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하는 휠체어를 밀며 들어왔다.시녀는 소하를 보자마자 급히 예를 갖추었지만, 여전히 난처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부인님께서는...”“모친께는 내가 친히 말하겠다.”소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그런데도 시녀가 여전히 물러설 기색이 없자, 그는 고개를 들어 시녀를 쏘아보았다. 그의 눈빛에 서서히 차가운 기운이 서리자, 시녀는 저절로 몸을 떨며 뒤로 물러섰다. “내가 친히 바래다주어야겠느냐?” 흠칫 놀란 하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물러났다.겁에 질려 도망치는 시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김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러고는 소하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어머님께서 그렇게 하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오라버니께서 이렇게 나가시면 어머님께서 마음이 상하실 것이옵니다.”소하가 어찌 어머니의 의도를 모를 리 있겠는가?그녀의 모든 결정은 결국 그를 위한 것이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단의 마음을 상하게 둘 수는 없었다.“내 다리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니, 어머니께서도 이해하실 것이오.”김단도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소하의 다리를 치료해야 하므로, 한 공간에서 지내는 것이 더 편리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소하의 다리가 완전히 나은 후에는 떠날 것이니 상관없었다.어머니께서 언짢으셔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소하는 김단의 속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물었다. “숙희는 왜 보이지 않소?”김단은 미소를 지으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의 부탁으로 신의께 서신을 전달하러 갔습니다.”그 말에 소하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숙희는 이제 떠도는 소문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어머니께서 왜 그녀의 처소를 옮기려고 하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는 마음이 결코 편치 않을 것이었다.게다가 신의께서 소하가 다리를 못 쓰는 척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기라도 한다면 거짓을 말한 소하에게 분명 실망할 것이다.그러
운명이 아닌 것 같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귓가에 들려오는 소하의 목소리.“낭자.”김단은 소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는 것은 인지하지 못했다. 훤칠한 키를 자랑하며 그는 우뚝 서 있었다. 간혹 늘어지는 수양버들 가지가 그의 얼굴을 자꾸만 가리려 했다. 김단의 눈이 그제야 휘둥그레졌다. “오라버니 다리가, 이게 대체 어찌…” “내가 속였소.”소하는 낮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의 잘생긴 이마에도 미묘한 미안함이 스쳤다. “미안하오.”김단의 미간도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왜 저를 속이신 겁니까? 설마 어제 궁에 다녀온 뒤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아니면 독을 탄 자가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을까 걱정되셨던 겁니까?”그녀는 계속해서 타당한 이유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소하의 대답은 마치 벼락처럼 김단의 머리 위로 떨어졌고, 김단은 잠시동안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당신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소.”“어제, 그대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더더욱 그대 말을 잘랐소. 하지만 어떻게 해야 당신을 붙잡을 수 있을지 방도가 떠오르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다리가 낫지 않았다는 거짓말을 했소. 미안하오.”그는 또다시 사과를 건네며 김단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불쾌해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소하도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리도 서툴고도 어설픈 거짓말이 어찌 오랫동안 전장을 누빈 장수의 입에서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막 사랑을 깨달은 소년이 충동적으로 내뱉은 것이라면 모를 일이었다.그는 김단이 분명히 그를 비난할 것이라고 여겼지만 김단은 어떠한 비난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그저 멍하니 소하를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녀는 소하의 “떠나고 싶지 않았다”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 사이의 관계
삼년. 만약 그녀가 여전히 그를 좋아하지 않으면, 기꺼이 처음에 한 약속을 지키고 그녀를 떠나보내겠노라 생각했다.물론, 그녀가 원치 않는다면, 그녀를 강요할 생각도 없었다.그는 그저 자신에게 기회를 주고 싶을 뿐이었다.김단은 소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마치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졌다. 소하는 항상 그녀에게 따스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결코 무언가를 시작할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소하의 이 같은 행동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다가왔다.삼 년. 그녀는 한때 약속했었다.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는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만 했다. 그녀는 소하와 소한의 사이가 틀어지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고 화목한 가정이 그녀로 인해 깨지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는 떠나야 했다. 과거에 얽매여 이곳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찾아야 했다.이성이 그녀에게 안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소하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결국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고 말았다. “저, 저도 오라버니께서 저에게 잘해주시는 것을 알지만… 아!”순간, 그녀의 발이 미끄러졌다. 균형을 잃은 그녀는 그대로 연못으로 휘청거렸다.깜짝 놀란 소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았다.그러나 그의 몸은 그녀와 함께 연못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잔잔했던 수면 위로 물결이 일렁이며 퍼져 나갔다. 그런데도 소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김단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오라버니!”몇 번이고 그를 불렀지만, 여전히 소하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도 곧바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김단은 소하가 수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소한은 소하에게 수영을 배웠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침대에 누워 지난 오 년 동안 한 걸음도 떼지 못했고, 수영은커녕 물속에 들어간 적이 없었으니 어떻게 헤엄치는지조차 잊었을지도 모른다.김단은 두려웠다. 물속에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소
그녀와 그녀의 미소만이 남았다.두 사람은 금세 하인들에 의해 발견되어, 물가로 올라왔다. 방에는 김단이 책상 앞에 앉아, 숙희가 억지로 건넨 생강차를 손에 들고 있었다. “여름이라 해도 물에 빠지면 감기에 걸리실 수 있으니 반드시 마셔야 하옵니다!”숙희가 김단의 뒤로 돌아가 반쯤 마른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그러다 문득, 밖을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아씨, 부인님께서 이리 오실 것 같사오니 문을 잠그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씨께서 몸이 불편해서 쉬고 계신다고 할까요?”생강차를 한 모금 마시던 김단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 어머님의 방문에 숙희가 왜 이렇게 거부감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숙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조용히 사실을 털어놀았다.“오늘 제가 소문을 들었사온데 아씨께서 남편을 해칠 운명을 지닌 분이라는 이야기이었습니다. 마침, 오늘 도련님께서 연못에 빠지셨잖습니까? 그러니 제 생각엔, 부인님께서 이 일을 아씨께 떠넘기려 하실 것입니다.”이 말에 김단은 숙희를 돌아보았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숙희의 얼굴에 김단은 그 소문이 꽤 심각하게 돌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어쩌면 어제부터 어머님께서 자신에게 이상한 태도를 보였던 이유가 그 소문 때문일지도 모른다.이렇게 되면, 그녀는 더더욱 이곳에 머물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소하와 어머니의 관계도 불편해질 것이었다! 김단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다. 어차피 우리는 떠날 예정이지 않느냐.”숙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씨 부인이 찾아왔다.김단은 머리를 정리할 시간도 없이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다. 소씨 부인은 급히 손을 뻗었다.“굳이 예를 갖출 필요 없다. 오늘 너도 많이 놀랐을 테지?”“괜찮습니다.”김단은 공손한 자태를 유지하며 그녀가 계속 말을 이어가기를 기다렸다.그녀는 김단의 손을 잡고 가볍게 두드리며, 잠시 무언가를 고민
그렇게 생각하던 중, 소하가 갑자기 이쪽을 바라보았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 김단은 오늘 소하가 호숫가에서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녀는 다시금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 쪽으로 다가오는 소하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깜짝 놀라며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덩달아 소하도 발걸음도 멈췄다. 김단의 방과 단 세 걸음 남긴 거리에서 멈춰 선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부르러운 미소를 지었다. “편히 쉬시오.”김단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오라버니도 편히 쉬세요.”소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몸을 돌려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방문이 닫히자, 소하의 표정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김단이 방금 물러나던 모습을 그는 똑똑히 보았다. 아무래도 오늘 적잖이 놀란 모양이다.그가 너무 직접적이었을까? 소하의 눈썹사이에 주름이 잡혔다. 그러나 곧 머릿속에 김단의 환한 미소가 떠올라 그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번졌다. 생각해 보니 그렇게까지 나쁜 상황만은 아닌 것 같았다. 차라리 털어놓는 것이 잘한 일 같았다. 적어도 앞으로 그가 베푸는 정을 남매의 감정으로 오해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녀가 지금은 거부하고 있었지만 아마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리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편, 김단은 책상 앞에 앉아 안도하며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가 그전에 했던 말을 꺼낼까 봐 얼마나 두려웠던지 모른다.그때, 숙희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저는 도련님이 참 괜찮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단은 깜짝 놀라며 숙희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그녀의 반응에도 숙희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솔직하게 말을 이어갔다.“도련님은 겸손하고 예의 바르며, 아씨께도 잘하십니다. 오늘 부인님께서 분명히 마님을 꾸짖으러 오신 것이지만, 도련님 덕분에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씨를 이토록 아끼시는 분이라면, 그 곁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이것은 숙희의 진심이었다. 아
그 밤, 김단은 침대에 누웠지만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찌 된 일인지, 눈을 감기만 하면 소하의 얼굴이 그려졌다.언급하지 않으면 그저 지나가지만, 한번 언급되면 마치 홍수와도 같아 파도처럼 밀려들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억지로 밀어내려 할수록 더더욱 뚜렷해졌다. 김단은 몸을 일으켜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그네 아래에 앉아 달빛을 감상하며 바람을 쐬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했다. 하지만 방문을 나서는 순간, 그녀의 시선이 그네 옆 오동나무로 향했다. 잎이 무성하여, 사람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잔뜩 경계하며, 나무 위를 살펴보았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그네는 가볍게 흔들리고, 둥근 달은 나뭇가지 사이로 아련히 모습을 드러냈다 숨겼다를 반복했다.이 순간, 손에 매실주 한 병이라도 있으면, 그야말로 운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그때, 오동나무 잎이 눈앞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여름이 막 시작되었는데 벌써 낙엽이라니?김단은 깜짝 놀라며, 급히 고개를 들어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저 미세하게 흔들리는 가지와 잎들뿐이었다. 분명 나무 위에 사람이 있었다! 김단은 즉시 그네에서 벌떡 일어나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나뭇가지 사이를 샅샅이 훑었다. 그러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소한의 실력으로 정말로 숨어 있었다면 그녀가 알아챌 리는 없었다.그래서 그가 일부러 나뭇잎을 떨어뜨린 것이었다. 아니면, 어찌 이리도 기가 막히게, 그녀의 눈앞에 떨어질 수 있겠는가?그녀에게 그가 왔음을 알리려고 한 것이다!그는 여전히 그녀를 놓지 않았고 지켜보면서 소하와의 그 어떠한 가능성도 막을 것이라는 경고였다.혼란스러웠던 마음은, 그 순간 갑자기 진정되었다. 김단은 자신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김단은 늦잠을 자고 말았다. 다행히 숙희가
그녀는 전에 사주한 사람의 외모를 묘사한 적이 있었다. 이각은 그것이 소한과 비슷하다고 판단하여, 그녀를 소하 앞에 끌고 왔고, 소하가 결정을 내리게 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노파가 공개적으로 소한을 지목할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소한 쪽으로 시선을 던져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시선이 자주 소한 쪽으로 향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 배후가 바로 소한이었다! 김단은 본능적으로 소한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밖에서 퍼지는 소문들이 모두 소한의 지시였다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전혀 놀랍지 않았다. 소한에게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많았다. 어릴 적 그녀와 함께 복수할 때에도 대부분은 소한의 계획이었다. 이 아이디어들이 전장에서라면, 그야말로 노련한 책략이라 불릴 것이지만 그녀를 상대로 쓰기에는 너무나도 비열한 수작에 불과했다. 소철학과 주명희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소한을 향한 그들의 눈빛에는 질책으로 가득했다. 소정원조차도 소한을 몇 번이고 바라보았다. 그저 자신이 아는 오라버니의 수단이 점점 더 저급해지고 있음에 한심할 뿐이었다.하지만 소한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찻잔을 들어, 뚜껑을 살짝 밀어내며, 차분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몸을 향해 다시 한번 눈알을 굴린다면, 네 눈알을 뽑아버릴 것이다.” 말을 마친 그는 천천히 차를 마셨다. 그의 태도가 너무도 느긋했던 탓에 주변에 아무도 없는 듯한 착각을 줬다.당당하게 위협을 가하는 소한의 모습은 소씨 대감을 더욱 분노하게 할 뿐이었다. 겁에 질린 그녀는 급히 고개를 푹 숙이고 소한 쪽을 쳐다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소하는 차분한 미소를 지었다.“아우가 농담을 한 것이니, 걱정 말게. 그는 항상 나를 존중해왔으니, 형수에게 누명을 씌운 자가 누군지 몹시 궁금할 것이네. 그렇지, 한아?”“한아”라는 그 단어에 그녀는 잠시 멍해졌다.
게다가 김단을 모욕하는 더러운 비방 글귀들까지 적혀 있었다.글씨체를 확인한 순간 소철학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이놈이 왼손으로 쓴 글자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철학만이 알 수 있었다. 그는 서신을 접은 후 다시 물었다. “그자는 어째서 너를 찾아간 것이냐? 너와 내 며느리 사이에 무슨 원한이라도 있었던 것이냐?”노비는 두려움에 떨며 손을 여러 번 내저었다. “아니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평범한 백성일 뿐, 어찌 대감댁의 큰 며느님과 왕래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만…”노비는 말을 멈췄다. 본래 성격이 급했던 소정원은 노비가 계속 머뭇거리는 모습에 불같이 쏘아붙였다. “뭘 그렇게 질질 끄는 것이냐?!”움찔하던 노비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저는 그저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걸 즐겼기에 평소에도 몇몇 노인네들과 함께 둘러앉아 수다를 떨곤 했지요. 그래서…”이후에 나올 말을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이 노비는 아마도 입이 가볍기로 유명한 여인이었다. 이런 입이 가벼운 여인들은 보통 고위층과는 접촉이 없기에,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녀를 알지 못했다. 소한의 부하들은 대부분 평민 출신이었기에, 이같은 여인에 대해 쉽게 알 수 있었다. 소철학은 깊은 한숨을 쉬더니 드디어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그럼, 너를 찾아온 사람은 어떤 모습이었느냐?”그가 ‘어떤 모습’이었냐고 묻는 이유는, 노비가 사실대로 말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비는 고개를 숙인 채, 울먹이기 시작했다. “밤이 어두워서 큰 키를 가진 남자였다는 것만 알 뿐, 그 외의 것은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소하는 살짝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이각에게 전혀 다른 대답을 했기 때문이었다.소한 앞에서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쨌든 오늘의 목적은 소한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머니에게 그 모든 소문이 악의적인 유포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니 상관없었다. 그러나 잔뜩 겁에 질린 노비의 모습
이튿날 아침, 김단은 궁무를 맡지 않았기에 평양관저에 머물며 맹영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탓인지 맹영지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김단의 곁에 있을 때만큼은 그녀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조용한 정원, 김단은 맹영지와 함께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계수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숙희가 건네준 과자가 들려 있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있었다. 맹영지는 고개를 들어 만개한 계화를 바라보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소하가 평양관저를 찾아왔으나 그는 맹영지와의 만남을 최대한 피하려 애썼다. 아마도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김단은 맹영지를 바라보며 과거 소하가 왜 그리도 그녀를 칭찬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한때 소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인답게 그녀는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가까웠던 두 사람이었는데 맹영지는 어쩌다 소하에게 독을 먹이려 했던 것일까?김단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맹영지의 몸과 마음이 회복되면 그때 자연스럽게 그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김단이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평양관저의 겸인이 급히 달려와 말했다.“아가씨, 맹가 사람들이 도착했습니다.”이런 큰일이 발생했으니 맹씨 집안에서 그녀를 보러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겸인에게 말했다.“알겠소. 이리로 모셔오시오.”잠시 후, 맹씨 부인이 정원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김단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한 뒤 슬픈 눈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김 의원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의원님이 아니었다면 제 딸이 그 짐승 같은 자에게 학대받으며 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말을 마친 맹씨 부인의 눈동자가 붉어졌다.김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과찬이십니다, 맹씨 부인. 민태훈, 그 자의 말에 따르면 맹영지 아가씨의 병은 이미 4~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완전히 회
소한은 코웃음을 치며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소하의 조용한 목소리가 방안의 침묵을 깨뜨렸다.“이번에는 정말 잘했어.”영의정 저택에서 벌어진 일은 소한이 형벌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소하의 귀에 들어갔다. 만약 소한이 과감하게 영의정 저택에 침입하지 않았다면 김단은 쉽게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비록 민씨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김단을 해치지 못한다고 해도 그녀가 겪었을 모욕과 고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소하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소한은 많이 당황한 듯했다.“제가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때로는 그 충동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소한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김단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에 그녀도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 듯했지만 곧 냉랭한 표정으로 일관하였다. 김단은 마차에 오를 때까지 자신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과거의 그녀였다면 그가 나타나자마자 바로 그의 품에 안기며 그를 향해 미소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너무나도 차갑게 변해버렸다. 자신을 외면하는 그녀가 소한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그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며 굳게 결심했다.그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이미 어떤 대가든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반 시진 후, 김단은 방 안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러자 숙희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아가씨?”김단은 정신을 차리고 숙희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이냐?”“두 도련님께서는 모두 돌아가셨습니다.”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전 발생한 일을 되새겨 보았다. 그녀는 소한이 오랫동안 계획해 온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에도 그는 소가를 위해, 전하를 위해 심지어 임원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러나 그녀만은 제외였다.그녀는 소한이 자신의 어머니를 걱정하는 척하며 평양관저로 따라온 것도 단지 자신의 동정심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상처
김단은 아무 말 없이 소한을 부축하며 걸었다. 궐에서 나오는 길은 유난히 길고 고요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무겁고 느렸으며 말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궐문에 도착했을 때 소한의 마차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아마도 말을 타고 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상태로 다시 말을 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된 김단은 곁에 있던 경씨에게 부탁했다.“도령님, 장군님을 먼저 집으로 모셔다 주실 수 있겠습니까?”그러자 소한이 놀란 듯 김단을 바라보며 물었다.“내게 약을 발라주지 않겠다는 것이오?”김단도 당황해하며 되물어 보았다.“소가에는 의원이 없습니까?”소한은 김단의 물음에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어머니께서 내가 또 다쳤다는 걸 아시면 얼마나 걱정하겠소? 그러니 그냥 근처에서 치료받을 것이오. 낭자는 신경 쓰지 말고 먼저 돌아가시오.”김단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먼저 평양관저로 함께 가서 약을 바르시죠.”소한은 그녀의 제안에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불편하지 않겠소?”김단은 그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괜찮습니다.”그렇게 소한은 김단과 함께 평양관저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김단의 몸종 숙희였다.소한을 발견한 그녀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러자 김단이 숙희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차분히 말했다.“숙희야, 장군님을 객실로 안내해 주거라. 나는 약을 준비하러 가야겠구나.”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김단의 지시를 따랐다.객실에 혼자 남은 소한은 조심스럽게 상의를 벗고 등을 드러냈다. 그의 등에는 형벌로 인한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등을 바라보며 오늘의 형벌이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음을 깨달았다.하지만 그는 김단이 이 상처를 보면 마음 아파할 것이라 생각하며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잠시 후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약을 들고
긴장감이 맴도는 분위기 속에서 전하는 이해 안 되는 듯한 어투로 물었다,“조선의 장군인 네가, 수많은 전공을 세운 네가, 원하는 여인 하나 얻는 것이 그리 어렵단 말이냐? 어찌 김단 하나 때문에 수년간 공들여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이야? 그 낭자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전하의 말투는 엄중했지만 그 속에는 실망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그러자 소한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그렇습니다.”전하는 눈썹을 찌푸리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김 의원, 들었소?”그 순간 소한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조용히 서있는 김단이 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소한은 그녀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이 모든 대화를 들었다는 사실에 당황했지만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소한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김단, 왜 이곳에 있는 것이오?”그녀는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전하에게 예를 올렸다.“소녀 김단, 전하를 뵙습니다.”전하는 손짓으로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일어나거라. 오늘 발생한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해 보거라.”김단은 소한을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차분하게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 “제가 직접 목격한 바는 없습니다. 하지만 민대부를 제외하고는 영의정 댁 장남의 부인에게 감히 손을 댈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전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맹 낭자의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두 명의 궁녀를 보내겠다. 평양관저에서 확인해 보도록 하거라.”학대의 이유가 무엇이든 맹영지는 필시 중전의 친척이었다. 만약 폭력을 가한 사람이 민대부라고 할지라도 이는 중전의 가문을 모욕하는 행위와 다름없었기에 결코 그를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전하는 소한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어쩌면 네 죄가 묻힐 수도 있겠구나.”민씨 가문의 잘못이 드러나게 된다면
소한은 곧바로 병사들과 함께 어서재에서 물러났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향 한 자루가 탈 정도의 시간이 흘러 있었다.소한이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본 전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냉랭하게 물었다.“영의정이 너를 더 때리라고 명하지 않았느냐?”소한은 조용히 전하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게 세운 채 대답했다.“전하의 깊은 뜻을 아는 자입니다. 그러니 더 심한 처벌을 요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전하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물었다.“그렇다면, 내 뜻이 무엇이더냐?”소한은 고개를 들어 전하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전하께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영의정을 불러 제가 벌을 받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게 하셨죠. 그리고 동시에 제가 전하의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영의정이 이 사실을 눈치채기 바라신 것 아니었습니까?”전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붓을 책상에 내던지며 소리쳤다.“이 불경한 자식아! 내 너를 아낀다고 해서 이렇게 제멋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영의정 저택 외에 또 어디에 첩자를 심어두었느냐?”소한은 눈을 내리깔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3품 이상의 모든 관료의 집에 첩자를 두었습니다.”그 말을 들은 전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한을 가리켰지만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였다.그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참 동안 방안을 서성이었다.잠시 후 그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네가 감히! 그렇게 많은 곳에 첩자를 심어두고 무슨 일을 꾸미려는 것이냐? 이렇게 행동하면 내가 소씨 집안을 멸문시켜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소한은 여전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조용히 말했다.“저도 위험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다섯 해 전, 저희 소가는 거의 멸문 당할 뻔했습니다.”그 해 소하가 지닌 병권은 다른 집안의 탐욕스러운 먹잇감이 되었고 그로 인해 조정의 문
김단은 그제야 잊고 있었던 민태훈을 떠올렸다.그녀는 맹영지를 몸종에게 맡기고 민태훈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허벅지에 박힌 은침을 뽑아냈다.침이 빠져나가자마자 민태훈은 마치 고통에서 해방되기라도 한 듯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한 가닥의 은침이 이토록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큰 마님은 김단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그녀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말이다.그때 경씨가 마차를 몰고 도착했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걸어 나오자 경씨는 놀란 얼굴로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낭자, 괜찮소?”방금 전 김단이 영의정 저택에서 곤란한 상황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소한은 급히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덕분에 한발 늦게 도착한 경씨는 자신이 더 일찍 김단을 챙기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말했다.“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소.“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저는 괜찮습니다. 먼저 맹 아가씨를 평양관저로 모시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그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마차에 오르자 경씨는 바로 마차를 출발 시켰다.김단은 마차에 오르기 전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조용히 서 있는 소한에게로 향했다. 소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김단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소한은 그런 김단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 후 소한은 곧장 궁으로 향했다.어서재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앉아 오늘 영의정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전하에게 보고했다.그의 말을 들은 전하는 노여움을 감추지 못하며 소한을 꾸짖었다.“네가 감히 허락도 없이 영의정 저택을 침입했단 말이냐? 정말 대담하구나! 내가 너를 벌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느냐?”그러나 소한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벌을 달게 받겠습니다.“전하는 그의 담담한 태도에 더 분노하며 외쳤다.“민가
김단은 민씨 부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다.보내서는 안 된다라...오늘 이 자리에서 맹영지뿐만 아니라 김단 자신도 민가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김단은 민씨 부인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이런 결정을 내릴 줄 몰랐다.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선택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김단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롭게 변해갔다. 그녀의 내면에서는 분노와 실망이 교차했다.큰 마님은 민씨 부인의 표정을 보고 심각한 상황임을 직감했다.맹영지의 몸에는 증거가 남아있었고 그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면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것이다.하지만 지금 김단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녀는 분명 궐로 들어가 이 일을 고발할 게 뻔했다.지금 김단을 적으로 돌린다면 그에 따른 후과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큰 마님은 사랑하는 손자를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김단을 보내면 민태훈의 입지가 위험해질 것이고 보내지 않는다면 민가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그때, 한 하인이 급히 달려와 외쳤다.“큰 마님! 소 장군님께서 오셨습니다!”소 장군? 소한을 말하는 것인가?그의 이름이 언급되자 큰 마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소한이 이렇게 빨리 이곳에 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김단도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녀가 생각에 잠긴 사이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큰 마님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되어 송구합니다.”모두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당당하게 정원으로 걸어 들어오는 소한의 모습이었다.“소한, 주인의 허락도 없이 들어오다니! 대체 영의정 저택을 무엇으로 보시는 것이오? 이곳은 마음대로 들락날락할 수 있는 곳이 아니오.”소한은 그 말을 한 사람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이런 무례를 범한 것은 제 잘못입니다. 곧 전하 앞에서 사죄드리지요.”그는 정원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더니 큰 마님에게 다가가 정중히 인사했다.
머뭇거리는 그들의 모습에 김단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마님,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막으신다면 저는 곧장 궐로 가 이 모든 일을 고할 것입니다.”그녀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그 안에는 확고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김단의 말이 끝나자 민가의 사람들은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큰 마님은 눈썹을 찌푸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그녀는 김단이 단순한 의원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김단은 진산군 댁의 적녀이자 평양원군의 의남매이다. 그리고 그녀는 소가의 두 형제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지금 그녀를 적대시하는 것은 곧 여러 권세 있는 가문을 적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었다.큰 마님은 민태훈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통에 찬 얼굴로 땀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그녀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그러나 동시에 마음속에는 김단에 대한 의심도 피어올랐다. 만약 그녀의 말이 과장된 것이라면 민씨 가문은 부당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한참을 고민하던 큰 마님은 굳게 결심한 듯 민씨 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네가 직접 확인해 보거라. 만약 낭자의 말이 거짓이라면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민씨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단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김단은 조심스럽게 맹영지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녀의 팔 안쪽에는 선명한 멍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민씨 부인은 숨을 들이켰다.“이런 상처가… 정말로…”그녀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자 김단은 차분하게 말했다.“다리 쪽은 더 심각합니다. 보시겠습니까?”민씨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이 상처, 정말로 태훈이의 짓입니까?”김단은 잠시 침묵하더니 그녀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그 말에 민씨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태훈이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닙니다. 어릴 적부터 착하고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기던 사람이었단 말입니다.”김단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공주의 이름이 거론되자 민씨 일가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스쳤다. 그러나 큰 마님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낭자가 공주의 명을 받고 우리 영의정 저택에 들어와 병자를 돌보는 것은 알겠소. 허나 공주의 허락 없이 사람을 해치는 것은 무엄한 일이오. 공주라 할지라도 국법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 함부로 공주의 이름을 빌어 협박하지 마시오.”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단은 박수를 치며 말했다.“참으로 옳은 말씀이십니다.”민가의 큰 마님은 김단이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신을 치켜세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단의 입가에는 더욱 짙은 미소가 떠올랐고 눈빛에는 경멸이 스쳤다.“공주님께서도 국법을 지키셔야 하는데 민가의 사람들은 더욱 그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민가의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높이며 반박했다.“그게 무슨 뜻이오? 우리 민씨 일가는 예로부터 법을 준수하며 국법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소!”“김 의원께서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우리 민가에 누명을 씌우려는 것 아니오?” 김단은 그저 조용히 서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김단의 이런 차분한 태도가 큰 마님의 신경을 건드렸다.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큰 며늘 아씨는 중전마마의 친조카이시며 공주자가의 사촌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의 치료를 맡게 되었지요. 원래는 상태가 호전되고 있었으나 오늘 갑자기 증상이 악화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누군가가 큰 며늘 아씨의 회복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의원으로서 제 환자가 이곳에서 고통받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으니 제가 데려가야겠습니다. 만약 제 앞을 가로막으신다면 다음번에는 민대부님의 다리에 은침을 꽂아 버릴 것입니다.”이에 큰 마님은 지팡이를 바닥에 세게 내리치며 외쳤다.“허튼소리 마시오! 낭자의 의술이 부족해서 생긴 일을 왜 우리한테 덮어씌우려는 것이오?”“맞소! 무슨 명의의 제자라더니... 다 헛소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