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는 술냄새가 진동해 김단은 그 냄새에 어지러웠다.다행히도 등의 상처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곧이어 임원이 서둘러 달려와, 다정한 말투로 임학을 달랬다.“오라버니, 화내지 마세요. 누이는 그저 명정대군과 놀다가 늦었을 뿐 입니다. 명정대군을 봐서라도 누이를 괴롭히시는 건 옳지 않습니다.”“명정대군을 봐서라도?”임학이 코웃음을 쳤다.“그래, 명정대군의 얼굴을 봐서라도 그만해야지. 낭자한테 참 잘해주시지, 낭자를 데리고 유람까지 가시니 말이오. 나라면 낭자를 한양 서쪽을 데리고 가겠소!”아무렇지도 않았던 김단의 얼굴이 그의 말에 점점 어두워졌다.“한양 서쪽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쉰 목소리에 임학은 잠시 멈칫했다.취기 마저도 깰 것 같았다. 그는 김단을 지그시 바라 보았다.위아래 훑어 보고는 그녀의 귓볼로 향해 시선이 집중 되었다. 피가 말랐지만 다쳤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그도 방금 전부터 은은하게 피비린내를 맡았다.‘하지만 고작 저 작은 상처 때문에 나는 냄새란 말인가?’임학은 순간 멈칫하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이때, 김단이 소리를 높여 물었다.“한양 서쪽에 대해서 알고 계시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다. 동시에 등의 상처에 누가 소금을 뿌린 것처럼 아팠다. 아파서 식은 땀이 흘릴 정도다.임학은 살짝 당황 하더니 세게 그녀를 밀쳤다.“감히 누구한테 소리를 질러!”김단은 최선을 다해 견디고 있었다.조모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벌써 마차에서 쓰러졌을 것이다.하지만 임학이 밀치자 바닥에 쓰러져서 계속 일어나지 못했다.곧이어 임학이 고래고래 외쳤다.“내가 알면 어떠하고, 모르면 어떠하리? 난 이미 너한테 경고를 했을 터, 명정대군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이야! 네가 선택한 길이다. 너는 기댈 곳을 찾았다고 생각했겠지. 하! 말이 되는 소리를 하거라! 그 곳은 불 타는 지옥이다! 들어가면 결국 타 죽을 것이란 말이다!”김단은 등의 상처 때문에 아파서 마비가 될
진산군은 김단의 말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 탓에 바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곧이어 소식을 들은 임 씨 부인이 서둘러 김단에게 다가가 그녀를 부축하면서 위로하기 바빴다.단아,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네 아버지가 정2품이기도 하고, 내가 덕빈과 돈독한 사이라 명정대군이 너에게 어찌..”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 씨 부인은 손에서 뜨겁고 축축함이 느껴졌다.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손을 바라 보았다. 손에는 피가 가득찼다.그녀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자신의 두 손을 보고 경악함을 감추지 못하고 임 씨 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을 쳤다.나머지 사람들도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저 김단 만이 그들을 천천히 바라볼 뿐이다.그녀는 그들의 얼굴을 가슴에 새겼다.입가에는 자신을 비웃는 듯한 미소가 지어졌다.“보아하니, 마님도 알고 계셨던 모양 입니다. 다 알고 계시고 저에게만 숨겼던 거지요...”그들은 명정대군이 여자를 학대하는 취미를 가진 변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를 속이고 직접 명정대군의 앞으로 그녀를 데려갔다.김단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참고 싶어도 마음의 상처가 더욱 깊게 파고 들었다.어떻게 그들이…자신에게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곧이어 먼저 말을 건 사람은 임 씨 부인이었다. 떨리는 목소리에는 당황스러움이 섞여있었다.“다쳤으니까 서둘러서 돌아가자. 어서, 의원에게 알려라!”그녀의 말에 김단은 뒷걸음쳤다.피로 가득한 그녀의 두 손을 뿌리치고 그저 웃음소리만 내었다.“허허,허허허..”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세답방에서 3년 이면 이전의 15년을 다 갚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다 갚았다고 하셨는데 저한테 왜 그러셨습니까, 도대체 제가 당신들과 무슨 원한이 있는 겁니까?”그들은 그녀가 가족처럼 대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기 바빴다. 하지만 또 그녀를 불구덩이로 밀어 넣어 버렸다.진산군과 그의 가족들은 알고 있었다.김단 몸에 난 상처와 세답방에서
“입 다물지 못해!”진산군이 크게 소리 쳤다. 씩씩거렸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바닥을 향했다.임학은 여전히 취기가 가시지 않았다.하지만 진산군의 반응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는 그저 김단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가 말대꾸를 하면 입을 찢어버릴 것 같은 눈빛이었다.한편, 김단은 서있는 것도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몸이 비틀비틀 거렸다.그녀는 숙희가 보고 싶었다.적어도 숙희라면 자신을 위해 달려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눈 앞이 점점 흐려졌다. 김단은 발에 힘이 풀려 그대로 쓰러졌다.이때, 임 씨 부인 옆에 있던 나인이 재빨리 김단을 붙잡았다.곧이어 양손과 팔에 축축하고 뜨거운 온기가 느껴졌다.나인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이어서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대감마님, 마님. 아,아씨 몸 전체가 상처 투성이 입니다!”‘온 몸이 상처 투성이 라고?’그녀의 말이 화살처럼 임학의 머리를 뚫는 것 같았다.그는 김단이 관저로 돌아가고 숙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그리고 임 씨 부인의 양손에 묻은 피를 보고 오늘이 ‘그날’ 이구나, 라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온몸에 상처가 날 줄은 몰랐다.어느 새, 나인의 옷도 붉은 색으로 물들었다.김단은 나인에게 기대어 임학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마도 충격을 받은 임학의 눈빛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그녀는 그와 눈을 마주치자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곧이어 쉰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저는 이미 한양 서쪽을 갔다왔습니다. 이제야 도련님께서 만족 하시겠지요?”쿵!임학의 뇌리에 천둥이 쳤다. 그대로 자리에 얼어서 움직이지 못했다.진산군은 서둘러 하인들을 불렀다.“여봐라! 어서 의원에게 데려가게!”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부축하기 바빴다. 그리고 서둘러 별당으로 자리를 옮겼다.임학이 제정신을 차렸을 때는 임원만이 그의 곁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오라버니...”임원이 작게 그를 불렀다.목소리에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자신이 마차꾼에게 들은 말을 사실대
임학이 칼을 꺼내든채 명정대군의 관저로 들어갔다.분노에 가득찬 그의 모습에 관저에 있던 시위들이 그를 둘러쌌다. 곧이어 목소리를 낮추어 설득하기 시작했다.“도련님, 흥분하지 마시고 말씀으로 풀어보시 옵소서.”“비키거라!”임학이 크게 소리쳤다.동시에 칼을 휘두르며 시위들을 위협했다.“최찬기 이리 나오지 못하겠느냐!”최찬기는 다름아닌 명정 대군의 이름이다.그의 행동에 시위들은 깜짝 놀랐다. 생명에 위협을 받을만한 행동이기 때문이다.곧이어 명정관저의 집사가 시위들의 뒤에서 나타났다. 임학에게 예의를 차리고 입을 열었다.“도련님, 어르신께서 들어 오시라 명하였습니다.”그의 말에 시위들은 서로를 번갈아 보기 바빴다. 그리고 눈치껏 길을 열었다.임학은 벌겋게 변한 눈으로 집사를 차갑게 바라보았다.곧이어 명정 대군의 거처로 발걸음을 옮겼다.명정 대군은 술을 마시고 있는 중 이었다. 그는 임학을 보자 흐리멍텅한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명정 대군은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처남 아니시옵니까? 잘 오셨사옵니다. 짐과 같이 술 한 잔 하시지 않으시겠사옵니까?”아무렇지도 않게 술을 즐기는 모습에 임학은 또 한번 더 바닥에 있던 피를 떠올렸다.그는 크게 분노했다.“이 짐승 같은 놈! 내 손으로 죽여주마!”곧이어 들고 있던 칼을 들고 명정 대군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어딘가에 숨어있던 시위에 의해 막혔다.시위가 없었다면 명정 대군의 머리에 칼이 들어갔을 것이다.명정 대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도련님께서 어찌 이리 화를 내시옵니까. 오, 혹시 단이 일로 오신겁니까?”“이 짐승! 감히 네가 단이 이름을 입에 올려?”임학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 다시 칼을 들어 휘둘렀지만 명정 대군의 시위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하지만 시위의 검이 부러지고 임학에 의해 손목에 상처고 생겼다.만약 임학이 다시 칼을 든다면 시위는 목숨을 걸수 밖에 없다.한편, 명정 대군은 전혀 두려워 하지 않는 모습이다. 자리에 앉아 일어날 기미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의자에 앉
시위는 그의 명령에 서둘러 자리를 떴다.임학 손에 있던 검은 이미 소한이 뺏어 버린 뒤였다.임학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어찌 막는 것이오! 저 짐승이 단이에게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기나 하오?”소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김단의 상처를 보진 못했다. 하지만 임원에게 그녀가 한양 서쪽에 갔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소한의 눈에는 살의가 가득했다. 명정 대군을 바라보는 그의 몸 전체에는 서늘함이 느껴졌다.사실 명정대군은 소한이 당장이라도 자신을 죽이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소한은 달랐다. 임학과 다르게 침착함을 유지했다. 아무리 위쪽의 총애를 받았어도 그를 죽이면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된다.명정 대군은 그를 보며 비웃었다. 소한을 향해 눈썹을 치켜 올리며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곧이어 마음 놓고 유유히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술잔에 술을 따랐다.“소 장군은 아마 모르실듯 합니다.”그는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술을 음미하고는 소한과 임학에게 말했다.“짐은 지금껏 그와 같은 여인을 본 적이 없었소. 그리 굵은 밧줄에도 신음 하나 내지 아니하였고, 고통에 몸이 떨려도 그 표정엔 조금 더 변함이 없었소. 창백해지고 식은땀이 흐르며도 그 고통을 참는 모습이 얼마나 우스운지 아시오? 하하, 하하하하…”명정 대군은 크게 웃기 시작했다.임학은 그에게 달려가 때려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하지만 소한이 그의 앞에 서있다.명정 대군은 소한의 핏줄이 터질 것 같은 손을 보면서 더욱 비아냥거렸다.“짐이 그렇게 흥분한 적은 처음 입니다. 이전에 여인들은 다 때리기도 전에 숨을 거두었지요, 김단 낭자 만이 죽지 않았소, 하하하! 그거 아시오?그 여인은 절대 죽지 않소. 짐이 힘이 닿을 때까지 때려도 숨을 쉬고 있지 않겠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여인은 하늘이 짐에게 준 선물이오. 천생연분 이라는 말이지, 하하하하!”명정 대군은 매일 김단을 때릴 생각 이었다.“이 개만도 못한 놈!" 임학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자신을 막
명정 대군의 표정과 말에 임학은 깜짝 놀랐다.같은 사람이라고?내가 명정 대군이랑?말이 되는 소리!'임학은 또 한번 더 그를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무슨 소리! 내가 어떻게 너 같은 인간이랑 같은 인간이야! 네 손에서 무고하게 죽은 여인들이 몇 명 인지 몰라!? 단이가 멀쩡하기를 기도해.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땐 나도 죽고 너도 죽는 거야!”명정 대군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피를 닦아냈다.드디어 그의 미소가 사라졌다.어두운 얼굴을 하고 임학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도련님께서는 실로 훌륭한 오라비이시옵니다. 그렇다면 짐에게 일러 주시지요, 그 훌륭하신 오라비께서 어찌하여 누이를 친히 세답방에 들이셨는지 말이옵니다.”그의 말에 임학은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명정 대군은 말을 이어 갔다.“도련님의 훈련이 아니었다면, 김단 또한 오늘과 같이 견디지 못하였을 것이옵니다. 마찬가지로, 짐의 마음에도 들지도 못하였겠지요.”임학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는 명정 대군을 뚫어져라 노려 보았다.다시 주먹을 한대 내리꽂고 싶었지만 순간 힘이 쭉 빠져버렸다.소한이 임학을 데리고 가기 전까지 움직일 수 없었다.“송구하옵니다. 오늘 도련님께서 술을 과하게 드신 탓에, 누이의 상처를 보고 그만 충동적으로 행동하였사옵니다. 부디 넓으신 아량으로 헤아려 주시옵소서.”그의 말투에서는 한치의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명정 대군은 소한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사실 그는 알고 있었다. 소한도 임학과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소한은 참는 것뿐이다.‘역시 장군이군, 아주 잘 숨기고 있어.’명정 대군이 코웃음을 쳤다.그는 옆에 있던 술잔을 보고 소한에게 말했다.“짐도 알고 있습니다. 도련님께서 짐과 같이 술을 즐긴 탓에 잠시 정신이 나간 것이지요.”이번 일은 결코 크게 만들면 안된다.그가 김단을 때렸던, 임학이 그를 때렸던 것은 중요하지 않다.만약 이 사실이 부황의 귀에 들어간다면 두 집안의 오랜 계획은
“아씨 정신이 드십니까?”숙희는 말을 하면서도 계속 훌쩍 거렸다. 코를 먹으면서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노비, 당장 의원을 부르러 가겠사옵니다. 아, 아니오, 노비, 약을 가져다 드리겠사옵니다! 아니, 의원을 먼저...”숙희는 당황하는 바람에 어쩔 줄 몰라했다.그녀의 모습에 김단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씁쓸함이 올라왔다.김단은 등의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숙희의 손을 잡았다.“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여기서 나와 시간을 보내주렴.”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편이 필요했다.김단의 쉰 목소리에 숙희는 눈물을 쏟아냈다. 그리고 침상 옆에 꿇고 앉아 김단의 손을 잡았다.“네, 노비가 아씨 옆에 있겠사옵니다.노비 절대로 아씨를 혼자 두지 않겠사옵니다!”숙희는 죄책감에 시달렸다.만약 그녀와 함께 궁에 들어갔다면 달랐을 까, 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명정 대군에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김단은 숙희의 표정을 읽고는 그녀를 위로했다.“너랑 상관없는 일이야.”사실 김단도 알고 있었다.숙희가 그녀의 옆에 있었다면 다치는 사람이 한명 더 늘 뿐이다.더군다나, 죄책감을 느낄 사람은 숙희가 아니다.숙희는 훌쩍거렸다. 그녀는 김단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랐다.김단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물었다.“조모는 어떠셔?”숙희가 고개를 끄덕였다.“댁 사람들이 큰 마님께 아씨가 감기에 걸리셨다고 말씀 드렸다고 하옵니다. 큰 마님께 영향이 미칠까 염려되어 시간이 지난 후에 찾아 뵙겠다고 하셨습니다.”김단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모르는 것이 득일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이었다.숙희는 계속 훌쩍 거리며 물었다.“아씨, 더 궁금하신 것은 없사옵니까?”김단은 숙희의 말을 알아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진산군 댁의 모든 사람에게 마음이 떠난 뒤였다.그저 한숨을 쉬며 물었다.“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숙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곧이어 김단이 혼수상태에 있을 때 일어난 일들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김단이 관저로 돌아온 그날 밤, 임학은
들어오자마자 그들은 김단이 깨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임 씨 부인은 눈가가 붉어졌다.빠른 걸음으로 침상 옆으로 다가갔다.그녀는 글썽이는 표정으로 김단을 바라 보았다.“눈 떴느냐, 그래, 눈 떴다면 다행이니라...”임 씨 부인의 볼 양쪽으로 눈물이 흘렀다.임원도 마찬가지로 붉어진 눈가로 임 씨 부인에게 다가갔다.울먹거리며 김단에게 말했다.“누이, 깨셨소? 어머니께서 하루도 빠짐없이 불경을 읽으셨소. 혹여 누이가 깨지 못하면 어머니가 울다가 눈이 망가질 것만 같았소.”임원의 말에 임 씨 부인은 더 격하게 흐느꼈다.반면 김단은 어두운 표정을 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 속에는 그저 역겨움만 남았다.그녀는 그들의 가식적인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자신을 죽음 앞에 데려다 놓은 것도 그들이고, 울먹거리는 사람도 그들이다.만약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그들의 성품을 칭찬할지도 모른다.김단은 또다시 역겨움이 올라오자 고개를 돌렸다.그녀를 보고 임 씨 부인이 흐느끼며 침상 끝에 앉았다.“단아, 네가 화난 건 이해를 한다. 이 어미가 제대로 설명할테니, 무시는 하지 말아다오. 응?”“누이, 어머니께서…”임원의 목소리에 김단의 속이 더 들끓었다. 두 사람을 내쫓으려 입을 열자 숙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숙희는 임 씨 부인과 임원을 일으켰다.“마님, 아씨께서 금방 눈을 뜨셨사옵니다. 안정을 취하셔야 하니, 그만 나가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그녀는 진산군 댁의 부인을 내쫓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하지만 김단은 숙희의 행동이 마음에 들었다.옆에 있던 의원이 서둘러 말했다.“마님, 제가 아씨 옆에서 맥을 짚어 보겠습니다!”의원이 말에 임 씨 부인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방 안에서는 나가지 않았다.멀찍이 서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김단을 바라 볼 뿐이다.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기 바빴다.의원이 김단의 맥을 짚어 보았다. 많이 다쳤다는 말과 함께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그의 말 덕분에 숙희의 행동이 더욱
이튿날 아침, 김단은 궁무를 맡지 않았기에 평양관저에 머물며 맹영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탓인지 맹영지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김단의 곁에 있을 때만큼은 그녀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조용한 정원, 김단은 맹영지와 함께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계수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숙희가 건네준 과자가 들려 있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있었다. 맹영지는 고개를 들어 만개한 계화를 바라보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소하가 평양관저를 찾아왔으나 그는 맹영지와의 만남을 최대한 피하려 애썼다. 아마도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김단은 맹영지를 바라보며 과거 소하가 왜 그리도 그녀를 칭찬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한때 소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인답게 그녀는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가까웠던 두 사람이었는데 맹영지는 어쩌다 소하에게 독을 먹이려 했던 것일까?김단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맹영지의 몸과 마음이 회복되면 그때 자연스럽게 그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김단이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평양관저의 겸인이 급히 달려와 말했다.“아가씨, 맹가 사람들이 도착했습니다.”이런 큰일이 발생했으니 맹씨 집안에서 그녀를 보러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겸인에게 말했다.“알겠소. 이리로 모셔오시오.”잠시 후, 맹씨 부인이 정원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김단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한 뒤 슬픈 눈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김 의원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의원님이 아니었다면 제 딸이 그 짐승 같은 자에게 학대받으며 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말을 마친 맹씨 부인의 눈동자가 붉어졌다.김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과찬이십니다, 맹씨 부인. 민태훈, 그 자의 말에 따르면 맹영지 아가씨의 병은 이미 4~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완전히 회
소한은 코웃음을 치며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소하의 조용한 목소리가 방안의 침묵을 깨뜨렸다.“이번에는 정말 잘했어.”영의정 저택에서 벌어진 일은 소한이 형벌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소하의 귀에 들어갔다. 만약 소한이 과감하게 영의정 저택에 침입하지 않았다면 김단은 쉽게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비록 민씨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김단을 해치지 못한다고 해도 그녀가 겪었을 모욕과 고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소하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소한은 많이 당황한 듯했다.“제가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때로는 그 충동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소한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김단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에 그녀도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 듯했지만 곧 냉랭한 표정으로 일관하였다. 김단은 마차에 오를 때까지 자신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과거의 그녀였다면 그가 나타나자마자 바로 그의 품에 안기며 그를 향해 미소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너무나도 차갑게 변해버렸다. 자신을 외면하는 그녀가 소한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그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며 굳게 결심했다.그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이미 어떤 대가든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반 시진 후, 김단은 방 안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러자 숙희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아가씨?”김단은 정신을 차리고 숙희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이냐?”“두 도련님께서는 모두 돌아가셨습니다.”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전 발생한 일을 되새겨 보았다. 그녀는 소한이 오랫동안 계획해 온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에도 그는 소가를 위해, 전하를 위해 심지어 임원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러나 그녀만은 제외였다.그녀는 소한이 자신의 어머니를 걱정하는 척하며 평양관저로 따라온 것도 단지 자신의 동정심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상처
김단은 아무 말 없이 소한을 부축하며 걸었다. 궐에서 나오는 길은 유난히 길고 고요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무겁고 느렸으며 말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궐문에 도착했을 때 소한의 마차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아마도 말을 타고 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상태로 다시 말을 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된 김단은 곁에 있던 경씨에게 부탁했다.“도령님, 장군님을 먼저 집으로 모셔다 주실 수 있겠습니까?”그러자 소한이 놀란 듯 김단을 바라보며 물었다.“내게 약을 발라주지 않겠다는 것이오?”김단도 당황해하며 되물어 보았다.“소가에는 의원이 없습니까?”소한은 김단의 물음에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어머니께서 내가 또 다쳤다는 걸 아시면 얼마나 걱정하겠소? 그러니 그냥 근처에서 치료받을 것이오. 낭자는 신경 쓰지 말고 먼저 돌아가시오.”김단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먼저 평양관저로 함께 가서 약을 바르시죠.”소한은 그녀의 제안에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불편하지 않겠소?”김단은 그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괜찮습니다.”그렇게 소한은 김단과 함께 평양관저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김단의 몸종 숙희였다.소한을 발견한 그녀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러자 김단이 숙희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차분히 말했다.“숙희야, 장군님을 객실로 안내해 주거라. 나는 약을 준비하러 가야겠구나.”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김단의 지시를 따랐다.객실에 혼자 남은 소한은 조심스럽게 상의를 벗고 등을 드러냈다. 그의 등에는 형벌로 인한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등을 바라보며 오늘의 형벌이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음을 깨달았다.하지만 그는 김단이 이 상처를 보면 마음 아파할 것이라 생각하며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잠시 후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약을 들고
긴장감이 맴도는 분위기 속에서 전하는 이해 안 되는 듯한 어투로 물었다,“조선의 장군인 네가, 수많은 전공을 세운 네가, 원하는 여인 하나 얻는 것이 그리 어렵단 말이냐? 어찌 김단 하나 때문에 수년간 공들여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이야? 그 낭자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전하의 말투는 엄중했지만 그 속에는 실망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그러자 소한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그렇습니다.”전하는 눈썹을 찌푸리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김 의원, 들었소?”그 순간 소한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조용히 서있는 김단이 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소한은 그녀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이 모든 대화를 들었다는 사실에 당황했지만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소한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김단, 왜 이곳에 있는 것이오?”그녀는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전하에게 예를 올렸다.“소녀 김단, 전하를 뵙습니다.”전하는 손짓으로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일어나거라. 오늘 발생한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해 보거라.”김단은 소한을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차분하게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 “제가 직접 목격한 바는 없습니다. 하지만 민대부를 제외하고는 영의정 댁 장남의 부인에게 감히 손을 댈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전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맹 낭자의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두 명의 궁녀를 보내겠다. 평양관저에서 확인해 보도록 하거라.”학대의 이유가 무엇이든 맹영지는 필시 중전의 친척이었다. 만약 폭력을 가한 사람이 민대부라고 할지라도 이는 중전의 가문을 모욕하는 행위와 다름없었기에 결코 그를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전하는 소한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어쩌면 네 죄가 묻힐 수도 있겠구나.”민씨 가문의 잘못이 드러나게 된다면
소한은 곧바로 병사들과 함께 어서재에서 물러났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향 한 자루가 탈 정도의 시간이 흘러 있었다.소한이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본 전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냉랭하게 물었다.“영의정이 너를 더 때리라고 명하지 않았느냐?”소한은 조용히 전하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게 세운 채 대답했다.“전하의 깊은 뜻을 아는 자입니다. 그러니 더 심한 처벌을 요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전하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물었다.“그렇다면, 내 뜻이 무엇이더냐?”소한은 고개를 들어 전하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전하께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영의정을 불러 제가 벌을 받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게 하셨죠. 그리고 동시에 제가 전하의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영의정이 이 사실을 눈치채기 바라신 것 아니었습니까?”전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붓을 책상에 내던지며 소리쳤다.“이 불경한 자식아! 내 너를 아낀다고 해서 이렇게 제멋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영의정 저택 외에 또 어디에 첩자를 심어두었느냐?”소한은 눈을 내리깔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3품 이상의 모든 관료의 집에 첩자를 두었습니다.”그 말을 들은 전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한을 가리켰지만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였다.그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참 동안 방안을 서성이었다.잠시 후 그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네가 감히! 그렇게 많은 곳에 첩자를 심어두고 무슨 일을 꾸미려는 것이냐? 이렇게 행동하면 내가 소씨 집안을 멸문시켜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소한은 여전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조용히 말했다.“저도 위험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다섯 해 전, 저희 소가는 거의 멸문 당할 뻔했습니다.”그 해 소하가 지닌 병권은 다른 집안의 탐욕스러운 먹잇감이 되었고 그로 인해 조정의 문
김단은 그제야 잊고 있었던 민태훈을 떠올렸다.그녀는 맹영지를 몸종에게 맡기고 민태훈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허벅지에 박힌 은침을 뽑아냈다.침이 빠져나가자마자 민태훈은 마치 고통에서 해방되기라도 한 듯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한 가닥의 은침이 이토록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큰 마님은 김단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그녀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말이다.그때 경씨가 마차를 몰고 도착했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걸어 나오자 경씨는 놀란 얼굴로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낭자, 괜찮소?”방금 전 김단이 영의정 저택에서 곤란한 상황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소한은 급히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덕분에 한발 늦게 도착한 경씨는 자신이 더 일찍 김단을 챙기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말했다.“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소.“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저는 괜찮습니다. 먼저 맹 아가씨를 평양관저로 모시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그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마차에 오르자 경씨는 바로 마차를 출발 시켰다.김단은 마차에 오르기 전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조용히 서 있는 소한에게로 향했다. 소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김단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소한은 그런 김단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 후 소한은 곧장 궁으로 향했다.어서재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앉아 오늘 영의정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전하에게 보고했다.그의 말을 들은 전하는 노여움을 감추지 못하며 소한을 꾸짖었다.“네가 감히 허락도 없이 영의정 저택을 침입했단 말이냐? 정말 대담하구나! 내가 너를 벌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느냐?”그러나 소한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벌을 달게 받겠습니다.“전하는 그의 담담한 태도에 더 분노하며 외쳤다.“민가
김단은 민씨 부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다.보내서는 안 된다라...오늘 이 자리에서 맹영지뿐만 아니라 김단 자신도 민가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김단은 민씨 부인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이런 결정을 내릴 줄 몰랐다.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선택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김단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롭게 변해갔다. 그녀의 내면에서는 분노와 실망이 교차했다.큰 마님은 민씨 부인의 표정을 보고 심각한 상황임을 직감했다.맹영지의 몸에는 증거가 남아있었고 그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면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것이다.하지만 지금 김단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녀는 분명 궐로 들어가 이 일을 고발할 게 뻔했다.지금 김단을 적으로 돌린다면 그에 따른 후과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큰 마님은 사랑하는 손자를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김단을 보내면 민태훈의 입지가 위험해질 것이고 보내지 않는다면 민가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그때, 한 하인이 급히 달려와 외쳤다.“큰 마님! 소 장군님께서 오셨습니다!”소 장군? 소한을 말하는 것인가?그의 이름이 언급되자 큰 마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소한이 이렇게 빨리 이곳에 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김단도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녀가 생각에 잠긴 사이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큰 마님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되어 송구합니다.”모두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당당하게 정원으로 걸어 들어오는 소한의 모습이었다.“소한, 주인의 허락도 없이 들어오다니! 대체 영의정 저택을 무엇으로 보시는 것이오? 이곳은 마음대로 들락날락할 수 있는 곳이 아니오.”소한은 그 말을 한 사람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이런 무례를 범한 것은 제 잘못입니다. 곧 전하 앞에서 사죄드리지요.”그는 정원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더니 큰 마님에게 다가가 정중히 인사했다.
머뭇거리는 그들의 모습에 김단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마님,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막으신다면 저는 곧장 궐로 가 이 모든 일을 고할 것입니다.”그녀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그 안에는 확고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김단의 말이 끝나자 민가의 사람들은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큰 마님은 눈썹을 찌푸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그녀는 김단이 단순한 의원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김단은 진산군 댁의 적녀이자 평양원군의 의남매이다. 그리고 그녀는 소가의 두 형제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지금 그녀를 적대시하는 것은 곧 여러 권세 있는 가문을 적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었다.큰 마님은 민태훈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통에 찬 얼굴로 땀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그녀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그러나 동시에 마음속에는 김단에 대한 의심도 피어올랐다. 만약 그녀의 말이 과장된 것이라면 민씨 가문은 부당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한참을 고민하던 큰 마님은 굳게 결심한 듯 민씨 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네가 직접 확인해 보거라. 만약 낭자의 말이 거짓이라면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민씨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단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김단은 조심스럽게 맹영지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녀의 팔 안쪽에는 선명한 멍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민씨 부인은 숨을 들이켰다.“이런 상처가… 정말로…”그녀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자 김단은 차분하게 말했다.“다리 쪽은 더 심각합니다. 보시겠습니까?”민씨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이 상처, 정말로 태훈이의 짓입니까?”김단은 잠시 침묵하더니 그녀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그 말에 민씨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태훈이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닙니다. 어릴 적부터 착하고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기던 사람이었단 말입니다.”김단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공주의 이름이 거론되자 민씨 일가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스쳤다. 그러나 큰 마님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낭자가 공주의 명을 받고 우리 영의정 저택에 들어와 병자를 돌보는 것은 알겠소. 허나 공주의 허락 없이 사람을 해치는 것은 무엄한 일이오. 공주라 할지라도 국법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 함부로 공주의 이름을 빌어 협박하지 마시오.”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단은 박수를 치며 말했다.“참으로 옳은 말씀이십니다.”민가의 큰 마님은 김단이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신을 치켜세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단의 입가에는 더욱 짙은 미소가 떠올랐고 눈빛에는 경멸이 스쳤다.“공주님께서도 국법을 지키셔야 하는데 민가의 사람들은 더욱 그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민가의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높이며 반박했다.“그게 무슨 뜻이오? 우리 민씨 일가는 예로부터 법을 준수하며 국법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소!”“김 의원께서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우리 민가에 누명을 씌우려는 것 아니오?” 김단은 그저 조용히 서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김단의 이런 차분한 태도가 큰 마님의 신경을 건드렸다.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큰 며늘 아씨는 중전마마의 친조카이시며 공주자가의 사촌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의 치료를 맡게 되었지요. 원래는 상태가 호전되고 있었으나 오늘 갑자기 증상이 악화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누군가가 큰 며늘 아씨의 회복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의원으로서 제 환자가 이곳에서 고통받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으니 제가 데려가야겠습니다. 만약 제 앞을 가로막으신다면 다음번에는 민대부님의 다리에 은침을 꽂아 버릴 것입니다.”이에 큰 마님은 지팡이를 바닥에 세게 내리치며 외쳤다.“허튼소리 마시오! 낭자의 의술이 부족해서 생긴 일을 왜 우리한테 덮어씌우려는 것이오?”“맞소! 무슨 명의의 제자라더니... 다 헛소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