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수인 남편과 생존 계약

다섯 수인 남편과 생존 계약

By:  오월 여름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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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다 과로로 돌연사한 뒤 수인 세계 소설 속으로 빙의된 한여월은 완전 멘붕에 빠졌다. 떠돌이 수인인 아빠 한태강이 억지로 납치해 강제로 계약을 체결한 다섯 명의 수인 남편들은 원래의 몸 주인에게 학대당해 죽기 직전까지 이르렀다. 머지않아 그들이 집단으로 흑화하게 되면서 한여월은 결국 비참하게 죽는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밤새워 고민한 한여월은 결국 전투력 최강인 아빠 한태강에게 의지하기로 했다. 그리고 악당 캐릭터들과는 피를 떨어뜨려 계약을 해제해 완전히 선을 긋기로 결심했다. 휴대하는 공간 능력을 이용해 수정을 모으고 식물을 키우며 살아남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던 어느 날... 몇몇 악당 수인 남편들이 한여월을 바라보는 눈빛이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건방지고 맹독을 지닌 백사는 꼬리로 한여월을 휘감으며 다정한 눈빛으로 말했다. “한여월, 내가 살아 있는 한 나와 계약 해제는 꿈도 꾸지 마.” 아름다운 인어가 한여월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유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노래 불러 줄게. 나를 버리지 마.” 검은 털을 지닌 수사자가 고개를 숙여 한여월의 얼굴에 뺨을 비비며 말했다. “한여월, 네가 나를 떠나지 않는다면 내 목숨도 전부 네게 바칠 수 있어.” 요염한 불여우는 한여월에게 달라붙더니 유혹하는 숨결을 내쉬며 말했다. “예전에 네가 나에게 했던 짓들... 전부 몇 배로 돌려받아야겠어.” 차가운 분위기를 내뿜는 사제인 두루미족 수인이 몸을 숙여 한여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가 누구든, 어디서 왔든 상관없어. 너만이 내 유일한 암컷이니까.” 한여월은 깜짝 놀랐다. “어? 너희들... 강제로 계약해서 나를 미워하는 거 아니었어? 다들 계약 끊으려고 했잖아... 왜 이제 와서 다들 싫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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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흐릿한 의식 속에서 한여월은 뭔가 스치는 듯한 채찍 소리를 듣고 천천히 깨어났다.

눈을 뜬 순간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어깨까지 닿은 은빛이 나는 회색 머리카락이었다.

은빛 회색 머리 주인은 바닥에 무릎 꿇고 있었다. 구릿빛 등은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굽어 있었고 근육마다 힘이 넘쳐흘렀지만 살갗에는 가로세로로 얽힌 채찍 자국이 짙게 자리 잡고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했다.

새로 갈라진 살갗 상처에는 아직도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단단한 근육 결을 따라 흘러 허리 옆구리까지 내려온 피는 수피 가죽 치마의 가장자리에 떨어졌다.

어두운 빛을 내뿜는 시뻘건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한여월은 마음이 마치 독사의 송곳니에 찔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빛에는 상대방에 대한 증오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돌린 그는 한여월의 손에 들린 수피 가죽 채찍을 본 순간 입가에 희미한 냉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가시가 박힌 듯한 어조로 허스키하면서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벌써 손을 놓는 거야? 오늘은 힘이 다 떨어졌어?”

한여월은 순간 머릿속에서 윙 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극심한 고통이 관자놀이에서 온몸으로 퍼져 나가며 원래 몸 주인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미친 듯이 머릿속에 밀려 들어왔다.

갓 사회에 발을 들인 직장인 한여월은 야근을 하다 과로사해 금방 다 읽은 수인 세계 소설 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책 속에 등장하는 동명이인의 악질 엑스트라로 빙의한 것이다.

원래 몸 주인의 아빠 한태강은 떠돌이 수인으로 하나밖에 없는 암컷 새끼를 매우 아꼈다. 그래서 한여월이 성년이 되자마자 다섯 명의 수컷을 잡아 와 억지로 그녀와 계약을 체결하게 했다.

하지만 한태강이 잡아 온 수인 남편들을 좋아하지 않았던 한여월은 날마다 방법을 바꿔가며 그들을 학대했다.

눈앞의 잘생긴 수인은 맹독을 지닌 백사로 거칠고 얄짤없는 행동으로 언젠가 한여월의 손가락을 하나씩 부러뜨릴 것이다.

바로 그때 한여월이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놓자 채찍이 찰싹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채찍 끝의 핏방울이 발목에 튀며 차가운 감촉이 느껴지자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윤이산은 아주 미세하게 미간을 살짝 움직였다.

예전 같으면 이 시간에 악독한 암컷이 채찍을 더 세게 휘두르거나 불에 탄 나무막대로 그를 지졌겠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손에 들고 있던 채찍을 내던져 버렸다.

“왜? 또 다른 꿍꿍이수작이라도 부리려는 거야?”

“닥쳐.”

섬뜩한 현실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 한여월은 바로 윤이산의 말을 끊었다.

수인 세계에서 수컷의 등급은 빨, 주, 노, 초, 파, 남, 보로 나뉘며 그중 보라 등급이 가장 강하고 빨강을 표시하는 적색 등급이 가장 약했다. 원래 몸 주인의 아빠 한태강은 보라 등급의 전갈 수인으로 수인 세계의 피라미드 정점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뛰어난 자질을 타고난 다섯 명의 수컷을 억지로 잡아 와 한여월의 수인 남편으로 삼을 수 있었다.

하지만 소설 줄거리에 따르면 한태강은 한여월에게 수인 남편을 구해주기 위해 외출했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한태강이 죽은 후 한여월의 학대에 극한의 한계가 온 수인 남편들은 집단으로 반항하면서 그들은 반역의 위험을 무릅쓰고 파트너 수인 마크를 도려내게 된다. 죽었어야 했을 다섯 명의 수컷들이 미세하게 남은 기운으로 악착같이 살아남아 원래 몸 주인보다 백 배 잔인한 방법으로 한여월을 먹어 치울 것이다.

책에 묘사된 손가락이 잘리는 고통을 생각하자 한여월은 손끝이 순간적으로 저리는 느낌이 들었다.

한여월은 절대 이대로 죽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렇게나 참혹하게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겨우 고개를 든 한여월은 어두운 빛을 내뿜는 붉은색 눈동자를 억지로라도 똑바로 쳐다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고는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어나.”

하지만 윤이산은 꼼짝하지 않은 채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는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뭐야,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고문하려는 거야?”

윤이산이 고개를 들자 가슴 위에 있는 전갈 수인 마크가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그것은 파트너 수인 마크이며 또한 그들의 반항을 속박하는 족쇄이기도 했다.

“상처에 소금이라도 뿌리려고?”

그 말에 한여월은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원래 몸 주인이 아마 그런 짓을 저질렀기에 윤이산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몸을 돌려 돌집 구석에 있는 대나무 바구니로 향했다.

그 안에는 한태강이 부족에서 바꿔온 말라비틀어진 약초들이 몇 개 놓여 있었다. 원래 몸 주인은 그들에게 절대 약초 같은 것들을 써 주지 않았다. 대신 독이 있는 덩굴을 약초인 것처럼 속인 뒤 그들이 그것을 바르고 아파서 바닥을 구르는 꼴을 보는 걸 아주 좋아했다.

한여월은 대나무 바구니에서 윤이산의 상처를 지혈해 줄 약초를 뒤적이며 말했다.

“네 상처 치료해야 해. 나는 더 이상...”

“됐어.”

윤이산은 한여월의 말을 끊은 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여월보다 한 뼘 넘게 키가 큰 윤이산인지라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순간 강렬한 압박감이 밀려왔다.

“그런 속임수 따위 집어치워. 좀 이따 나무막대로 나를 지지려고 그래? 아니면 더 악독한 방법으로 고문할 아이디어가 떠오른 거야?”

약초를 들고 있던 한여월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원래 몸 주인의 포악함이 수인 남편들의 뼛속까지 새겨져 있었기에 아주 사소한 반응조차도 수인 남편들은 새로운 고문 수단으로 받아들였다.

바로 그때 돌집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살랑살랑 들려오더니 세 명의 그림자가 동굴 입구에 나타났다. 저마다 부상을 당한 상태였지만 모두들 똑같이 차가운 눈빛으로 한여월을 응시했다.

제일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은 은백색 장발의 서기현이었다. 노랑 등급의 사제 두루미족 수인으로서 원래는 범접하기 어려운 기품을 내뿜을 수인이었지만 지금은 얼굴이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몸에는 화상 자국이 가득했다.

이것들 또한 원래 몸 주인이 쇠막대기로 지져서 낸 상처였다.

서기현이 눈을 내리깔고 있어 긴 속눈썹이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감정을 가렸지만 꽉 쥔 주먹만 봐도 얼마나 많이 참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붉은 머리의 불여우 지유혁이 서기현 뒤를 바짝 따랐다. 요염하고 아름다웠어야 할 불여우 얼굴은 눈가에서 턱까지 이어진 칼자국 때문에 흉측하기 그지없었다.

한여월을 보자 요염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 웃음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님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왜 그래? 왜 윤이산을 계속 괴롭히지 않는 거야?”

제일 뒤에 서 있는 새까만 단발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는 체격이 좋은 수컷이 말했다. 짧은 머리가 헝클어진 상태로 이마에 붙어 있고 상체에 칼자국과 채찍 흉터가 가득한 이 수인은 바로 검은 사자족 수인 강진우였다.

그들을 번갈아 본 한여월은 마음속에 돌덩이가 들어앉은 듯 무거웠다.

스타일이 확연히 다른 네 명의 최상급 미남이었지만 감상할 여유가 조금도 없었다.

다섯 명의 수인 남편 중에서 네 명이 왔다.

“나시원은 어디 있어?”

한여월이 무심결에 이 이름을 내뱉은 순간 동굴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변했다.

바로 그때 지유혁이 신나게 웃었다.

“벌써 잊어버린 거야? 어제 네가 인어 비늘을 뽑은 뒤 흙 속에 묻어두면 어떻게 될지 보고 싶다고 했잖아. 네가 우리보고 나시원을 산에 묻어버리라고 시켰잖아.”

한여월은 발끝까지 얼어붙을 듯했다.

나시원, 다섯 명의 수인 남편 중 유일한 해족 수인으로 소설 줄거리 상 파트너 수인 마크를 도려낸 후 한여월의 피부를 조금씩 도려낼 것이다.

왜냐면 한여월이 나시원으로 하여금 인어로서 제일 끔찍한 비늘이 뽑히는 고통을 겪게 했기 때문이다.

눈앞에 있는 상처투성이 네 명의 수컷을 바라본 한여월은 비늘이 뽑힌 나시원이 머릿속에 스치자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넋이 나간 한여월의 모습을 알아챈 윤이산은 붉은색 눈동자에 비웃음이 스쳤다.

“뭐야, 또 새로운 놀이 방법을 생각하는 거야?”

윤이산이 한 걸음 앞으로 나오자 온몸에서 피비린내가 더욱 짙게 풍겼다.

“차라리 한꺼번에 다 써 보는 게 어때?”

고개를 든 한여월은 윤이산과 시선이 마주쳤다.

지금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반드시 뭔가 해야만 했다.

“윤이산, 네가 가서 나시원 데려와. 나시원에게 할 말이 있어.”

윤이산은 개그 프로그램을 본 사람처럼 낮은 소리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한여월, 또 무슨 꿍꿍이 속셈이야? 한 명씩 고문하는 걸로 부족해? 그래서 이제 다섯 명을 동시에 괴롭히려고?”

한여월은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지혈할 약초를 대나무 바구니에 도로 넣으며 말했다.

“우리 얘기 좀 하자. 너희가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너희들 계약을 해제해 줄게.”

이 말이 나오자 돌집 안은 숨소리조차 크게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시선을 내리고 있던 서기현은 속눈썹이 저도 모르게 살짝 떨렸고 지유혁 또한 얼굴에 번졌던 미소가 굳어버렸다. 주먹을 꽉 쥐고 있던 강진우의 손에서도 딱딱 하는 가벼운 소리가 났다.

윤이산도 더는 웃지 않고 한여월의 말이 믿을 만한지 판단하는 듯 그녀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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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흐릿한 의식 속에서 한여월은 뭔가 스치는 듯한 채찍 소리를 듣고 천천히 깨어났다.눈을 뜬 순간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어깨까지 닿은 은빛이 나는 회색 머리카락이었다.은빛 회색 머리 주인은 바닥에 무릎 꿇고 있었다. 구릿빛 등은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굽어 있었고 근육마다 힘이 넘쳐흘렀지만 살갗에는 가로세로로 얽힌 채찍 자국이 짙게 자리 잡고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했다.새로 갈라진 살갗 상처에는 아직도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단단한 근육 결을 따라 흘러 허리 옆구리까지 내려온 피는 수피 가죽 치마의 가장자리에 떨어졌다.어두운 빛을 내뿜는 시뻘건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한여월은 마음이 마치 독사의 송곳니에 찔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얼음장같이 차가운 눈빛에는 상대방에 대한 증오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고개를 살짝 돌린 그는 한여월의 손에 들린 수피 가죽 채찍을 본 순간 입가에 희미한 냉소를 지었다.그러더니 가시가 박힌 듯한 어조로 허스키하면서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벌써 손을 놓는 거야? 오늘은 힘이 다 떨어졌어?”한여월은 순간 머릿속에서 윙 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극심한 고통이 관자놀이에서 온몸으로 퍼져 나가며 원래 몸 주인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미친 듯이 머릿속에 밀려 들어왔다.갓 사회에 발을 들인 직장인 한여월은 야근을 하다 과로사해 금방 다 읽은 수인 세계 소설 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책 속에 등장하는 동명이인의 악질 엑스트라로 빙의한 것이다.원래 몸 주인의 아빠 한태강은 떠돌이 수인으로 하나밖에 없는 암컷 새끼를 매우 아꼈다. 그래서 한여월이 성년이 되자마자 다섯 명의 수컷을 잡아 와 억지로 그녀와 계약을 체결하게 했다.하지만 한태강이 잡아 온 수인 남편들을 좋아하지 않았던 한여월은 날마다 방법을 바꿔가며 그들을 학대했다.눈앞의 잘생긴 수인은 맹독을 지닌 백사로 거칠고 얄짤없는 행동으로 언젠가 한여월의 손가락을 하나씩 부러뜨릴 것이다.바로 그때 한여월이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놓자 채찍이 찰싹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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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윤이산과 강진우는 나시원을 찾으러 나갔고 지유혁과 서기현은 동굴 속에서 기다렸다.한여월은 가만히 있기 어색해 그들에게서 등을 돌린 뒤 동굴 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원시 사회의 거주 환경은 딱히 좋다고 할 수 없었다. 동굴 입구의 굵은 나무줄기와 덩굴이 안으로 불어오는 찬 바람을 대부분 막아주고 있었다.동굴 벽은 비교적 평평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동굴 바닥에는 마른풀이 두껍게 깔려 있었으며 그 위에는 서로 다른 종류의 수피 가죽 일곱여덟 장이 겹쳐 있었다.이것들은 한태강이 해 놓은 것이다.보라 등급 떠돌이 수인 한태강은 늘 밖에서 지냈지만 유일한 암컷 새끼를 아주 세심하게 보살폈다.동굴 벽 한쪽에는 손질된 가죽 수피가 스무 장 넘게 쌓여 있었고 돌 선반 위에는 풍성한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벽 절반에 말린 짐승 고기가 가득 걸려 있었고 대나무 바구니 속의 야생 과일에는 아직도 이슬이 맺혀 있었다.맑은 물이 가득 담긴 도자기 재질의 항아리 앞으로 걸어가 물속에 비친 모습을 본 한여월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비쳐진 모습 속의 암컷은 살짝 곱슬곱슬한 보라색 긴 머리와 정교하고도 예쁜 이목구비의 소유자였다. 검은색 눈동자는 마치 별들이 가득 담긴 듯 반짝이고 있었다.한여월은 암컷의 외모가 이렇게 예쁠 줄 몰랐다. 학대를 즐기는 성격과는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몇몇 수인 남편들이 책 속에서 마음이 잔혹한 악당들인 것이 떠오르자 그들과 함께 있으면 언젠가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한태강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오직 한태강만이 한여월을 무조건적으로 믿어주고 잘해 줬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태강은 이미 보라 등급이었기에 한태강이 위험에 처하기 전에 얼른 만난 뒤 몇몇 수인 남편들과의 계약을 해제하기만 하면 한여월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 여기는 각종 맹수들이 출몰하고 있는 환경이 열악한 수인 세계였기에 강력한 수컷의 보호가 없다면 전투력도 없고 수인 형태도 없는 암컷은 스스로 생존할 수 없다.수컷이 많고 암컷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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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눈을 내리깔고 있는 서기현은 속눈썹이 격렬하게 떨렸다. 은백색 긴 머리 아래의 밤색 눈동자에도 처음으로 동요하는 듯한 빛이 스쳤다.“네가 정말 그런 마음이었다면 진작 계약을 해제했겠지, 왜 지금까지 기다렸겠어. 또 뭐 새로운 술책이라도 생각이 난 거야?”사실 서기현은 다른 몇몇 수인 남편들과는 좀 달랐다. 다른 수인 남편처럼 한태강에게 잡혀 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온 것이다.원래 몸 주인과 어릴 적부터 아는 사이였던 것 같지만 계약을 체결한 게 자의에 의한 건지 아닌지는 원래 몸 주인의 기억을 갖고 있는 한여월일지라도 알아낼 수 없었다.하지만 조금 전 서기현의 말투를 들어 보니 서기현 역시 계약을 해제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서기현이 훗날 비를 부르고 바람을 일으키는 악당으로 변할 거라는 스토리가 떠오른 한여월은 이내 한마디 했다.“말했잖아, 내 목적은 너희들이 나와 함께 아빠를 찾으러 가는 거라고.”잠시 멈칫한 한여월은 숨이 끊어질 듯한 나시원을 흘깃 보며 말을 이었다.“서기현, 네 정신력으로 나시원의 상처를 치유해 줘. 그러면 지금 바로 너에게 피를 한 방울 떨어뜨려 줄 테니.”서기현은 사제였기에 정신력을 지니고 있어 다른 수인을 치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한여월은 서기현이 치료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심지어 서기현 본인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그랬던 한여월이 먼저 서기현에게 나시원의 상처를 치료하라고 하다니, 게다가 계약 해제를 위해 본인 피까지 한 방울 떨어뜨려 주겠다고 하니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서기현은 비록 한여월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지만 나시원의 부상이 워낙 심각한 데다 한여월이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지 궁금해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앞으로 나가 나시원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서기현의 손끝에서 희미한 하얀 빛이 번졌다. 그것은 노랑 등급 사제의 정신력이었다.손을 나시원의 인어 꼬리에 얹자 부드러운 빛을 내뿜는 둥그런 테가 상처를 따라 스며들었다. 그러자 피와 살로 뒤범벅이 되었던 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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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아, 내 피를 받아내서 얼른 계약을 해제하려는 거였구나.’한여월은 순간 마음이 확 트이는 듯했다. 수인 남편들이 원래 몸 주인이 잠가 놓은 ‘족쇄’에서 얼른 벗어나려고 안달이 나긴 했지만 그래도 꽤 솔직했기 때문이다.오히려 이런 솔직함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당분간은 한여월을 죽이겠다는 생각 같은 건 안 한다는 뜻이니까...계약을 체결한 수인 마크의 구속이 있는 한 그들이 한여월에게 해를 끼칠 염려는 없었다. 독약을 타지 않았을까 했던 걱정도 사실은 불필요한 셈이었다.여기까지 생각하자 한여월은 긴장했던 몸이 완전히 풀리는 듯했다.하지만 계약을 해제하는 일은 서두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지금 정말로 지유혁에게 피를 열 방울 다 떨어뜨려 줘서 수인 마크가 사라지면 앙심을 품으면 어떻게든 원한을 갚는 여우 수인의 성격상 바로 덤벼들어 한여월의 목을 물어뜯을지도 모른다.고개를 든 한여월은 교활함이 넘치는 지유혁의 반짝이는 눈동자와 마주치자 갑자기 입꼬리를 올리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고기 한 끼에 피 한 방울을 바꾸겠다고?”얼굴에 번졌던 미소가 잠시 굳어졌던 지유혁은 이내 ‘역시 그럴 줄 알았어’라는 듯 비아냥 섞인 표정을 지었다.“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한여월은 손에 든 고기를 살랑살랑 흔들며 느긋하게 말했다.“이렇게 하자. 이제부터 나에게 다섯 끼를 해 줘. 끼니마다 오늘처럼 정성스럽게. 그러면 피를 한 방울씩 떨어뜨려 줄게. 어때?”사실 별생각 없이 조건을 내뱉은 지유혁인지라 한여월이 정말로 받아들일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다섯 끼에 피 한 방울이면... 쉰 끼면 계약을 해제할 수 있네?’순간 눈빛을 반짝인 지유혁은 이내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그 말, 진짜야? 수인신에게 맹세할 수 있어?”이 세계에서 수인신은 지고무상한 존재로 수인신 앞에서는 절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며 수인신에게 일단 맹세하면 그것은 보이지 않는 족쇄처럼 구속력이 있었다.한여월은 속으로 계산해 보았다.‘쉰 끼면... 아빠를 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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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나시원은 항아리 속에서 천천히 두어 바퀴를 돌았다. 인어 꼬리가 움직일 때마다 부드러운 물결이 일더니 항아리 속 반쯤 차 있던 바닷물이 눈에 띄게 줄어들며 수면이 조금씩 내려갔다.잠시 후, 항아리 속의 바닷물은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움직임을 멈춘 나시원은 살짝 고개를 들더니 꿀꺽 침을 삼키며 목젖을 움직였다. 이어 입을 벌리더니 그 안에서 주먹만 한 물건을 하나 내뱉었다.새하얗고 투명한 광택이 감돌고 있는 그 물건은 바로 소금 덩어리였다.한여월은 눈이 휘둥그레졌다.‘이게 인어족의 소금 제조 기술이야? 그런데... 나시원의 입에서 나온 건데 먹을 수 있을까?’머릿속에 이 생각이 스치자마자 아까 그 싱거웠던 구운 고기가 생각났다. 배에서는 한여월의 마음을 대변하듯 아주 솔직하게 ‘꼬르륵’ 소리가 났다.‘소금이 어디서 나왔든 하나도 없는 것보단 낫지.’한여월은 곧바로 손을 내밀었다.“소금 줘봐.”그러나 나시원은 움직이지 않은 채 그저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보랏빛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어 보였지만 확고한 의지가 담긴 맑은 목소리로 거침없이 한마디 했다.“네 피를 먼저 떨어뜨려 줘. 그러면 줄게.”한여월이 서기현에게 피를 떨어뜨리는 것과 지유혁 앞에서 수인신에게 맹세하는 것을 직접 보았지만 너무나 많은 손해를 본 나시원은 더 이상 한여월의 말을 믿지 않았다.한여월도 나시원이 쉽게 믿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에 이를 악물고 목걸이를 벗어 막 아문 상처를 그어서 나시원에게 피를 떨어뜨려 줬다.핏방울이 나시원의 가슴에 있는 전갈 수인 마크 위에 떨어지자 짙은 보라색의 흔적이 마치 맑은 물에 먹물이 번지는 것처럼 눈에 띄게 한 층 옅어졌다. 가장자리는 어느새 희미한 분홍빛으로 번졌다.속눈썹을 격렬하게 떤 나시원은 보랏빛 눈동자에 마치 불똥이라도 튄 듯 잔인한 빛이 터져 나왔다.가슴 위의 옅어진 보라색을 응시하더니 목이 메어 끝내 소리를 내지 못했다. 무의식적으로 반쯤 올라간 손은 갑작스러운 현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 허공에서 멈췄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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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한여월은 한태강이 윤기가 반지르르한 구운 수육 꼬치를 건네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목을 단단히 조르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숨이 막혀 당장이라도 질식할 것 같았다.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꿈에서 본 눈앞의 고기는 흐릿한 검은 그림자로 변했다.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간 것 같았고 눈꺼풀은 천근만근이 된 듯 무거워 좀처럼 눈을 뜰 수 없었다.“으...”목에서 흐느끼는 목소리가 살짝 새어 나왔다. 의식은 깨어날 듯 말 듯 한 경계를 오가고 있었다.동굴 속 횃불이 나시원을 비춰 그림자가 암벽 위에 길게 드리워져 유난히 커 보였다.시선을 내리깔고 있어 긴 속눈썹의 그늘이 눈 밑에 드리워졌다. 하지만 보라색 수정 같이 빛나는 눈동자 속에는 쉽게 풀리지 않을 듯한 음험함이 거칠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한여월의 목을 조르는 손의 힘이 점점 더 강해지자 한여월의 얼굴이 벌게지다가 차츰 새파래졌다. 입술은 부르르 떨렸고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의식이 흐려지려는 찰나 누군가 나시원의 손목을 강하게 붙잡았다. 뼈를 으스러뜨릴 것 같은 센 힘에 나시원도 억지로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김빠진 풍선처럼 힘없이 마른풀 위에 축 늘어진 한여월은 격렬하게 기침하며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가슴도 심하게 오르내렸다.“나시원, 너 미쳤어?”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외친 윤이산은 나시원을 죽일 듯이 응시했다. 어두운 빛을 내뿜는 붉은색 눈동자에는 분노가 가득했다.“죽고 싶으면 혼자 죽어! 우리 모두 같이 죽일 셈이야?”수인 세계의 철칙이 바로 계약한 암컷이 자신의 파트너에게 살해당할 경우 계약을 맺은 모든 수컷이 수인 마크를 배신한 대가로 그 자리에서 몸이 터져 죽게 된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윤이산의 말에도 나시원은 여전히 온몸을 떨고 있는 한여월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눈빛이 얼마나 차가운지 동굴 안의 모든 공기조차 얼려 버릴 듯했다.몇 초가 지나자 갑자기 손을 놓은 나시원은 아무 말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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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한여월은 몇몇 수인 남편들이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왜 저러지? 내가 제안한 보상이 별로 솔깃하지 않다는 건가?’상처를 세 번 싸매줄 때마다 피 한 방울이면 지유혁과의 다섯 끼에 피 한 방울 주는 것보다 훨씬 나은 셈이다. 이치대로라면 오히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좋아해야 하는 게 정상이지 않을까?한여월은 눈을 깜빡이며 의아한 듯 나시원을 바라보았다.“왜...? 이 보상, 필요 없어?”이 말이 나오자 몇몇 수인 남편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서기현이 가장 먼저 눈빛 속의 놀라움을 감추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지유혁은 입가에 번졌던 미소가 잠시 굳어졌지만 이내 다시 희롱 섞인 미소를 지었다. 강진우는 아직도 예상과 다른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듯 멍하니 있었다.하지만 눈치 빠른 수인 남편들인지라 이내 알아차렸다. 한여월이 목에 난 손자국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나시원에게 목이 졸렸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을...한여월이 눈치채지 못했다면 누구도 일부러 먼저 나서서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여기까지 생각한 나시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윤이산을 흘낏 바라보며 말했다.“상처를 싸맨 사람은 나 아니야.”그러자 다들 일제히 윤이산에게 시선이 쏠렸다.어두운 빛을 내뿜는 붉은색 눈동자가 살짝 흔들린 윤이산은 의아해하는 한여월의 시선과 마주치자 반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야.”더욱 멍해진 한여월은 고개를 돌려 나시원을 바라보았다.“그럼 너는? 아까 왜 너라고 했어?”나시원은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눈을 내리깔고 있어 보랏빛의 눈동자 속에 무슨 감정이 일렁이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한여월이 목을 조른 일을 추궁하는 줄 알고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피해가 갈까 봐 자수한 거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누가 했든 잘한 거니까 상을 줘야지.”한여월은 의아함을 뒤로한 채 윤이산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확실히 잘 싸맸어. 상처에 딱지도 앉았네. 이번 한 번은 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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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급해! 얼마나 급한데!’한여월은 생각할 것도 없이 손을 내저었다. 한태강에게 위험이 닥칠 상황이었기에 반드시 가능한 한 빨리 한태강을 찾아야 했다.지금 한여월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한태강이었다. 책 속 줄거리대로 한태강이 변을 당하면 그 결과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조금이라도 더 빨리 갈 수 있다면 수인 형태로 가자.”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몇몇 수인 남편들이 갑자기 침묵했다.그 모습에 한여월은 눈을 깜빡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어?”윤이산이 반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어두운 빛을 내뿜는 붉은색 눈으로 그녀를 곁눈질하고는 비아냥이 흘러넘칠 듯한 어조로 말했다.“수인 형태로 길을 가도 상관은 없어. 그런데 너는 누구 등에 앉을 생각이야?”이 말에 한여월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했다. 순간 원래 몸 주인이 그들의 수인 형태를 비아냥거렸던 일이 떠올랐다.원래 몸 주인은 윤이산의 뱀 형태가 미끌미끌한 것이 보기만 해도 역겹다고 했으며 한 번 스치기라도 하면 더럽다고 했다.서기현의 두루미 수인 형태는 고결해 보이지만 사실은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고 날개를 펄럭이며 날면 어지러울 정도라고 하면서 쓸데없이 큰 날개를 달고 있다고 했다.지유혁의 불여우 수인 형태는 보기만 해도 음흉하고 교활해 보이며 붉은 털은 피로 물들인 것 같아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불길하다고 했다.강진우의 사자 수인 형태는 위엄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돼지처럼 우둔하고 털은 마른 풀더미처럼 엉망이며 달리면 땅이 울릴 정도로 시끄러워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나시원은 물을 떠나면 어설프게 움직여 우스워 보이고 비늘이 빠지면 가죽을 벗긴 물고기 같아 못생겨서 보기 싫다고 하면서 시냇물에 사는 일반 물고기가 나시원보다 훨씬 낫다고 했다.자리에 서 있던 한여월은 그저 목이 메는 듯한 느낌만 들었다.그들이 이런 모욕을 당하고도 기꺼이 자신을 태워 길을 나설 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지금 유일한 방법은 피를 떨어뜨려 주는 걸 미끼로 삼을 수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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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나무통 곁으로 걸어간 나시원은 물고기 꼬리를 살짝 휘둘러 소금이 든 도자기 항아리를 감싸 들어 올리더니 들고 있던 수피 가방 안에 넣었다.모든 준비가 끝나자 몇몇 수인 남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동시에 수인 형태로 변했다.온몸이 은백색인 거대한 뱀으로 변한 윤이산은 햇빛 아래서 차가운 빛을 반짝였다. 배배 꼰 몸통이 물통보다 더 굵어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하얀 두루미로 변신한 서기현은 날개를 펼치자 폭이 2미터는 족히 되었다. 깃털은 눈처럼 하얗고 부리 끝은 옅은 금색을 띠고 있어 마치 구름 위에서 내려온 신조처럼 고귀해 보였다.불여우 수인 형태인 지유혁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온몸의 붉은 털은 불타는 불꽃처럼 빛났고 꼬리는 커다란 솜처럼 폭신해 보였다.강진우의 사자 형태가 그들 중에서 가장 위엄이 있었다. 보통 사자보다 한 단계는 더 큰 체급과 검은 털은 아주 위풍당당해 보였다.나시원은 인어 형태를 유지했다. 인어 꼬리의 상처에 이미 딱지가 앉았지만 비늘이 자라지 않아 흉터가 그대로 보여 아주 흉측했다.눈앞에 펼쳐진 각양각색의 수인 남편들의 형태를 바라본 한여월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역시 수인 세계의 수컷이라 수인 형태도 이렇게 아름답구나.’한여월 앞으로 걸어간 강진우가 살짝 몸을 굽히더니 올라타라는 신호를 보냈다.강진우의 털은 그냥 보기에는 아주 거칠어 보였지만 손끝에 닿았을 때 의외로 부드러웠다. 살을 찌르는 듯한 느낌도 전혀 없었다.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조심스럽게 강진우의 등에 올라탄 한여월은 두 손으로 그의 털을 꼭 움켜쥐었다.“꽉 잡아.”강진우의 말에 한여월이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강진우는 걸음을 옮기더니 검은 숲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윤이산이 앞장서서 길을 열었고 두루미족 서기현은 상공을 맴돌며 주위에 위험 요소가 있는지 경계했으며 불여우 지유혁은 숲 사이를 민첩하게 누비며 이따금 야생 과일을 몇 개 입에 물어 수피 가방에 던져 넣었다. 나시원은 잠시 물을 채운 큰 나무통 안에 있다가 윤이산의 꼬리에 감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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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손에 든 채찍을 멍하니 바라본 한여월은 정신이 아찔해 났다.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가득할 정도로 그저 아리송할 뿐이었다.손을 내밀어 채찍을 받지 않고 의아한 듯 강진우를 바라보았다.“너를 때리라고? 왜 때려야 하는데?”강진우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듯 얼음장처럼 차가운 빛을 내뿜는 파란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얼굴 가득 충격받은 표정으로 한여월을 바라보더니 반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큰 키 때문에 한여월의 온몸에 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눈빛에는 믿기 어렵다는 듯한 감정이 가득했다.본인 때문에 등 위에서 그렇게 큰 고생을 했을 뿐만 아니라 토하기까지 했으며 팔은 아직도 떨고 있는데 때리지 않는다니...한참을 기다렸지만 한여월이 때리려고 하지 않자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정말 안 때릴 거야?”예전 같았으면 채찍으로 때리는 것만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적어도 채찍에 소금물을 묻히거나 불에 달군 나무막대로 지졌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의 한여월은 원래 몸 주인이 아니었기에 사람을 때려서 남의 고통을 즐기는 그런 취미 따위 없었다.게다가 자기를 죽이려 드는 악당들인데 어떻게 감히 때릴 수 있겠는가... 설령 강진우가 학대를 즐기는 패티시가 있어서 채찍질을 좋아한다 해도 지금 한여월은 때릴 힘이 없다.나무줄기에 기대어 눈을 감은 뒤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나 피곤해, 좀 쉴래. 시끄럽게 굴지 말고 조용히 있어.”말이 끝나자마자 이내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한여월은 너무 지쳤다. 게다가 어젯밤 악몽을 꾸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긴장이 풀리자 곧바로 잠들어 버렸다.큰 나무에 기대어 잠든 한여월의 모습에 몇몇 수인 남편들은 표정이 무척 복잡해졌다.악독한 암컷이 처음으로 수컷 등에 앉아 외출했지만 거친 진동에 얼굴이 새파래졌다.하지만 길에서 단 한 마디 욕설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놀라서 그런 줄 알고 수컷 등에서 내려오면 분명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지만 채찍을 들지도 않았을뿐더러 불쌍한 모습으로 큰 나무에 기대어 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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