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층.마침 집청소를 하던 심미연은 집으로 돌아온 박유진의 손에 물건이 들려 있는 것을 보고 얼른 다가가 손에 든 물건을 받으려 했다.박유진이 그녀의 다정한 모습에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내가 들게. 네 일 다 끝났으면 같이 요리나 할까?”“그래!”심미연은 흔쾌히 대답했지만 마음은 조금 복잡했다.삼 년 동안, 박유진은 아무리 바빠도 늘 집에서 그들에게 요리를 해줬다.그런 박유진의 모습이 예전의 그녀와 너무 닮아 있었다.“왜 말이 없어? 무슨 생각 해?”그녀가 너무 조용하게 있자 이상함을 느낀 박유진이 한마디 물었다.심미연이 고개를 저었다.“아무 생각 안 했어, 그냥 피곤해서 그래.”박유진이 한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말했다.“피곤하면 좀 쉬어. 이제 우리 부족한 거 없잖아. 그러니 너도 너무 무리하지 마.”“하지만 앞을 보며 살아야지. 멈춰 있을 순 없잖아.”과거 그녀는 강지한을 위해 모든 걸 포기했지만 결국 비참한 결말을 맞았다.다시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절대 똑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박유진이 무심결에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미연아, 난 너만큼 훌륭하지 않아. 그래서 내가 싫어지면 어떡하지?”두 사람은 말을 하며 부엌에 들어섰다.박유진이 그녀의 손을 놓은 뒤 채소를 싱크대에 내려놓았다.심미연이 소매를 걷어 올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글쎄, 그럴 수도 있겠지.”그에게 감사해도 모자랄 판에 싫어할 리가 있겠는가?박유진이 그녀의 소매를 정리해주며 말했다.“넌 그냥 옆에서 보다가 잘못된 게 있으면 알려줘.”심미연은 얌전히 서서 박유진이 요리하는 걸 바라보았다.이때 집으로 들어온 신하린은 따뜻하고 로맨틱한 두 사람의 분위기를 보고는 혹시라도 방해가 될까 봐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생활의 향기가 가득한 부엌, 어둡지만 부드러운 조명, 박유진은 스토브 앞에 서서 냄비 안의 요리를 볶고 있었다. 집중하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요리에 얼마나 큰 정성을 쏟는지 알 수 있었다.곁에 서서 방금 씻은 토마
참지 못하고 풉, 웃음을 터뜨린 신하린은 손을 뻗어 깜찍한 아이의 작은 볼을 꼬집었다.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이모한테 전부 얘기해. 이모가 사줄게. 죽을 때까지 써도 다 못 쓸 만큼 이모 돈 많아.”거짓말은 아니었다. 신하린에게는 정말 쓰고도 남을 돈이 있었다. 작업실을 막 오픈했을 땐 매일 기도를 올리면서 여기저기 부탁해 프로젝트를 가져왔었다. 하지만 지금 작업실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전부 클라이언트가 직접 계약서를 들고 찾아온 것들이었다. 신하린은 더 이상 일이 없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법률 사무소의 수입까지 더해져 지금의 신하린은 온전한 부자라고 할 수 있었다. 책 몇 권이 아니라 집 몇 채, 차 몇 대를 사달라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줄 수 있었다. “그리고 예쁜 치마도 몇 벌 사줘요. 입원한 동생에게 선물하고 싶어요.”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여동생을 떠올리면 저도 모르게 가슴이 아픈 건 왜일까?“그 동생이 그렇게 좋아? 왜?”신하린은 그런 심태하가 이상하기만 했다. 심미연은 분명 심태하는 차가운 아이라 밖에선 누구를 보든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처음 만난 꼬마 아가씨한테는 과분하게 잘 해주는 것 같은데?’‘대체 뭐가 쌀쌀맞다는 거야.’“왜냐하면 저랑 똑같이 생겼으니까요!”심태하가 초롱초롱하게 눈을 깜빡이며 신하린을 쳐다보았다. “이모, 아니면 내일 저와 같이 쇼핑해요. 제가 직접 예쁜 원피스로 고르고 싶어요.”신하린은 저도 모르게 눈을 커다랗게 뜨고 심태하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급하게 선물하려고?”“저 다음 주면 생일이잖아요. 제가 사준 원피스를 입고 제 생일파티에 오라고 하고 싶어요.”심태하가 진지하게 말했다. “좋아!”신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 있는 강지한을 꼭 닮은 얼굴은 아무리 봐도 잘생긴 것 같았다. 만약 아이가 강지한을 만난다면 바로 아빠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그럼 약속한 거예요. 이모, 먼저 잠깐 놀고
어린 아이라 아직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몰랐다. 화가 나는 상황에 기쁜 척을 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얘기해 봐. 이모가 해결해줄게.”말이 없는 심태하의 모습에 조바심을 느낀 신하린의 말투가 조금 조급해졌다. “제 아빠 이름이 강지한이예요? 이노하이브의 대표?”심태하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엄마가 알려줬어?”신하린이 의외라는 듯 반문했다. ‘심미연, 추진력도 빠르지.’“그 사람, 혹시 완전 나쁜 남자예요? 엄마에게 하나도 안 잘해줬어요?”심태하가 또 물었다. 신하린은 그만 멍해졌다. ‘미연이가 자기 아들에게 이런 말은 안 했을 텐데.’게다가 심태하에게 아빠의 존재를 알려줬다고 해도 이렇게 강지한을 평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 누가 알려준 거야? 설마 박유진 씨?’‘아냐, 박유진 씨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제 말이 맞나 보네요, 그렇죠?”신하린의 표정을 본 심태하의 자신의 추측이 맞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신하린이 얼른 대답했다. “그건 엄마와 아빠 사이의 일이야. 엄마 입에서 나온 것만이 사실이고 믿을 수 있는 얘기야. 다른 사람이 뭐라고 했든 그냥 듣고 넘겨. 믿을 필요 없어. 왜냐면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의 한 가지 모습만 봤거든. 그건 진짜 그 사람이 아니야.”신하린의 말을 알아들은 심태하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럼 제가 나중에 엄마에게 물어볼래요.”“그러면 지금은 웃으면서 기분 좋게 지내볼까?”신하린이 심태하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아이를 달랬다. 몽글몽글한 얼굴을 꼬집을 때의 촉감이 너무 좋았다. ‘또 꼬집고 싶네.’하지만 심태하는 신하린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모, 가요.”말을 마친 심태하는 먼저 자리를 벗어났다. 자신의 손을 힐끔 내려다보던 신하린이 피식, 웃어버렸다. 레스토랑으로 들어가자 심미연은 이미 자리에 앉아있었고 박유진이 서빙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신하린은 괜히 부러워졌다. ‘행복해 보여.’심태
심미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린아, 태하가 하는 얘기 들었어? 얼른 움직여. 태하 이모부 찾으러 가야지.”말하며 심미연은 신하린을 향해 윙크를 날렸다. “저 꽤 괜찮은 남자들 많이 알고 있는데, 소개해줄까요?”박유진이 국그릇을 심미연 앞에 놓으며 늘 그렇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옅은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좋지. 오빠가 하린에게 소개해줘. 잘생기고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밖에서 이상한 짓하는 사람은 안 돼. 이왕이면 식스팩도 있는 남자로.”단번에 모든 조건을 말한 심미연은 그제야 몇 쌍의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다들 왜 그렇게 봐?”“네가 그런 남자를 소개 받고 싶은 거야, 아니면 하린 씨가 받고 싶은 거야?”박유진 눈가의 미소는 사자질 줄 몰랐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다. “그건 네 요구사항이잖아. 난 그거 아냐.”심미연에게 책임을 떠넘긴 신하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심태하는 큰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식스팩이 뭐예요?”‘나 어려서 못 알아듣는다고 일부러 이러는 걸까?’흥!“아빠한테 옷 올려서 만지게 해달라고 해 봐. 복근이 여섯 개가 있는지 세어보면 알 수 있어.”신하린이 음식을 집어 그릇에 놓으며 심태하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심태하가 박유진을 쳐다보며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아빠, 식스팩이 어떻게 생긴 건지 보여줄 수 있어요?”심미연도 박유진을 바라보았다. 마치 식스팩의 존재 여부를 알고 싶은 표정이었다. 심미연의 눈빛을 마주한 박유진의 눈빛이 그윽하게 짙어졌다. “왜? 너도 보고 싶어? 아니면, 만지고 싶은 건가?”신나게 구경 중이던 심미연은 저도 모르는 사이 구경의 대상이 되자 순간 빨갛게 얼굴을 붉혔다. “아냐. 헛소리 하지 마.”‘애가 뭘 배우겠어.’심태하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 심미연을 쳐다보았다. “엄마, 왜 안 만지고 싶어?”심미연의 얼굴이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 “심태하, 말 말고 얌전히 밥 먹어.”
심미연과 강지한은 이미 오래 전 지나간 과거였다. 진작 깨끗하게 헤어졌고 심미연의 마음엔 강지한의 조금도 없었다. 그러니 강지한이 남자를 거부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심미연은 박유진과 잠자리를 가질 수가 없었다. “아니면 다른 의사에게 진료를 받는 건 어때?”심미연의 이런 상황에 신하린 역시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의사에게 희망을 걸어야만 했다. “이런 상황엔 어떤 의사에게 진료를 받으면 좋을지 내가 알아볼게.”매번 그런 상황이 오면 심미연은 늘 박유진에게 죄책감이 들었다. 그녀 역시 이런 심리적 거부감을 치료해 박유진과 잘 시작해 보고 싶었다. 이 세상에 더는 박유진처럼 자신을 사랑하고 잘해줄 사람이 없다는 걸 심미연은 잘 알고 있었다. “내일 파티가 있어. 내가 몰래 경성에서 제일 유능한 정신과 의사를 알아봐 올게.”신하린은 진심으로 심미연이 행복하길 바랐고 그래서 그녀를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다. 갓 박유진을 알게 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는 늘 한결같이 심미연을 대했다. 만약 심미연이 박유진과 결혼까지 가게 된다면 그녀는 분명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너 예전엔 강지한 엄청 싫어했었다. 그래서 내가 강지한과 만나는 걸 마땅치 않아 했었고. 하지만 오빠와 내 일에는 오히려 지극정성이네. 그러고 보니 네 마음속에 오빠는 꽤 괜찮은 사람인가 봐.”심미연이 웃는 얼굴로 장난스레 말했다. 신하린이 그런 심미연을 힐끔 노려보았다. “강지한 씨는 너와 있을 땐 늘 차가운 모습이었어. 외식할 때도 늘 네가 그 사람을 챙겨줬었고. 그런데도 그 인간은 늘 당연하다는 듯이 네 모든 사랑을 받고만 있었어. 그게 전부 네가 본인을 좋아하니까 넌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잖아. 그러니 그 인간은 네가 보이지도 않고 널 마음에는 더더욱 두지도 않았던 거야. 그런 인간을 내가 어떻게 좋아해.”강지한의 얘기에 마음속 분노가 들끓었다. ‘그런 개 같은 인간은 미연이가 모든 걸 내려놓고 사
심미연이 입술을 짓이겼다. 얼마 전 심서연이 전화로 딸 얘기를 꺼낸 것을 떠올린 심미연은 혹시 심서연은 진작 자신이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은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심서연이 심미연은 살아있고 심지어 아이까지 낳았다는 정보로 거래를 해 강씨 가문에 들어간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만약 강지한이 정말 심미연이 살아있고 그의 아들까지 낳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왜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을까?‘아냐. 원호 선배가 내 모든 흔적을 지웠어. 강지한은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었을 거야.’침묵으로 일관하는 심미연을 보며 신하린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심미연이 뭔가를 떠올렸다. 잠시 후, 깊은 숨을 들이쉰 심미연이 생각을 정리하며 말했다. “내가 조사해보면 알겠지.””그래. 우리도 너무 오래 자리 비웠어. 일단 내려가자. 나중에 박지윤이 알면 우리가 뒤에서 몰래 험담이라도 한 줄 알겠어.”신하린이 심미연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너 심서연 조심해. 태하 곁에서 경호원 더 붙여야겠어. 아니면 내가 마음이 안 놓여.”신하린은 그 순간 심태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태하는 대체 강지한 그 쓰레기를 어떻게 알게 된 거야?’‘누가 알려준 거지?’그런 생각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신하린이 손에 힘을 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데 이렇게 화가 났어? 너 때문에 내 손 부러질 것 같아.”귓가에 심미연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신하린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려 심미연을 보던 신하린이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신하리는 심태하와의 대화 내용을 심미연에게 전했다. 얘기를 들은 심미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미연아, 혹시 심서연이 가르쳐준 거 아닐까?”신하린은 박유진의 인성의 100% 신뢰했다. 그는 절대 심태하에게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심미연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럴 수도 있지.”‘아무래도...’‘심서연이 착한 사람은 아니니까.”“난 도무지 이해가 안 돼. 네 부모님과 심서연처럼 악독한 인
“그 사람들 누구에게나 잘해주면서 정작 너한테만 그렇게 구는 거야! 혹시 네가 그 집 친딸이 아닌 거 아니야?” 신하린은 문득 떠오른 생각을 내뱉었다. 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 “예전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래서 몰래 DNA 검사를 해봤는데 결과는 당연히 그들의 딸이었지.” 신하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부모님도 정말 드물다니까!” “그러게 말이야. 그래도 다행히 외할머니가 계셔. 외할머니는 나한테 정말 잘해주시거든.” 다만 조은하는 양경자에게 전혀 잘해주지 않았다. 그게 아니었으면 양경자의 병이 그렇게까지 악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양경자를 떠올리니 심미연의 마음이 아려왔다. 돌아온 지 이틀째인데 아직 양경자를 찾아갈 시간을 내지 못했다. 하지만 양경자라면 심미연을 원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네 외할머니는 온지유가 죽인 거야. 이제 온지유도 마땅한 대가를 받았으니 외할머니도 편히 잠들 수 있겠지.” 신하린은 그 날의 재판을 떠올렸다. 임현은 법정에서 당당하게 나서서 온지유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임현은 그 일 이후 유명세를 타며 변호사로서 승승장구했다. 그녀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임현의 뒤에는 줄곧 심미연이 있었다는 걸. 진짜 대단한 사람은 심미연이었다. 그 후 그녀는 심미연에게 당시 그렇게 많은 증거가 있었는데 왜 온지유를 사형에 처하지 않고 무기징역으로 만든 거냐고 물었다. 심미연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온지유가 평생 고통 속에서 살게 할 거야. 그리고 내 성공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게 할 거고.” 그리고 심미연은 그 모든 것을 이루어냈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 임현 씨를 찾아간 건 일종의 도박이었어. 그런데 임현 씨가 법정에서 내 예상을 뛰어넘는 활약을 해줬지!” 심미연은 임현을 높이 평가했다. 지난 몇 년간 둘은 좋은 협력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때 나한테는 왜 안 찾아왔어! 흥! 나는 진짜 네가 죽은 줄 알았단 말이야!” 지금도 그때의 기분을 떠올리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땐 정말
신하린은 고개를 저었다. “됐어.” 그녀와 이진영은 원래 사랑 때문에 함께한 게 아니었다. 당시엔 그저 서로 필요한 것이 있어서였을 뿐 이미 오랫동안 연락도 없었으니 더 이상 얽힐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이진영은 이제 곧 결혼을 앞두고 있었기에 그녀가 갑자기 끼어드는 건 의미가 없었다. 절 열 개를 부수는 한이 있어도 한 번 맺어진 인연을 깨뜨리지 말라는 말도 있다. 이진영의 결혼을 망치는 그런 비도덕적인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거다. “넌 진영 도련님을 사랑하지 않아?” 심미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는 신하린이 이진영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신하린은 약간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함께 있을 때부터 우리 둘이 불가능하다는 걸 똑똑히 알고 있었어. 그 후로 연락이 끊겨서 나도 그냥 헤어진 거라고 생각했어. 특별히 슬프다는 느낌도 없었어. 가끔씩 떠올리긴 했지만 그게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안 그래?” 심미연은 잠시 침묵했다. 신하린은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이진영에게 너무 많은 실망을 느껴 이미 마음이 완전히 떠났다. 심미연은 그런 신하린이 안타까웠다. “시간도 늦었는데 이제 가야겠다!” 신하린은 심미연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섰다. 이진영과 관련된 이야기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심미연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나왔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박유진과 심태하가 매트 위에서 레고를 조립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표정은 모두 진지했다. 그들은 마치 부자처럼 보였다. 신하린은 심미연의 손을 살며시 잡아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봐, 정말 사이가 좋다니까!” 아마도 박유진처럼 아이와 함께 놀아주고 신경 써주는 남자는 많지 않을 거다. 게다가 이 아이는 친아들도 아니었다. “응, 태하가 오빠를 정말 잘 따른다니까.” 심미연은 자신이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 박유진은 심태하를 돌보면서 동시에 그녀까지 챙겨줬다. 그녀는 여러 번 도우미를 고용하자고 제안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도우미가 그들을
육현성이 입가를 만지며 말했다.“이진영, 네가 감히 나한테 주먹질을 날려? 내가 집에 가서 이다은 저년을 아주 제대로 혼쭐 내줄 거야. 이번엔 최소 몇 달은 못 일어날걸?”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기고만장했다.“보아하니 육씨 가문이 요즘 꽤 살 만한가 보네. 감히 나 이건명의 딸을 건드려?”이건명이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육현성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감히 어디서 제멋대로 굴어!”그는 자신의 앞날을 위해 딸을 육씨 가문에 시집보냈었다. 그래도 육씨 가문은 4대 가문 중 하나인데 비록 육현성이 이다은을 사랑하진 않더라도 최소한의 예우는 할 줄 알았다.그래서 이다은이 이혼하겠다고 했을 땐 괜히 유난 떠는 줄 알았는데 방금 그 모든 생각이 송두리째 무너졌다. 이다은이 육씨 가문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이제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이건명의 등장에 육현성은 순식간에 기세가 꺾였다. 아무리 육씨 가문이 돈 많고 배경 있는 집이라도 지금의 이건명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아버님, 화내지 마세요. 이건 오해예요. 저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육현성이 다급히 변명하려 들었다.“됐어. 변명은 필요 없어.”이건명이 이다은의 손을 꽉 잡았다.“다은아,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어. 너 이혼하고 싶으면 해. 내가 최고로 실력 좋은 변호사를 붙여줄게.”이다은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아빠가... 나를 이렇게 감싸준다고? 늘 냉정하기만 했던 사람이?’그때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렸다.“정말 감동적인 부녀지간이네요. 좋은 아버지십니다, 정말.”이진영이 자신의 아버지를 조롱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본 순간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그... 그쪽이 왜 여기 있어요?”강혁승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한 모금 빨아 연기를 뿜으며 웃었다.“나요? 부모 찾으러 왔죠.”이미 이진영이 그의 정체를 눈치챘기에 더 숨길 이유도 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 이 사람들이 모두 모인 것도 하늘의 뜻이라 생각한 강혁승은 오늘 결판을 보려 했다.“너...
“문자를 보낸 건 그 여자가 아니라 나예요!”강혁승의 음울한 얼굴에 스며든 미소는 왠지 모르게 오싹했다.이건명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멈췄다. 얼굴에 난 깊은 흉터만 아니었다면 이건명 본인과도 놀랍도록 닮은 얼굴이었다.하지만 그의 아내가 낳은 자식은 이다은, 이진영 남매 둘뿐이었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건명 씨는 여기 왜 왔어요? 어서 나가요!”문소영이 다급하게 외쳤고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왜 이렇게 쫓아내려고 안달이에요? 여기까지 왔는데 문제는 해결하고 가야죠.”강혁승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고 그의 눈빛엔 싸늘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왜 저 사람한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 저 사람이랑은 아무 관련도 없어!”문소영은 이건명을 붙잡아 두고 싶지 않았다.심미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이 와중에도 이건명을 감싸려 하다니, 그래도 한때는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나 보네.’“관련이 없다고요? 저 사람이 내 아버지인데?”강혁승은 조소를 띤 채 반문했다.“내가 저 사람이 수십 년 동안 도와준 일들을 전부 알고 있는데 한 번 읊어볼까요?”문소영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헛소리하지 마!”“입 다물지 못해!”이건명이 서늘한 눈빛으로 강혁승을 노려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저 자식이 모든 걸 알고 있단 말이야?’심미연은 입술을 깨문 채 이건명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방원호가 넘겨준 자료가 전부 사실이었던 것이다.하지만 이건명이 한 여자를 위해 불법까지 저질렀다는 건 예상 밖이었다. 진심으로 사랑해서였을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걸까?“심미연, 이리 와!”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심미연이 깜짝 놀라 돌아보니 깊고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의식이 없었는데 분위기는 여전히 무게감이 있었다. 이런 것이 바로 한 회사를 이끄는 대표만의 카리스마와 아우라인가.“멍하니 있지 말고 어서 오라고.”강지한의 말에 심미연은 정신을
문도현은 심미연의 표정이 굳은 걸 보고 머리를 쉴 새 없이 굴리기 시작했다.‘안 되겠어. 일단 지금 이 상황부터 어떻게든 모면해야 해.’하지만 심미연은 그렇게 쉽게 속을 여자가 아니었다. 그가 아무 말이나 둘러대면 단번에 꿰뚫어 볼 게 뻔했다.‘어쩌지?’그때 마침 심미연의 휴대폰이 울렸다.“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네, 가서 일 봐요. 난 여기 있을게요!”문도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심미연은 대답도 제대로 못 하고 황급히 사무실을 나섰다.문도현은 기지개를 한껏 켠 뒤 슬며시 일어나 그녀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책상 위에 액자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 심미연이 다른 사람과 같이 찍은 사진이 한 장 있었다.그런데 그 사진 속에서 심미연의 옆에 박유진이 서 있는 걸 본 순간 문도현은 마치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박유진이랑 심미연이 왜 같이 있어? 말도 안 돼! 절대 이 둘이 이어지게 두면 안 돼!’문도현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홱 돌아서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때 마침 임현이 문을 열고 들어오다 그와 정면으로 부딪쳤다.“아야! 아이고, 아파라...”임현이 낮게 신음하며 얼굴을 찡그렸다.하지만 문도현은 그녀를 밀치고 나가버렸다.임현은 어이없다는 듯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아니, 누가 건드리기라도 했나? 왜 저렇게 화가 나 있지?”마침 그때 심미연이 다시 들어왔다.“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어요? 문 대표님은요?”“방금 나가면서 저랑 부딪혔어요. 엄청 화난 얼굴이던데요? 아무 말도 안 하고 나가더라고요.”임현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저 남자, 감정 기복 진짜 심하네.’“잘됐네요. 나 급한 일이 있어서 나가야 해요. 오늘은 임현 씨가 사무실 좀 맡아줘요.”심미연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방을 챙겨 들고 서둘러 나가버렸다.방금 강지한이 의식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에게 직접 물어봐야 했다.그가 어떻게 그녀가 교통사고를
문도현의 치명적인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떠올랐고 깊고 그윽한 눈빛엔 묘하게 사람 마음을 사로잡는 기운이 스쳤다. 그 눈으로 마음속 깊은 비밀까지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정말 여기서 얘기할 거예요?”그는 나직하면서도 묘하게 귀를 간질이는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사진이라도 찍으면 어쩌려고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하면서도 이상하리만치 매혹적이었다. 마치 한 음절 한 음절이 심장을 울리는 현처럼 듣는 이의 감정을 툭툭 건드렸다.유흥가를 오래 드나든 남자답게 문도현의 말투나 몸짓 하나에도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서려 있었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상대방은 쉽게 그에게 빠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 뒤에 자리 잡은 견고한 집안 배경은 그의 존재에 신비로움과 권위를 덧씌웠다. 한 번만 눈빛을 주고받아도 수많은 여자가 그를 위해 기꺼이 심연으로 빠져들곤 했다.심미연은 가늘고 곧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그래요. 그럼 위에 올라가서 얘기하죠.”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차 문을 잠그고는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그녀의 발걸음엔 흔들림 없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더라도 문도현은 사건을 의뢰하러 온 손님이었다. 심미연은 일과 사적 감정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문도현의 시선은 무심결에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라인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자 곧 뇌리에 수많은 기억의 파편이 번뜩이듯 스쳐 지나갔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길들지 않은 야수 하나가 깨어나는 느낌이었다.이제야 그는 자신이 여자에게 설레는 감정을 잃은 게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다만 평범한 여자들에게 더 이상 설레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흔한 여자들은 이제 그의 마음을 건드릴 수 없지만 심미연은 예외였다.그 순간 심미연의 차분하고 냉정한 목소리가 그의 흐트러진 정신을 다시 현실로 끌어당겼다.“문 대표님께서 소송을 의뢰하신다네요. 임 변호사님께서 맡아주세요.”“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문 대표님.”임현이 공손하게 몸을 살짝 기울이며 안내했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