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버니!”김단이 경쾌한 목소리로 소하를 부르며 그에게 걸어갔다.소하는 그 자리에 서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오늘 대군을 따라 한양으로 돌아왔다고 들었소. 마침 나도 당직이 아니라 보러 온 것이오.”소하가 천천히 말했다. 그의 맑고도 처연한 시선은 자연스레 붉은 매화나무로 향했다. “정말 예쁘게도 피었소.”김단은 어느덧 소하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소하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 붉은 매화나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온화함과 평온함이 가득했다. “네, 정말 예쁘게 피었습니다.”“평양원군과의 일에 대해서 들었소.”소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고, 김단은 순간 멈칫하고는 고개를 돌려 소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약간 놀란 듯한 표정을 보였다.소하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어려 있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퍽 잘 된 일이오. 적어도 대군이라면, 안심할 수 있소.”적어도 그는 최지습의 인성과 능력을 알고 있었다.김단을 최지습의 손에 맡기니, 그는 비로써 안심할 수 있었다.단지...이에 기뻐하는 동시에, 가슴속에는 여전히 시큰하고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이었고, 후회였다.그는 과거 그녀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김단이 이런 소하의 마음을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그녀의 마음속에 소하는 평생의 은인이며, 한때 자신을 곤경에서 구해주어 소한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 사람이었다.하지만 감정이라는 것은 억지로 꾸며낼 수 없는 법이다.더군다나 그와 소한은 친형제이니, 그 관계만으로도 그들이 함께할 수 없도록 정해진 것일지도 모른다.이에 김단은 숨을 깊이 들이쉬며,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아, 그 금강보리 염주 말입니다. 아직도 차고 계십니까?”소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차고 있소.”“한번 보겠습니다.”김단은 이 기회에 소하의 맥을 만져, 한빙산의 독이 어느 정도까지 퍼졌는지 확인하고 싶었다.하지만 김단의 손이 그의 손목에 닿기도 전에 소하가 손을 거두었다.입가에는 미
숙희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얼어붙으며 돌연 조용해졌다.경씨는 고객을 끄덕이더니 이내 마차를 몰아 저택으로 향했다.어쩐지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던 것 같았다.저택 앞에 서서 익숙하면서도 낯선 나무 대문을 바라보자, 김단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얼마 지나지 않아 왕철이 문을 열었다.김단을 본 왕철은 곧장 기뻐하며 말했다. “아씨?! 드디어 돌아오셨군요!”왕철은 그렇게 말하며 김단을 맞이하고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김단은 자연스럽게 안을 천천히 훑어보았다.그때 왕철이 말했다. “소인이 매일같이 마당을 깨끗이 쓸고, 아씨와 숙희 누이 방도 청소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이부자리도 며칠에 한 번씩 햇볕에 말려두었습니다. 혹시라도 아씨께서 돌아오실까 해서 말이죠!”그는 과거 김단으로부터 저택을 지키라는 부탁을 받은 뒤, 모든 집안 일을 꼼꼼하고 깔끔하게 처리하고 있었다.김단은 그것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집을 너에게 맡기니 안심이 되는구나.”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왕철이 그녀를 따라가려 했으나, 숙희가 제지했다.숙희는 천천히 고개를 저은 뒤 김단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근심이 서려 있었다.김단은 정원 쪽으로 향하였다. 그 곳에 가까이 가기도 전에, 찬 바람을 타고 희미한 꽃향기가 날아왔다.정원에 들어서자 붉은 매화나무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가지 가득 피어난 붉은 매화는 피처럼 붉은 색을 띄었다.꽃은 하얀 눈을 배경으로 더욱 요염한 자태를 뽐냈다.김단도 이를 예상하고 있었다. 정암이 정성껏 심은 나무이니, 분명 꽃이 만개할 것이라고 말이다.하지만 이렇게까지 아름답게 피어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마치 그가 수많은 꽃봉오리를 숨겨두고, 그녀가 돌아오기 만을 기다리다 놀래는 듯했다.왠지 모르게 가슴속 한구석이 시큰하게 쓰려왔다. 김단의 눈시울도 붉게 물들었다.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뒤,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다.눈밭에는 수많은 붉은 매화 꽃잎이 떨어져 있었다.
열흘이 지나고서야 마침내 조정의 전근 명령이 도착했다. 최지습이 이끄는 대군은 전승의 기세를 안고 한양으로 돌아왔고 설을 이틀 앞둔 날, 그들의 긴 여정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전날 내린 눈이 온 조선 땅을 하얗게 덮고 있어 세상은 마치 은빛 비단을 두른 듯 고요하고 찬란했다. 고지운은 처음 마주한 풍경에 참지 못하고 마차의 창을 걷어 올렸다.“와…”그녀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메마른 사막만을 보며 살아온 돌궐에서는 이런 풍경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소나무와 짙푸른 산들 그리고 눈의 무게에 눌려 허리를 숙인 청송은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정말 아름답소.”고지운은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김단은 말없이 그녀의 어깨 위로 외투를 단단히 여며주며 다정히 말했다.“찬바람 오래 쐬면 고뿔에 걸립니다.”고지운은 아쉬운 듯 조심스레 창을 내리고 김단을 향해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여기가 단이가 예전에 살던 곳이오?”그 말에는 부러움과 동경이 가득 담겨 있었다.“정말 좋소. 우리 돌궐보다 훨씬 아름답소.”예전이라는 단어가 김단의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기억들을 조용히 건드렸다. 다만 그녀는 가볍게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멈췄다.차창 밖에서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단아.”최지습이었다. 김단은 조심스럽게 마차의 창을 젖히고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한 마리의 말을 이끌고 마차 옆에 서 있었다.“나는 공주를 모시고 먼저 궁궐에 들어가야 하오. 낭자는 관저로 돌아가 보시오.”“네.”김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에서 내렸다. 최지습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그녀를 부축했고 그녀가 두 발로 땅을 디딘 후에도 한참이나 손을 놓지 않았다.“걱정 마시오. 한양으로 돌아온 이상, 그들이 감히 손댈 수는 없을 것이오.”그 말에 김단은 잠시 멈칫했다. 최지습이 언급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동안 자신을 노렸던 맹가의 존재를 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김단은 짧게
환하게 웃고 있던 김단의 얼굴은 어느새 걱정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조용히 천막을 한 번 돌아본 뒤 낮게 중얼거렸다.“그 아이는 너무 바보 같아요.”이윽고 다시 최지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도령님, 혹시 알고 계셨나요? 공주님도 사실은 돌궐에서 그다지 총애 받는 존재가 아니에요. 저처럼, 그분의 몸에도 상처가 많습니다. 공주님께서는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은 다시 돌궐로 버려지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겁니다.”최지습은 김단의 손목을 가만히 끌어당기며 함께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돌궐의 사정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소. 공주의 신분과 처지도 어느 정도는 파악해 두었지. 그래서 애초에 그 공주를 다시 돌궐로 돌려보낼 생각은 없었소.”그녀를 돌려보내는 건 곧 죽음으로 몰아내는 것과 다름없었다.“그럼 도령님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최지습은 숨김없이 자신의 생각을 꺼내 놓았다.“전하께서는 자제분이 여럿 계시니 그중 한 사람을 책봉해 왕위로 세우는 것도 고려 중이오. 내 기억에 일곱째 왕자가 혼인할 나이가 다 된 걸로 알고 있소. 그의 외가 쪽은 세력이 약해 태자에게 위협이 될 수 없으니 괜찮은 후보라고 할 수 있지.”“일곱째 왕자요?”김단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작고 왜소한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자 그녀는 눈썹을 깊게 찌푸리며 말했다.“그분은 너무 어려요.”최지습의 얼굴에도 미세한 그늘이 드리웠다.“두 해만 지나면 혼례를 올릴 나이긴 하지.”“안 돼요. 너무 어립니다.”김단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직접 고지운의 혼사에 개입하겠다고 약속했으니 어린아이는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그렇다면…”최지습은 다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다섯째 왕자는 어떤가? 나이도 적당하고 공주와도 잘 어울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만 이미 정실부인을 맞이한 상태라 또 다른 이를 정실로 들이려면 절차상 고려할 점이 많겠지.”“이미 아내가 있는 사람은 절대 안 돼요.
고지운의 얼굴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방금 전 그녀가 제안한 방법이 완벽하다고 생각했기에 김단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왜 안 되는 것이오?”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평처를 둔다면 두 나라의 평화도 유지되고 김단과 대군자가의 사랑도 지킬 수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그녀는 그들의 삶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투명 인간처럼 조용히 지낼 자신이 있었다. 돌궐에서의 지난 세월 동안 그녀가 가장 먼저 배우고 익혀온 생존 방식은 바로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었다. 오랜 시간을 걸쳐 감정을 죽이며 살아남는 법을 몸으로 익혔다. 김단은 잠시 침묵하더니 조용히 말했다.“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이에 제3자가 끼어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요.”고지운은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그런 것이오? 하지만 내 아버지와 오라비들은 모두 많은 부인들을 두었소. 조선에서도 능력 있는 남자일수록 부인이 많은 것 아니오? 대군자가께서 평생 한 사람만 부인으로 맞이할 거라 생각하시오?”“네.”김단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지운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되물었다.“정말 그렇게 믿는 것이오?”김단은 시선을 내리깔며 가볍게 웃었다.“그 사람을 믿는 게 아니라 제 자신을 믿는 겁니다.”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남자라면 한 평생 자신만을 지켜줄 거라 믿었다. 김단의 잔잔한 미소를 바라보는 고지운의 마음에는 여전히 의문이 가시지 않는 듯했지만 이내 그녀를 따라 미소 지었다.“멋지오.”그녀는 조용히 감탄했다. 만약 이 세상 어딘가에 정말 그런 사랑이 존재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김단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다시 고지운을 바라보았다.“어쨌든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공주님을 돌궐로 돌려보내지 않을 겁니다. 화친에 관한 일도 좋은 방향으로 해결될 거예요. 공주님께서 누구와 혼인하든 제가 반드시 지켜볼게요. 절대 나쁜 사람에게 시집가게 두지 않을 겁니다.”고지운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제 오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지 마시오.”고지운은 김단의 말을 끊으며 외쳤다.“단이는 잘못한 게 없소. 낭자와 대군자가는 분명 서로 마음이 맞았고 오랜 시간 함께하며 정이 쌓인 거겠지. 반면 나는... 그저 여러 사정에 이끌려 갑작스레 끼어든 사람일 뿐이오. 그러니까 낭자에 대한 원망 같은 건 없소. 난 그저...”말을 잇던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떨림마저 담겨 있었다.“난 그냥… 너무 무서웠소.”그녀가 이곳에 보내지기 전 그녀의 이복 오라비들이 경고했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울려 퍼졌다. 만약 조선의 대군자가에게 시집가지 못한다면 그녀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던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 김단과 대군자가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기에 그녀는 더 이상 최지습에게 시집을 갈 수 없게 되었다. 그 말은 곧 그녀가 돌궐로 돌아가면 죽음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그들 손에 끌려가 맞고 천천히 망가져 죽는 상상을 수도 없이 해왔다. 그렇게 잔인하게 죽느니 차라리 지금 이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하지만 그녀는 겁이 많았다. 죽는 것조차 용기가 없어 손에 쥔 칼끝 앞에서 망설이다 결국 김단의 손에 상처를 내고 말았다. 오히려 미안해야 할 쪽은 그녀 자신이었다. 김단은 말없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작고 떨리는 고지운의 어깨가 그녀의 품 안에서 미세하게 흔들렸다.“무서워하지 마세요. 공주님은 지금 조선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 공주님을 해칠 자는 아무도 없어요. 공주님을 위협했던 그 오라버니들조차 함부로 공주님에게 손을 대지 못할 겁니다. 제가 약속할게요.”김단의 목소리는 단단했고 고지운은 그녀의 품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정말 나를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오?”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웃었다.“그럼요. 공주님은 화친을 위해 온 겁니다. 조선과 돌궐이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 맺은 약속의 상징인걸요. 그러니 저희가 공주님을 돌려보낼 이유도 그럴 권리도 없습니다.”그러나 고지운은 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