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습이 황궁을 떠났을 때, 밤은 이미 먹물처럼 짙었다.당국의 겨울은 조선보다 훨씬 추웠다. 가벼운 바람이 불어오는 것에도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평소 추위를 타지 않던 그였지만,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였다.높이 솟은 궁궐 담장의 그림자는 희미한 등불 아래 유난히 음산하고 위압적으로 보였다.그리고 궁문 밖, 커다란 목씨 가문의 마차가 그림자 아래에 서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다.마부는 고개를 숙인 채 조각상처럼 말없이 서 있었다.최지습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자, 마부가 그제야 인사를 올렸다. “대군 자가, 강녕하신지요.”말을 하며 그는 마차의 휘장을 걷었다.최지습은 대꾸 없이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수레바퀴가 차가운 돌길 위로 굴러가며 단조롭고 둔탁한 “덜컹” 소리를 냈다. 고요한 한밤중에 그 소리는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마차 안에서 최지습은 부드러운 베개 받침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의 미간에는 가시지 않은 서늘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그의 손끝은 무의식적으로 창틀을 두드렸다. 머릿속에는 어전에서 당국 황제와 벌였던 소리 없는 폭풍 같은 대화가 반복적으로 떠올랐다.목씨 가문은 역시나 그를 궁에 남겨두려 하지 않았다.그를 이렇게 뻔뻔하게 수도로 데려오고 황제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목씨 가문의 배짱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목강수가 말했던 보물 때문일까?최지습은 사실 이미 다 알고 있었다.목씨 가문 사람들이 김단과 그의 관계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목씨 가문에 묶어두고 김단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호랑이 군은 그를 견제하는 데 쓰이고 있었다.이 판국을 뒤집으려면 그가 먼저 호랑이 군을 찾아야 했다.금지 구역…밤은 먹물처럼 짙었고, 마차는 그 사이를 누비는 하나의 별처럼 보였다.최지습은 고개를 숙이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의 눈빛은 싸늘하고 날카로웠다. 마치 얼음장과 칼날과도 같았고, 모든 것을 삼킨 밤보다도 세네 배는 더 서늘해 보였다.그는 목씨 가문 사람을 찾아 그 금지 구역의 상
그는 몸을 약간 앞으로 기울이며 매 한 마디마다 천근의 무게를 실어 매섭게 내리꽂았다.“목씨 가문은 만금의 재화를 거느려 부국에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고, 권세가 하늘을 덮어 홀로 구름을 가리오. 그 기세가 이미 보통 신하에 비길 바가 아니오. 주상께서는 천하를 거느리시니, 과연 한 번도 때를 골라 난을 평정하고 본정을 회복하여 이 반근착절한 세력을 송두리째 정돈할 생각을 해보지 않으셨소.”낮지 않은 목소리였으되, 그 말은 벼락처럼 어서재 안을 쾅 하고 울렸다.그는 우문임의 눈빛에 순식간에 번져 오른 복잡한 기류를 놓치지 않았다.경계인가, 오래 눌러 둔 분노인가, 아니면 약점을 찌른 데서 오는 전율인가.우문임 또한 최지습을 똑바로 응시하였다.목씨 가문은 당국 제일 부호라 그 재력은 상상 밖이었다.당국의 황실이라도 목씨 사람을 보면 삼분 물러선다는 소문은 당국만이 아니라 사방이 다 아는 바였다.심지어 주상의 자리는 허울일 뿐, 그 뒤의 주인이 따로 목씨 가문이라는 말까지 떠돌았다.당대의 군주가 끝내 일개 상인만도 못하다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 아닌가.이러하니 백 년 이래 역대의 주상들은 지극한 권위를 힘입어 목씨의 모든 것을 되찾고자 하는 뜻을 품지 않은 적이 없었다.하오나 그 세력은 이미 반근착절하여, 설령 강제로 거둬들인다 하여도 곧바로 맡길 만한 자, 목씨 수하들까지 납득케 할 적임자를 찾기 어려웠다.당국의 국력 또한 그 태반을 목씨 가문에 의지하고 있었다.만약 목씨가 꺾이면… 끝내는 양패구상일 뿐이었다.최지습이야 어찌 우문임의 마음속 근심을 모를까.그가 눈을 내려 흘기더니 허공에 머물던 흑돌을 마침내 내리꽂았다.“탁.”맑고도 날카로운 낙성 한 소리가 칼을 뽑듯 정적과 위장을 모조리 끊어냈다.그 흑돌은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던 백의 세력권 한가운데를 정확히 파고들어, 오래 잠복하던 흑룡이 문득 고개를 치켜드는 듯 균형을 단숨에 갈라놓았다.“주상께서는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시옵니까.”최지습의 목소리는 모든 것이 이미 자리 잡힌
한편, 당국 황궁의 어서재.두터운 자단문이 바깥의 소란을 가로막아 숨 막히는 적막만이 남아 있었다.용연향이 유금 서수 향로에서 은은히 피어올라 연무를 그렸으나, 공중에 깔린 보이지 않는 압박을 걷어 내지는 못했다.창밖 하늘은 잔뜩 흐렸고, 정교한 꽃살문을 비집고 들어온 빛이 거울처럼 반들거리는 전돌 바닥 위에 명암이 교차한 기하무늬를 그렸다. 그 빛결은 어상 뒤, 명황색 곤룡포를 걸친 채 성내지 않아도 위엄이 배어나는 군주의 실루엣을 함께 비추었다.커다란 어상 한가운데 바둑판이 놓여 있었다.흑백의 바둑돌이 종횡으로 뒤얽혀 대국은 무르익었고, 겉으로 보기엔 막상막하라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당국 주상 우문임은 온기 어린 백옥 바둑돌 하나를 집어 든 채 시선을 바둑판에 고요히 박아 두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우문임이 문득 입을 열었다.“짐은 일찍이 조선 평양원군의 위명을 들어 왔노라. 금일 대면하니 과연 허명이 아니구나.”앞서 대면하여 예를 주고받을 때도, 지금 이 수담에서도 최지습은 분수가 지극히 분명하여 불비불강하였다. 마치 애초부터 적국의 인물이 아닌 듯했다.그리고 조선 평양원군 최지습이 어찌하여 느닷없이 당국 도성에 모습을 드러냈는지에 대해서도, 우문임은 묻지 않았다.칭찬을 들었으나 최지습은 시선을 들어 우문임을 보지 않았다. 저음의 묵직한 목소리는 여전했다.“당국 주상의 과찬이옵니다.”그 말끝이 떨어지자, 다시금 길고 깊은 고요가 방 안을 메웠다.그 뒤로, 우문임의 목소리가 번갈아 울리는 착착 소리 속에 퍼졌다.“평양원군께서 천리길을 마다하지 않고 오셨으니 노고가 크도다. 오늘도 때가 이미 늦었으니, 차라리 궁중에서 잠시 쉬어 가심이 어떠한가. 짐이 반드시 주인의 도리를 다하여 대군자를 극진히 대우하겠다.”겉으로는 온정 가득한 말이었으나 한 마디 한 마디가 찬 쇠창살이 되어 둘러쌌다.유폐의 뜻이 또렷하였다.어서재는 다시 심장을 조여 드는 듯한 정적에 잠겼다.가끔 바둑돌이 바둑판에 떨어지는 딱 소리만이 굳은 공기를 단
김단이 막 답하려던 찰나, 눈가로 문밖 행각 기둥 뒤에서 어두운 옷자락 한 귀퉁이가 번개처럼 스치는 것이 포착되었다.순간 눈빛이 가라앉았으나 얼굴의 미소는 더 짙어졌다. 그녀는 목몽설을 향해 목소리를 한층 높이며 다독이듯, 또 못 이긴 듯 말하였다.“됐다, 됐다. 그대가 나를 못 놓는다는 것쯤은 아오. 허나 인명은 천금이오. 나는 의원이니 병을 다스려 사람을 살리는 것이 내 천직이오. 어찌 놀음이 좋다 하여 병자를 함부로 떠날 수 있겠소.”소한이 아직 이곳에 있으니, 떠날 수 없었다.목몽설의 눈에 일순 알아챈 빛이 스쳤다. 영리한 아이였다. 곧장 김단의 처지와 신호를 깨달은 것이다.그녀는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며 아직 토라진 체하다가도, 아무렇지 않게 김단의 손을 끌어 부드러운 안석으로 데려가 앉혔다. 입술로는 여전히 중얼거렸다. 소리 크기는 크지도 작지도 않게 알맞았다.“종자는 정말 나를 털끝만큼도 아끼지 않으시네, 흥.”자리 또한 절묘했다. 큰문을 등지고 거리도 멀어, 우달이 설령 귀가 백 배 밝다 한들 일부러 낮춘 속말을 엿듣긴 어려웠다.앉자마자 목몽설은 몸을 돌려 문을 완전히 등졌다. 몸으로 자연스레 가림을 만들었다.그녀는 살짝 고개를 떨구어 마치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는 듯하더니, 거의 속삭임에 가까운 낮은 소리로 또렷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냉정과 결단을 담아 말했다.“내가 최지습을 구해내면, 그대들은 곧장 당국을 떠나시오. 사람을 붙여 끝까지 호송하겠소. 약속하시오. 떠난 뒤에는 다시는 돌아오지 마시오.”김단의 마음에 의혹이 더욱 일었다.“목 낭자, 어찌하여 나를 위해 이토록 큰 위험을 무릅쓰시오.”목씨 가문을 배반하면 어떤 말로를 맞을지는 불을 보듯 뻔하였다.목몽설의 얼굴에서 천진난만한 기색이 순식간에 걷히고 차갑고 음울한 기운이 드리웠다. 그녀가 눈을 들어 칼끝 같은 빛을 번득이며 낮게 말했다.“연유는 묻지 마시오. 아무려나 내가 반드시 해내겠소.”“아니 되오.” 김단이 단호히 말을 잘랐다.목몽설이 눈을 크게 뜨며
우문호는 마치 처음 듣는 듯 놀란 표정을 얼굴에 띠었다. “골식독이라니? 혹 소 장군 또한 독에 당한 것이오? 나는 알지 못하오. 어쩌면… 목씨 가문의 소행일지도.” 그 어리둥절하고 무구한 기색은 한 점 빈틈도 없었다.김단은 천천히 고개만 끄덕였을 뿐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우문호는 곧장 물꼬를 타 물었다. 미간 가득 근심을 드러내며 말했다. “어찌된 일이오? 소 장군의 형세가 그리도 난처하오?”“그렇습니다. 단시에 고치기는 어렵습니다.” 김단이 담담히 답했다. 눈빛은 고요했다.우문호는 크게 놀란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김 낭자까지 그렇게 말하니, 실로 난국이로다.”말이 채 끝나기 전, 문밖에서 알리는 소리가 났다. “전하, 목씨 가문의 육낭자가 배알을 청합니다.”목씨 가문의 육낭자라니.김단의 머릿속에서 순간 영접연에서 목강수가 인사를 올리며 일행을 소개하던 장면이 번개처럼 스쳤다. 목씨 가문의 육낭자는 바로 목몽설이었다.그녀는 우문호의 얼굴에 스친 의심의 빛을 힐끗 쳐다보더니,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몽설이는 아마 제 안위를 걱정하여 온 것일 겁니다. 제가 오래 관저로 돌아가지 않았으니 전하께서는 편히 쉬시옵소서, 저는 가 보겠습니다.” 이 말과 함께 몸을 일으켜 예를 올리고는 태연히 걸음을 옮겼다.김단의 자취가 문밖으로 사라지자, 우문호의 얼굴에 남던 온화함은 순식간에 걷히고 싸늘한 살핌으로 바뀌었다.그는 낮게 우달을 불렀다. “뒤를 미행하라.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빠짐없이 들어라.”“예.” 우달은 명을 받들고 유령처럼 그림자에 스며들어 뒤를 따랐다.전청에 이르자, 김단은 목몽설을 마주하였다. 따져 보면 정식으로 뵙는 것은 이번이 겨우 두 번째였다.그러나 목몽설은 그녀를 보자마자 맑은 눈이 번쩍 빛나며, 오래전 헤어진 친언니를 만난 듯 환히 달려들었다. 개구진 사슴처럼 가볍게 품으로 파고들어 다정히 팔을 끼고 매달리다시피 하며, 새초롬하고 달착지근한 음성으로 투정 섞인 애교를 쏟아냈다. “우리 언니는
우달이 크게 기뻐하여 문밖의 나인들에게 약선을 들여오라 재촉하였다.김단은 따스한 옥완을 자연스레 받아 우문호 곁의 백호가죽 침상 가장자리에 앉았다. 걸쭉하고 온화한 약선을 한 숟가락 떠서 그의 창백한 입술가에 지체 없이 내밀었으니, 손놀림에는 머뭇거림이 전혀 없었다.우문호는 남자에게 음식을 먹여 주는 일을 김단이 이토록 능숙하리라 짐작하지 못해 잠시 멍해졌다.김단이 그가 입을 떼지 않자 부드럽게 권했다. “전하의 강녕이 급하옵니다. 비록 입맛이 없으시더라도 조금은 드셔야 하옵니다.”그제야 우문호가 입을 열어 한 숟가락을 넘겼다.돌이켜 보니 남의 손에 먹을 것을 받아 들이킨 지 십여 년은 족히 지난 일. 지금은 연민을 사려 일부러 허약한 체하고 있으되, 그녀의 지나치게 익숙한 동작이 오히려 그의 가슴에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을 일렁이게 했다.“김 낭자.” 그는 목울대를 삼키며, 미세한 긴장을 띤 목소리로 물었다. “늘 남을 이렇게 먹여 주시오?”짙은 눈빛이 그녀의 얼굴을 붙들고, 내려깐 속눈 속에서 단서를 더듬었다.김단은 시선을 낮춘 채 다시 한 숟가락을 떠 살짝 불어 김을 거두었다. 짙은 속눈썹이 눈빛 깊숙이 번득인 냉소를 완벽히 가렸다.흐음, 이 우문호, 연기에 너무 깊이 빠져 스스로까지도 속은 것이냐. 지금 질투를 하는 게로군.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눈은 인애로 맑았고, 목소리 또한 유난히 가늘고 부드러웠다. “의자의 본분일 뿐이오. 중병으로 자립하지 못하는 환자를 대하면, 이런 일은 피할 수 없지요.” 말을 잇는 사이 따스한 숟가락 끝이 다시 그의 입술에 닿았다.우문호가 입을 열어 약선을 삼켰으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눈동자는 내내 그녀의 얼굴을 떠나지 않았다.말끝에 그는 무의식중에 마른 아랫입술을 혀끝으로 살짝 훑고, 집요한 탐색을 머금은 눈빛으로 다시 낮게 물었다. “허나 나는 아직… 스스로 할 수 있소.”분명 김단의 대답은 그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김단은 입가에 알맞게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나직이 말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