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네가 살아 있을 수도 있고, 불구가 되었을 수도 있고, 깊은 산속으로 팔려갔을 수도 있고, 거지가 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렇게 잘 살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이미숙, 넌 왜 항상 운이 좋은 거야? 납치당했는데도 멀쩡히 돌아왔고, 돌아와도 모두들 널 예전처럼 대해 주잖아.”이미숙은 담담하게 말했다.“정말 부러워하는구나?”이미윤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 부러워. 하지만 그것보다 난 네가 더 미워!”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정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이미숙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더니 안으로 걸어가며 말했다.“정은아, 나 여기 있어.”“할머니께서 엄마 어디 갔냐고 찾고 계세요.”“아까 물건 좀 정리하고 있었어. 이제 갈게.”이미윤은 그대로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눈송이가 그녀의 어깨 위로 떨어져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었고, 차가운 기운이 머리부터 심장 깊숙이 스며들었다.심정훈과 현빈 부자가 서재에서 나왔을 때, 거실에는 이미숙만 남아 있었다.이미윤은 언제 떠났는지도 모른다.심정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버지, 저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요.”현빈은 그렇게 말하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심정훈은 이미숙을 바라보며 다가가 그녀 앞에 멈춰 섰다.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요동쳤다.“새해 복 많이 받아, 미숙아.”“네, 고마워요.”이미숙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한쪽은 깊은 수렁 같았고, 다른 한쪽은 잔잔한 호수 같았다.“아빠랑 얘기 끝났어요?”“응.”심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돌아가려고.”“그래요.”이미숙은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여보, 잠깐만 와 봐. 우리 같이 형부 배웅하자.”그 한마디는 마치 화살처럼 심정훈의 가슴을 찔렀다.심정훈은 시선을 드리우며 눈빛 속의 아픔과 쓸쓸함을 감췄다.“그래! 바로 갈게!”소진헌은 부리나케 주방에서 나왔다.손에는 물기가 남아 있었고, 급하게 닦으며 말했다.“두유 만들고 있어. 금방 될
“당신 어떻게 감히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어?”남자는 핏줄이 불끈 솟아오르며 이를 악문 채 한 글자 한 글자 쥐어짜듯 내뱉었다.이미윤은 시선을 피하더니 이내 질문을 했다.“여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심정훈은 냉소를 지으며 차갑게 이미윤을 쏘아붙였다.“여보? 떳떳했다면 따귀를 맞고도 날 그렇게 불렀을까? 욕부터 퍼붓는 게 정상 아니야?”이미윤의 표정은 순간 굳어졌다. 싸늘한 기운이 등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졌다.“나... 나는 그저 당신이 술에 취해서 그랬다고 생각했을 뿐인데...”“나 오늘 술 한 방울도 안 마셨어.”이미윤은 힘겹게 침을 삼키며 억울한 기색을 띠었다.“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화를 내는 거예요? 나는...”말을 잇던 이미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세월이 지나도 고운 눈매와 정교한 이목구비는 여전했다. 성숙한 분위기 속에 풍겨 나오는 그윽한 매력은 변함없었다.“나도 귀하게 자란 사람이에요. 그런데 당신이 이렇게 함부로 손을 대면 내 체면은 뭐가 돼요?”이미윤은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며 고개를 숙였다. 마치 속상한 아내가 남편에게 토라지듯이.서운함, 애교, 그리고 은근한 유혹이 담겨 있었다.하지만 심정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차갑게 굳은 얼굴로 이미윤을 위아래로 훑었다.그 시선에는 조롱이 서려 있었다.“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할 줄은 몰랐네. 아니, 감히 이런 배짱까지 키웠을 줄이야?”심정훈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귀한 몸이라고? 방금 이원에서 당신이 한 말과 좀 다르던데?”‘나와 이미숙이 하는 말을 들었어.’이미윤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리고 눈빛이 흔들렸다. 당혹, 두려움, 그리고 절망.“여보, 내 말 좀 들어봐요. 나... 나 일부러 미숙이랑 싸운 게 아니에요. 당신 혹시 서재 발코니에 서서 뭐라도 본 거예요?”“하, 이미윤. 아직도 거짓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해?”심정훈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난 발코니에서 본 게 아니야. 정원에 나가 바람을
“왜?! 대체 왜 그랬어! 미숙이는 당신 동생이잖아!”“동생? 그래요, 이미숙은 이씨 가문의 친딸이잖아요, 늘 나보다 사랑을 많이 받았고요! 당신도 그 여자를 좋아하잖아요. 도대체 왜요?”“그래서 그런 이유로 미숙이를 죽이려 했단 말이야?!”“맞아요! 부러워서 그랬어요! 질투도 나고요!”“이미윤, 당신 미쳤어! 정말 미쳤다고!”“하하하... 그래요, 나 미쳤어요. 20년 전부터 난 이미 미쳤겠죠! 특히 당신이 이미숙과 다정하게 붙어 있을 때마다, 난 달려가서 이미숙의 목을 조르고 싶었으니까요!”“오늘까지도 마찬가지였어요! 당신이 애틋한 눈빛으로 이미숙을 바라볼 때마다, 평생을 함께해도 부족할 것처럼 바라볼 때마다, 내가 얼마나 미쳐가고 있었는지 알아요?!”“심정훈, 당신은 이제 내 남편이에요. 우리가 한 가족이라고요! 20년이 넘었는데도 왜 아직도 이미숙을 못 잊는 거죠? 그 여자는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았어요. 그런데도 당신은 여전히 이미숙을 그리워하고 있잖아요!”“소진헌을 볼 때마다 질투가 나겠죠? 아마도 소 서방이 사라지길 바랐을 거예요, 안 그래요? 소진헌이 당신에게 있어 그런 존재라면, 나에게 있어 이미숙도 마찬가지예요.”“우리는 같은 사람이에요. 가질 수 없어서, 사랑에 미쳐서,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고 발버둥 치는 불쌍한 인간들이라고요!”심정훈은 차갑게 말했다.“당신 그 말 틀렸어. 내가 소진헌을 아무리 질투해도 절대로 그 사람을 해치진 않을 거야. 왜냐하면... 그 사람이 없다고 해도, 미숙이가 내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니까.”“하하하! 잘 말했어요! 그럼 우리 확실히 다르네요. 나는 이미숙을 없애버리면, 당신은 내 것이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하하!”“그러니까 결국 난 틀리지 않았어요. 이미숙이 사라지자, 당신은 나와 결혼했고, 우린 아이까지 낳았잖아요. 20년 넘게 함께 살았고요. 이거면 충분하지 않나요?”심정훈은 온몸이 굳었다.이미윤은 다시 한번 비수 같은 말을 내뱉었다.“만약 내가 냉혹한 킬러라면, 당신
[정은아, 새해 복 많이 받아.]남자의 목소리는 고요한 밤에 흐르는 첼로 선율처럼 낮고 깊었다.주위는 조용했지만, 재석의 목소리만이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정은은 귀가 간질거려 손끝으로 살짝 긁고는 핸드폰을 반대쪽으로 옮겼다.“선배님도 새해 복 많이 받아요.”그때, TV에서 새해맞이 카운트다운이 울려 퍼졌다.“5, 4, 3, 2...”[정은아, 고개 들어봐.]재석은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은은 바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하늘에서 가득 터지는 불꽃을 보았다.수많은 불꽃이 땅으로 쏟아지는 듯한 모습에 정은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어머, 이 많은 불꽃놀이를 어떻게 동시에 터뜨린 거지?”“어? 이거 일반 불꽃이 아니야! 전자 불꽃이잖아!”“뉴스에서는 아직 기술적인 한계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벌써 출시된 거죠?”“이미 해결된 거겠지!”“와, 너무 예쁘네! 화약 냄새 하나도 안 나!”“게다가 전자 불꽃놀이는 더 오래 머물고, 손만 뻗으면 닿을 것처럼 가까워 보여...”“앞으로 매년 설날마다 볼 수 있는 거야?”“당연하지! 개발한 기술은 이렇게 써먹야지!”이웃들도 모두 밖으로 나왔는데, 떠들썩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정은도 넋을 잃고 하늘을 올려다봤다.어둠 속에서 터지는 불꽃은 눈앞에서 피어나다 사라졌다.한순간이지만 그 순간은 너무나 찬란했다.아름다운 것은 사라진다 해도 후회할 필요가 없었다.꽃이 피고 지는 것도 다 자연의 법칙이니까.전화기 너머로 재석이 말했다.[정은아, 벌써 세 번째 해가 찾아왔어.]정은은 미소를 지었다.하늘에 터지는 불꽃을 바라보며 그녀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시간 참 빠르네요... 같이 설날을 두 번이나 보냈다니.”[영상통화 할 수 있어?]“네, 할 수 있어요.”곧 영상통화가 들어왔고, 정은이 바로 받았다.화면 속의 재석은 목폴라 니트를 입고 있었다. 조명이 비추자, 옆모습은 부드러운 빛에 감싸여 평소보다 온화해 보였다.그의 뒤로는 끝없이 터지는 불꽃이 있었고, 밤
“왜 안 좋은데요?”“마음이 쓰려서 가만히 못 있겠어,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아.”“기다려요, 어머니는 형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그래서 내가 나온 거지. 그런데 너 아까 누구랑 통화했길래 그렇게 웃고 있었던 거야?”재석이 되물었다.“그게 형과 무슨 상관인데요?”“야, 재석아. 그건 아니지. 내가 그래도 형인데, 형 체면 좀 세워주면 안 되냐?”“싫은데요.” 재석이 고개를 저었다.“흥, 꽁꽁 숨기는 거 보니... 혹시 여자친구냐?”“헛소리 하지 마요.”“와, 진짜 여자친구인가 보네!”“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요!”“어머니! 재석이가 여...”재석도 동시에 외쳤다. “어머니! 형이 또 담배...”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닫았다.“야, 너희 둘 왜 눈을 마주치고 그러냐?”조지훈이 웃으며 다가와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아까 뭐라고 소리쳤어? 무슨 중요한 일인 거 같은데?”재석과 지언은 동시에 말했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그게 형이랑 무슨 상관이에요?”말하면서 두 사람은 얼른 자리를 떠났다.“야! 도망가지 마! 뭐 그리 대단한 비밀이라고 나만 못 듣게 하는 건데?!”지훈도 두 사람을 쫓아갔다.세 사람은 앞뒤로 들어섰고, 그렇게 강서원과 맞닥뜨렸다.그녀는 솔로인 세 아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어디 갔다 오는 길이야?”세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바람 좀 쐬다 왔어요.”“집이 그렇게 답답한 거야?”“참, 지언아, 모레 나랑 같이 지씨 가문에 가자.”“왜요?”“설 인사해야지.”지훈은 피식 웃으며 끼어들었다. “겸사겸사 지씨 가문의 아가씨랑 맞선도 봐야 하지 않아?”지언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 갑자기 생각났네요. 모레 출장이 있어서 안 돼요. 어머니, 그냥 지훈이 데려가세요. 얘 엄청 관심이 있어 보이지 않나요?”“안 돼요!” 지훈은 손을 내저었다. “전 절에 가서 향을 올려야 해요. 올해 우리 집 운세는 제 손에 달렸다고요! 지씨 가문이 일부러 맞선 핑계 대고 우리 집 자리를
친척과 친구들이 묻자, 서영숙은 그저 도겸이 출장을 갔다며 핑계를 댔다.하지만 다들 바보가 아니었다. 누가 섣달 그믐날에 출장을 가겠는가?그렇다고 굳이 분위기를 깨며 캐묻는 사람도 없었다.서영숙은 문득 예전이 떠올랐다.도겸이 사업에 성공해 승승장구하던 시절, 그녀도 덩달아 고개를 들 수 있었다.친척이며 친구들이 서영숙을 볼 때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대단한 아들 하나 두셨네요.”“그러게, 정말 훌륭한 아들 하나 낳았어.”세정도 예쁘고 다정하며, 효심까지 깊어 곁에서 명절 손님맞이까지 도왔다.그런 모습을 보며 다들 세정을 ‘우아하고 품위 있다’며 감탄하곤 했다.정은은 강씨 가문의 명절 식탁에 앉을 자격조차 없었지만, 해마다 빠짐없이 선물을 보냈다.하나하나 정성이 가득하고, 그 어떤 것도 허투루 준비한 것이 없었다.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과거의 일로 되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서영숙은 마음이 공허해졌다.‘만약 그때, 서정은이 우리 가문에 들어오는 걸 막지 않았다면, 도겸도 지금처럼 변하진 않았겠지?’‘우린 여전히 화목한 가족으로 함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웃음이 넘치고, 모자간의 정이 변함없는 그런 모습으로.’서영숙은 지친 듯 눈을 감았다.그녀는 지금 후회를 하고 있었다. 뼈저린 후회를. 그러나 이미 돌이킬 길이 없었다....“도겸이 형, 정말 혼자 들어갈 거예요?”“그래.” 도겸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너 먼저 가.”“정말이죠? 그럼 나 먼저 간다?”“그래, 빨리 가.”그가 별장 문을 여는 걸 보며 선우는 한숨을 내쉬었다.섣달 그믐날, 그는 본래 가족들과 밥을 먹고, 카드놀이도 하고, 설 특집 방송을 보며 한가롭게 보낼 예정이었다.그러나 술집 매니저의 다급한 전화 한 통에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도겸이 취했던 것이다.두 사람 모두 그 술집의 단골 손님이었기에, 매니저는 가장 먼저 선우에게 연락했다.하는 수 없이 그는 배탈이 났다며 핑계를 대고 가족들 몰래 빠져나와 도겸을 데리러 갔다.하지만 오래 자리를 비
가족사진도 찍었고, 부모님도 만났고, 심지어 함께 설까지 보냈다.지난번처럼 밥상만 찍고 겨우 정은의 반쪽 얼굴만 찍은 게 아니라, 이번엔 당당하게 온 가족이 다 같이 찍은 사진이었다.‘이 정도면 단순히 사귀는 게 아니라, 결혼 이야기까지 오가는 분위기 아닌가? 이러니 도겸이 형이 미쳐버릴 만도 하지.’선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현빈에게 전화를 걸어 떠보기로 했다.‘만약, 만약 정은 누나가 현빈이 형 가족을 만난 게 단순한 오해라면, 도겸이 형도 술로 속을 달랠 필요가 없을 거야.’“현빈이 형,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이제야 새해 인사 하네요!”[너도 새해 복 많이 받아, 선우야.]“집에서 설 보내고 있는 거예요? 아저씨 아주머니께도 안부 전해줘요.”[그래, 고맙다.]“우리 집이랑 형 집도 가까운데, 기다려요. 좋은 술 두 병 갖다 줄게요.”[아냐, 난 지금 본가에 있는 게 아니야.]“네?” 정우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럼 어디에 있는 거죠?”[할아버지 댁에.]“아.” 선우는 일부러 맞장구쳤다. “이 술 진짜 괜찮은 건데, 그럼 아저씨랑 아주머니께 보내드릴게요. 형이 돌아오면 같이 마시면 되니까요. 그런데, 외갓집에서 설을 보내면 아무래도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가는 거 아니에요?”반대편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선우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돌렸다.“아니, 어른들도 좀 다르게 말씀하시면 안 되는 건가요? 매년 같은 이야기, 똑같은 말만 계속 반복하니 진짜 질린다니까요.”현빈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너에 비하면 난 오히려 편한 거야. 올해는 결혼 이야기 한 마디도 안 꺼내셨거든.]이춘재와 봉수진의 관심은 오랜만에 돌아온 딸에게 쏠려 있었으니, 현빈을 신경 쓸 틈이 없었던 것이다.선우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결혼 이야기를 안 꺼내셨다고? 그럼 이미 결혼할 사람이 있다는 뜻 아닌가?!’‘도겸이 형이 이 말 들으면 완전히 미쳐버릴지도 몰라.’...별장 안.도겸은 불을 켜며 안으로 들어왔다.밖에서 눈바람
그러나 들어온 사람은 정은이 아니라 경혜였다.남자의 어두운 표정을 본 여자는 가슴이 철렁하더니 급히 해명했다.“선우 씨가 전화했어요. 도겸 씨가 취했다고요. 혼자 두는게 걱정돼서 나보고 와보라고 했고요.”그러면서 조심스럽게 도겸 앞으로 다가갔다.“괜찮아요? 그렇게 많이 취한 것 같진 않은데요?”남자는 눈에 스친 실망을 감추고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응.”경혜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럼... 난 먼저 가볼게요.”“응.”여자는 뒤돌아서 나가려 했다.그때였다.“꺄악!”밖에서 갑자기 비명이 터져 나왔다.도겸은 미간을 찌푸리며 급히 나가보았다.경혜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는 신발을 벗고 발목을 살펴보았다.“괜찮아? 어디 다친 거 아니야?”남자의 목소리에 놀란 경혜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괜찮아요, 괜찮으니까 별거 아니에요.”도겸은 그녀의 발목을 훑어보며 무심하게 말했다.“부었네.”“아, 그냥 살짝 접질린 거니까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경혜는 일어서려 했다.그러나 발에 힘을 주는 순간, 찌릿한 통증이 몰려왔고, 그녀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남자는 미간을 더욱 세게 찌푸렸다.그럼에도 경혜는 애써 태연한 척 웃고 있었다.“정말 괜찮아요. 조금 있으면 나아질 거예요.”그러나 다음 순간, 도겸은 말없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거실로 데려갔다.경혜는 순간 멍해졌다. 하지만 속으로는 기쁨이 넘쳐났다.‘제대로 걸렸군!’도겸은 원래 홈닥터를 부르려 했지만, 연말인 데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는 걸 떠올리고는 그만두었다.대신 경혜에게 물었다.“심하게 다친 거야?”“아니에요, 괜찮아요. 조금 쉬면 나아질 거예요.”경혜가 그렇게 말했음에도 도겸은 여전히 약상자를 꺼냈다. 안을 뒤적이더니 연고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이거 발라.”“아, 고마워요.”십 분 후.경혜가 발목을 문지르며 말했다.“이거 바르니까 처음엔 시원하더니 점점 따뜻해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
아침 햇살이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들었다. 부드럽게 퍼진 빛이 정은의 잠든 옆얼굴을 은은하게 감쌌다.살랑이는 바람에 커튼 끝자락이 가볍게 흔들렸고, 고요한 침실에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아버지?”이춘재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직 자고 있었구나? 그럼 내가 이따가 다시...]“아뇨, 괜찮아요. 이제 깼어요. 요즘 집에서 쉬고 있어서요, 실험실을 좀 멈췄거든요.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전화기 너머에서 이춘재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어젯밤에... 내 친구 하나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단다. 병원에서 못 버티고... 그냥 그렇게.]‘헉...’[오늘 아침에 그 집 식구한테 연락이 왔어. 장례 준비도 해야 하고, 남은 가족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니 내게 좀 도와달라고 하더구나. 그 친구는 진짜, 훅 떠났지만 남겨진 식구들은... 참 마음이 아프지.]이춘재는 말을 멈췄고, 한참 후에 덧붙였다.[원래는 오늘 네 외할머니가 병원 가는 날이라 내가 같이 가기로 했는데... 현빈이는 출장이란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부탁할 사람은 너밖에 없더라.]정은은 웃으며 말했다.“외할아버지, 그게 어떻게 부탁이에요. 당연히 제가 가야죠. 외할머니랑 병원 가는 건 제 몫이에요. 외할아버지는 마음 놓고 다녀오세요.”[그래, 그래. 고맙다, 정은아.]...오전 9시. 정은은 외할머니댁 앞에 도착했다. 봉수진은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치고 작은 가방을 손에 든 채 문 앞에 서 있었다.그 옆엔 이춘재가 말없이 함께 서 있었고, 두 사람은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당신 진짜 왜 그래요? 정은이는 실험실에서도 바쁜 애인데, 이런 일까지 시켜서 되겠어요? 괜히 애 걱정하게 만들고, 또 미안하게 만들고...”봉수진의 잔소리가 이어졌고, 이춘재는 구겨진 어깨로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맞아, 당신 말이 다 맞아. 근데 정은이가 요즘 쉰다길래... 그냥 부탁한 거지 뭐...”“쉰다고 병원까지 같이 가야 해요? 그
수민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한 대 갈겼다.짝!동건은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이마를 맞았다.“야! 미쳤어?!”수민은 인상을 팍 구기며 외쳤다.“너 귀신이야 뭐야? 소리도 없이 뒤에서 들이대고... 맞을만 하니까 맞은 거지.”“뭐? 지금 그딴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뭐야? 딴 남자 생각하다가 놀란 거 아냐? 장은혁? 그 잘난 척하는 새끼?”수민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맞아. 잘생겼지, 말도 잘해, 심지어 마술도 하지. 매력 넘치는데?”“푸... 마술? 그건 여자들 꼬시려고 배운 거지. 허세로 가득 찬 새끼야.”“오히려 더 좋지 뭐... 허세라도, 적어도 표현은 하잖아. 넌 뭐 있어?”동건은 이를 악물었다.“그런 애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딱 봐도 겉멋만 잔뜩 든 애송이잖아.”“내가 좋으면 된 거지. 근데... 잠깐만.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수민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그냥.”“고동건!!!”“야, 소리 좀 그만 질러. 힘 좀 아끼라고. 이따가 쓸 데가 있을 테니까.” “꺼져.”수민은 문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동건은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대신, 그녀를 천천히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너 요즘... 왜 이렇게 자꾸 도망치는데? 솔직히 말해봐. 내가 그리웠지?”“웃기지 마.”“아닌데... 지금도 눈 흔들리는 거 보이거든.”수민은 숨을 고르며 조용히 말했다.잠시 후, 그녀는 동건에게 그대로 안겨 침대 위로 내던져졌다.동건은 셔츠 단추를 풀며 천천히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한다고 했잖아. 내가 농담하는 사람으로 보여?”수민은 몸을 살짝 일으키며,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너 하나로 되겠어?”“해보면 알겠지.”밤은 길었고, 봄기운처럼 뜨거웠다.누군가는 그 열기를 마음껏 즐겼고, 누군가는 답답한 숨을 눌러 삼켰다....불 꺼진 침실. 어둠 속,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창문 너머로 달빛만이 희미하게 커튼 틈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왔다.재석은 거실 창 앞에 서 있었다. 등
부재중 10통 중 9통은 고동건, 그리고 나머지 1통...‘어? 우리 조재석 교수님?’수민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톡 알림도 확인했다.읽지 않은 메시지 42개.대부분은 역시나 고동건.수민은 손가락으로 휙휙 넘기며 대충 읽었다.[야, 또 남자랑 밥 처먹냐?][여사친 모임엔 남자 안 끼운다며?][그 장은혁, 꽃미남 새끼 남자 아니냐?][조수민 너 진짜 표리부동이다?] [답장 안 해?][전화도 안 받아? 10초 준다!][기다려, 오늘 밤에 너 좀 혼나야겠어!!]수민은 손가락으로 한 번에 쭉 밀어내고, 심드렁하게 한 마디만 보냈다.[꺼져!!!]10초도 안 돼서 동건한테서 바로 또 메시지가 왔다.[답장할 줄은 몰랐네...][넌 진짜 사람 마음 찢어놓고 아무렇지 않지?] [아냐, 넌 원래 마음이 없지.][...]수민은 무표정하게 창을 닫았다. ‘이 인간은 진심으로 질린다...’그리고 재석과의 메시지함을 열었다.단 두 줄.[정은이랑 어디서 밥 먹었어?][장은혁도 함께였어?]수민의 눈썹이 절로 올라갔다.‘어라...?’‘우리 조재석 교수님이? 이런 문장을? 이렇게 빠르게? 이렇게 직접적으로?’‘우리 조 교수님... 평소에 ‘응’ 하나 치는 데도 심장 박동 조절하듯 하던 사람이었는데...’게다가 이 두 문장, 보통 사람이 보냈다면 ‘그냥 궁금했나 보다’ 하고 넘겼을 거다.하지만, 그게 ‘조재석’이라는 이름으로 오면 느낌이 전혀 달랐다.‘이거... 약간... 삐쳤다고 읽어야 하나?’수민의 눈이 반짝였다.‘뭐야, 이거 진짜네?’그녀는 살짝 웃으며 미용실에서 찍어둔 사진을 열었다.정은과 은혁이 나란히 앉은 각도, 분위기도 꽤 그럴싸한 장면.‘자, 실험 들어가자.’사진을 톡에 업로드. 손끝으로 부드럽게 터치.전송 완료.바로 이어 핸드폰에 내장된 스톱워치를 켰다.“시... 작!”1초, 2초, 3초... 5초...띵-[지금 어디야?]수민은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내려놨다.‘오케이, 확정. 조재석 교수님
“은혁아, 우리 먼저 가볼게.”은혁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려던 찰나, 정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은혁 씨, 같이 식사하시죠? 어차피 저도 아직 안 먹었는데요.”“마침 예약도 해뒀으니까 괜찮다면 같이 가요.”“정, 정말요?! 괜찮을까요?”은혁은 말끝이 떨릴 정도로 들뜬 기색이었다.수민은 표정으로 정은에게 물었다. ‘진심이야?’정은은 눈빛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수민은 한숨 쉬듯 웃으며 말했다.“좋지 뭐... 사람 하나 늘어난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 같이 가자.”은혁은 기뻐서 입꼬리를 다 못 내렸다. ‘정말 같이 가는 거야...? 나 지금 약간... 꿈꾸는 거 아냐?’...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직원이 안내한 자리로 세 사람이 들어갔다. 따로 마련된 룸이라 분위기도 아늑했다.음식이 나오기 전, 은혁이 갑자기 말했다.“기다리는 김에... 작은 마술 하나 보여드릴까요?”수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마술도 해? 그러고 보니, 정은이 외할머니 생신 때도 뭐 하나 보여줬었지.”“이번엔 새로 배운 거예요.” 은혁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해봐, 해봐!” 수민은 벌써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 준비 완료 상태로 들고 있었다.“도구 필요해?” 그녀가 묻자, 은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옆 캐비닛에서 종이 티슈 한 팩을 꺼냈다.그중 다섯 장을 쏙쏙 뽑아냈다. 마침 티슈에 프린트된 꽃무늬가 하나하나 다 달랐다.그는 정은을 향해 말했다.“정은 씨, 가장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골라주세요.”정은은 망설이지 않고 무심하게 한 장을 집어 들었다.은혁은 그걸 받아 조심스럽게 반으로 접고 말했다.“잘 봐요.”다시 펴서 말한 뒤, 조용히 티슈를 손안에서 뭉쳤다. 그리고 그 주먹을 천천히 펴자 손안에는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선물이에요.”은혁은 웃으며 그 꽃을 정은에게 건넸다.“진짜 꽃이에요?”정은은 놀란 듯 꽃을 받았다. 손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다.‘이거... 어떻게 한 거지?’수민은 슬쩍 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