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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or: 오월 여름
‘아, 내 피를 받아내서 얼른 계약을 해제하려는 거였구나.’

한여월은 순간 마음이 확 트이는 듯했다. 수인 남편들이 원래 몸 주인이 잠가 놓은 ‘족쇄’에서 얼른 벗어나려고 안달이 나긴 했지만 그래도 꽤 솔직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솔직함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당분간은 한여월을 죽이겠다는 생각 같은 건 안 한다는 뜻이니까...

계약을 체결한 수인 마크의 구속이 있는 한 그들이 한여월에게 해를 끼칠 염려는 없었다. 독약을 타지 않았을까 했던 걱정도 사실은 불필요한 셈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한여월은 긴장했던 몸이 완전히 풀리는 듯했다.

하지만 계약을 해제하는 일은 서두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 정말로 지유혁에게 피를 열 방울 다 떨어뜨려 줘서 수인 마크가 사라지면 앙심을 품으면 어떻게든 원한을 갚는 여우 수인의 성격상 바로 덤벼들어 한여월의 목을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고개를 든 한여월은 교활함이 넘치는 지유혁의 반짝이는 눈동자와 마주치자 갑자기 입꼬리를 올리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고기 한 끼에 피 한 방울을 바꾸겠다고?”

얼굴에 번졌던 미소가 잠시 굳어졌던 지유혁은 이내 ‘역시 그럴 줄 알았어’라는 듯 비아냥 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

한여월은 손에 든 고기를 살랑살랑 흔들며 느긋하게 말했다.

“이렇게 하자. 이제부터 나에게 다섯 끼를 해 줘. 끼니마다 오늘처럼 정성스럽게. 그러면 피를 한 방울씩 떨어뜨려 줄게. 어때?”

사실 별생각 없이 조건을 내뱉은 지유혁인지라 한여월이 정말로 받아들일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다섯 끼에 피 한 방울이면... 쉰 끼면 계약을 해제할 수 있네?’

순간 눈빛을 반짝인 지유혁은 이내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그 말, 진짜야? 수인신에게 맹세할 수 있어?”

이 세계에서 수인신은 지고무상한 존재로 수인신 앞에서는 절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며 수인신에게 일단 맹세하면 그것은 보이지 않는 족쇄처럼 구속력이 있었다.

한여월은 속으로 계산해 보았다.

‘쉰 끼면... 아빠를 찾을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거야.’

망설임 없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또렷이 말했다.

“나 한여월은 수인신께 맹세합니다. 지유혁이 다섯 끼니를 정성껏 해 줄 때마다 피 한 방울 떨어뜨려 계약을 해제해 주겠습니다. 이 약속은 꼭 지킬 것이며 절대로 번복하지 않겠습니다.”

말이 끝나는 순간 지유혁의 눈동자에서 순간적으로 환희의 빛이 쏟아져 나왔다.

이내 진심 어린 미소를 짓더니 손에 든 푸른 잎사귀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어서 먹어. 식으면 맛없어.”

한여월은 그제야 고기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식감은 생각보다 꽤 괜찮았지만 두어 번 씹자 곧바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간이 전혀 안 돼서 물 마시는 것처럼 싱거웠다.

“왜 소금을 안 넣었어?”

한여월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자 지유혁의 얼굴에 번졌던 미소가 살짝 옅어지더니 비아냥이 가득한 말투로 한마디 내뱉었다.

“벌써 잊었어? 그때 네가 있는 소금 모두 털어서 소금물을 만들었잖아. 소금물에 채찍을 담갔다가 우리를 때리면 더 아플 거라면서... 그러니 소금이 어떻게 남아 있겠어?”

순간 멍해진 한여월은 이내 원래 몸 주인의 기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런 일이 확실히 있었기에 참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먹을 소금도 부족한 판에 소금을 그런 데 썼고?’

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 어떡하지? 길을 가려면 체력이 필요한데 계속 간이 안 된 음식만 먹을 순 없잖아.”

그러자 지유혁이 갑자기 턱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나무통 속의 나시원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약간 희롱이 섞인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시원은 해족 중에서 유일하게 소금을 만들 줄 아는 인어족이야. 소금이 없으면 나시원더러 만들라고 하면 되지.”

지유혁의 시선을 알아챈 한여월도 따라서 나무통의 나시원을 바라보았다. 조용히 물속에 잠겨 있는 나시원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빛을 내뿜는 아름다운 눈으로 한여월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물속에서 살랑살랑 움직이고 있는 인어 꼬리는 비늘 가장자리에 아직도 희미하게 붉은 기가 돌고 있었다.

그것을 본 한여월은 마음이 약간 무거워졌다.

서기현의 치료로 상처는 아물었지만 생생하게 뽑혀 나간 비늘이 있던 자리에는 아직도 움푹 파인 흔적들이 있었다. 다시 자라날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였다.

증오심으로 따지자면 나시원이 아마 몇몇 수컷들 중에서 가장 강렬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여월은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나무통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살짝 몸을 굽혀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시원, 나를 위해서 소금을 좀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공짜로 달라고 하는 거 아니야. 네가 소금을 주면 나도 너에게 피를 떨어뜨려 계약을 해제해 줄게.”

한여월의 얼굴을 스치듯 훑은 나시원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다만 인어 꼬리를 조금 전보다 더 크게 흔든 바람에 잔물결이 사방으로 튀었다.

한태강이 나시원을 이곳으로 끌고 온 후 나시원은 입을 연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혹시 나시원이... 벙어리인 걸까?’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며 무의식적으로 나시원의 팔뚝을 바라보았다. 보통 수컷 수인들은 팔뚝에 수인 밴드를 차고 있었다. 밴드 색깔이 곧 서로 다른 실력 등급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런데 매끈한 나시원의 팔뚝에는 그 어떤 것도 없었다.

‘이상하네... 아빠가 나를 아끼긴 하지만 수인 남편을 고를 때 결코 얼굴만 보고 판단하지는 않을 텐데... 그런데 왜 수인 밴드도 없는 수컷을 데려와 계약을 체결한 것일까?’

한여월은 소설 속 줄거리를 떠올려 보았다. 나시원은 훗날 해역에서 더 이상 적수가 없을 정도로 대륙 절반을 뒤집어엎을 대악당이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왜 수인 밴드조차 없는 것일까?’

나시원이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자 한여월은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억지로 요구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기에 더는 말하지 않고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진짜야?”

바로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마치 산골짜기 시냇물이 돌 위를 흐르듯 청량하면서도 아주 미세한 떨림이 실려 있는 목소리였다. 분명 물어보는 것이었지만 새의 깃털이 심장을 스치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인어족의 노래가 사람의 마음을 현혹할 수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평범한 말투조차 이렇게 듣기 좋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말끝마다 은은하게 실려 있는 그 알 수 없는 듯한 소리는 가장 맑은 샘물보다 사람의 심금을 더 많이 울렸다.

“당연히 진짜지.”

상대방이 믿지 않을까 봐 조바심이 난 한여월은 돌아서서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소금만 만들어 주면 바로 피를 떨어뜨려 줄게. 약속해. 절대 거짓말 아니야.”

속눈썹을 살짝 떤 나시원은 보랏빛을 내뿜던 차가운 눈동자도 조금 녹는 듯했다. 한동안 한여월을 응시하더니 손을 들어 동굴 구석에 있던 먼지가 수북이 쌓인 커다란 도자기 항아리를 가리켰다.

“저기에... 바닷물이 있어. 소금을 만들려면 바닷물이 필요해.”

한여월은 나시원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동굴 구석에 확실히 사람 배꼽까지 올 정도의 높이인 도자기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낡은 수피 가죽으로 덮여 있는 항아리 아가리 위에 먼지가 얇게 쌓여 있는 것을 보니 한동안 아무도 손대지 않은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지유혁에게 말했다.

“나시원이 소금을 만들 수 있도록 네가 가서 저 항아리를 이리로 옮겨 와.”

지유혁은 즉시 사람을 유혹하는 미소를 띠며 물었다.

“옮겨 주면 무슨 상을 줄 건데? 예를 들면... 미리 피 한 방울 떨어뜨려 준다든지?”

한여월은 하도 어이가 없어 못마땅한 어조로 말했다.

“항아리 하나 옮기는 걸로 보상을 바라는 거야?”

막 지혈된 손끝을 살랑살랑 흔들며 아주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피를 뽑는 게 얼마나 아픈 줄 알아?”

한여월이 정말로 약간 화난 기색을 보이자 지유혁은 바로 눈치껏 미소를 거두었다.

원래 이 정도 일로 피를 받아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저 한여월이 오늘따라 유난히 평소와 다른 모습을 많이 보여 이참에 뭔가 더 얻을 수 있을지 떠보려던 것뿐이었다.

지유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동굴 구석으로 걸어간 뒤 무거운 도자기 항아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항아리 속의 바닷물이 찰랑거리며 가벼운 소리가 났다. 그것을 들고 성큼성큼 걸어 나무통 곁에 내려놓았다.

코앞까지 온 도자기 항아리를 응시하던 나시원은 눈에 희미한 빛이 스쳤다.

꼬리가 물속에서 살짝 움직이더니 온몸도 나무통에서 옆의 도자기 항아리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나시원의 허리까지 오는 도자기 항아리 속 바닷물은 잔잔한 물결이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가까이 서 있던 한여월은 나시원이 꼬리를 움직이며 물보라를 일으키자 얼굴에 물이 가득 튀었다.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슥 닦은 뒤 앞으로 바짝 다가가 눈빛을 반짝이며 도자기 항아리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지켜보았다.

인어족이 대체 어떻게 소금을 만드는지 정말 궁금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지유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상해. 너무 이상해.’

예전 같았으면 한여월은 물을 뒤집어쓰자마자 펄쩍 뛰었을 것이다. 최소한 그들에게 삿대질하며 한참을 욕했을 것이고 심각할 경우 채찍을 들어 후려쳤을지도 모른다. 오늘처럼 얼굴만 슥 닦은 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럴 리가 없었다.

오늘 한여월은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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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섯 수인 남편과 생존 계약   제30화

    한여월은 고개를 들어 윤이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그의 팔뚝 위 선명한 초록색 수인 밴드에 머물렀다. 초록 등급 수인의 실력은 결코 약하지 않다. 일반적인 초록 등급 맹수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니 그와 함께 물에 들어가는 건 이론적으로 매우 안전할 터였다.하지만 어제 거악망이 기습했을 때, 나시원이 순간적으로 멈춰 섰던 장면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본래 수중 생활에 능한 인어족인 그가 왜 그렇게 늦게 반응했을까? 그 망설임 가득했던 찰나는 마치 맹수의 손을 빌려 그녀의 목숨을 끊으려 했던 고의처럼 느껴졌다.한여월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시냇가로 고개를 돌렸다. 나시원은 이미 나무통에서 나와 얕은 물가에 조용히 몸을 담그고 있었다. 가끔 꼬리지느러미로 수면을 툭툭 치는 모습이 겉보기엔 유유자적해 보였지만 그녀는 그저 불안하게만 보였다.그러다 문득 기슭에 놓인 빈 나무통을 발견하자 한여월의 눈이 반짝였다. 물속이 위험하다면 나무통을 가져와 뭍에서 씻으면 되지 않겠는가.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 윤이산에게 말했다.“물에 들어갈 필요 없어. 그냥 나무통으로 씻을게.”윤이산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빈 나무통을 보더니 곧장 그녀를 이해했다. 어제의 일이 트라우마로 남은 모양이었다. 윤이산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무통을 들고 시냇가로 향했다. 통을 깨끗이 헹궈 맑은 물을 가득 채운 그는 나무 그늘 아래 시원한 곳으로 통을 옮겨 놓았다. 통 가장자리에 그녀의 살결이 상하지 않게 부드러운 수피 가죽까지 덧대어 주는 세심함을 보였다.그 정성스러운 손길에 한여월의 마음이 조금 말랑해졌다. 그녀는 서둘러 제안했다.“고마워. 이렇게 하자. 앞으로 다섯 번 내가 씻을 물을 떠다 주면 피를 한 번 줄게. 어때?”당연히 기뻐할 줄 알았던 윤이산은 오히려 눈을 가늘게 뜨며 미간을 찌푸렸다. 기쁜 기색은커녕 묘하게 침울한 기운까지 감돌았다.‘대체 왜 저런 표정이지? 다섯 번이 너무 많나?'한여월은 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 다섯 수인 남편과 생존 계약   제29화

    한여월은 그의 목소리에 생각에서 깨어나 고개를 들었다가 그의 깊은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지금은 한여름 열기가 한창이라 정오의 태양이 지면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춥다는 말과는 거리가 먼 날씨였다.윤이산은 냉혈 수인이었기에 그에게 안겨 있는 것은 천연 얼음주머니를 품고 있는 것과 같았다. 이 무더운 날씨에 아주 제격이었다.한여월은 고개를 저으며 공간에 관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물었다.“아니, 안 추워. 휴식지까지 얼마나 더 가야 해?”윤이산은 앞쪽의 숲을 한 번 내려다보았다. 뱀 꼬리를 부드럽게 흔들며 돌덩이들을 피해 나가는 그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한결 더 부드러워져 있었다.“앞에 있는 상수리나무 숲을 지나면 작은 시냇가가 나올 거야. 시냇가 근처에 햇빛을 피할 만한 커다란 바위들이 몇 개 있으니까 거기서 쉬자. 금방 도착할 거야.”한여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쉴 때 공간 속의 영천 수를 다시 시험해 보고 정확히 어떤 효능이 있는지 확인할 생각이었다. 베인 손가락은 처치를 받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 만약 영천에 정말 치유 효과가 있다면 앞으로 이 수인 세계에서 살아남는 데 큰 도움이 될 터였다.하지만 영천에 물이 고작 몇 방울뿐이라는 사실이 떠오르자 그녀는 다시금 공간을 업그레이드할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시선은 자신도 모르게 다시 윤이산의 입술로 향했고 마음속에 품었던 황당한 추측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정말 키스 한 번에 공간이 업그레이드 되는 걸까?'어제 입을 맞춘 뒤 공간의 모습이 변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만약 단순한 우연이라면? 한참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윤이산은 갑자기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여월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얼른 시선을 피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너무 위험해.' 윤이산은 심장까지 얼어붙게 할 만큼 잔인한 악당이라는 사실을 잊을 뻔했다.지금 이 악당들이 겉으로는 고분고분해 보일지 몰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파트너 수인 마크의 제약 때문이었다. 계약 해제가 되는 순간

  • 다섯 수인 남편과 생존 계약   제28화

    이런 식으로도 변할 수도 있었단 말인가?한여월은 뱀 꼬리를 흔들며 나아가는 윤이산을 바라보았다. 속도는 다른 수인 남편들의 수인 형태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았고 오히려 뱀 꼬리가 땅을 훑는 가벼운 소리만 들릴 뿐 훨씬 안정적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윤이산의 팔뚝에 머물다 멈췄다.어제까지만 해도 노랑 등급 언저리에 머물던 수인 밴드가 지금은 완벽한 초록으로 변해 은은한 광택을 내뿜고 있었다. 초록 등급 수정을 흡수해 성공적으로 돌파한 것이 분명했다. 한여월은 발정기 탓에 여전히 옅은 홍조가 감도는 윤이산의 뺨을 보며 한 가지 추측을 했다. 발정기가 아닌데도 갑자기 발정이 난 것은 아무래도 급격한 등급 돌파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수인 세계의 수컷들은 돌파할 때 체내 에너지 파동이 격렬해져 이성을 잃기 쉽다. 게다가 그는 본래 발정기가 가까워진 상태였으니 두 가지 요인이 겹쳐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을 가능성이 컸다.윤이산은 여전히 발정기였기에 한여월을 안고 이동하면서 온 신경을 그녀에게 쏟고 있었다. 품 안의 암컷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긴 속눈썹을 나비 날개처럼 파르르 떨며 그의 가슴팍에 얌전히 기대어 있었다. 그 모습이 더없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꼬리를 흔드는 폭을 줄이며 팔에 힘을 더 주어 그녀를 더욱 안정감 있게 감싸안았다.그때, 꼬리 끝이 툭 튀어나온 돌덩이에 걸려 윤이산의 발걸음이 휘청였다. 품 안의 한여월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고 뜨거운 숨결이 순식간에 그의 목덜미를 스쳤다.“미안. 바닥에 돌이 많아서 못 봤어.”윤이산의 목소리가 살짝 잠겼다. 그는 널브러진 돌 더미들을 훑어보며 말했다.“돌이 너무 많아. 떨어질지도 모르니까 그냥 내 목을 계속 잡고 있어.”한여월이 바닥을 내려다보니 정말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깔려 있었다. 조금 전 흔들림에 깜짝 놀랐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그녀 손끝의 말랑말랑한 촉감이 목덜미 피부에서 강렬하게 느껴졌다.뒤따라오던 다른 수인 남편

  • 다섯 수인 남편과 생존 계약   제27화

    눈부시게 찬란한 미소가 한여월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 순간 윤이산의 마음속 어색함은 눈 녹듯 사라졌고 그 자리엔 몽글몽글한 설렘만이 남았다.윤이산의 목소리는 약간 잠겨 있었다.“응. 네 거야. 발에 맞는지 신어 봐봐.”한여월이 발을 밀어 넣자 가죽이 발목을 기분 좋게 감싸안았다. 가죽은 부드럽게 밀착되었고 크기도 딱 맞았다. 이전에 신었던 수피 가죽 장화보다 훨씬 편안했고 걸을 때 살이 쓸리는 느낌도 전혀 없었다. 그녀가 일어나서 두어 걸음 걸어보더니 윤이산을 향해 더 활짝 웃어 보였다.“정말 딱 맞아! 고마워, 윤이산!”그것이 안정에 대한 보답이든 의도적인 아부든, 신발을 만드는 데 윤이산이 정성을 쏟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정말로 신발이 마음에 쏙 들었던 한여월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이 찬란한 미소를 보고 넋을 잃은 것은 윤이산뿐만이 아니었다.강진우는 웃을 때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한여월의 눈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손에 든 수피 가죽 주머니를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고맙다고 했다고? 게다가 윤이산이 준 신발을 받아줬어?'옆에 서 있던 서기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그녀의 신발을 응시했다. 나시원은 무표정하게 시선을 거두었으나 손가락으로는 무의식적으로 가슴팍의 수인 마크를 만지작거렸다. 조금 전 수혈해 줄 때 발그레해졌던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자 마음속의 묘한 기분은 배가 되었다.몇 초 후, 수컷들은 제정신을 차리고 신중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한여월의 태도가 윤이산에게 눈에 띄게 부드러워진 것을 알아챘다. 그녀는 정말 이 신발이 마음에 든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일까?윤이산은 다른 이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가죽 주머니에서 지혈초 한 줌을 꺼냈다. 바위 위에 놓고 짓이겨 즙을 낸 뒤 깨끗한 가죽 끈을 챙겨 한여월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여전히 피가 배어 나오는 그녀의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맞잡았다.한여월은 멍한 얼굴로 정성스레 약초를 상처에 발라주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어제 했던 약속이 떠올라 말했다

  • 다섯 수인 남편과 생존 계약   제26화

    나시원에게 수혈을 마친 한여월은 손가락 끝에서 여전히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을 보고 즉시 서기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이미 상처가 난 김에 지금 한 번 더 주는 것이 나중에 다시 살을 긋는 수고를 더는 길이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든 채 그대로 서기현에게 다가갔다.제자리에 서 있던 서기현의 눈동자에는 조금 전 한여월이 나시원에게 피를 주던 모습을 지켜볼 때의 복잡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치켜들고 자신에게 직진해 오는 것이 아닌가.손가락 사이로 혈액이 뚝뚝 떨어지는 가운데 그녀가 다소 급한 어조로 말했다.“빨리 좀 숙여봐. 너한테도 피 줄게.”서기현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거부감이 아니라 경악이었다. 그는 그녀가 어제 했던 말이 그저 상황을 모면하려 던진 빈말인 줄 알았는데 그의 예상이 틀린 것이다.“정말로 나랑 계약을 해제하려고 피를 주겠다는 거야?”서기현이 미간을 찌푸린 채 깊고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한여월은 그 눈 속에 담긴 감정을 읽어낼 수도 없었고 읽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빨리 길을 떠나고 싶을 뿐이었다.한여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그러니까 좀 숙여봐.”서기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천천히 몸을 낮췄다.한여월이 즉시 그의 가슴팍 위로 피 한 방울을 떨어뜨리자, 그곳의 수인 마크가 곧바로 한층 연해졌다. 그 순간, 서기현은 고개를 숙이더니 한여월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엄지손가락으로 피가 흐르는 그녀의 손가락 끝을 문지르더니 고개를 더 숙여 부드럽게 핥았다.손가락 끝을 감싸는 뜨거운 촉감과 함께 밀려온 서기현 특유의 맑고 깨끗한 체취에 한여월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늘 청초하고 서늘했던 서기현의 얼굴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밑으로 내리깐 긴 속눈썹 아래로 정성스럽게 상처를 핥아내는 모습은 그녀의 머릿속을 순식간에 백지로 만들었다.“너!”한여월은 정신이 번쩍 들어 얼굴이 홍당무가 된 채 손가락을 힘껏 빼냈다. 손가락 끝에는 여전히 서기현 입술의 온기가 남아 있

  • 다섯 수인 남편과 생존 계약   제25화

    지유혁은 그녀의 설명에 그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한여월은 의아한 마음에 물었다. “혹시 다른 일이라도 있어?”지유혁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뗐다. “윤이산 발정기야. 너 어젯밤에...”말은 끝까지 잇지 않았지만 한여월은 그가 무엇을 묻고 싶은지 충분히 알아들었다.아침에 남편들은 윤이산이 한여월의 자리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가 발정기라는 건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으나 몸에서는 폭주 인자로 인한 폭력적인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암컷에게 안정을 얻었다는 증거였다.하지만 지유혁이 동굴에 들어와 관찰한 결과, 한여월의 몸 어디에도 윤이산의 수인 마크는 나타나지 않았다. 두 사람이 결합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썼다는 뜻이다.한여월의 수인 마크 등급은 높지 않다. 이치대로라면 결합 없이는 윤이산을 진정시킬 수 없었을 텐데 대체 어떤 방법으로 해결한 걸까?방법이야 어찌 됐든 한여월이 윤이산을 도와주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자신들이 발정기를 맞았을 때도 그녀가 도와줄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품게 했다.물론 지유혁은 곧바로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저 사악한 암컷이 목적도 없이 그들을 도와줄 리가 없다. 분명 무언가 꿍꿍이가 있을 터였다.한여월은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윤이산 일은 알아. 어젯밤에 내가 안정시켜 줬거든. 오늘 상태는 어때? 이동할 수 있어?”사실 그녀가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그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여정에 차질이 생겨서는 안 됐다.지유혁이 대답하려던 찰나, 나머지 남편들도 하나둘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윤이산의 뺨에는 여전히 홍조가 남아 있었으나 눈빛만은 맑은 상태였다.윤이산은 동굴 밖에서 한여월의 말을 들은 모양인지 즉시 말을 가로챘다. “이동할 수 있어. 하지만 계속 안정이 필요하니까 오늘은 내가 널 태우고 갈게.”한여월은 안정을 위해 신체 접촉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차피 누구의 등에 타든 이동만 할 수 있다면 상관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남편들이 짐을 챙겨 출발하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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