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내리깔고 있는 서기현은 속눈썹이 격렬하게 떨렸다. 은백색 긴 머리 아래의 밤색 눈동자에도 처음으로 동요하는 듯한 빛이 스쳤다.“네가 정말 그런 마음이었다면 진작 계약을 해제했겠지, 왜 지금까지 기다렸겠어. 또 뭐 새로운 술책이라도 생각이 난 거야?”사실 서기현은 다른 몇몇 수인 남편들과는 좀 달랐다. 다른 수인 남편처럼 한태강에게 잡혀 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온 것이다.원래 몸 주인과 어릴 적부터 아는 사이였던 것 같지만 계약을 체결한 게 자의에 의한 건지 아닌지는 원래 몸 주인의 기억을 갖고 있는 한여월일지라도 알아낼 수 없었다.하지만 조금 전 서기현의 말투를 들어 보니 서기현 역시 계약을 해제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서기현이 훗날 비를 부르고 바람을 일으키는 악당으로 변할 거라는 스토리가 떠오른 한여월은 이내 한마디 했다.“말했잖아, 내 목적은 너희들이 나와 함께 아빠를 찾으러 가는 거라고.”잠시 멈칫한 한여월은 숨이 끊어질 듯한 나시원을 흘깃 보며 말을 이었다.“서기현, 네 정신력으로 나시원의 상처를 치유해 줘. 그러면 지금 바로 너에게 피를 한 방울 떨어뜨려 줄 테니.”서기현은 사제였기에 정신력을 지니고 있어 다른 수인을 치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한여월은 서기현이 치료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심지어 서기현 본인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그랬던 한여월이 먼저 서기현에게 나시원의 상처를 치료하라고 하다니, 게다가 계약 해제를 위해 본인 피까지 한 방울 떨어뜨려 주겠다고 하니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서기현은 비록 한여월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지만 나시원의 부상이 워낙 심각한 데다 한여월이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지 궁금해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앞으로 나가 나시원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서기현의 손끝에서 희미한 하얀 빛이 번졌다. 그것은 노랑 등급 사제의 정신력이었다.손을 나시원의 인어 꼬리에 얹자 부드러운 빛을 내뿜는 둥그런 테가 상처를 따라 스며들었다. 그러자 피와 살로 뒤범벅이 되었던 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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