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아는 문을 나서자마자 재석의 뒷모습을 보았고,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그래서 즉시 입을 열어 재석을 불렀다.뜻밖에도 재석과 함께 고개를 돌린 사람은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정은일 줄이야.“정은이도 있었구나.” 수아는 싱겁게 웃으며 재석의 다른 한쪽에 멈춰 섰다.정은은 상대방의 냉담한 태도를 알아차리고, 그저 담담하게 웃으며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수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재석을 바라보았다.“교수님, 내려가서 식사하시게요?”“음.”“저도 가려던 참이었는데!”말이 끝나자, 현장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재석은 수아를 초대하지 않았고, 인사치레조차 하지 않았다.이때의 침묵은 거절과 다름없었다.수아는 마치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재석이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말했다.“교수님, 우리 같이 먹으러 갈까요?”“미안, 나 약속 있어서.”말이 끝나자 엘리베이터 두 대가 동시에 열렸다.수아는 뻣뻣하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그리고 재석은 정은을 데리고 왼쪽의 다른 한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금속문이 천천히 닫히면서, 수아의 질투로 일그러진 얼굴을 조금씩 가렸다.“풉...”정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재석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왜 그래?”“선배님, 너무 티가 나잖아요.”“에헴...” 남자는 가볍게 기침하여 어색함을 숨겼다.1층에는 식당이 아주 많았는데, 정은은 그중 한 가게를 골랐다.“SNS에서 이 가게가 제일 맛있다고 해서요. 중식도 그렇게 잘 한데요. 같이 먹지 않을래요? 내가 살게요.”주최측은 하루 세 끼 모두 책임졌지만, 오직 한식당의 뷔페만 무료였다.다른 중식당과 양식은 모두 스스로 돈을 내야 했다.“응, 네가 결정하면 돼. 하지만, 이건 내가 살게.”두 사람은 종업원을 따라 창가에 앉았다.시간이 아직 일러서인지, 손님이 많지 않아 주위가 아늑했다.정은은 간판 요리 몇 가지를 주문한 후, 재석에게 메뉴를 건네주었다.“선배님도 음식 시키죠?”재석은 받은 뒤 입을 열었다.“그럼 차슈 하나,
내성적이고, 조용하고, 온화하고, 청순했다.재석은 자기도 모르게 그 모습에 빠졌다.“선배님? 선배님?!” 정은이 재석을 불렀다.재석은 그제야 정신을 번쩍 차렸다.“미안, 방금 뭐라고 했어?”“풉!” 정은은 참지 못하고 웃었다.재석은 더욱 멍해졌다.“내 얼굴에 뭐가 묻었냐고 물었어요. 왜 날 계속 쳐다보는 거예요?”재석은 잠시 멈칫하더니 정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뭐 묻긴 했지.”“네?” 이번에는 정은이 멍해졌다. “뭔데요?”“미모.”몇 초 끝의 고요함 뒤.“하하하하... 선배님도 이런 농담할 줄 아는 거예요?”“에헴!”‘농담이 아니라 사실인데.’재석은 마음속으로 묵묵히 말했다.두 사람은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이렇게 적게 입었으니 춥지 않아?”“아니요, 숄 있잖아요.”“이 작은 천을 말하는 거야?”“그럼요! 바람을 막기엔 충분해요!”“음. 추우면 말해. 내가 외투 걸쳐줄게.”“네.”정은은 동산 타워 앞에 가더니, 전의 관광객들이 사진 찍었던 곳에 서서 고개를 돌려 재석을 보았다.재석은 바로 물었다.“사진 찍어줘?”정은은 눈빛이 반짝거리더니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관광지에서 사진을 찍는 것을 싫어하는 여자애는 없을 것이다. 물론 정은도 예외가 아니었다.재석은 핸드폰을 꺼냈다.“준비됐어?”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셋, 둘, 하나!”사진 속의 소녀는 가드레일 앞에 서 있었다. 멀리는 눈부시게 빛나는 남산 타워였고, 바람이 소녀 귓가의 긴 머리를 불었다. 정은은 한 손으로 머리를 정리하며, 다른 한 손은 숄을 꼭 감고 있었다. 화면이 고정되는 순간, 카메라를 보지 않았단 것을 깨달은 정은은 미소를 머금으며 재석을 바라보았다.재석은 부동한 각도에서 초점을 바꿔가며 연속 몇 장이나 찍었다.정은이 다가오자, 재석은 자신의 핸드폰을 건네주었다.“봐봐, 잘 찍혔는지.”정은은 원래 아무런 희망도 품지 않았다.‘남자들의 사진 찍는 기술은 정말...’그러나 사진을 보자마자 정은은 깜짝 놀랐다.“선배님,
정은은 사진을 올린 다음 바로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그래서 남들이 어떤 댓글을 달았는지 전혀 몰랐다.시간도 늦었기에 두 사람은 호텔로 돌아갔다.뜻밖에도 호텔 로비에서 다시 수아를 만날 줄이야...“교수님, 정은아.”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특히 두 사람이 나란히 대문으로 들어와 웃으며 말하는 것을 보니, 수아는 속이 답답했다남자는 우아하고, 여자는 아름다우며, 조화롭고 애틋한 분위기가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두 사람 커플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재석은 수아를 보자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정은은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고 가볍게 웃기만 했다.그리고... 두 사람은 수아와 어깨를 스치며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수아는 짜증이 났다.‘내가 로비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앉아 있었는데, 힘겹게 교수님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는데, 우연히 만난 척하면서 교수님과 말할 기회를 만들려고 했는데.’뜻밖에도 이런 장면일 줄은 몰랐다.수아는 갑자기 자신이 우습다고 느꼈다.‘다 소정은 때문이야!’수아는 두 사람이 떠나는 방향을 보며 은근히 주먹을 쥐었다.이번에 융합연구 포럼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은 수아가 어렵게 쟁취했기 때문이다.태민이 스스로 물러나게 하기 위해, 수아는 꾹 참고 그와 함께 며칠간 여행을 갔다. 그동안 수아는 웃는 얼굴로 태민을 대했고, 심지어 태도도 무척 부드러웠다.‘그 바보는 뜻밖에도 미친듯이 감동을 했지. 임시로 백화점에 달려가 다이아몬드 반지까지 사서 그날 밤 나에게 청혼했고.’수아는 원래 거절하려 했지만, 이번 융합연구 포럼을 참가하기 위해 먼저 얼버무리며 승낙한 뒤, 태민이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해 얘기할 때, 자신의 욕심을 드러냈다.“태민 씨 작년에 이미 한 번 참가했잖아요, 정말 좋겠다. 난 아직 가 본 적이 없는데.”태민은 수아가 단지 감탄하고 있는 줄 알았다.“서두를 필요 없어. 앞으로 기회가 있을 거야.”수아는 입술을 깨물었다.“기회가 있어도 내 차례가 못 돼요. 태민 씨, 미진 언니 모두
‘나만 짝사랑한 게 아니었어. 나만 스트레스와 열등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었어.’‘수아도 나와 마찬가지였어! 이건 수아가 날 사랑하고 있다는 거잖아!’한 사람을 사랑해야만 늘 열등감을 느낄 수 있고, 상대방과 어울릴 수 있도록 더 강한 자신을 만들려 할 것이다.“좋아.”태민은 갑자기 수아의 손을 잡더니 정중하게 약속했다.“수아야, 네가 원하는 거라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와줄게.”수아는 이 일이 이렇게 쉬울 줄 몰랐다.J시로 돌아온 이튿날, 재석은 수아에게 전화를 걸었고, M시 융합연구 포럼에 참가할 준비를 하라고 통지했다.수아는 태민이 재석에게 어떻게 말했는지, 또 어떻게 그녀가 조미진을 넘어 성공적으로 이 기회를 얻게 됐는지 몰랐다. 어차피 그녀도 이런 일에 흥미가 없었으니까.‘앞으로 3일, 마침내 교수님과 함께 지낼 기회가 생겼어!’원래 수아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어차피 실험실에서 그녀는 재석과 함께 감정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그러니 굳이 재석을 따라 이곳에 올 필요도 없었다.그러나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 반년 동안 재석은 의도적으로 수아를 멀리했던 것이다.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재석은 수아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했다.그러나 두 사람이 따로 남게 된다면, 재석은 자꾸 그런 자리를 피하려 했고, 항상 수아와 같은 곳에 있는 것을 거절할 이유와 구실이 있었다.수아는 당황했다.그녀는 마음속으로 불안해졌다.‘이러다가 교수님은 나와 점점 멀어질 거야. 더 이상 쟁취하지 않으면 아마도 기회가 없을 거라고.’그래서, 이번에 수아는 반드시 와야 했다.수아는 재석과 정은이 떠나는 방향을 보면서 주먹을 은근히 움켜쥐었다.어떤 결심을 한 것처럼 눈빛에 결단이 번쩍였다....이튿날, 융합연구 포럼이 정식으로 시작되었다.장소는 바로 호텔 옆의 회의실이었다.아침 8시, 초대 손님들이 속속 입장했다.9시, 포럼이 마침내 시작되었다.사회자가 단상에 올라 간단한 환영 인사를 전한 뒤, 본격적인 주제 강연 순서로
그 눈빛에는 부러움과 존경, 그리고 닮고 싶은 마음까지 담겨 있었다.‘언제 나도 그런 높이에 설 수 있을까? 실력으로 남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남들의 질투를 자아낼 자격.’정은은 한숨을 쉬었다.‘노력이 부족한 거지...’재석은 향후 10년간 자신이 집중할 연구 방향에 대해 발표했다.그는 ‘신개념 양자 얽힘’, ‘자유공간 채널에서의 양자광 간섭’, 그리고 ‘양자광 기반 3차원 영상화 기술’을 핵심 주제로 제시했다.남자는 속도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으며, 목소리가 낮고 듣기 좋았다. 내용도 전문성을 고루 돌보는 동시에 통속적이고 알기 쉬운 표현방식으로 기타 전문분야의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했다.지금의 재석은 스스로 후광을 띠고 있어, 사람을 탄복하게 하는 강대한 매력을 드러냈다.정은은 무대 아래에 앉아 미리 준비한 공책을 꺼냈다. 그녀는 들으면서 펜으로 필기를 했다.이 강연에 정신을 집중한 게 분명했다.멀지 않은 곳에서, 마찬가지로 무대 아래에 앉아 있는 수아는 무대 위의 양복차림을 한 재석을 보면서, 그가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이미 홀딱 반했다.남자의 그 잘생긴 얼굴을 보며, 수아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듣지 못했다.지식은 흐르는 물처럼 수아의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로 새어나갔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수아는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이미 자신이 아직 융합연구 포럼에 참가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오직 이 순간에만 수아는 거리낌 없이 재석을 바라볼 수 있었고, 그를 생각하며, 자신의 가장 진실한 감정을 드러낼 수 있었다.매 강의가 끝나면, 30분의 질문을 주고받는 시간이 주어진다.또한 포럼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항상 다툴 수 있었기 때문이다.예컨대 지금처럼.의문을 제기한 이는 국민대학교에서 생명과학과 물리학의 융합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교수, 도하빈이었다.“말씀처럼 전문성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물리학 같은 전공 중심 학문만 의미 있고, 융합이나 다학제 연구는 쓸모 없다
정은은 말을 마친 뒤 조용히 자리에 앉으려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재석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조금 전 말씀하신 견해를, 생물학과 물리학 간 융합 연구 사례를 들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정은은 순간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심지어 오미선조차도 무대 위에 선 재석을 다시 한번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연구 현장의 실천 사례를 바탕으로 자신의 관점을 설명한다는 건, 누구에게나 쉽게 주어지지 않는 소중한 기회였다.정은에게는 명백히, 자신의 연구 주제와 방향을 대중 앞에서 소개할 수 있는 결정적 순간이 찾아온 셈이었다.이 자리는 많은 연구자들이 꿈꾸는 무대였고, 재석은 그 기회를 아무런 조건 없이 정은에게 넘겨준 것이다.문제는, 정은이 과연 그 기회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것이었다.정은은 눈빛이 복잡하게 변하더니, 저도 모르게 재석을 다시 바라보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그녀는 재석의 눈빛에서 격려와 믿음을 읽을 수 있었다.‘선배님은 날 믿기에 이런 기회를 준 거야. 그렇다면...’정은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눈빛이 확고해졌다.‘선배님을 실망시킬 수는 없지.’“물론입니다. 제 연구 분야는 생물학적 데이터 기반의 모델링 및 그 응용입니다. 실험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특정 패턴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분석을 이어간 결과, 해당 결과를 도출할 수 있었습니다.”실험실에서 보낸 수많은 시간이 바로 이 순간 빛을 발했다.정은은 수많은 실험 절차, 데이터 분석 결과, 수치 조정 과정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고, 덕분에 막힘 없이 설명을 이어갔다.그녀는 핵심을 조리 있게 정리하며, 실험 과정 전반을 논리적으로 풀어냈고, 군더더기 없이 명확한 결론으로 마무리했다.답변을 마칠 즈음, 정은은 정확하게 다음 발표 순서 시작 시간에 맞춰 사회자에게 침착하게 마이크를 넘기고 자리에 앉았다.잠시 정적이 흐른 뒤, 장내는 큰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심지어 가장 까다롭기로 알려진 도하빈조차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
‘나야말로 조 교수님과 한 팀인데, 이런 주목받는 기회가 소정은에게 돌아갔다니. 이거 명백한 편애 아니야!’오전 포럼이 끝나고, 점심은 호텔에서 단체로 식사를 한 뒤, 한 시간 휴식을 가진 후 다시 오후의 일정이 이어졌다.같은 절차지만, 발표자와 주제 분야는 모두 달랐다.정은은 펜을 쉴 새 없이 움직였고, 작은 공책은 어느새 빼곡히 채워졌다.뒤로 갈수록 학문 연구의 놀라운 연결성과 상호작용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마치 하나의 음악회 같았다.피아노와 바이올린의 하모니, 플루트와 쟁의 울림, 가야금과 하프가 어우러진 선율처럼, 서로 다른 분야가 어우러져 하나의 아름다운 오케스트라를 만들어내는 듯했다.‘이것이 바로 융합 연구의 매력이구나. 지식이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이랄까...’정은은 그렇게 느꼈다.늘 자신의 연구에만 몰두해 왔던 정은에게, 천체물리학, 응용화학, 의생명과학 같은 낯선 분야와 갑작스레 마주한 그 순간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신선한 충격이었다.아직은 정리하고 소화할 시간이 필요했지만, 분명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기분이었다.오후 5시, 포럼이 마무리되었다.정은은 오미선과 함께 회의장을 나와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오미선은 외투를 갈아입고 머리도 정성스레 손질했다.“정은아, 준비해. 이따 나랑 같이 저녁 먹으러 나가자.”“네? 호텔에서 안 드시고요?”“예전의 친구들과 모이는 자리야. 간만에 얼굴 좀 보려고.”정은은 잠시 망설였다. “이런 자리에 제가 가도 괜찮을까요?”“안 괜찮을 게 뭐가 있겠어? 넌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잖아. 선배님들에게 인사도 할 겸, 가자.”그 말은 곧, 정은에게 인맥을 넓혀줄 기회를 준다는 것이었다.오미선이 그녀를 데리고 가는 이유는 단순한 식사 때문이 아니었다.“네, 알겠어요. 옷 갈아입고 올게요.”“그래, 천천히 해, 서두르지 말고.” 오미선은 흐뭇하게 웃었다.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정은은 재석도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오미선이 들어서자,
“하하... 그래! 당연하겠지!”“어머, 말하느라 신경을 쓰지 못했군. 미선아, 서 있지 말고 얼른 앉아!”“정은이도 함께 앉아야지...”정은은 이런 학계의 비공식적인 자리엔 처음이었고, 평소 근엄하기만 했던 교수나 학자들이 일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 꽤 신기하게 느껴졌다.친구들끼리 주고받는 유쾌한 농담, 어쩌다 앞뒤가 안 맞는 말도 오가고, 흥분하면 목소리가 커지기도 하고, 기쁘면 호탕하게 웃는 모습들이 그저 재밌을 뿐이었다.연회가 이어지는 중, 오미선은 보기 드물게 먼저 잔을 들었다.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알고 있었다. 이건 정은을 위한 행동이란 것을.정은도 그걸 알았기에, 몇 잔은 기꺼이 받아 마셨다.술잔이 세 바퀴쯤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한 베테랑 교수가 정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둘은 전공 이야기에서 시작해, 꿈에 대한 이야기, 논문, 실험 이야기도 나누며 점점 대화를 깊이 이어갔다.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그 교수의 눈빛에는 감탄과 호의가 점점 더 선명해졌다.“하하하... 역시 젊은 세대는 다르다니까. 새로운 머리가 참 잘 돌아가네! 내 제자 중엔 왜 이런 애가 하나도 없는 거야? 아이고, 사람은 비교하면 안 된다더니, 진짜 열받네!”그러더니 오미선을 바라보며 웃으며 물었다.“그런데 오 교수, 이런 학생을 어디서 발굴한 거야? 왜 좋은 인재는 전부 너한테만 가는 거지?”“정말 우리에겐 숨통도 안 틔워주는구나.”오미선은 잠시 생각하다가 웃으며 말했다.“글쎄... 아마 내가 보는 눈이 좀 있는 모양이겠지? 한눈에 알아봤으니까? 어쩔 수 없어. 나도 이렇게 귀한 인재는 딱 보면 알겠더라고.”농담인 줄 알면서도 그 교수는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였다.“내가 네 제자 데려갈 것도 아닌데, 누가 보는 눈이 없다는 거야?”옆에 앉아 있던 다른 교수가 못 참고 끼어들었다.“고 교수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죠. 지난번엔 누가 자긴 눈도 안 좋고 나이도 많다고, 제가 2년간 아껴둔 와인을 억지로 가져가신 거죠?”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