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연구와 학술 경기는 별개야. 더구나 올해 해외 교류 연구진을 확정했고, 지금도 긴박하게 경기 훈련을 진행하고 있지. 지금 임시로 선수를 교체하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야.”부총장은 한숨을 내쉬었다.“저도 다 알고 있지만, 현재의 상황으로 볼 때, 저희 학교는 이미 5년 연속 외국 대학과의 경기에서 졌습니다. 올해 또 진다면...”국내 각 대학교 간의 경기가 아니라, 국내외의 싸움이었다.같은 나라 학생들에게 지는 것은 수치스럽지 않고 오히려 괜찮았다.하지만 외국인에게 진다면...국내외 대학 간의 우호적인 경기이니, 그들이 남보다 못하다면 당연히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그러나 이것은 국가의 명예, 과학연구수준, 민족 자신감과 관련된다.“총장님, 올해는 정말 질 수 없습니다.”송영한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소정은 팀이 출전하면 반드시 이기는 건 아니잖아? 그건 어떻게 확신하는 건데?”“확신할 수 없지만, 위기를 직면할 때, 기발한 계략을 써야 승리할 수 있죠!”...무한 실험실, 휴식 구역.“에취! 에취! 에취!”민지는 연속 재채기를 세번 하더니 코를 비비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틀림없이 누군가 뒤에서 내 험담을 하고 있는 거야...”서준은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건 아... 에취!”“봐봐!”민지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서준을 가리켰다.“너도 시작했네!”서준은 쓰던 휴지를 뭉쳐 쓰레기통에 버리더니 담담하게 말했다.“난 감기에 걸린 거야. 만약 정말 누군가가 험담을 했다면, 정은 누나는 왜 멀쩡한...”“에취!” 정은은 궁색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그게... 나도 왜 이렇게 공교로운지 모르겠지만, 난 확실히 감기에 걸리지 않았어...”서준은 말문이 막혔다.민지는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헤헤, 나 정말 똑똑해.”그녀는 언제나 쉽게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서준은 이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개학하자마자 ‘네이처 바이오테크놀러지’ 쪽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니. 지금은 이미 전 대학원에
서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아, 신경 쓰지 마!” 민지는 가볍게 팔을 저으며 말했다.“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요. 학교에서 정말 뭔가 의도가 있다면 알아서 연락 올 거예요. 그럼 그때 가서 대응하면 되지. 여기서 괜히 혼자 추측해봤자 뭐하겠어요?”정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어차피 문제가 나타나면 그때 가서 해결하면 되지. 뭐가 두려워?”“응! 맞아요! 우리가 또 ‘네이처 바이오테크놀로지’에 논문을 발표했잖아요! 이렇게 대단한 일을 축하하지 않으면 안 되겠죠?”“그래.”민지가 서준을 바라보자,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너무 좋네요! 오늘 시내 나가서 맛있는 거 먹어요! 도심에 새로 생긴 레스토랑이 있는데, SNS에서 엄청난 호평을 받고 있어요. 설 보낼 때부터 가보고 싶었어요!”민지의 맛집 탐지 레이더가 작동하기 시작했다.실험실이 교외에 위치해 있어서, 그녀는 도심을 갈 때마다 항상 ‘시내에 간다'고 표현했다.서준은 풀이 죽었다. “다른 방식으로 축하할 순 없어?”“양식도 괜찮아.” 민지가 대답했다.서준은 말문이 막혔다.“아니면 샤브샤브? 매운탕? 난 다 괜찮아.”결국 세 사람은 그 새 레스토랑을 찾아갔다.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벌써 저녁 8시가 되었고, 도시의 불빛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참, 진일 선배는 왜 안 보이는 거죠?” 민지는 문득 실험실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본 진일의 깨끗한 실업대가 떠올랐다.서준이 말했다. “개학 후로 한 번도 못 봤는데. 누나는요?”정은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못 봤어.”“이상하네...” 민지가 중얼거렸다. “졸업을 앞둔 이상, 수업도 없을 텐데. 진일 선배는 당연히 실험실에 와야 하는 거 아니에요?”설 전에 진일은 두 개 데이터를 처리한 다음, 논문을 완성해 발표할 계획이라고 했었다.정은이 추측했다. “아직 학교에 안 온 거 아니야?”서비대학교 졸업을 앞둔 학생들은 비교적 자유로웠는데, 온라인 등록만 완료하면 등교 시간이 조금 늦어도 괜찮았다
재운은 이런 위험을 감수할 리 없었다.“그래서 계속 생각해봤는데, 너무 이상해요.”정은은 이 말을 듣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확실히 이상하네.”“그 3학년 선배 말로는, 진일 선배 부모님이 건강이 안 좋으시고 자주 편찮으시다고 했어요. 그래서 학교에 늦게 오는 거 아닐까요?”서준은 차분하게 분석했다.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잖아. 전에도 늦은 적 없으니 이렇게 갑자기 늦을 리 없어. 다른 돌발 상황이 생긴 게 분명해.”“다른 상황?”“응. 예를 들어 부모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어 떠날 수 없거나, 집안에 무슨 변고가 생겨서 올 수 없다든가.”“만약 진일 선배의 집안 문제라면, 재운이까지 안 온 건 어떻게 설명하지?”“그건...”정은이 말했다.“추측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지금은 직접 선배에게 연락하는 수밖에 없어.”그러나 이후 며칠 동안 세 사람은 전화, 이메일, 문자, SNS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진일의 답장이 없었다. 문자는 모두 바다에 빠진 돌처럼 소식이 없었다.“이젠 어떡하죠?”개학한 지 벌써 2주가 지났다. 다행히 정은은 오미선에게 설명했고, 오미선은 학교 측과 협의해 두 사람의 처분을 면하게 했다.“3주까지만 기다려줄 수밖에 없어. 그 이상은 안 돼.”오미선이 말했다....“벌써 2주 지났는데... 남은 일주일 안에 안 오면 정말 제적당하는 거잖아요?”민지는 초조해하며 실험실을 왔다갔다했다.서준이 말했다.“우리도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이젠... 운명에 맡길 수밖에.”“하지만... 정은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요?”정은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선배 집 주소부터 찾아보자.”“주소를요?” 민지가 놀라며 물었다. “직접 찾아가려고요?”“무슨 일인지 확실히 알아야 해. 가면 바로 알 수 있을 거야.”“나도 갈래요!”“여자 둘이 가기엔 위험하니 나도 함께 가요.”“네가?” 민지는 서준을 훑어보았다. “너 싸움 잘 해?”‘얘는 자신이 무슨 조폭인 것처럼 말하네.’“꼭 싸
J시의 건조한 기후와 달리, Y시는 전형적인 습한 기후였다.고속열차가 도착할 때쯤,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정은 일행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얼굴을 스치는 찬바람에 목을 움츠렸다. 추위가 모공마다 스며들어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했다.민지는 목도리를 꽉 조이며 어깨를 움츠린 채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마치 살찐 메추라기와 같았다. “정은 언니, 빨리 가요. 열차역은 사방으로 뚫려서 너무 추워요.”입으로 말을 할 때마다 하얀 김이 서렸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먼저 역을 나가자.”커다란 역도, 북적이는 인파도 없는 작은 시골역은 어쩐지 을씨년스러웠다. 부유하지 않은 마을답게 한적하기 그지없었다.“방금 알아봤는데, 역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버스는 하루 한 대뿐이래요. 막차는 이미 떠났으니 오늘은 탈 수 없어요.”서준이 냉정하게 분석했다. “오늘 내로 가려면 승합차를 타거나 전세를 내어 차 한 대 빌릴 수밖에 없어요.”“전세차?”정은이 물었다.“호객하는 사설 승용차예요.” 서준이 보충했다.정은은 저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두워지기 전에 이곳에서 하룻밤 묵고, 내일 아침에 버스를 타는 게 낫지 않을까?”민지는 즉시 동의했다. “그래요! 낮에 움직이는 게 안전할 거예요.”서준도 수긍했다.세 사람이 작은 여관에 체크인할 때는 이미 밤 8시, 거리는 죽은 듯이 고요했다. 민지가 창문을 열자, 몇 안 되는 가게 불빛만이 어둠을 가르고 있을 뿐이었다.“정은 언니... 너무 조용해서 소름 끼쳐요...”정은은 인스턴트 푸드와 라면을 건넸다. “이것밖에 없어. 참아.”원래는 바비큐를 먹으러 가려 했지만, 가게 주인이 철판 닦던 수건으로 고기를 닦는 걸 보고 세 사람은 식욕이 떨어져 버렸다.민지는 라면 냄새를 맡으며 환호했다. “맛있겠다.”“너답지 않네.” 정은이 웃었다.“왜요?”“입맛이 까다로운 네가 라면을 좋아하다니.”“배고프면 뭐든 맛있죠.” 민지는 후루룩 라면을 들이켰다.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누
다음 날 아침, 세 사람은 516번 버스에 올라탔다.그런데... 차 안은 어르신들로 가득 찼다. 광주리와 바구니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안에는 갓 딴 채소와 농산물이 가득했다. 민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 거죠?”세 사람은 승차하자마자 중간으로 밀려났다. 발밑에는 광주리들이, 옆에는 앉지 못하고 서 있는 노인들이 바글거렸다. 상대방이 하품만 해도 아침에 뭘 먹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정은 언니, 무서워요...” 민지는 눈물이 맺힌 채 정은을 찾았지만, 이미 뒤로 밀려난 정은 대신 서준과 눈이 마주쳤다.“너...”“쮼, 나 무서워...”서준의 마음이 약해졌다. “이...이쪽으로 와.” 그는 옆을 가리키며 자리를 비켰다.민지가 다가오자 서준이 설명했다. “아침에 채소를 팔려고 나가시는 거야.”그리고 그 노인들은 딱 봐도 시골 사람들이었다.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민지를 밀쳤고, 그녀는 앞으로 넘어졌다. 서준은 재빨리 품으로 민지를 안으며 그녀가 의자에 부딪히는 걸 막았다.“괜찮아?” 서준은 긴장해하며 민지를 살폈다.“서준아, 숨... 숨 막혀...”서준이 즉시 창문을 열자, 주변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추운데 창문을 왜 열어!”“머리 아프니까 닫아!”“빨리 닫으라고!”서준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제 친구가 숨이 막혀서 그런 것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뚱뚱하면 버스 타지 말지 그래!”“우리 노인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민지는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떨구었다.서준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큰 소리로 말했다. “몸무게와 상관없이 표 샀으면 버스를 탈 권리가 있어요. 여러분의 광주리들도 자리 많이 차지하시던데, 광주리의 표까지 사신 거예요?”차 안이 조용해졌다. 기사도 거울로 서준을 흘끗 보았다.“요즘 애들 입만 살았네...” 누군가 중얼거렸다.서준은 태연한 표정이었다.민지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숨을 고르더니 감탄했다. “쮼, 너 방금 완전 멋있었어!”
버스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지나 마침내 읍내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세 사람은 동시에 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모두 방금 악몽 같은 경험을 다신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이제 도착한 거죠?” 민지는 산 음료수를 몇 모금 마신 뒤에야 말문을 열었다.정은은 고개를 저었다. “여긴 읍내야. 선배네 집은 안으로 더 들어가야 해.”“네? 또 버스를 타야 한다고요?!” 민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서준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마을까지 가는 버스가 없어.”민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그는 한 마디 덧붙였다. “삼륜차만 있거든.”“뭐??”...10분 후. 민지는 삼륜차의 요동에 수천 번 흔들거리다 모퉁이를 돌 때 또 양 옆으로 넘어질 뻔했다. “이게 ‘약간' 흔들리는 거라고?”서준은 창백한 얼굴로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내비 보니까 거의 다 왔어. 좀만 더 힘내자!”그도 이 길이 이토록 험난할 줄은 몰랐다. 아스팔트 대신 수리가 되지 않은 흙길이 계속 이어졌다.“너 괜찮아? 안색이...” 민지는 걱정스럽게 물었다.서준은 손을 저으며 버텼다. “괜, 찮...”“멀미 난 거 아니야?” 정은의 물음이 떨어지자마자, 서준은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토했다.정은과 민지는 할 말을 잃었다.서준은 다 토한 뒤, 진정하려는 듯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진짜 괜찮아요!”정은과 민지는 눈빛을 교환했다.‘지금 믿어주는 척이라도 해야 하나?'‘글쎄요.’민지는 가방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서준에게 건넸다. “시큼한 사탕 하나 먹어. 그럼 속이 괜찮을 거야.”“사양할게.” 서준이 거절하려는 순간, 민지는 억지로 그의 손에 쥐어줬다.“뭐가 그렇게 쑥스러워? 그냥 먹어!”“아니...”“알아, ‘괜찮다'는 말 그만 좀 해.” 서준이 마지못해 받아먹자, 민지는 정은에게 눈짓했다.‘서준이 쟤 자존심이 너무 강한 것 같아요.'정운도 눈짓으로 답했다.‘서준이 너무 놀리지 마.'‘뭐가 어때서요!'옆에 있던 서준은
정은이 대답했다.“저희는 그 아드님을 찾으러 왔어요.”“남진일이?”“네! 그 아이를 아세요?”“아는 건 아니야. 그래도 우리 마을에서 처음으로 대학에 합격한 아이이고, 심지어 명문대학에 붙었으니 나름 기억하고 있지.”민지가 물었다.“저희는 진일 선배와 같은 과 후배예요. 아저씨, 저희를 그곳으로 데려다 주실 수 있어요?”기사는 이상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더니 잠시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마침 돌아가는 길이니까 너희들을 남 씨 집 앞에 두면 되지.”“감사합니다!”서준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그 집안의 구체적인 상황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왜 절름발이 남 씨라고 부르시는 거예요?”“절름발이 때문이겠지, 길을 걸을 때 절뚝거리기 때문에 모두가 붙여준 별명이야.”이야기를 나누면서, 세 사람은 진일의 집안 형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만성병이 있어 일년 내내 약을 먹어야 했다.집에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진일의 아버지 하나밖에 없었는데, 일찍 공사장에서 부상을 입고 한쪽 다리를 절고서야 핍박에 의해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근년에 과수를 심기 시작하면서 수확이 좋을 때도 있었다.그러나 집에 장기간 약을 먹어야 하는 환자가 있는 데다가, 먼 J시에서 공부하면서 일상생활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아들이 있었기에 남 씨는 도무지 돈을 모을 수가 없었다.세 사람은 다 듣고 침묵했다.그들은 진일이 전에 송지혜에게 속고 착취당했다는 것만 알았을 뿐, 그의 가정 조건이 좋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도 짐작했지만,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곧 삼륜차가 멈추었다.“다왔어. 절름발이의 집은 바로 요 앞에 있어. 너희들 스스로 걸어가. 난 문 앞까지 바래다주지 않을게.”“네, 감사합니다.” 정은은 핸드폰으로 돈을 지불했다.눈앞에 낡아빠진 구식 시골집을 보면서 세 사람 모두 마음이 좀 복잡했다.삼륜차는 줄곧 읍내를 지나 도중에 다른 한 마을을 지났다. 멀리 바라보니 전부 몇 층 되는 스스로 지은 주택이
여자아이는 문을 쾅 닫았고, 발소리를 들으니 상황을 살펴보러 달려간 것 같았다.민지는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우리를 이렇게 경계하다니.”서준은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느꼈다.금방 마을에 도착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자기집 문어귀에 서서 그들 일행을 살펴보았는데, 세 사람이 남진일의 집을 향해 걸어가자, 사람들의 눈빛은 순식간에 이상해졌다.심지어 삼삼오오 모여 작은 소리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멀리 떨어져 있던 서준은 비록 알아듣지 못했지만, 사람들의 표정에서 뭔가를 알 수 있었다.의심, 의아함으로 가득 찬 따가운 시선...곧 문이 다시 열렸다.이번에 문을 연 사람은 진일이었다.그는 주방에서 동창이 자신을 찾는다는 말을 듣고, 가장 먼저 정은 그들을 떠올렸다.너무 놀란 진일은 그릇 하나까지 깼다.문을 열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정은 일행이 서 있었다.“너희들 무슨 일로 찾아온 거야?!”진일의 눈에는 놀라움이 번쩍였지만, 곧 경악해졌고, 또 걱정을 내비쳤다.J시에서 마을까지 오려면 진일은 중간에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많은 길을 돌아서 와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정은 그들이 찾아오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다.‘내가 대체 뭐라고...’“괜찮아요?” 정은은 위아래로 진일을 훑어보았다.팔다리는 멀쩡했고, 정신도 나름 괜찮아 보였지만...추운 날, 진일은 뜻밖에도 얇은 외투밖에 입지 않았다. 실험을 하고, 기자재를 들고, 키보드를 두드려야 할 손이 빨갛게 얼었다.목은 심지어 목도리조차 두르지 않았다.민지는 눈을 부릅뜨더니 저도 모르게 말했다.“춥지도 않은 거예요?!”진일은 머리를 긁적였다.“습관이 되어서 안 추워.”말을 마치자 진일은 그제야 정은 그들을 집으로 초대했다세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자, 진일은 불을 켰다.어쩐지 안이 어두컴컴하나 했더라니, 불을 켜지 않았던 것이다.정은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주 낡은 기와집, 거실 한 칸, 침실 세 칸, 그리고 뒤뜰이 주방과 연결되어 있었다.위층은 널빤지로 한 층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