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겸이는 자기가 정말 뭐라도 된 줄 알아! 싸다 싸! 그러게 누가 그때 저런 말을 하래?”선우는 한숨을 쉬었다.“도겸이 형이 언제 단념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정은 누나는 이미 그 과거에서 벗어났는데.”“흥.” 동건은 냉소를 지었다.“도겸이가 단념을 한다고? 두고 봐. 정은 씨가 고개를 돌리지 않는 한, 저 자식 평생 이러고 있을 거야.”“이건 또 무슨 말이에요??”“그 가사가 뭐였더라? ‘얻을 수 없다면 영원히 소란을 피울 거야.’ 남자는 말이야, 정말 천박한 존재지. 됐어, 너희들 천천히 놀아, 나도 갈게.”“아니... 이제 막 왔는데 왜 가는 거예요?”동건은 헤헤 웃었다.“수민이가 갑자기 야근을 안 해도 된다고 했거든. 수민이 데리러 갈 거야.”선우의 눈빛은 더욱 이상해졌다.“그런데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고?”동건은 변명했다.“네가 뭘 알아? 나는 진지하게 연기를 하고 있는 거라고. 남자친구가 퇴근한 여자친구를 데리러 가는 것은 정상 아니야? 이것도 할 수 없다면, 양가 부모님들은 또 어떻게 우리 둘이 결혼을 전제로 진지하게 사귀고 있다는 말을 믿을 수 있겠어?”“아, 늦었으니 먼저 갈에! 안녕!” 말하면서 동건은 성큼성큼 떠났다.선우의 잘생긴 얼굴에는 엄청난 의혹이 나타났다.‘왜 다들 요즘 귀신에 홀린 것 같지... 이상해! 너무 이상해!’...겨울의 비는 마치 바늘을 숨긴 듯 했고, 쌀쌀한 바람은 뼈를 에는 듯 했다.8시도 안 되었지만, 거리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도겸은 클럽을 떠난 후, 차를 몰고 정은의 거처로 곧장 달려갔다.도중에 그는 질투와 불쾌감을 느끼며 심지어 정은에게 어떻게 따져야 할지를 생각했다.‘심현빈이랑 안 친하다며?’‘둘이 불가능하다며?’‘그런데 왜 그 자식과 집에 가서 부모님을 만난 거야?’‘두 사람 언제 사귄 거냐고?’‘심현빈이 대체 뭐가 좋은 거야?!’‘대체 왜?!’그러나 막상 도착하자, 도겸은 위층으로 올라갈 용기조차 없었다.그저 차 안에 멍하니 앉아서 비가 유리창에
눈에 거슬리는 동시에 도겸은 두 눈이 붉어졌고, 현빈의 뒷모습을 보며, 펑하고 핸들을 내리쳤다.도겸은 내려가서 현빈의 멱살을 잡고 그를 호되게 한 대 때리고 싶었다.하지만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남에게 손을 대는 것일까?단념하지 않는 전 남자친구? 아니면, 예전의 절친?그는 입가를 실룩거리더니 결국 두 사람이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물건을 올려준 뒤, 현빈은 떠날 준비를 했다.정은은 거실에서 물을 따르며 건네주었다.“고마워요, 오빠, 물 좀 마시고 가요.”현빈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더니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좋아.”정은은 물건을 간단히 정리하고 내일 다시 차츰차츰 치우려 했다.바로 이때, 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이 불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은은 낮에 베란다 문을 닫지 않았는데, 이때 바람이 세게 불어왔다.화분이 아직 베란다에 있었기에, 만약 바람에 날려 가서 사람이라도 다치게 한다면 큰일이었다.그래서 정은은 하던 일을 멈추고 서둘러 화분을 실내로 옮겼다.그중 하나가 비교적 무거워서 그녀는 몇 번 시도했지만 조금도 들지 못했다.이때 두 손이 나타나더니, 화분을 받으며 듬직하게 들어올렸다.현빈이 말했다.“내가 할게.”정은은 한숨을 돌렸다.“고마워요, 오빠.”손을 거둬들일 때, 부주의로 현빈의 손을 부딪혔지만, 정은은 별다른 생각하지 않았다.남자의 눈빛은 조여졌고, 그다지 많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현빈이 그 잘 자란 코코넛을 쉽게 실내로 옮기는 것을 보고, 정은은 또 손을 들어 다른 몇 개를 가리키며 어색하게 말했다.“이거, 그리고 이거도 다 옮겨야 하는데...”현빈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내가 짐꾼처럼 보여?”정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 하지만 내 오빠잖아요. 전에 어려움이 있으면 오빠를 찾으라고 했고요.”이번에 현빈이 말문이 막혔다.‘오빠, 오빠, 그놈의 오빠!’그는 자신이 정말 정신이 나갔다고 느꼈다. 어떤 호칭이든 정은의 입에서 나오면 이유 없
그리고 도겸은, 상대방의 이런 모습을 보며 현빈이 묵인했다고 느꼈다.화가 난 그는 핸들을 내리치더니 고요한 밤에 갑자기 경적 소리가 울렸다.위층에서 직접 욕을 하기 시작했다.“한밤중에 누가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 거야?! 죽으려고 작정을 한 건가!”말을 마치자 물 한 대야가 쏟아졌다.마침 도겸의 차 꼭대기에 뿌렸다.현빈은 이미 쿨하게 몸을 돌려 성큼성큼 떠났다.두 사람 사이에 발생한 모든 것, 앞서 현빈이 정은을 위층으로 데려다 준 장면까지, 베란다에 서 있던 재석은 똑똑히 보았다.찬바람이 쌩쌩 불며 눈까지 그의 얼굴에 떨어졌지만, 재석은 마치 추위를 모르는 듯 30분 넘게 이렇게 서 있었다.그는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잘 몰랐는데, 그저 가슴이 심하게 답답하고 숨조차 잘 쉬지 못했다.머릿속은 많은 생각을 했지만 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지난번 정은을 떠보며, 그녀가 연애 대신 학업에만 전념하고 싶다는 대답을 받은 재석은 자신이 마음속의 감정을 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리고 다시 친구로 되어 이렇게 정은의 곁에 있으면서 그녀의 성장을 목격하는 것도 좋았다.그러나 지금, 그는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재석은 자신의 마음을 억제할 수 없었다.그는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정은의 곁에 남자라곤 오직 자신뿐이었으면 좋겠다고.그녀의 눈빛은 영원히 자신에게 떨어졌으면 좋겠다고.정은의 미소도, 그녀의 기쁨도 오직 자신 때문이었으면 좋겠다고.만약 가능하다면, 재석은 심지어 자신이 정은을 생각하는 것처럼 그녀가 자신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랐다.이런 미친 생각들은 정은이 현빈의 차에서 내려 두 사람이 나란히 올라오는 것을 보았을 때 들끓기 시작했다.재석은 쓴웃음을 지었고, 자신도 이렇게 이성을 잃을 줄은 몰랐다.더 슬픈 것은 감정에 빠져 나오지 못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하나뿐이라는 것이다....같은 밤, 매서운 찬바람 속에서, 동건도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수민의 전화를
남자는 이 상황을 보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 동건에게 시선을 돌렸다. “수민아, 이분은...?”분명히 수민이 직접 소개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동건도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할지 궁금했다. 표정은 변함없었지만, 이미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눈빛 속에 심지어 작은 기대가 어렴풋이 비쳤다.“아, 이분은 고씨 가문의 큰아들, 고동건이야.” 수민은 담담하게 말했다.이 대답은 틀리다고 할 수는 없지만, 두 남자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그런데, 이분은 수민과 무슨 사이지?” 남자가 다시 물었다.이번에 동건은 수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말했다. “남자친구예요.”말을 마치며 동건은 다시 한번 강조했다.“난 수민의 남자친구라고요.”동료는 수민을 바라보며, 그녀가 고개를 젓길 바라는 눈길을 보냈다.이에 동건은 화가 나더니 오히려 웃음이 나왔고, 수민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자신의 강한 소유욕을 과시했다.수민도 뭐라 하지 않았고, 부드럽게 그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남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남자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수민은 즉시 똑바로 서더니, 자신의 어깨에 놓은 동건의 손을 털어냈다. “이제 됐어. 그 사람 이미 떠났잖아.”동건은 손을 호호 불며 아픈 표정을 지었다. “아야! 좀 살살 해!”수민은 대꾸했다. “싫어.”“너 정말... 전화해도 안 내려오고, 전화도 안 받고. 대단하네.”“누가 그렇게 전화를 했는지 궁금했는데, 너였구나. 배불리 먹고 할 일이 없어서 그런 거야?”동건은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제시간에 내려왔으면 내가 전화를 그렇게 했겠어?”“제시간? 내가 너랑 약속했던가?” 수민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동건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네가 오늘 야근 안 한다고 했잖아!”“그렇게 말했지만, 데리러 오라고 한 적은 없어.”수민은 야근을 하지 않아도, 바로 퇴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직 처리할 일이 남아있었고, 동건이 데리러 올 필요
“수민아, 정말 보고 싶었어!”말을 마치자마자 동건은 뜨거운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수민도 능숙하게 응답했다.사실 그녀도 동건이 꽤 그리웠다.동건의 손은 수민의 옷자락으로 파고들며 점점 대담해졌다.그러나 수민은 그의 손을 꽉 잡았다.“응?” 동건이 물었다.“여기서 하고 싶지 않아, 집에 가서 하자.”그 한마디에 동건은 억지로 욕구를 참으며 가속페달을 쭉 밟았고, 엔진 소리가 거칠게 울렸다. 원래 20분 넘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지만, 10분 만에 동건의 집앞에 도착했다.문이 닫히자마자 두 사람은 시선이 마주치더니 곧바로 뜨거운 입맞춤이 이어졌다.그렇게 침실에 들어갔고, 옷이 여기저기 흩어졌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한 시간 후, 정은은 나른한 눈빛을 띠며 욕실로 향했다.동건은 침대에 기대어 단단한 가슴을 드러냈다.“어딜 가?”“샤워.”“씻지 말고 좀 더 누워 있어.”“땀 냄새 나서 싫어.”동건은 다정하게 속삭였다.“안 나. 네 땀은 엄청 향기로워.”“내 땀이 아니라 네 땀이잖아.”“아...”샤워를 마친 수민은 원래 입던 옷으로 갈아입고 가방을 챙겼다.동건은 점점 이상하다고 느끼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놀란 눈으로 물었다.“설마 지금 가려고?”“응.”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수민은 내일 출근해야 했기에 다른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대체 나를 뭘로 생각하는 거야?”동건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수민은 고개를 돌리며 눈썹을 치켜세웠다.동건은 침대에서 내려와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자고 바로 가다니, 내 집이 호텔이야? 내가 무슨 제비냐고?”수민은 부드럽게 설명했다.“난 그런 뜻이 아니야...”“아니긴 개뿔! 나를 심심풀이로 쓰는 거잖아?!”말을 마치자, 화를 못 참은 동건은 침대 끝에 있는 벤치를 발로 차 넘어뜨렸다.수민의 눈빛이 차가워졌다.‘그래도 설명을 하려 했는데... 이 남자는 정말 어이가 없군.’“내가 너무 오냐오냐해줬지?”“나는...”“네가 자신을 제비라 생각한다면
수민은 차여 넘어진 의자를 향해 턱을 들었다.동건은 재빨리 알아차리고 즉시 의자를 들고 제자리에 놓았다.“이제 나랑 좀 더 있을 수 있지? 헤헤...”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동건은 이미 수민의 가녀린 허리를 껴안고 침대 위로 가져갔다.5분 후.“수민아...”“너 뭐 하는 거야? 잠깐 누워있겠다며? 왜 내 단추를 풀어?”“쉿, 말하지 말고 우리 한 판 더 하자.”수민은 말문이 막혔다.새벽 3시, 밖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동건은 그녀가 이곳에 밤을 보낼 것이라고 생각했다.“차 좀 빌려줘.” 수민은 거울을 보고 체크하다가 목에 담담한 키스자국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앞으로 흔적 좀 남기지 말고 조심해.”동건은 침대에 기대고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왜? 다른 남자가 볼까 두려워?”“또 말을 이따위로 할 거야?”동건은 긴장을 하며 침을 꿀꺽꿀꺽 삼켰다.“아니... 내가 너무 매료되어서 이런 흔적 남기는 것도 정상이잖아. 내 등 좀 봐...”말하면서 그는 돌아섰다.“다 네가 손톱으로 파낸 흔적이야, 그런데 내가 언제 뭐라고 했어?”수민은 말문이 막혔다.그러나 등에 긁힌 자국이 가득하고, 심지어 껍질이 벗겨진 것을 보니 확실히 무서웠다.“에헴!” 수민은 가볍게 기침을 했지만 지지 않으려 했다.“그 뭐야... 넌 흔적이 다 등에 있으니 옷만 입으면 누가 알겠어? 이건 목이잖아. 내일 색깔이 더 깊어질 텐데. 어떻게 동료를 만나라는 거야?”“헤헤... 그럼 만나지 말고 휴가를 내. 우리 둘이 별장에서 하루 종일 누워 있자!”“허, 네 말에 속을 것 같아? 꿈이나 깨!”동건은 마음이 찔렸다.“그게 무슨 말이야? 난 그런 뜻이 아니라고.”“그건 너 자신이 더 잘 알갰지. 차 키 가져와.”동건은 침대 머리맡에서 BMW의 키를 꺼내 던졌다.수민은 힐끗 보더니 다시 던져주었다.“난 마이바흐를 원해.”“까다롭긴!”“내일 저녁에 퇴근하면 이리 와.” 남자는 이 기
민지가 대답했다.“여행 이미 마쳤어요!”“벌써?”“여긴 그리 크지 않으니, 하루 만에 끝낼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며칠 걸릴 리가 없잖아요?”정은의 의혹스러운 눈빛은 서준에게 향했다.만약 그녀가 잘못 기억하지 않았다면, 그때 서준은 2박 3일 여행을 계획했던 것이다. 그 기간에 몇 번 더 보완되었고, 코스도 더 많아졌다.그러니 하루 만에 끝내는 건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았다.정은이 입을 열어 물어보려고 할 때, 서준은 갑자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콜록... 맞아요, 하루 만에 끝냈지만 즐거우면 됐죠.”“정은 언니, 이번에 서준이 가방이 나보다 더 큰 거 있죠!”서준은 말을 하지 않았다.“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말하지도 않고, 놀 때도 꺼내 쓰는 것을 보지 못했어요. 그렇게 큰 가방을 메고 산을 올라갔는데, 엄청 대단하죠!”‘칭찬인 건가... 그건 좀...’정은은 이상한 눈빛으로 서준을 보더니, 마치 그의 가방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아맞힌 것 같다.2박 3일 동안 여행할 준비를 한 이상, 갈아입을 옷, 생활용품 따위를 챙겨야 하지 않을까?아마 민지는 원래 이것이 2박 3일 여행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에헴, 누나!”정은은 크게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오직 민지 만이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정은 언니, 바쁜 일이 끝난 후, 하루 동안 쉬는 느낌은 정말 너무 좋아요! 그냥 점심까지 자고 나서 여러 코스를 돌아다니니...”‘그래서 2박 3일은 그렇다 쳐도, 온전한 하루조차 여행하지 못한 거야?’“서준이 줄곧 재촉했는데, 귀찮아 죽는 줄 알았어요... 사람이야 그냥 즐거움을 위해서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편한 대로 행동해야지, 누가 꼭 몇 시에 외출해야 한다고 규정했죠?”“늦잠을 잔 후에 다크서클이 바로 없어졌어요. 전에 밤을 새울 때 눈까지 작아졌는데.”서준이 말했다.“그래? 네 눈은 항상 그렇지 않았어? 이전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아.”민지는 허리를 짚으며 눈을 부릅떴다.“임서준, 너 나한테 얻어맞고 싶은
민지는 그 말을 듣자마자 내일 2킬로미터 더 달려야 한다는 말을 뒤로 했다.그리고 정은을 안고 애완동물처럼 깡충깡충 뛰었다.“사랑해요, 정은 언니, 내가 그 가게의 닭볶음탕을 먹고 싶어한 지 오래되었다는 것을 또 어떻게 알았어요?”정은은 민지가 자신을 안도록 내버려두더니 웃으며 말했다.“네가 전에 한 번 말했잖아, 그래도 기억해뒀지. 그리고 나도 그 닭볶음탕이 도대체 얼마나 맛있는지 궁금하네.”“날 믿어요, 절대로 언니를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까. 그 가게는 맛이 아주 좋아요!”맛있는 음식을 발견하는 것은 아마도 먹방들의 타고난 능력일 것이다. 민지가 추천한 것이라면, 대부분 엄청 맛있는 음식이었다.이 레스토랑의 주방장은 아주 정통적인 닭볶음탕을 만들었다.또 J시 사람의 입맛을 결합하여 간단하게 개량했기에 엄청 고소하고 맛있었다.닭고기가 부드러우며 매콤한 향기까지 곁들이니, 생각만 해도 민지는 이미 침을 삼키기 시작했다.요 며칠, 조깅의 성과를 공고히 하기 위해 서준은 민지의 식단을 엄격히 통제했다. 매일 그 싱겁고 무미건조한 음식들만 먹으니 민지는 토가 나올 지경이었다.비록 저녁에 집에 돌아가면 몰래 간식을 훔쳐 먹었지만, 간식이 어떻게 맛있는 요리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정은 언니, 완전 사랑해요.”마침내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자, 민지는 감동에 눈물을 글썽였다.“야, 내가 언제 널 학대했어?”“그럼 조깅 취소해.”“그래, 그럼 너도 마음의 준비를 해. 내년 건강검진 보고서에 ‘지방간’이라는 결과가 또 나올 테니까.”‘됐어, 건강을 위해서라도 말을 말자. 난 그래도 자신의 처지를 잘 아는 사람이니까.’서준은 민지의 다이어트를 돕기 위해 매일 날이 밝기도 전에 찾아와서 문을 두드려 그녀를 불렀다.사실 민지는 가끔 서준의 얼어붙은 볼과 코를 보고, 또 아직 이불 속에 틀어박혀 쿨쿨 자는 자신을 생각하면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다.‘이건 죽을 죄야! 한겨울에 누가 더 자고 싶지 않겠어?’‘우리 아빠도 서준처럼 매일 일찍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