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하린의 눈빛은 마치 두 개의 날카로운 얼음 조각처럼 조금의 온도도 없이 이진영의 깊은 눈동자를 찔렀다. 그 눈빛에는 의외와 분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처가 가득했다.“무슨 일이 있어요?”그녀의 말은 나지막하고 힘차서 한 글자 한 글자가 마치 이 사이로 비집고 나온 듯 거부할 수 없는 무거움을 띠고 있었다.이진영은 몸을 살짝 움직였다. 그녀가 이 한마디를 뱉는 순간 그의 눈빛은 순간적으로 암울하게 변했고 마음속에 복잡하고 알 수 없는 감정이 피어올랐다.그는 한 걸음 천천히 앞으로 내디디며 꿈에도 그리지만 아득히 먼 이 그림자에 접근하려 했지만 신하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담함과 거부감은 보이지 않는 장벽처럼 그를 격리했다.“괜찮으시다면 먼저 나가서 기다렸다가 나중에 들어오세요!”그녀가 계속 말했다. 말투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 확고함과 결단만이 있었다.그녀의 두 손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는데 핏줄이 하얀 손등에 내비쳐 그녀의 마음속 거친 정서를 드러냈다.이 순간, 그녀는 더는 그 온화하고 사랑스러운 여자가 아니라 복수의 사신으로 변신하여, 죽은 절친을 위해 따지려는 듯했다.이진영의 마음이 아프게 조여왔다. 그는 신하린의 증오로 가득 찬 두 눈을 바라보며 전례 없는 무력함과 고통을 느꼈다.그는 앞으로 나가 그녀를 안으려고 했다.위로해주고 싶고그녀와 얘기도 하고 싶었지만 신하린의 눈빛은 너무 차가웠다.두 사람은 이렇게 대치하고 있었고, 공기 중에는 긴장과 억압이 가득 차 있어 마치 시간조차 이 순간에 정체된 것 같았다.“왜 아직도 안 가?”신하린이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에는 귀찮음이 느껴졌다. 그녀는 더는 이 남자와 아무런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았고 지금 이 순간 마음속에는 복수의 불길만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이진영은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속의 충격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이왕 만났으니 우리 얘기 좀 할까?”신하린은 가슴이 아파지는 걸 느끼며 입을 벌리고 그를 불렀다.“진영 씨.”그녀의
그는 후회했다.몹시 후회하다.하지만 이 세상에 후회 약은 없다!신하린은 몸을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입가에 풍자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마치 여름 오후에 갑자기 들이닥친 소나기처럼 차갑고 격렬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곧바로 쳤다.“미연이는 이미 한 줌의 흙이 되었는데 강지한 씨의 이런 능청스러운 태도는 누구에게 보여주려는 거예요?”그녀의 목소리는 높지 않지만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어 주위의 공기를 굳힌 것 같다.강지한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는 입술을 감빨며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감정을 억누르려 했으니 그 강렬한 통증은 조수처럼 세차게 밀려와 그를 삼킬 것 같았다.그는 두 손을 주먹으로 꽉 쥐었다. 핏줄이 불끈 솟아올랐고 손끝은 너무 힘을 주어 하얗게 질렸지만 마치 이렇게 해야만 심장을 찌르는 듯한 고통을 조금이나마 완화할 수 있는 것 같았다.신하린은 강지한을 바라보며 차갑게 웃더니 시큰둥하고 비참함으로 가득 찬 어투로 말했다.“뒤늦은 정은 길가의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들풀보다 더 비천해요.”강지한의 마음은 이 순간 유난히 무거웠다.신하린은 그런 그를 보고 또 계속 말을 이었다.“온지유의 일에 더는 끼어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에요.”그녀의 목소리는 높지 않지만 우레와 같이 그의 귓가에 폭발했고, 글자마다 천근 무게로 대처할 수 없는 힘을 띠고 있었다.그녀의 눈빛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고, 단지 확고함과 냉혹함만이 있었는데 마치 이미 온지유의 비참한 미래를 예견한 것 같았다.“난 끼어든 적 없어요. 온지유가 지금 감당하고 있는 모든 것은 자업자득이에요. 신하린 씨가 어떻게 상대하든 상관없어요.”강지한은 차가운 눈빛으로 쌀쌀하게 말했다.신하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에 분노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는데 그것은 심미연을 향한 끝없는 그리움과 슬픔이 만들어낸 불꽃이었다.“말한 대로 하기를 바라요!”또박또박 말하고 난 그녀는 몸을 돌려 떠나갔다.신하린이 문을 나서자마자 성무진이 초조한
성무진은 신미연이 정말 바다에 빠졌다면 어떻게 찾을 수 있었을까 생각했지만 이런 말을 그는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다.그렇지 않으면 강 대표님이 틀림없이 화를 낼 것이니 말이다.“빨리 가서 이 일을 처리해. 난 기사를 불러 집에 갈 거야.”성무진은 서둘러 갈 수밖에 없었다.강 대표님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했다.강지한은 이불을 들치고 일어나 욕실로 갔다.손으로 얼굴의 손자국을 어루만지며 신하린의 당시 슬프고 분노하던 모습을 떠올렸는데 연기하는 것 같지 않았다.만약 심미연이 죽지 않았다면 신하린에게 알리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심미연이 죽었다면...강지한은 감히 더는 생각하지 못하고 재빨리 수도꼭지를 틀고 물로 얼굴을 씼었다.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자 정신이 확 들었다.씻고 옷 갈아입고 나니 기사도 도착했다.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침실은 이미 깨끗이 청소되어 공기 중에 은은한 향기가 났다.강지한은 또 그 넥타이를 보고 마음이 뒤숭숭해졌다.심이연이 그리웠고 그가 전에 했던 일도 떠올라 알 수 없는 괴로움이 밀려왔다.오후가 되자 육현성이 찾아왔는데 얼굴이 초췌하고 수염도 깎지 않아 의기소침해 보였다.강지한은 소파에 앉아 눈앞의 육현성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눈썹을 치켜세우고 물었다.“무슨 일로 찾아왔어?”온지유는 이미 체포되었으니 절차가 끝나면 모든 것이 마무리된다.육현성이 온지유의 도주를 도운 일에 대해 그는 결코 추궁할 생각이 없었다.“넌 분명히 이미 모든 것을 안배했는데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어?”육현성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따져 물었다.온지유가 체포된 일에 대해 그는 사람을 찾아 경위를 똑똑히 묻고 나서야 자신이 철두철미한 바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강지한의 눈에는 그가 아마 우스운 꼬락서니였을 것이다.집에서 며칠을 지내다가 그는 강지한을 찾아 분명히 묻기로 했다.“내가 너에게 말했으면 너는 온지유를 도와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어?”강지한은 찻잔
“지한아, 너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온지유를 놓아줄 수 있는 거야?”육현성은 그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고 또 한마디 물었다.강지한은 눈빛을 그의 얼굴에 떨어뜨렸다.“이것이 바로 온지유의 결말이야. 아무도 바꿀 수 없어. 너는 그만 가봐.”강지한이 내쫓자 육현성의 안색은 극도로 나빠졌다.“너는 왜 이렇게 정이 없는 거야!”강지한은 그의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예전에 심미연도 같은 말을 했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세계에는 냉랭한 사람만 존재했고 감정은 없었다.육현성은 그곳에 앉아 그의 모습이 2층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눈을 감은 채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마음속의 모든 감정을 누르고 천천히 일어섰다.이 순간 그는 갑자기 어머니의 심정을 깨달았다.원래 강하지 못하면 발밑에 밟힐 수밖에 없다.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그는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어디 갔어?”오미경은 분노로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다.“이다은과 결혼할게요.”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었다.만약 그가 이다은과 결혼할 수 있다면 이씨 가문의 세력이 생길 것이고 그는 서서히 강해질 것이다....신하린은 흐리멍덩하게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운 채 공허한 눈빛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그녀는 멀쩡하던 심미연이 왜 이렇게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그리고 그녀의 배 속에 있는 두 아이도...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얼마나 울었을까, 그녀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꿈속에서만 그녀는 심미연을 볼 수 있다.얼마나 지났는지 그녀의 침대 옆에 그림자 하나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신하린, 넌 왜 나에게 사랑을 좀 나누어 줄 수 없는 거야? 젠장, 넌 양심이 없는 년이야!”이진영의 목소리는 침대 위의 여자를 깨우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럽게 들려왔다.욕을 한 후 그는 옷을 벗고 이불을 젖히더니 이불 속에 누웠다.그가 눕자마자 여자의 몸은 습관적으로 그에게 다가와 두 손으로 그를 껴안고
이진영은 땅에서 일어나더니 침대 옆에 서서 분노한 신하린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심미연은 이제 없어. 나마저 밀어내면 너의 곁에는 의지할 사람이 없을 거야.”신하린은 침대에 앉아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난 혼자가 되더라도 다시는 진영 씨와 함께 있지 않을 거예요!”약혼녀가 있는 남자에게 매달리다가 결국 자신만 다칠 것이니 마지막에 엉망진창으로 지는 것보다 좀 일찍 떠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었다.“신하린, 나한테 여자는 너 하나뿐이야. 다른 여자와 함께 있지 않았어.”이진영은 설명하려 했다.“나를 믿어줘.”신하린은 그의 얼굴을 보고 차갑게 웃었다.“진영 씨가 그 여자와 함께 있지 않더라도 두 사람이 약혼한 사이라는 건 변하지 않을 거잖아요! 다른 여자가 있는데도 나와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것은 나를 죽이려는 거에요? 미연의 결말로 내가 정신 차리기에 충분하지 않아요?”만약 심미연이 조금 일찍 강지한을 떠났더라면 온지유가 그녀에 대한 적의가 그렇게 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심미연의 외할머니도 죽이지 않을 것이고 그녀도 죽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이 세상에는 만약이 없다.이런 사실 앞에서 그녀가 어떻게 이진영과 계속할 수 있겠는가.“심미연은 심미연이고 너는 너야! 나는 너를 위험하게 하지 않을 거라고!”이진영은 맹세하며 말했다.“진영 씨, 나는 진영 씨가 사랑하는 사람이 구아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지난 몇 년 동안 진영 씨가 나를 곁에 둔 이유는 단지 내가 구아정이랑 조금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일 뿐이잖아요. 진영 씨, 난 이제 대역이 되고 싶지 않아요. 우리 그만 헤어지고 더는 나를 방해하지 말아요.”오랫동안 마음에 두었던 말을 마침내 뱉고 나니 신하린은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졌다.이진영은 놀라서 멍하니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신하린...”그는 입을 벌리고 설명하려 했지만 신하린이 먼저 입을 열어 그의 말을 끊었다.“진영 씨, 그만 가요.”예전에는 그의 마음속에 사람이 있었고, 지금은 그의
작업실에 갔을 때 성무진이 아직 있었다.성무진을 본 그녀는 놀라며 왜 아직 안 갔는지 의아했다.소민이 와서 조용히 그녀의 귓가에 말했다.“제가 말했는데 꼭 여기에 앉아서 사장님을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먼저 가서 일 봐. 내가 얘기 좀 할게.”신하린은 성무진이 가지 않는 것은 틀림없이 강지한이 꼭 완성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와 잘 이야기할 생각이었다.“그냥 승낙하면 안 돼요?”소민은 이렇게 큰 장사를 거절하는 것이 정말 큰 손실이라고 생각했다.누가 들어오는 돈을 밖으로 밀어낸단 말인가.“겉으로 보기에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일도 있어. 이 일은 말하자면 기니 나중에 다시 너에게 알려줄게. 됐어, 너 먼저 가서 일해.”신하린이 소민을 밀었다.“참, 너 인터넷에 채용 정보를 하나 발표해.”소민이 가고 나서야 신하린은 성무진에게 다가가 소원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성 비서님,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을 이미 알고 있어요. 전에도 직원에게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말 전해달라고 했지만 지금 나는 다시 한번 직접 얘기할게요. 나는 강지한 씨가 페푸는 걸 받아들일 마음이 없어요. 난 미연의 죽음으로 양심을 속이는 돈을 벌지 않을 거예요!”성무진은 신하린의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모습을 보면서 사모님과 절친이 된 이유를 알 같았다.품위도 있고 기개도 있는 모습이었다.만약 평소에 있었다면 그는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그러나 지금 그가 원하는 것은 이런 모습이 아니라 이노 하이브와의 협력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이노 하이브와 협력하면 이 작업실은 곧 작은 회사로 바뀔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녀가 뜻밖에도 거절하다니, 미친 짓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이 일은 강 대표님이 이미 결정했으니 거절하려면 직접 찾아가세요.”성무진은 아예 이 일을 강지한에게 떠넘겼다.강 대표님의 말이라면 들어줄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강 대표님에게 전화해요. 내가 직접 말할게요.”신하린이 성무진을 보며 말했다.“그럼 잠깐
신하린은 손을 뻗어 눈물을 훔치고 소민을 보며 말했다.“작업실을 팔고 이곳을 떠날 생각이야.”심미연이 죽었으니 이 도시에는 의지할 사람이 없어졌고 동시에 그녀를 슬프게 하는 곳이 되었다.그녀는 이곳을 떠나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네? 왜요?”소민은 그냥 너무 갑작스럽다고 생각했다.“도시를 바꿔서 살고 싶어.”“도시 생활을 바꾸는 것보다 마음가짐을 바꾸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사장님은 너무 열심히 사세요.”신하린은 웃으며 대꾸했다.“아마도.”열심히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정말 다른 곳에서 생활하고 싶다면 작업실을 남겨 뒀다가 밖에서 적응이 되지 않으면 돌아와요.”신하린은 눈앞의 소민을 보며 머릿속에 갑자기 생각이 스쳤다.‘미연이가 죽지 않고 단지 도시 생활을 바꾸어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앞으로 그녀는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사장님, 왜 이렇게 쳐다보세요?”소민은 그녀의 눈빛에 어리둥절했다.신하린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팔을 벌리고 힘껏 그녀를 껴안고 감격에 겨워 말했다.“고마워.”소민이 어리둥절해 있을 때 신하린은 이미 그녀를 놓아주고 사무실을 나갔다.심미연이 살아있을지도 모르니 그녀는 당연히 마음먹고 열심히 일해야 한다. 심미연이 아이를 데리고 돌아오면 그녀는 그들을 먹여 살릴 능력이 있어야 하니깐 말이다.심미연은 정신을 차리고 책상 위의 심미연이라는 이름을 힐끗 보았다....성무진은 회사로 돌아오자마자 대표사무실로 갔다.강지한은 그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어때?”성무진은 고개를 저었다.“신하린 씨가 원하지 않아요.”강지한은 입술을 감빨며 대답했다.“알았어.”신하린이 이노 하이브의 프로젝트를 거절했다는 건 심미연이 정말 죽었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녀는 그를 미워하니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동시에 신하린이 연기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그럼, 계속 신하린 씨와 협력할 거예요?”“네가 할아버지에게 연락해서 프로젝트를 신하린 씨에게 줘.”전에 할아버지가 이 프
그는 이때에야 문득 심미연이 그에게 시집온 이 3년 동안 그는 정말 집의 따뜻함을 느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안타깝게도 그는 너무 늦게 알았다.성무진이 들어와서 식기를 정리하다가 음식을 조금만 건드렸다는 것을 발견했다.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고 있는 강지한을 힐끗 보던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한마디 물었다.“이 레스토랑의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은 거예요? 아니면 내일 다른 레스토랑으로 바꿀까요?”예전에 점심은 모두 이 레스토랑에서 포장했는데 강 대표님이 맛이 없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앞으로 음식을 가져오지 않아도 되니까 회사 구내식당에 가서 먹자.”강지한은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성무진은 좀 의외였다.“내일부터 회사 구내식당에서 드신다고요?”구내식당 음식은 맛이 괜찮았지만 강 대표님은 늘 미슐랭 셰프가 만든 음식만 먹었다.“그래, 음식들 다 치워.”성무진은 치우는 동안 몰래 그를 두 번 훔쳐보며 뭐가 잘못됐는지 어리둥절했다.하지만 정말 뭔가 잘못된 것 같았는데 강 대표님이 왜 그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성무진이 대표님의 생각을 알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강지한 스스로도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오후에 회의할 때 강지한은 회의 내내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임원들이 모두 성무진을 향해 의아한 눈빛을 보냈지만 성무진도 설명할 수 없었다.결국 그도 강 대표님이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알지 못하니 말이다.퇴근할 때 강지한은 박시훈의 전화를 받았다.“지한 도련님, 미안하지만 네 전처의 통화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심미연 씨의 마지막 날의 행적도 깨끗이 지워졌어. 마치... 심미연 씨가 지금까지 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야.”박시훈의 말투는 조금 흥분되었다.“만약 이것이 너의 전처가 한 일이라면 심미연 씨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지한 도련님, 심미연 씨가 너의 곁에 몇 년이나 있었는데 알아보지 못했어? 넌 정말 눈이 멀었구나.”강지한은 저도 모르게 멍해져서 이전에 기술부의 그 신인이 한 말을 떠올렸다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