 아니라, 눈빛은 마치 수시로 사람을 죽일 것만 같았다.‘그냥 혼자 오라고 해.’구급차에 올라가지 못하자, 도겸은 화가 나서 이를 악물었다.그러나 도겸은 곧 자신의 스포츠카에 올라타더니 시동을 걸고 뒤쫓아 갔다.처음부터 끝까지 경혜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았다.경혜는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차가운 바람은 칼처럼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주위에서 구경을 하던 군중들은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이게 무슨 막장 드라마야?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를 위해 떠났다니?”“이제 버려진 여자가 눈에 점을 찍고 다시 돌아오는 거 아니야?”“드라마 좀 적게 봐.”“그 남자 상장회사의 대표님이야. 심경혜의 집안사정이 안 좋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겠어?”“남자친구가 부자인데, 다른 여자랑 도망가는 게 뭐가 어때서? 밖에서 다른 여자와 아이를 낳아도 난 산후조리까지 다 해줄 거야!”“심경혜 지금 입고 있는 옷과 들고 있는 가방 좀 봐. 강 대표님은 손도 참 크셔. 누가 이런 남자와 헤어지려 하겠어?”지예는 팔짱을 끼고 고소해하며 경혜를 흘겨보았다.“야, 네 남자친구 이미 도망갔는데, 안 쫓아가고 뭐 하니?”경혜는 정신을 차리더니 담담하게 웃었다.“정은이가 기절을 했으니 가보는 것도 당연하지. 게다가 난 도겸 씨를 믿어.
세정은 자신의 친오빠가 정은을 쫓아간 것을 보며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난 친동생이잖아! 날 집으로 데려다줄 수도 있는데... 또 그 소정은을 위해서 날 무시하다니. 그 여자와 난 정말 잘 안 맞아!’...병원 구급실에서.의사는 정은의 기본 상황을 물어본 후, 즉시 전신 검사를 안배했다.현빈이 말할 때 재석은 옆에서 보충했다. 열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몇 시에 열이 내렸는지, 몇 시에 땀이 났는지 등 디테일을 전부 상세하게 설명했다.의사조차도 그런 재석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검사가 끝나자, 정은은 병실로 밀려났고 그사이 한번 깨어났다.재석은 즉시 앞으로 다가갔다.“정은아, 내 말 들려?”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괜찮아, 지금 병원에 있으니까 졸리면 안심하고 자.”말이 끝나자 정은은 다시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현빈은 한발 늦어서 정은과 말을 하지 못했다.“왜 나한테 정은이 깨어났다고 말하지 않은 거예요?” 그는 재석을 바라보았다.“그럴 책임이 없으니까요.”게다가 재석은 정은과 이야기하느라 바빴으니 또 어찌 현빈이 생각나겠는가?현빈은 말문이 막혔다.재석은 곧장 주치의를 향해 걸어갔다.“의사 선생님, 정은이의 상태는 좀 어떤가요?”“방금 이미 환자분에게 전면적인 검사를 했는데, 일부 검사 보고서는 좀 늦게 나올 거예요. 그러나 현재로 볼 때, 환자분은 열이 이미 내려갔어요.”“비록 발목이 심하게 삐었지만 다행히 뼈를 다치지 않았으니 약을 먹고 휴양하기만 하면 돼요. 적게 걷고 평소에 침대에 누워 있으면 빨리 나아질 거예요. 다른 주의할 만한 점은 아직 없어요.”“감사합니다.”“두 분 중 한 분이 간호사를 따라 병원비부터...”“제가 갈게요!”재석과 현빈이 입을 열기도 전에 도겸은 성큼성큼 걸어와 의료비 지급명세서를 받았다.현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여자친구를 달래지 않고 왜 여기에 온 건데?”도겸은 냉소를 지었다.“왜? 난 여기에 올 수 없어?”“정은이는 널 보고 싶지 않을 텐데
핸드폰 비밀번호와 은행카드 비밀번호.재석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고, 하는 말은 그의 뒷모습처럼 사람을 화나게 했다.“정은이가 알려준 거예요.”현빈과 도겸은 묵묵히 이를 갈았다....정은이 깨어났을 때, 이미 아침이 되었다.햇빛도 없고 비도 오지 않았으며 찬바람이 벌거벗은 나뭇가지를 무정하게 때리고 있었다.그녀는 일어나서 앉았다. 병원에 속하는 소독수 냄새가 자극적이고 고약해서 정은은 코를 비볐다.그리고 정은은 자신의 다친 발목을 바라보았다. 이미 꽁꽁 싸맨 발목은 그 상태를 확인할 수 없었다. 가볍게 움직이자, 다행히도 조금 아프지만 전처럼 심하진 않았다.보온병을 들고 들어온 수민은 정은이 일어난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너 왜 일어났니?! 빨리 누워 있어!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단 말이야.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침대에 누워야 한다고! 내가 회사에서 우리 오빠 전화 받았을 때 정말 깜짝 놀랐어. 별일 없어서 정말 다행이야.”수민은 요즘 아주 바빴다. 두 사람은 이미 한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하나는 일하느라 바쁘고 다른 하나는 학술 연구에 바빴으니 한담할 시간도 거의 없었다.그러나 자신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사람이 바로 절친인 게 아니라, 자신이 필요할 때 가장 먼저 나타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절친이었다.예를 들면 지금.“수민아, 나 얼마나 잤어?”“꼬박 하루, 지금은 아침이야.”정은은 입술을 움직이며 말을 하려다 멈추었다.수민은 그녀가 무엇을 묻고 싶은지 알고 있었다.“내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네 병상 옆에 남자 세 명이나 지키고 있는 거 봤거든. 우리 오빠는 그래도 괜찮지만, 심현빈과 강도겸은 틈만 나면 기싸움을 해서 정말 눈에 거슬렸어, 그래서 모두 쫓아냈지 뭐야!”“아, 맞다. 그리고 네 동창이라는 애들 두 명 왔었어. 하나는 민지, 다른 하나는 서준이라고. 두 사람도 아주 오래 기다렸는데, 너무 피곤한 것 같아서 먼저 돌아가서 쉬라고 했어.”“내 핸드폰은? 우리 엄마 아빠한테 전화 온 적 없어? 내가 받지 않
“너, 너희 둘 지금 뭐 하는 거야?”동건은 대야를 든 채로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마치 바보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수민과 정은은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왜 이제야 왔어? 대야를 하나 사는데 한 시간이나 걸리다니.”수민은 동건에게서 대야를 빼앗아왔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정은을 볼 때, 다시 환한 미소를 지었다.“뜨거운 물 받아왔으니까 이따가 닦아줄게. 그럼 많이 편해질 거야.”“고마워, 수민아! 사랑해!”“그럼 다음엔 피하지 말고 나랑 뽀뽀하자, 응?”“안 돼, 나 하루 종일 누워 있었잖아. 얼굴도 안 씻고 머리도 안 빗었으니 어떻게 여신님의 뽀뽀를 받아들일 수 있겠어?”“괜찮아, 난 상관없거든.”대야를 빼앗기고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동건은 어이가 없었다.“어? 이 로고...”수민은 대야를 바라보더니 깜짝 놀랐다.“너 설마... 에르메스 매장에 가서 산 거야?”“맞아!” 동건은 턱을 살짝 들더니 콧방귀를 뀌었다.“어때? 내 안목 괜찮지?”수민은 말문이 막혔다.“너 그게 무슨 표정이야?”“너 정말 머리가 없는 사람이구나? 병원 밖의 편의점에서 몇천 원이면 대야 하나를 살 수 있는데, 넌 에르메스에 가서 이걸 사다니?”“그게 뭐가 어때서?”“바가지를 쓴 거와 다름이 없잖아? 돈 많아서 아주 좋겠어.”동건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했다.“됐어, 그냥 쓸 수밖에 없겠군.” 수민은 싫어하는 감정을 드러냈다.‘예쁘기만 하고 실속이 없는 것... 천 원짜리 플라스틱 대야보다 못하잖아, 쯧쯧...’“야, 조수민, 네가 사오라고 했잖아! 사왔는데도 계속 트집을 잡을 거야! 이 몸이 언제 심부름하는 거 봤어? 너 그래도...”“이제 입 다물어도 될까, 고동건 도련님?” 수민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동건은 바로 입을 다물더니 찍소리도 내지 않았다.정은은 눈을 깜박이며 두 사람을 살펴보았다.‘음, 수상한 냄새가 나는데!’수민이 입을 열었다.“거기 서서 뭐해?”“어? 그럼 뭐 하라는 거야?”“나가
동건의 손은 수민의 스웨터를 파고들어가 손쉽게 속옷 단추를 풀었다.“수민아... 수민아...”키스를 하면서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로 수민의 이름을 불렀다.목소리는 부드럽지만 기세가 사나워 마치 그녀를 잡아먹을 것 같았다.수민은 엄청난 힘을 써서야 동건을 밀어냈는데, 얼굴은 새빨개졌고 숨을 약간 헐떡였다.“대낮에 이게 무슨 짓이야? 꺼져.”남자는 여전히 그 감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좀 더 키스하자...”말하면서 또 뻔뻔스럽게 달라붙었다.“요 며칠 너 병원에서 정은 씨 돌보았잖아. 나 정말 네가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내가 보고 싶었다고?” 수민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도도하게 말했다.“뭐가 빠진 것 같은데?”“헤헤, 맞아, 너랑 자고 싶었어, 왜?”말하면서 긴 팔을 뻗더니 마치 억지를 부리는 코알라처럼 수민을 끌어안았다.수민은 뻔뻔스럽고 파렴치한 동건의 모습에 이미 습관되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여자를 수도 없이 만나 본 고동건 도련님이 왜 동물처럼 툭하면 발정기에 들어서는 거지?”동건은 안색이 어두워졌다.“지금 누굴 욕하는 거야?”“너.”동건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앞으로 이런 질문 좀 하지 마. 한 번 모욕을 당했는데도 또 한 번 모욕을 자초하다니, 그럴 필요가 없잖아?”“조수민! 너 계속 내가 듣기 싫은 말만 할 거야?! 그래, 나한테도 다 방법이 있어!”“야, 너... 으윽!”동건은 웃음을 짓더니 다시 수민의 입술에 키스했다.이 키스는 유난히 길었다.중간에 수민은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했고,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그러나 동건은 한사코 손을 놓지 않았는데, 수민은 그의 입술을 깨물어서야 마침내 벗어날 수 있었다.“너 개띠야?” 동건은 아파서 줄곧 숨을 헐떡였다.수민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그녀는 신선한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며, 빨갛게 달아오른 두 얼굴은 마치 잘 익은 사과와 같았다. 두 눈은 촉촉했고 입술은 또 약간 부었다.눈빛은 앞유리를 뚫고 지나 앞을 똑바로 바라보았다.한쪽
“사실 요즘 우리 엄마가 자꾸 너에 대해 물어보셨어.”동건이 갑자기 말했다.“뭘?” 수민은 여전히 송보미를 존경했다. 첫 만남에 비싼 보석 팔찌를 선물로 줬으니까.‘아, 그 팔찌 아직 돌려주지 않았는데...’“너 왜 우리 집에 안 오냐고, 나 때문에 화난 거 아니냐고.”“넌 어떻게 말했는데?”“아! 실수로 널 임신시켰다고 말했지.”“뭐?!!!”수민은 귀가 터질 목청으로 말했다.동건은 헤헤 웃으며 말했다.“농담이야.”“너 정신 나갔구나!”“네가 일 때문에 바빠서 날 무시했다고 했어. 그리고 난 화를 내며 소란을 피우다가 널 화나게 했고.”‘쯧쯧... 그래도 책임을 자신에게 떠맡길 줄 아네.’수민은 미소를 지었다.동건은 그녀의 기분이 좋은 것을 보고, 이 기회를 틈타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냈다.“우리 계속 합작할까? 내 말 좀 들어봐... 우선 양쪽 어머니들이 만약 우리가 이미 헤어졌다는 것을 아신다면, 우린 엄청난 욕을 먹지 않을까?”백지영은 남을 욕하지 않지만 비아냥거리기 좋아해서, 듣기 거북한 말 하지 않아도 사람을 몸 둘 바 모르게 할 수 있었다.재벌 집 사모님들에게 모두 이런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둘째, 욕을 먹은 뒤, 두 분은 계속 결혼이며 아이를 낳으라고 재촉하실 거야. 우린 예전처럼 잔소리를 들으면서 감히 짜증조차 내지 못하는 나날을 보내야 하고.”이 모든 것은 전부 수민이 원하지 않은 점이었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협력 대상을 다시 물색할 수밖에 없겠지. 게다가 이 사람도 우리와 같은 재벌 출신이어야 해. 그건 쉽지 않을 거야.”이렇게 보면,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우리가 계속 협력하는 거야. 상대를 바꾸는 것보다 우리가 전처럼 연기하는 게 더 낫지 않겠어? 시간도 절약하고.”동건은 말주변이 확실히 좋았다.적어도 그 순간, 수민은 정말 마음이 움직였다.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내가 말했지, 협력 상대와 잠자리에 들지 않는다고.”설령 마음이 움직였다 해도 수민은 원칙
마침 이때, 백지영과 송보미가 화장실에서 돌아왔다.수민은 재빨리 동건의 손을 뿌리쳤고, 동건도 재빨리 자리로 돌아왔다.송보미는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감지하며 입을 열어 떠보았다.“너희들... 괜찮은 거니?”동건은 말을 하지 않고 수민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지금 당장 대답을 하라는 뜻이었다.수민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방긋 웃었다.“괜찮아요, 저와 동건이 다 별일 없어요.”그렇게 두 사람은 우연히 관계를 맺은 파트너에서 합리적으로 관계를 맺는 파트너로 됐다....추억에서 정신은 차리자, 수민은 입을 내밀고 있는 동건을 밀어냈다.“넌 끝도 없는 거야? 빨리 운전해!”“키스 좀 더 하자! 나 더 하고 싶단 말이야...”수민은 눈을 부라렸다.“고동건, 너 어쩜 우리 파푸보다 더 매달리기 좋아하는 거지?”파푸는 수민이 마장에서 기르고 있는 Y국 조랑말이었다.성격이 너무 좋은 데다가 주인을 특히 좋아했다.매번 수민이 보러 갈 때마다 애교를 부렸다.동건도 수민을 따라 가본 적이 있었는데, 떠날 때 은근히 발로 파푸를 걷어찼다.그 결과, 오히려 파푸한테 되차였다.배에 든 멍은 이주 만에 사라졌다.“그 난폭한 짐승과 비교하지 마!”“파푸가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 그렇지 않으면-”그녀의 시선은 동건의 배에 떨어지더니 이어서 아래의 어딘가에 멈추었다.동건은 저도 모르게 똑바로 앉아 있었다.“너, 너, 너... 즐기고 싶지 않은 거야?!”수민은 웃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난 언제든지 사람을 바꿀 수 있지.”동건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운전해! 계속 쓸데없는 소리 한다면 오늘 밤 소파에서 자!”“네, 아가씨, 잘 앉으세요.”...수민은 병원에서 정은을 3일간 돌보았고, 동건도 3일간 내내 따라왔다.“이거 대체 무슨 상황이야?” 정은은 절친이 끓인 보신탕을 마시면서 의자에 앉아 원망을 하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아마도 욕구불만이겠지.”“크헉...”“천천히 마셔, 사레 들리잖아!”동건을 바라보며
“발은 좀 어때?” 재석은 방금 실험실에서 돌아왔는데, 문앞에 뜯은 택배 상자가 놓여있는 것을 발견하고 정은이 퇴원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큰 문제는 없대요. 그저 제때에 약을 바르고, 일주일 후에 재검사를 하면 된다고 했어요.”무슨 생각이 났는지, 정은은 눈을 드리웠다.“그날... 선배님과 심 대표님 덕분에 나도 별일 없었던 거예요. 그렇지 않았다면 나 혼자서 그렇게 오래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그때 난 열까지 났잖아. 내가 먹은 해열제도 다 선배님이 챙겨온 것이고.’비록 한밤중에 고열이 내리지 않아 정은은 어렴풋이 잠들었지만, 완전히 의식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그녀는 재석이 자신을 바람을 등진 기둥으로 옮겼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재석과 현빈이 자신을 에워싸고 자신을 따뜻하게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둘이 알콜과 거즈로 끊임없이 자신의 온도를 낮추었단 것을 알고 있었다.정은이 아주 잘 알고 있었다.정은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에 발생한 일들, 그리고 그들이 한 말들 역시 다 기억하고 있었다.“너에게 사고난 날, 민지가 나에게 전화를 했었어. 하지만 처음에 받지 못했기 때문에 늦게 찾아갔어. 미안해.”“하지만 결국 왔잖아요?” 정은은 고개를 들었다.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가볍게 입을 열었다.“선배님,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선배님은 날 구할 의무가 없으니까요. 오히려 내가 그런 선배님이 엄청 고마운 걸요. 우리 알고 지낸 후부터 선배님은 날 수도 없이 많이 도와줬잖아요.”.“그래, 그럼 우리 모두 그런 말하지 말자.”“좋아요!”“참, 너한테 줄 게 있는데. 잠깐만...”정은은 의혹을 느꼈고, 그런 그녀의 시선을 감지한 재석은 먼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 후, 쇼핑백 하나 들고 나왔다.쇼핑백은 아주 컸지만, 안에 든 물건은 더 컸고, 검은색 비닐봉지로 포장되었다.쇼핑백에 다 들어가지 못해서 심지어 한 토막이 드러났다.“이게 뭐죠?” 정은은 눈을 깜박거렸다.“한번 뜯어봐.”“네.”정은은 재석을 집으로 초대했다. 그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