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섭은 깜짝 놀랐다. 16살?
고우섭이 속한 이 사교계 사람들이 지유나를 인정하는 이유는 단지 아름다운 외모 때문만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뛰어난 성적과 높은 학력, 일류 대학 출신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해성 명문가들의 딸들 중에서 지유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찾기란 어려웠다.
그녀는 하승민에게 어울리는 여자였다.
여자는 아름다움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아름다움과 학력이 더해져야 진정한 가치를 발휘할 수 있었다. 그래서 상류층일수록 여자의 학력을 중요하게 여겼다.
방금 전 지서현에게 가졌던 호감이 순식간에 사라진 고우섭은 경멸하는 투로 말했다.
“서현 씨, 정말 16살에 학업을 그만뒀어요?”
지서현은 거만한 지유나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미소 지었다.
“네, 16살에 그만뒀어요.”
고우섭은 비웃듯이 말했다.
“그거 참 우연이네요. 우리 형도 16살에 학업을 그만뒀는데. 하지만 우리 형은 진정한 천재였죠. 16살에 하버드에서 석사 학위를 두 개나 딴, 역사에 남을 인물이거든요. 그런데 서현 씨는 16살에 학업을 그만뒀다고요? 그럼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겠네요. 하하.”
고우섭의 조롱하는 웃음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고 지유나는 거만한 태도를 유지했다.
하승민은 길고 늘씬한 몸으로 서 있었다. 복도 조명이 그의 차갑고 잘생긴 얼굴을 비췄다. 그는 지서현을 바라보았다.
지난 3년 동안 지서현은 그의 주변만 맴도는 주부였으니 학력이 없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서현은 전혀 당황하거나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맑고 투명한 눈으로 그를 보며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게요. 참 우연이네요.”
그러게요. 참 우연이네요...
왠지 모르게 하승민은 마음이 흔들렸다.
지서현의 눈은 정말 아름답고 영혼이 가득했으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서현아!”
그때 소아린이 달려왔다.
그녀는 지유나를 보고 화를 내며 말했다.
“지유나, 너 또 서현이 괴롭혔지?”
지유나는 거만하게 말했다.
“우리는 서현이를 안 괴롭혔어. 오히려 일자리 찾아주려고 했지.”
소아린은 깜짝 놀랐다.
“너희가 서현이한테 일자리 찾아준다고?”
지유나는 계속 생색냈다.
“그래, 서현이가 학력은 없지만 우리가 좋은 데 알아봐 줄게.”
소아린은 할 말을 잃었다.
기가 막혀서 웃음이 터졌다.
“너희들 서현이가 누군지 알아? 서현이는...”
지서현이 소아린 팔을 잡아끌었다.
“아린아, 가자.”
소아린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지유나를 마치 광대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두고 봐. 네가 망신당할 날이 올 거야!”
소아린은 지서현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고우섭은 화를 내며 말했다.
“지서현은 뭐야? 16살에 공부도 때려치운 주제에 저렇게 건방져? 나 같으면 부끄러워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겠어요.”
지유나는 화내지 않았다. 그녀는 지서현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지서현은 그녀의 상대가 될 자격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서현에게 화를 내는 것은 자신의 수준을 낮추는 것과 같았다.
지유나는 고우섭을 보며 웃었다.
“우섭 씨, 괜찮아요.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고우섭이 말했다.
“형, 빨리 지서현과 이혼해. 형한테 어울리지 않아.”
하승민의 잘생긴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었다. 그는 지유나를 보며 말했다.
“가자.”
지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유나와 고우섭은 하승민을 따라 자리를 떠났다.
...
술집을 나서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 대표?!”
하승민이 고개를 들어보니 카이스트 총장 신윤철이었다.
하승민은 앞으로 나아가 인사했다.
“총장님, 해성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지유나는 신윤철을 매우 존경했다. 어릴 적부터 성적이 뛰어났지만 최고의 대학인 카이스트에 들어갈 자격은 없었다.
신윤철은 웃으며 말했다.
“해성에 연구 토론회가 있어서 왔네. 마침 자네 후배도 해성에 있다고 하더군.”
하승민은 잠시 말을 멈췄다.
“제 후배요?”
신윤철은 말했다.
“그래. 우리 카이스트에는 두 명의 전설이 있지. 첫 번째 전설은 하 대표이고 두 번째 전설은 자네 후배인데 자네처럼 16살에 복수전공으로 학위를 딴 고지능 천재 소녀야. 아쉽게도 너희는 기수가 달라서 서로 모르는 것 같더라고.”
고우섭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와, 우리 형 후배가 그렇게 대단해요? 우리 형이랑 누가 더 대단해요?”
신윤철은 하승민을 보며 웃으면서 말했다.
“막상막하라고 할 수 있지.”
하승민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는 아직 막상막하의 여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지유나는 하승민에게 막상막하의 천재 후배가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그녀는 지서현에게는 아무런 적대감도 없었지만 이 천재 소녀 후배 때문에 순간적으로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이 후배는 누구일까?
지유나는 강한 적대감과 질투심을 느꼈다.
신윤철은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
“하 대표, 그 후배의 카톡 명함을 보내줄 테니 시간 나면 추가하게. 마침 해성에 있으니 선배로서 잘 챙겨주도록 하고.”
하승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신윤철이 떠나자 고우섭이 재촉했다.
“형, 빨리 그 여자 후배 카톡 추가해 봐.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
하승민은 휴대폰을 꺼내 여자 후배의 카톡을 열었다.
카톡 이름은 알파벳 SH였다.
배경은 온통 하얬다.
고우섭이 물었다.
“SH는 무슨 뜻이야?”
하승민도 알지 못했다. 그는 친구 추가를 누르고 '하승민'이라고 메모를 남겼다.
상대방이 확인 중이었고 아직 수락하지 않았다.
고우섭은 잔뜩 신이 나서 말했다.
“형, 그 후배 카톡 추가되면 나한테도 소개해 줘. 완전 궁금해 죽겠어.”
지유나는 그들이 여자 후배에게만 관심을 쏟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롤스로이스 세단 한 대가 멈춰 섰다. 하승민의 비서 조현우가 운전해 온 차였다.
지유나는 바로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오빠, 차 왔어. 우리 타자.”
고우섭이 말했다.
“형, 형수님, 안녕히 가세요.”
...
롤스로이스 비즈니스 세단은 도로 위를 부드럽게 질주했다. 고요하고 호화로운 차 안에서 운전석의 조 비서는 룸미러를 통해 뒷좌석의 하승민에게 공손하게 물었다.
“대표님, 어디로 모실까요?”
하승민이 말했다.
“회사로 가.”
지유나는 하승민을 바라보았다. 밤 도시의 네온 불빛이 깨끗한 차창을 통해 그의 잘생긴 얼굴에 쏟아져 마치 영화 속 흑백 화면처럼 고귀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지유나의 눈에 애정이 어렸다.
“오빠, 아까 서현이랑 무슨 일 있었어? 설마 걔 예뻐졌다고 무슨 일 벌이려고 했던 건 아니지?”
하승민은 지유나를 흘끗 보며 무심하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아내인데 무슨 일이 좀 있어도 되잖아. 네가 나한테 걔 떠민 거 아니었어?”
지유나는 그가 여전히 자신을 탓하고 있음을 알았다.
3년 전 식물인간 상태인 자신을 두고 해외로 떠나 지서현에게 대신 시집가게 한 것을 탓하는 것이었다.
지유나는 변명하고 싶었다.
“오빠, 서현이가 시집가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걔한테 양보할 수밖에 없었어...”
하승민이 되물었다.
“그 말을 너라면 믿겠어?”
지유나는 말문이 막혔다.
붉은 아랫입술을 깨문 지유나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3년 전에 내가 오빠를 버리고 떠난 건 맞아. 그게 그렇게 마음에 걸리면 우리 헤어져. 나 버리면 되잖아.”
그러고는 조 비서에게 소리쳤다.
“조 비서, 차 세워요!”
지유나는 차에서 내리려 했다.
그 순간 하승민의 손이 번개처럼 나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고 지유나는 그의 단단한 가슴에 부딪혔다.
머리 위에서 남자의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나야, 넌 내가 널 예뻐하는 걸 알고 이러는 거잖아.”