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한 지 8년, 서유정은 양주원의 마음속 그토록 그리워하던 존재에서 그가 서둘러 떨쳐버리고 싶은 존재로 전락했다. 3년간 노력했지만 그에 대한 마지막 한 줄기 감정마저 닳아버리는 순간 서유정은 결국 포기하고 등을 돌렸다. 이별하는 날 양주원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서유정, 네가 돌아와 다시 만나자고 애원하길 기다릴게.” 하지만 기다리던 끝에 돌아온 대답은 서유정의 결혼 소식이었다. 분노에 휩싸인 남자가 서유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적당히 하지?” 전화 너머로 남자의 중저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양 대표님, 제 약혼녀가 지금 샤워 중이라 전화를 받을 수가 없네요.” 양주원은 콧방귀를 뀌며 전화를 끊었다. 단지 서유정이 그를 유혹하기 위해 부리는 수작이라고 생각했다. 서유정의 결혼식 날, 그녀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꽃다발을 든 채 다른 남자에게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양주원은 서유정이 정말로 그를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미친 듯이 서유정 앞으로 달려갔다. “유정아, 내가 잘못했어.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마, 응?” 서유정은 드레스를 들어 올린 채 그를 지나쳤다. “양 대표님, 신나경과 둘이 천생연분이라면서요? 왜 내 결혼식에 와서 무릎을 꿇는 거죠?”
View More박수환은 상대방의 농담을 무시하고 곧장 본론부터 꺼냈다.“내 친구 중에 변호사가 한 명 있어. 경험도 꽤 많고 오늘 막 전 로펌에서 퇴사했는데 혹시 너희 쪽에 이혼 전문 변호사 자리 비어 있어?”“굳이 필요하진 않지만 한 명 더 들어온다고 나쁠 건 없지. 그런데 네가 이렇게 직접 전화까지 할 정도면 보통 사람은 아니겠네? 여자야, 남자야?”“여자야.”상대는 바로 흥미가 생긴 듯 목소리가 높아졌다.“설마 네 여자 친구야?”박수환은 침을 꿀꺽 삼켰고 목소리는 더 낮아졌다.“아니야.”“그럼 아직 썸 타는 중인가? 그런데 네가 여자를 꼬시는데 나를 이용해 놓고 나한테 아무것도 안 해 주는 건 좀 너무한 거 같은데?”박수환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며 나른하게 말했다.“내가 뭘 해 주길 바라?”“네 차고에 있는 한정판 컬리넌, 그거 한번 몰아보게 해줘.”“그거 네가 가져.”“진짜야?”상대방은 믿기지 않는 듯 목소리가 더 높아졌다.예전에 그가 박수환의 차고에 들어갔다가 그 차를 보고 만져보려 했다가 거절당했는데 이렇게 쉽게 준다고 하다니? 박수환이 그 여자에게 푹 빠져 있는 게 분명했다.“내일 당장 와서 몰고 가. 아, 그리고 그 여자한텐 우리가 아는 사이라는 거 말하지 마. 신세 지는 거 되게 싫어하거든.”박수환의 말을 듣고 상대방은 피식 웃었다.“그런 것까지 신경 쓰는 거 보니까 이번엔 진심이구먼?”그러나 박수환은 대답하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받은 쪽에서는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금테 안경 너머로 호기심 어린 눈빛을 번뜩였다.‘아니, 박수환이 저렇게까지 마음을 줄 정도면 어떤 여자인 거지? 궁금해서 잠도 안 올 지경이네.’그렇게 그가 궁금해하던 찰나, 휴대폰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떴다. 박수환이 그 여자의 정보를 보낸 것이다.‘서유정’, 남자는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입가의 미소가 굳어졌고 눈을 휘둥그레 뜬 채 화면을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다.‘서유정? 진짜 그 서유정이야? 아니, 박수환이 좋아하게 된 사람이 왜 하필 서
박수환은 서유정이 들고 있는 박스를 보자 순간 눈빛이 흔들렸다.“회사 그만뒀어요?”서유정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렇다고 봐야죠.”“그럼 당분간 다른 일 알아볼 생각은 있어요?”“아직은요. 당분간은 좀 쉬려고요.”그녀와 양주원의 일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이상 새 직장을 알아봐도 양주원이 분명히 방해할 게 뻔했다. 게다가 오늘 진태현이 로스쿨 진학을 제안했던 것도 계속 마음에 남았다.대학교 시절, 서유정은 전공 성적이 우수해서 로스쿨에 바로 진학할 수도 있었지만 그때 양주원이 창업에 몰두하느라 자금이 필요했고 결국 그녀는 취업해 돈을 벌며 양주원을 도왔다.그렇게 미뤄버린 로스쿨 진학은 늘 그녀의 마음속에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다. 지금이 어쩌면 그걸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계속 일을 할지, 아니면 다시 공부할지 말이다.“제가 아는 로펌 대표 몇 분 계시거든요. 유정 씨가 원하면 소개해 줄게요.”서유정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수환 씨, 고마워요.”하지만 그녀는 박수환에게 부탁할 생각이 없었다. 괜히 그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양주원의 성격을 생각하면 아마 이번에 그녀가 쉽게 취직할 수 있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박수환도 그녀가 진심으로 자신의 제안을 고려해 보려는 생각은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녀가 들고 있는 박스를 건네받아 뒷좌석에 싣고는 차를 출발시켰다.40여 분이 흐른 뒤, 차는 서유정의 아파트 단지 앞에 도착했고 차창 너머로 두 사람은 동시에 어떤 차 한 대를 발견했다. 바로 양주원의 차였다.박수환은 눈빛이 차갑게 식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같이 올라가 줄게요.”“괜찮아요. 오히려 잘 됐어요. 양주원한테 할 말이 있었거든요. 수환 씨, 오늘 데려다줘서 고마워요.”박수환은 핸들을 꽉 쥔 채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서유정은 그의 반응을 알아채지 못한 채 조수석에서 내려 뒷문을 열고 박스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아파트 단지 입구 쪽으로 걸어가기 시
“사모님, 둘째 아가씨께서 나오시네요.”주희정은 고개를 들고 바라봤고 아니나 다를까 서유정이 박스를 안고 천천히 걸어 나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걸음걸이와 표정을 보니 회사에서 잘린 게 분명했다.‘저 쓸모없는 년!’그녀와 카드 게임을 하는 친구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뒤에서 또 무슨 소리를 해댈지 뻔했다.주희정은 애써 화를 억누르며 차 문을 열고 나가 서유정 앞을 막아섰다.“통화할 땐 너무 당당하게 굴길래 뭐 얼마나 잘났나 했더니 회사에서 잘린 거니? 서씨 가문의 체면을 구기는 거 말고 네가 하는 일이 뭐가 있니?”서유정은 주희정이 이 시간까지 자신을 기다릴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놀란 눈빛이었지만 곧바로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제가 다시 한번 말씀드려야 아시겠어요? 저와 서씨 가문은 이제 아무 연관도 없어요. 그러니 제가 망신을 당하든 말든 서씨 가문엔 아무 영향도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볼일 없으시면 비켜주세요. 지금 길 막고 계시잖아요.”그 말에 주희정은 얼굴이 굳었다.“넌 진짜 혈연관계를 그렇게 쉽게 끊을 수 있다고 생각해? 인터넷에 있는 너에 관한 글 때문에 지금 서씨 가문이 얼마나 망신당하고 있는지 알긴 하냐고?”“그건 서씨 가문 사정이죠. 전 그쪽과 아무 관련 없어요.”서유정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곧장 주희정을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주희정이 그녀의 팔을 확 붙잡았다.그러자 서유정이 안고 있던 박스가 땅에 떨어지며 안에 있던 물건들이 흩어졌다.주희정도 예상 못 한 일이었기에 그녀는 당황한 듯 얼른 손을 놓았다. 하지만 서유정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그저 무릎을 꿇고 묵묵히 흩어진 물건들을 하나씩 주워 담기 시작했다.주희정은 이를 꽉 깨물고 짜증스럽게 말을 내뱉었다.“쓰레기 같은 것들을 왜 그렇게 열심히 주워?”그 말에 서유정은 살짝 멈칫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손을 움직였다.주희정에게 있어 저 박스 안에 든 물건은 물론이고 서유정조차도 지워버리고 싶은 흠집일 뿐
퇴사 절차를 마치고 나니 벌써 저녁 여섯 시가 다 되어 갔다.서유정은 컴퓨터를 끄고 박현우와 성하나에게 간단히 인사를 건넨 뒤 박스를 안고 사무실을 나섰다.그런데 그때 박현우가 급히 따라왔다.“누나, 제가 1층까지 배웅해 줄게요.”“괜찮아요. 이 정도는 무겁지도 않아. 현우 씨는 앞으로 일 열심히 하고 하루빨리 독립해서 혼자 사건을 맡을 수 있도록 해요.”“네...”박현우는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서유정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먼저 말했다.“그럼 난 이만 가볼게요. 잘 있어요.”“누나, 저...”그런데 건너편에서 들려온 전은하의 목소리가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박 변호사님, 진 변호사님께서 찾으세요.”이때 서유정은 이미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있었고 1층 버튼을 누르고는 박현우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가 봐요. 진 변호사님께서 기다리신다잖아요.”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히는 동안 박현우는 그녀를 허망하게 바라봤고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진태현이 하필 이 타이밍에 그를 부르다니, 박현우는 겨우 용기를 냈는데 전은하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싹 식어버렸다.그는 할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려 진태현의 사무실로 향했고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삼촌, 저를 부르셨다면서요?”박현우의 말투엔 불만이 잔뜩 담겨 있었고 그것을 눈치챈 진태현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물었다.“왜 그렇게 토라졌어? 내가 뭘 잘못했냐?”박현우는 입을 삐죽이며 투덜댔다.“몰라서 물으세요? 제가 유정 누나를 따른 지 며칠이나 됐다고 누나를 갑자기 내보내시면 저는 이제 어떡해요?”“그래서 내가 널 부른 거잖아. 너 앞으로 성하나 변호사 밑에서 배워. 성 변호사는 민사 경험도 많고 실력도 있어서 널 잘 가르쳐 줄 거야.”하지만 박현우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알겠어요. 뭐, 이 로펌도 기대할 게 별로 없네요. 실력 제일 좋은 변호사 하나 지켜내지도 못하고.”그가 일부러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살짝 높여 말하자 진태현은
박현우가 벌떡 일어나 진태현의 사무실 쪽으로 걸어가려 하자 서유정이 다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가만히 있어요. 제가 그만두는 건 진 변호사님과 아무 상관 없어요. 현우 씨가 진 변호사님을 찾아가봤자 소용없어요.”“누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왜 퇴사해야 해요? 말이 안 되잖아요!”“일단 좀 앉아봐요.”박현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절대 진 변호사님을 찾아가지 마요. 진 변호사님도 지금 스트레스가 많으실 거예요. 전 제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여기서 일하기가 어려워진 거니까 진 변호사님과는 정말 상관없어요.”“그런데 누나가 로펌 나가면 누가 저를 가르쳐줘요? 조금만 더 버텨봐요. 반드시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박현우는 도저히 방법이 없으면 부모님에게 부탁이라도 해볼 생각이었다.“우리 로펌 다른 변호사님들도 다 유능하신 분들이에요. 그리고 진 변호사님께서 인맥이 넓으시니까 금방 현우 씨에게 괜찮은 분을 붙여주실 거예요.”“싫어요. 전 누나가 좋은데...”그가 입을 삐죽이며 고집을 부리자 서유정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알았어요. 저 완전히 은퇴하는 거 아니고 그냥 잠깐 쉬는 거예요. 그리고 제가 이 업계를 떠나는 것도 아니니까 조만간 다시 돌아올지도 몰라요. 우리 또 만날 수 있을 거예요.”“누나, 지금 저를 어린애 취급하는 거잖아요...”“됐고, 저 이제 짐 정리해야 해요. 현우 씨도 슬슬 따르고 싶은 변호사님을 고민해 보고 진 변호사님께 말씀드려요.”박현우는 여전히 서유정이 떠나는 게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제가 괜히 머리를 다시 검은색으로 염색했나 봐요.”서유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박현우의 말투와 반응은 영락없는 철부지였다.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조용히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한참 뒤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성하나는 서유정의 책상이 비어 있는 걸 보고 얼굴이 굳었다.“이게 무슨 일이에요?”서유정은 담담하게 퇴사하기로 했다고 설명했고 성하나는 얼굴이 벌게진
“너 정말...”주희정은 화가 나서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가 이내 웃음이 터져 나왔다.“너 아주 잘 컸네? 몇 년 밖에서 돌아다니더니 말발이 제법 늘었어. 어디서 그런 싹수없는 것만 배워온 거야?”그녀는 서민아를 남기기로 결정한 게 신의 한 수라고 생각했다. 안 그랬으면 서유정을 매일 상대해야 했을 텐데 그녀는 진작에 병나서 죽었을 것이다.“제가 싹수없는 건 부모님에게 교육을 못 받아서죠. 부모 노릇도 안 하면서 낳기만 한 사람들한테 뭘 바라겠어요.”말을 마친 서유정은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뚝.통화 종료음이 들리자 주희정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가 금세 다시 파랗게 굳었다.“다시 전화 걸어! 당장 그년한테 다시 전화 걸라고!”그녀는 서유정에게 도대체 자신들이 뭘 그렇게 잘못했다는 건지 따지고 싶었다. 그들은 서유정을 서씨 가문에 데려온 뒤로 입는 거나 먹는 거나 빠짐없이 챙겨줬고 서민아보다 더 좋은 걸 해준 적도 많은데 결국엔 양주원이랑 눈 맞아서는 집안 망신 다 시키고 나가놓고 이젠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니.‘그년이 그딴 소리를 할 자격이 어디 있어?’유석진이 다시 서유정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소리만 들려왔다.“사모님, 둘째 아가씨께서 저를 차단하셨어요.”주희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변했다.‘그래! 서유정, 네가 밖에서 몇 년 굴러다니더니 아주 제멋대로 구는구나!’그녀는 당장 돌아가자고 하고 싶었지만 조금 전에 서민형이 했던 말이 뇌리를 스치자 이내 이를 악물며 감정을 억눌렀다.“여기서 기다려 보지.”서유정이 휴대폰을 내려놓은 지 얼마 안 돼 전은하로부터 메시지가 왔다.[진 변호사님께서 잠깐 보자고 하십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진태현의 사무실로 향했고 문 앞에 도착해 노크했다.“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서자 진태현이 그녀를 보며 손짓했다.“서 변, 앉아요.”서유정이 자리에 앉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사실 외부에서 우리 쪽에 압력을 넣으면서 서 변을 해고하라고 요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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